(주막은 열리고 중간막이 내려져 있는 희미한 무대. 관객이 차기시작하자 가슴에 번호표를
붙인 죄수 두명이 의자를 들고 나와 관객을 향해 의자를 배치한다. 이어 또 한명의 죄수가
비를 들고 나와 마루를 쓴다. 사복차림의 소장이 황급히 걸어 나온다.)
소장 : 그래 다준비가 됐오? 모두 나오라고 해요. 그 분들이 곧 오실거야. (무대 밖을 향해)
이것봐! 빨리 나와요!
(여죄수 한 명을 포함한 죄수 4명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온다. 소장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다.) 99번, 33번, 18번, 됐어. 모처럼 방문하시는 분들이니까 결례하는
일이 없도록 각자 명심하도록. 내 그분들을 모시고 올테니까 여기서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구... 그 분들이 혹시 각자의 과거를 물을 지도 모르니까
간단히 요령힜게 대답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두도록.
(소장이 나간다)
99번 : 빌어먹게! 밤낮 과거야! 99번! 강도미수! 이렇게 하는거야?
33번 : 시원해서 좋군
99번 : 시원하구 남자답지. 너같은 좀도둑하고는 달라. 할 일이 없어 남의 무덤이나 파?
33번 : 내가 언제 무덤을 팠어?
99번 : 마찬가지지. 무덤 옆에 있는 비석을 훔치는 째째한 짓은 안해
33번 : 비석이 아니고 망주석이야.
99번 : 망주석이나 비석이나 매일반이야. 임마. 죽은 사람 물건을 훔치는 놈이 어딨어?
33번 : 그래도 나는 큰 일을 했어. 망주석을 해외에 수출했단 말야. 수출은 곧 애국이야.
99번 : 네 여편네를 수출하렴.
18번 : 그 비석인가 망주석은 뭣에다 쓰죠?
33번 : 용도가 많죠. 돈있는 놈들이 정원에 장식품으로 놔두지
18번 : 죽은 사람 무덤의 비석을요?
33번 : 비석이 아니라 망주석.
18번 : 그건 좀 잔인한 데요.
33번 : 흥. 집에 불을 지르는 당신같은 방화범 보다는 덜할걸. 그것도 여자가.
18번 : 뻔뻔스럽게 여자를 배반하는 남자는 불에 타 죽어도 싸요.
99번 : 그래? 그 남자는 죽었오?
18번 : .........아뇨. 그날 집에 없었어요.
99번 : 그래. 나도 그 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은 것 같애. 약간 동정도 했지요.
99번 : (힘없이 지쳐있는 5번에게) 대학생! 여기에 몇번이고 드나드는 사람도 있는데 그까짓
한 번쯤을 뭐 그렇게 ..... 사람 사는게 다 그런게 아뇨? 피차 훔쳐 먹고 사는 판에.......
요는 들키는가 안들키는가 하는데 달려 있어.
(이때 소장이 손님들을 안내하며 들어온다.)
소장 : 자.(의자를 가리키며) 여기에 좀 앉으세요.
(모두 자리를 잡는다.)
소장 : 그럼.......여러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교도소를 대표해서 불초 소장이 뜨거운
환영을 하는 바입니다. 먼저... 다 아시겠지만... 대한물산주식회사의 회장이시며
민권신장협회 회장이신 안중팔 선생님. 다음엔 여성권익옹호협회 회장이신 고여사.
고여사의 며느님이신 음악가 신신옥씨. 당교도소의 고문이시며 의학계의 권위이신
오박사님.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인기 여배우 김화자양.
(죄수들이 박수를 친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의 방문을 받은 당소는 감개무량 할 뿐입니다.
안중팔 : 과분한 소개를 받았습니다. 안중팔입니다.
희망에 찬 여러분들의 모습이 반갑습니다. 이 안중팔은 물론 옆에 계시는 고여사도
민권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께 용기와 희망을 드리기위해 오늘 하루 종일을 여러분과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저기 오박사님의 호의로 유람선을 타고 요 앞 바다에
있는 행락도에 가서 하루를 즐기기로 했습니다. 마음껏 드시고 마음껏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그동안 나의 회원과 고여사의 회원일동은 성금을 걷었습니다.
출발에 앞서 우리의 성의를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화자가 죄수들에게 흰 봉투를 나누어준다. 33번이 봉투를 찢어 내용을 본다.
소장이 옆으로 가 자중을 권한다.)
안중팔 : 그럼 떠나 볼까요?
고여사 : 참! 안선생님.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이 분들을 모시고 우리 자선 음악회를 열면 어때요?
김화자양이 사회를 맡고 안선생님이 취지문을 쓰시고 돈이 많이 들어올 거에요.
신신옥 : 어머니. 그 일은 좀 더 있다 하시고요. 빨리 행락도로 가요.
오박사 : 배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직접 배를 몹니다.
안중팔 : 그럼 가 볼까요?
(여섯명의 손님이 각기 죄수 한명과 팔장을 끼고 무대밖으로 나간다. 소장만
남는다. 소장이 무대 밖을 향해 손을 흔든다)
소장 : 네. 곧 가겠습니다.
(이어 배의 기적소리가 나며 엔진의 가동 소리가 난다.)
(관객에게) 아시다시피 저는 교도소 소장이 올시다. 죄수 4명과 사회 명사 5분,
그리고 저도 막 행락도를 향해 출발 할 찰나에 있습니다.
교도소란 죄인을 끌어들여 벌을 주는 곳은 아닙니다. 그래서 좀 더 인간적이며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간 많은 연구를 해 왔고 몇가지 일을
실천에 옮겼습니다.우리 교도소의 담을 일미터 높이로 개조했습니다.
보통 여러분들의 집 울타리 보다도 낮습니다. 복역수들에게 외출도 시킵니다.
합창단도 조직했습니다. 어떤 복역수는 연극부도 만들자고 하지만... 글쎄요.
인생 자체가 연극인데 구태여 연극부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요? 저명한 사회의
명사를 초청해 토론도 합니다. 그리고 방금 보신 것 처럼 훌륭한 분들과 야유회도
갖습니다. 자, 저의 형무소에서의 직책은 이만 하겠습니다.
저는 이 연극에서 설명역도 맡아야 합니다. 이 연극의 내용은 무려 한달에 걸친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긴 한 달 동안의 사건을 불과 두시간 이내에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설명역의
설정은 불가피합니다.
무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은 진실 그대로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연극의 내용이나 등장인물은
어디까지나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도 각자의
자유입니다. 어떤쪽이 옳으냐구요?
두 쪽이 다 옳습니다. 진실과 허구란 항상 대립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이 진실과 허구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뒤바뀔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습니다. 소장인 나는 현실과 허구, 한 중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연극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합니다.
양쪽을 보여야 하니까요. 그럼 소생은 물러나겠습니다.
(암전)
제 2 장
(뇌성이 울린다. 이어 폭풍이 휘몰아친다.
잠시후 햇빛과 초목을 상징하는 고요한 음악이 들리며 중간막이 오른다. 조명이 들어오자
어떤 고도가 전개된다. 새 소리도 들린다. 여기 저기에 바위가 벌거벗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잠시 후 피곤에 지친 일행이 들어온다. 소장이 앞장 서 있다. 이어 맨손의 명사,
그리고 상자며 천막, 연장 등을 쥐거나 둘러멘 죄수들이 뒤따른다. 모두 지친 듯
여기 저기에 앉는다.)
소장 : (고여사에게) 피곤하시죠? 몸은 좀 어떻습니까?
고여사 : 피곤하긴 마찬가지죠.
오박사 : 행락도로 간다던 것이...... 이섬의 이름이 뭐죠?
김화자 : 무인도 같은데 지도에나 나와 있을까요?
안중팔 : 글쎄, 하여튼 꼬박 하루를 표류했으니까.
오박사 : 우리가 관상대의 일기예보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어요. 현대 과학에서 믿을 것은
의학 밖에 없어요.
고여사 : 이상하다 했어요. 내 이 어깨가 쑤시기에 날씨가 궂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깨가 쑤시면 꼭 비가 와요.
김화자 : 앞으로 어떡하죠?
안중팔 : (일어나서) 자. 우리 용기를 내고 명랑하게 지냅시다.
(죄인들에게)자, 용기를 냅시다. 세상 어디에 가도 이렇게 뭉쳐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하기야 이번 모임의 주최자로서 미안한 마음 이루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하느님께서 우리가 좀 더 친할 수 있도록 특별한 기회를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이 시련의 기회를 고맙게 여겨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배우며 아울러 인간은 위대한 존재라는 걸
몸소 체험해 봅시다. 우리는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명사들입니다. 양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서로 힘을 합해 일을 하면 안될 일이 없습니다. 자, 우선
짐을 풀어 점심이나 먹고 다음 할 일을 생각해 봅시다. 이 섬은 손바닥만합니다.
낙망을 말고 우리의 새 집인 이 섬도 구경해 봅시다.
가만 잠자리라도 만들어야겠는데......
33번 : 소장님. 천막을 치면 어떨까요?
소장 : 배에 싣고 온 천막은... 햇빛이나 가리는 것인데?
33번 : 배에서 내릴 때 닥치는 대로 다 가지고 왔으니까 궁리를 해보죠.
(33번이 죄수들 쪽으로 가 이것저것 지시하며 천막을 치기 시작한다.
명사들이 구경한다.)
안중팔 : 솜씨가 제법이군요.
소장 : 솜씨야 저 사람들을 따를 사람이 없지요.
(18번은 음식이며 취사도구를 절벽밑에 깊이 뚫린 곳으로 나른다.
신신옥이 그녀를 돕는다.)
(안중팔과 고여사가 작업중인 죄수들 쪽으로 간다.)
고여사 : 수고가 많아요.
33번 : 수고는 무슨 수고요. 야유회에 온 것 같은데.
고여사 : 하기야 야유회를 열 판이었지만... 이렇게 표류할 줄은 몰랐죠.
오박사 : (동굴에서 나오며) 이건 동굴인데. 삼십명도 잘 수 있겠어.
안중팔 : 자. 우리 섬이나 구경해 볼까요?
손바닥만한 섬이니 시간도 안 걸릴꺼요. (죄수들에게) 수고들 하시오. 곧 육지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배가 지나가겠죠. 바다가 넓다지만 지금 해상을 항해하는 배가
만척도 넘을 겁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안중팔일행이 손을 흔들며 나간다. 33번 인사를 한다.)
33번 : 좋은 분들이군. 자 그쪽은 다 됐나?
(죄수들이 다시 일을 시작한다.)
18번 : 점심은 어떡하죠?
99번 : 해야지.
18번 : 다행이 배안에 쌀도 좀 있었어...
그렇지만... 배에 싣고 온 양식도 일주일은 못갈걸.
소장 : 아니 일주일 이상이나 여기에 있을 작정인가.
18번 : 배가 지나가지 않으면 할 수 없잖아요?
소장 : 비행기도 지나갈수 있으니까.
33번 : 흥. 이 천막에선 다섯사람도 못자겠는걸! 차라리 이 천막을 창고로 써야겠어.
99번 : 네마음대로? 저분한테 물어 봐야지.
18번 : 다 끝났으면 좀 도와줘요. 밥을 지어야겠어요. 불은 어디다 피운다? 땔감도 없고......
소장 : 자, 수고들 했어.
33번 : 소장님, 좋은 생각이 있어요. 교도소를 여기에 옮기면 어때요? 장소가 그만인데.
99번 : 쓸 데 없는 소리 말구 밥이나 하자. 내 나무를 해 올게.
33번 : 이 섬에 물이 있을까? 바케스는?
(18번과 소장만 남기고 모두 나간다. 18번은 돌을 고여 불 피울 차비를 한다.)
18번 : 소장님, 댁에서 걱정하시겠어요.
소장 : 3년이 멀다 하고 전근을 하면서 살아온 부부니. 괜찮을꺼야.
(고여사가 들어온다.)
소장 : 어떻게 벌써......
고여사 : 힘이 들군요. 거기다 난 심장이 약해서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오늘 저녁에 우리회의 모임이 있는데...... 내가 없으면 회의가 힘들텐데.
소장 : 잊어버리세요.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고여사 : 배가 언제 지나갈 지 모르니까 밤에도 누굴 시켜 감시해야겠죠?
소장 : 불침번을 세우지요.
고여사 : 참. 사람의 팔자두! (18번에게) 이것봐요!
18번 : 네?
고여사 : 밥을 너무 질게 하지 말아요.
18번 : 네
고여사 : 성질 나름이지만 난 진밥은 질색이야.
소장 : 저도 마찬가집니다.
(33번이 바케스를 들고 들어온다.)
고여사 : 그게 물이예요?
33번 : 드시게요?
고여사 : 목이 마르군요.
(18번이 컵에다 물을 딸아 가지고 온다. 고여사 마신다.)
물맛은 괜찮군요.
(죄수들이 드나들며 식사준비에 바쁘다. 안중팔일행이 돌아온다.)
고여사 : 왜 벌써...?
안중팔 : 뭐 그저 그렇군요. 나도 물 좀 주시오.
(33번이 바케스를 들고 들어온다. 모두 마신다.)
김화자 : 거기 세숫대야가 있죠? 손을 좀 씻어야겠어요.
(99번이 세숫대야를 갖고와 물을 따른다. 김화자 손을 씻는다. 5번이 수건을 갖고와
건네준다.)
오박사 : 좀 시장하군. 밥은 아직 멀었나요?
18번 : 금방 됩니다.
소장 : 저 그늘밑에서 좀 쉬시죠.
99번 : (안중팔에게) 저 잠깐... 천막이 좀 좁은 것 같은데... 천막을 창고로 쓰고 잠은
저 굴속에서 자면 어떨까?
안중팔 : ......그렇군. 밤에 비가 와도 곤란하겠지. 그렇게 합시다.
(신신옥이 18번과 함께 불을 지핀다. 소장이 관객 앞에 나온다.)
소장 : (관객에게) 이리하여 무인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섬 근처를 지나는 배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1주일이 지나
가지고 왔던 식량이 모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99번 : (죄수들에게) 자! 뭣들해. 또 한번 돌아 봐야지.
33번 : 이건 어디 여관집 식모살이 보다 더 힘이 드니!
99번 : 우리 팔자에 사람을 부릴 수도 없지?
33번 : 이 섬에도 머루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죄수들 나간다)
고여사 : 원, 운명도! 죽을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애당초 이번 일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
아, 성금만 전하면 됐지..., 죄수들 하고 무슨 야유회야? 우리집에선 얼마나 걱정을
할까? 매스컴에서도 야단들 이겠지? 내 얼굴이 매일밤 T.V.에 나올꺼야. 하기야
우리의 일이 잘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꺼야.
신신옥 : 설마요.
고여사 : 아냐. 그 김국장 여편네는 좋아라 하고 손뻑을 칠꺼야. 항상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까.
신신옥 : 그럴 리가 있어요?
고여사 : 나는 이런 고생을 해도 좋지만, 너까지......
신신옥 : 다 경험인 걸요 뭐.
고여사 : 경험?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생하는데 넌 이걸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젊어서 그런가, 넌 벌써 큰 경험을 했다.
신신옥 : 또 그말씀을......
고여사 : 어제 밤에는 죽은 아들의 얼굴이 보이더라. 너하고 결혼할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죽다니! 너무나 자동차가 많아. 결혼도 안한 네가 아직도 나를
시어머니처럼 대해주다니.....
신신옥 : 시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님이에요. 저는 고아에요. 저를 길러준 분이 누군데요.
고여사 : 미안하고 고맙다. 네 자유란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시집 가도록 해라. 하기야 네가 내 곁을 떠나면 나는 죽고
말꺼야.
신신옥 : 어머니, 전 결혼 안해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고여사 : 그러면야..... 벌써 햇볕이 뜨거워지는군. 이런걸 뭣이 좋아서 여름철이면 기를 써서
바닷가로 몰려가곤 했는지.... 넌 시장하지 않냐?
신신옥 : 할 수 없어요. 식량이 떨어진다니까요.
고여사 : 나는 좀 들어가 쉬어야 겠다. 밖에는 뜨겁구 저 안에는 축축하구.....
(고여사가 일어난다 신신옥이 그녀를 부축하고 들어간다. 5번이 등장한다. 천막안에 들어가 도끼를 들고 나온다. 도끼를 한두번 휘둘러보고 이어 바다건너 지평선을 바라본다. 갈매기가 운다. 신신옥이 나온다. 인기척에 5번이 돌아선다. 신옥은 한손에 도끼를 들고 자기를 보는 5번에 놀란다. 5번이 빙그레 웃더니 주머니에서 무슨 열매를 꺼내 신옥에게 던진다. 신옥이 놀라면서 그 열매를 받는다.
5번 : (빙그레 웃으며) 맛이 있어요. 먹어봐요.
신신옥 : 이게 뭔데요.
5번 : 나도 몰라요. 맛이 있던데요.
(김화자가 화를 내며 일어선다. 5번이 도끼를 메고 나간다.)
김화자 : 여태껏 TV 영화에 나가 벼라별 역을 다 맡아 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너무해.
이런 일은 처음이야, 인기를 얻는데 좋은 방법이래서 왔더니... 저 늑대 같은 것들
틈에서 언제까지 기다려! 여기가 어디쯤 되죠?
신신옥 : 모르겠어요. 지도에 없을지 모르죠.
김화자 : 그래도 기선이나 하다못해 비행기라도 지나갈 것 같은데... 벌써 일주일이야.
지금 한참 바쁠 때인데 이게뭐야!
(김화자 운다)
신신옥 : 울지 말아요. 굶지 않고 버티는 수 밖에 없어요.
김화자 : 윤감독이 지금 쯤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텐데.....
신신옥 : 우리 일행이 행방불명이 됐다는 걸 다 알고 있을테니 괜찮을 꺼예요.
김화자 : 신문에도 났을까요?
신신옥 : 신물 뿐이겠어요? 라디오 TV에도 다 보도 됐겠죠.
김화자 : 그러니 이제 싹 돌아가면 굉장하겠지요? 영화나 TV에 나가는 일보다
신문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일이 더 바쁠꺼야. 근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신신옥 : 밥을 안먹었으니까요.
김화자 : 그걸 내가 몰라서 그래요?
(신신옥이 말없이 동굴속으로 들어간다. 김화자가 자기의 몸을 만져본다. 머리칼도
만져본다. 초라한 자기 모습에 울기 시작한다. 무대가 어두워지고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음악이 흐른다. 암전)
제 3 장
(조명인)
33번 : 흥, 즉석 토끼탕이라!
99번 : 그 토끼는 내가 잡았어.
33번 : 그래, 혼자 먹겠다는거야?
99번 : 누가 혼자 먹는데.
소장 : 자. 조용히들 해.
안중팔 : 한끼를 또 먹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요.
18번 : 누구한테 감사를 해요?
안중팔 :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99번 : 흥.
안중팔 : 왜요?
99번 : 우리 현실적으로 놉시다. 이토끼는 내가 잡았고 요리는 18번이 했어요.
소장 : 자, 다 시장할텐데 시작합시다.
(모두 말없이 먹는다. 오박사는 손에 먹을 것을 들고 내키지 않는양 이맛살을
찌프리고 있다.)
99번 : 오박사님은 안드세요?
33번 : 흥, 위생관념이 철저하신 분이니까.
세균이 우글거리는 음식을 어떻게 잡술 수 있겠오.
오박사 : 시끄러워. 먹건 안 먹건 그건 내 자유야.
33번 : 그래 그 자유는 좋지만 왜 툭하면 반말이요? 내가 오박사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 적도 없는데
오박사 : 뭐야?
33번 : 뭐라니요?
소장 : 자. 조용히 합시다.
(동굴에서 김화자가 나와 일행사이에 앉아 음식을 집으려고 손을 내민다.)
99번 : 흥!
김화자 : 네?
99번 : 먹어야 하겠오?
김화자 : 지금........밥을 먹고 있는게 아니에요?
99번 : 그렇지만...... 이름이 뭐라더라?
김화자? 김화자씨가 꼭 먹어야 하는건 아니지.
고여사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99번 : 일을 하지 않은 주제에 무슨 염치가 있어서요? 우리가 뭐 지금 호텔방에서 사는 줄
아시우?
고여사 : 어떻게 그럴수가......?
33번 : 옳아.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먹어야 살 수 있어. 저 배우는 먹을 자격이 없어.
김화자 : (벌떡 일어나며) 이런 사람들을 돕는다고 나선 우리가 바보였어.
33번 :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환경이 달라졌으니까.
99번 : 먹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지.
훔쳐먹어요. 우리가 저 세상에서 그랬듯이. 그러나 훔치다 들키면 벌을 받아. 들키지
않아야해. 우리는 들켜서 봉변을 당했지만.
33번 : 훔치는 것도 기술인 걸.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사과해요.
김화자 : 사과요?
고여사 : 사과인지 능금인지는 몰라도 당신네들은 지금 숙녀 앞에서 큰 실수를 하고 있어요.
99번 : 지금 이 마당에 숙녀가 어디 있고 신사가 어디있어?
33번 : 최소한 여기에서는 기생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박사 : 기생충이라니?
33번 : 일을 않고 남의 것을 먹는 것이 기생충이죠. 저쪽사회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신옥 : 다음부터 같이 일하면 되지 않습니까? (화자에게) 자, 이걸 좀 드세요.
(화자가 말없이 음식을 받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33번 : 경치게 조용하군.
99번 :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
18번 : 사람들은 참 간사해요. 조금 조용하면 조용해서 미칠 지경이라고 하지 조금
시끄러우면 시끄러워 죽겠다고 하니.
99번 : 그것뿐인가, 조금 추우면 추워서 죽겠다고 학 조금 더우면 더워서 죽겠다고
지랄을 하지.
18번 : 자, 다 드셨으면 일어나세요. 치워 야지.
99번 : 가만! 어째서 밥먹고 치우는 것은 18번 뿐이지? 식모도 아닌데?
신신옥 : 저도 돕겠어요.
99번 : 그게 아니고 우리 조를 짭시다. 일을 분담한다는 말이요.
소장님 생각은 어떻소?
소장 : 글쎄......
33번 : 흥, 하기야 무덤에서 망주석을 훔칠 때도 조를 짰으니까.
좋은 망주석을 찾아 다니는 정보책, 그들을 파내는 행동조,
파낸 망주석을 운반하는 운반책, 그것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수출책.
99번 : 앞으로 어떻게될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팔자가 아냐? 여기서 며칠 더 살게 될는지...
또는 몇 년을 더 살게 될는지... 그러니 조직생활이 필요해. 누가 알아?
부득이 결혼을 하게될는지?
고여사 : 결혼? 나 참! 우릴 뭘로 보고 하는 말이요?
99번 : 누가 고여사보고 결혼하자고 했나?
오박사 : 농담이 심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상황 속에 있다고 하지만 예의는 지켜야
합니다.
안중팔 : 모두 진정합시다. (죄수들을 둘러부며)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인 선심에 대해서는
의심할 분이 없을 줄로 압니다. 다만 결과가 우리의 본 뜻하고는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됐으면 좀더 다정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서로 존경을
하며 지내야 합니다. 인간이 동물하고 다른 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사회에서 기반도 굳혔고 또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환경이 달라졌다 해서 당장 천대를 받는다면 우리는 용소할 수 없습니다. 특히
부녀자에 대해 모욕적인 언행이 있다면 이 안중팔은 생명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우리가 여러분들게 동정을 베푼 것이 죄가 될 수는 없겠지요?
99번 : 동정? 우리가 언제 동정을 바랬습니다? 안중팔 선생의 동정은 사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국회의원이 되려고요? 나는 선생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쓰지도 않는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판잣집을 지었다고 해서 쓸어버렸지요? 그것도 한겨울 가장
추운날씨에 그러면서 우리에게 동정을 베풀어요? 우리를 방문했다는 신문기사가
더욱 중요했겠지요.
걱정마세요. 우리가 다행히 무인도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면 선생은 영웅이 됩니다.
국회의원도 될 수 있고 사업도 번창할 겁니다. 선생은 지금 유명해지기 위해 투자를
한겁니다.
안중팔 : 당신이 무슨 일을 하다 잡혔는지는 몰라도 한심합니다.
소장 : 조용히 지냅시다. 입씨름을 해봤자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99번 : 누가 입씨름을 하자고 했나? 살기위해 하는 일을 분담하자고 제의 했을 뿐인데.
33번 : 저도 동감입니다. 우선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안중팔 : 흥, 내각을 구성할 생각이군.
오박사 : 잘 해 보시우. 3년 동안을 돌보아 주었는데.....
33번 : 형무소에서 돈을 주지 않았던가요?
오박사 : 내가 돈 때문에 형무소의 죄수들을 보아준 줄 아나?
33번 : 동정때문이겠지. 한마디 할까요?
오박사 : 한마디뿐인가, 두마디라도 해보지?
33번 : 당신은 다혈질입니다. 한마디만 하면 당신은 터질꺼에요.
당신은 도적놈입니다.
오박사 : 뭣이?
33번 : 그것봐요. 터졌지요. 돈벌기 위해서 의사가 된 주제에. 역사를 보시오.
의사들 치고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생명을 걸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나라가 바뀌거나 정부가 뒤바뀌어도 당신네는 그저
눈깔이 새빨개져 돈벌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의사 치고서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이 있오? 호의호식하고, 심심하면 간호사나 건드리고.......
(오박사가 33번에게 달려든다. 99번이 그를 가로막아 밀어버린다.)
오박사 : 흥! 폭력이 나오는군.
안중팔 : 오박사 참으세요.
(고여사가 해변쪽으로 가려고 한다.)
99번 : 이것봐요! 가긴 어딜까요!
살기위해서 조를 짜자는데 뭣이 나빠? (일동을 돌아보며)
자,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우.
33번 : 우선 지도자가 있어야해.
5번 : 지도자? 왕초라고 하지.
33번 : 왕초도 좋고, 두목도 좋아.
빈정대지 마세요. 어떻습니까. 우리 99번을 뽑읍시다.
몸도 제일 좋고 이것 저것 이런 데서 사는 법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니까 적격자지.
5번?
5번 : 좋아요.
33번 : 18번은?
18번 : 다 좋다면은.....
33번 : 안선생은?
안중팔 : ........마음대로 하시오.
33번 : 그런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아요. 여기는 안선생이 살던 사회하고는 다릅니다.
안중팔 : 마음대로 하라니까!
고여사 : 아, 좋은대로 하시라니까.
33번 : 이 거지 발싸개 같은것들!
신신옥 :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말은 조심하세요.
33번 : 그럼, 일은 끝났어. 이왕이면 우리 주석이라고 부릅시다.
오박사 : 흥.......
33번 : 그래 당신이 주석이요.
99번 : 원치는 않치만 시키면 할 수 없어.
한가지 조건이 있어. 내 말에는 무조건 따라야 해. 이의없지?
우선 취사반이 필요해. 18번하고 저... 여배우. 반장은 18번. 여배우는 자기 손으로
밥을 지어 본 적도 없을꺼야. 다음엔 급식반. 먹을 것을 찾는 반이야. 33번 하고....
그리구.... 오박사. 반장은 33번. 훔치는 솜씨가 종요하니까. 다음엔 나무반.
33번 : 나무반 이라니?
99번 : 불을 때야 하니까.
33번 : 연료반이 어때?
99번 : 응. 그래! 연료반. 연료반은....... 안선생. 다음은 감시반.
18번 : 감시반?
99번 : 스물네시간 바다를 살펴야 해.
지나가는 배를 찾는거야. 5번..... 저....... 며느리...... 반장은 5번.
그리구 청소반. 고여사 혼자서 하면 돼.
오박사 : 흥 반장은 너희들 끼리 다 해먹는군.
99번 : 불만이요? 밥을 지어 봤어? 나무를 해봤어? 먹을 것을 찾아 봤어? 그리고.....
여자들은 전부 세탁을 책임져야지.
고여사 : 흠!
99번 : 그리고..... 소장은..... 글쎄..... 하기야 사회가 있으면 형무소도 있어야 해. 사회가
있으면 도둑이 있는 법이니 그 도둑을 위해 형무소도 있어야 하거든.
33번 : 경찰이지.
99번 : 그래 소장은 경찰이요. 경찰은 사회가 어떻게 되건 항상 지도자, 아니지, 주석밑에서
일하면 되는 법이니까.
소장 : 99번! 자네는 인간 사는걸 장난으로 아나?
99번 : 왜 이래요? 우린 장난으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었어요.
배가 고파서 할 수 없이 도둑질을 했지. 여편네가 앓아 눕고 애들이 벌거벗고
다니기에 할 수 없이 도둑질을 했어요. 그것이 장난이요? 말은 바른대로 합시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살자는 거야?
간단하지 않아요? 조직이 있어야해. 다같이 힘을 모아야해. 두고봐. 혼자서만 잘 먹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것들이 이 안에서도 생길테니까. 그때는 벌을 줘야 해.
그 벌주는 책임을 소장이 하라는 거요.
33번 : 말이야 옳지.
99번 : 여자들은 갖고 있는 머리핀을 다 내놔요.
고여사 : 머리핀을?
99번 : 물고기를 잡아야 하니까. 낚시 바늘을 만드는거야.
저 배우부터.
(김화자가 망서린다)
왜이래요?
(여자들이 머리핀을 뽑아 99번에게 준다)
99번 : 33번, 너 손재간이 있지? 잘해봐.
(99번이 33번에게 핀을 넘겨준다.)
그럼.... 다 끝났지? 한시간 후에 모이기로 하지. 그동안은 자유야.
낮잠을 자는게 좋을걸.
(99번이 동굴안으로 들어간다. 33번도 뒤따른다. 5번은 천막안으로 들어간다. 18번은
그릇을 들고 나간다.)
오박사 : 미친것들! 아니, 당신은 소장이 아니요? 저렇게 내버려두는거요.
소장 : 어떻게하면 좋겠오? 호랑이도 물에 빠지면 송사리가 시키는대로 해야합니다.
선생님들은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아닙니까? 인격이 있고 명성도 있고.......
오박사 : 흥! 당신은 저쪽 편이군요!
소장 : 나 참!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안중팔 : 우리 이섬을 빠져나갑시다.
고여사 : 어떻게요?
안중팔 : 뗏목을 만듭시다. 배에서 판자를 메고 통나무를 잘라서.....
오박사 : 힘들껄요..
고여사 : 휴! 팔자두! 애당초 이런 일은 안했어야 했는데.
난 그저 성금이나 전하자고 했는데.... 안선생이 고집을 부리기에
안중팔 : 싫으면 그만 둘것이지.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면 뭘해.
고여사 : 말은 바른대로 합시다.
신신옥 : 어머니!
안중팔 : 자. 그만하고 바닷가에나 가봅시다.
(모두 일어나 나간다. 신신옥만 남는다. 5번이 천막에서 밧줄을 들고 나온다.
얽힌 밧줄을 푼다.)
5번 : 미안하지만 이 밧줄을 잡아주세요. 마구 얼켜버려서.....
(신신옥이 가까히 가서 밧줄 한 끝을 잡는다)
신신옥 : 이걸로 뭣을 하게요.
5번 : 글쎄요..... 용도가 생기겠지요. 배에 있었던 것을 가지고 왔는데....
신신옥 : ..... 통 말씀을 안하시더니......
5번 : 할말이 있어야죠.
신신옥 : 어떻게해서.... 그런 옷을 입게 됐어요?.... 미안 합니다.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대학생 이라면서요?
5번 : 그때는요. 하기야 형무소를 졸업하니까 매 마찬가지지. 대학을 졸업하나 형무소를
졸업하나.... 그러다가는 인생도 졸업하겠지.
신신옥 : 인생을 졸업 하다니요?
5번 : 살다가 죽으면 그게 졸업이니까요.... 집생각이 나죠? 처음에 감방에 들어오니까
미칠 것 같더군요. 집 생각이 나서.
신신옥 : 저.... 같이 오신분들이 괜찮을까요?
5번 : 우리 죄수요? 글쎄.... 사람이란 수시로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모르겠습니다.
신신옥 : 해를 끼치지 않도록 잘 설득해 주세요.
5번 : 맡은 일을 잘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겠죠.
신신옥 : 저희들을 잘 봐 주시면 후에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5번 : 후에요? 후에라니요? 아 저쪽 사회에 나가서요?
(신신옥이 머리를 끄덕인다.)
저쪽 사회에선 자신이 있나보죠? 여기서 꼼짝못하고 죽으면 어떻게요?
자 다 됐습니다.
(밧줄을 쥐고 천막안으로 들어간다. 신신옥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어 일행이
나간 방향으로 퇴장한다. 무대가 암전된다.뇌성이 들리며 비가 내린다. 잠시후
동굴에서 안중팔이 나온다.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쏜살같이 천막쪽으로 뛰어
들어간다. 신신옥이 뛰어들어와 동굴입구에서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는다.
안중팔이 먹을 것을 들고 나와 씹으며 우측으로 뛰어간다. 신신옥이 그의 뒷모습을
볼 때 5번이 동굴에서 나온다.)
5번 : 바다를 누비는 배가 몇천개는 될텐데.... 이 근방을 지나는 배는 보름이 지나는데도
한척 없으니..... 그래도 지켜봐야겠지. 자 들어가 좀 쉬지요.
신신옥 : 잠도 오지 않아요. 이상해요. 어떻게 모두 순순히 99번의 말을 듣는지 모르겠어요.
5번 : 그럴 수밖에 이런데서 사는 방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99번이니까 혹시 여기에
학교를 세운다고 생각해봐요. 가리키는 것은 글이 아닐꺼야. 물고기 잡는 법 땔감을
구하는 법 맨손으로 집을 짓는 법 이런 것 들을 가리킬꺼야. 또 그렇게 해야만
여기서는 이겨 나갈 수 있어. 야생동물처럼 날쎄야 우등생이 되겠지. 이런 일을 제일
잘 하는 것이 99번이니까.
99번이 싫으면 반대를 해야지. 반대를 하려면 생명을 내걸어야지. 뿐인가?
99번을 반대하려면 그 사람의 생활방법보다 나은 방법을 발견해야 하는데 우리
일행 중에는 그러한 방법을 아직도 창안해 낸 사람이 없어요. 사람을 반대해서
내쫓는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겠지만 그 후가 문제지. 더 좋은 방법이 없다면.
우리주위에는 미운사람들이 많아요. 그 미운 사람들을 다 없앨 수 없는 것은 그후의
뒷처리가 문제이기 때문이지.
신신옥 : 벌써 보름이 지났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5번 : 아무도 모르죠. 자, 바닷가에나 나가 볼까.
(5번이 바닷가로 나간다. 신신옥이 동굴 쪽으로 발을 옮긴다. 안중팔이 뛰어 들어온다.)
안중팔 : ......아, 신양이군. 교대요? 잠이 안오기에 한바퀴 돌았지. 힘들지요?
좀더 참아 봅시다.
(신신옥이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안중팔이 천막 쪽을 본다. 이어 동굴안으로
들어간다. 암전)
제 4 장
(무대가 밝아진다. 아침이다. 18번이 천막에서 나온다. 동굴에서 사람들이 나온다.)
18번 : 경찰을 불러야겠어!
33번 : 왜?
18번 : 도둑놈이 있어. 오늘 아침에 먹을 끼니가 없어졌어.
소장 : 그럴 리가 있나?
18번 : 그럴 리가 있다니까요!
33번 : 혹시 짐승이 훔친 게 아냐?
18번 : 씨앗 한알 안 남기고 깨끗이 훔쳤어 짐승이. 그런 짓을 해?
(그릇을 들고 나온다.)
5번 : 흥! 경찰이 책임을 져야겠군.
소장 : 왜?
오박사 : 우리 사이에 도둑놈이 있는 모양이군. 과거에 훔쳐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가 훔치겠오?
고여사 : 옳은 말이야.
99번 : 분명 누가 훔쳤어! (신신옥에게) .....음...신.....이름을......귀찮다! 저 아가씨는 오늘부터
0번이야. 우리도 번호를 부르니까. 아가씨도 오늘부터 번호를 써. 이름을 외우기가
힘들어. 0번! 어제 감시를 했겠지요?
신신옥 : .......네.
99번 : 이 천막 앞을 지날 때 누가 없었오?
신신옥 : ......아뇨.
99번 : 자 양심적으로 나와. 훔친 놈은.
고여사 : 왜 나를 자꾸 보시우? 나는 동굴 속에서 나온 적이 없어요.
99번 : 빌어먹을 것들! 훔칠 때가 따로 있지, 이 판국에 훔쳐? 33번! 너 아냐?
33번 : 왜 이래? 주석 옆에서 잤는데.
99번 : 나는 저 쪽에서 살 때 훔치긴 했지만 가난한 사람의 물건을 훔친 적은 없어!
33번 : 나도 그래!
안중팔 : 무덤의 망주석을 훔치고서도?
33번 : 가난한 집안에서 망주석 세우는 걸 봤오?
김화자 : 이렇게 떠들기만 하면 뭣해요?
99번 : 우선 경찰이 책임을 져야 해.
소장 : 아니 경찰이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책임을 져? 정치문제라던가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기도 힘이 드는데.
99번 : 그건 저쪽에서 하는 일이야. 여기선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해.
그리구...... 밤에는 이 천막 앞에서 자도록 해야겠어요.
소장 : 나참!
99번 : 싫단 말이요?
소장 : ........알았어.
99번 : 우리는 공동책임을 져야 해. 오늘 하루는 너 나 할 것 없이 굶는 거야.
오박사 : 하루를 굶어?
고여사 : 아니 죽일 생각이요?
99번 : 왜 말이 많아요?
33번 : 굶는 것도 좋지만..... 음식을 훔쳐먹은 놈은 배가 덜 고플 게 아냐? 훔친 놈은 괜찮구
애꿎은 우리만 고생해?
김화자 : 옳아요.
99번 : ......음 그렇기도 해. 그럼 어떻게 하지? 한끼만 굶지.
신신옥 : 훔친 사람이..... 자수하면 되잖아요?
99번 : 그놈이 자수를 할까?
(5번이 뛰어 들어온다.)
5번 : 이것봐! 비행기야..... 비행기!
99번 : 비행기?
5번 : 저 쪽에 깨알만 하게 나타났어!
99번 : 모두 바닷가로 나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마구 흔드는 거야!
(99번이 웃저고리를 벗는다. 오박사도 벗고 이어 김화자도 벗는다. 모두 뛰어 나간다.
밖에서 어이! 어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후 5번이 상의를 입으며 들어온다.)
33번 : (들어오며) 그놈의 조종사 눈깔이 어떻게 됐나? 어떻게 우릴 그냥 지나갈수 있지?
김화자 : (자기의 입은 옷이 18번의 옷임을 알고) 아니, 내 옷이......? (18번에게) 옷이 바뀌었어요.
안중팔 : ........내 옷도...하! 주석....., 옷이 바뀌었는데.
99번 : ......그래?
18번 : 그까짓 옷이 문젠가? 귀찮다! 어차피 세탁도 해야 하는 데.
99번 : 그래. 그대로 입고 있어.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
김화자 : 그럼 우리가 죄수란 말이요?
99번 : 죄수? 말조심해!
말조심해....... 여기 죄수가 어디 있어?
33번 : 우릴 뭘로 보고서.
99번 : 다 보는 앞에서 사과해! 못해? 경찰! 그 천막 안에서 몽둥이를 가져와. 빨리!
신신옥 : (김화자에게) 미안하다고 해요.
김화자 : 뭐가요?
신신옥 :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김화자 : 왜요?
신신옥 : 여기는...... 여기니까요.
김화자 : ........(모기소리로) 미안해요.
99번 : 안 들려. 크게!
김화자 : 미안해요.
99번 : 미안한 것 같지 않아. 크게.
김화자 : (화를 내서 거의 발광적으로)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사이) 아-ㄱ!
(쓰러져서 운다. 신신옥이 그녀를 부축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어색한 사이)
33번 : 그래, 오늘은 먹지 않는 거야?
99번 : 급식반! 급식반은 손들어!
(33번이 번쩍 손을 든다. 오박사도 마지못해 손을 든다.)
먹고 못먹는 것은 급식반에게 달렸어! 나가서 먹을 것을 구해봐요. 그러나 2일 분을
구해와야해. 내일 것하고 도둑맞은 오늘 것하고.
오박사 : 어떻게 구해 와? 한두 사람의 식량이면 몰라도 열명분을.... 그 것도 이틀치를?
열매라는 열매는 다 따왔어!
99번 : 다람쥐도 있고 도마뱀도 있어.
오박사 : 천막에는 아직 먹을 것이 있어요. 우선 그걸 먹구.....
99번 : 그건 비상 식량이야. 그리구 나머지 사람들은 바닷가에 나가서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찾는 거야. 경찰만 남아서 이 천막을 지키는 거야.
고여사 : 일을 하려 해도 배가 고프니.....
99번 : 그건 음식을 훔친 도둑놈한테 애기해요. 주석인 나도 배가 고프오. 이래뵈도 자기는
잘 처먹으면서 국민에게만 검소한 생활을 하라고 강조하는 지도자하고는 질적으로
달라. 내 주석이라는 자리가 언제 끝날지는 몰라도. 자 세수를 할 사람은 세수를
하고 용변을 볼 사람은 숲 속에 들어갔다가 일을 하는거야.
(99번이 나간다)
33번 : 급식반은 여기에 남읍시다.
(모두 흩어진다. 33번이 천막안에 들어가 연장을 들고 나온다.)
33번 : 어젯밤 다람쥐 꿈을 꿨어요. 다람쥐나 잡을 수 있었으면!
자, 가 볼까요?
(오박사는 말없이 33번을 따라 나간다.)
안중팔 : (신신옥에게) 피곤하지요? 형무소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거요. 시장해 죽겠군.
한 끼를 굶는다면서? 어떤 놈이 음식을 훔쳤을까. 몹쓸 놈.
신신옥 : 누가 훔쳐 먹었는지 짐작이 안 가세요?
안중팔 : 그러면 내가 경찰서장을 하게? ㅅ람이란 역경에 빠져봐야 사람됨을 판단할 수 있어요. (혼잣말처럼) 흥! 사람 팔자란 묘하군! 이런 데서 지낼 줄이야!
(안중팔이 나간다. 5번이 천막 안에 들어가 밧줄을 들고 나온다.)
5번 : (잠시 망설이다가) 아가씨.....
신신옥 :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네?
5번 : .....우리....감시반이죠? 좋은 생각이 있어요. 감시는 높은 곳에서 해야해요. 형무소의
감시초소도 높거든요. 그래서 이섬에서 제일 높은 나무위에 올라가는 겁니다.
이 밧줄을 써서. 그럼 더 멀리 볼 수 있거든요.
신신옥 : 오지도 않는 배를 뭣 때문에 기다려요?
5번 : 그럴까요? 그래도 배를 놓치고 후회하기는 싫군요. 왜? 우울하시군요.
신신옥 : (돌아서면서) 저한테 신경을 쓰지 마세요. (자기에게 쏠린 대화를 돌리고자) 말씀
좀 해보세요. 형무소에는 왜...... 입학했어요?
5번 : 수업료가 무료니까요.
신신옥 : 자기의 아픈 과거를 농담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5번 : 농담처럼 물은 건 누군데요?
얘기 할까요? 공부하기 싫어서 형무소에 들어왔어요.
신신옥 : 그래요? 무슨 공부를 했는데요?
5번 : 모르겠어요. 그저 고학해서 등록금을 바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학년이
됐고! 그리구..... 또 형무소에서 2년 지냈고. 젊었을 때의 인생은 바쁘더군요. 그러나
오해는 마세요. 살인을 했거나 사기를 해서 걸려 든 것은 아닙니다. 아가씨도 대학은
나왔습니까?
신신옥 : 맞춰 보세요.
5번 : 글쎄 모르겠군요. 하기야 여자란 대학을 나오나 마나니까.
불이 나게 복습하고 지랄나게 예습을 해서 일등만 하던 여학생을 아는데 시집가니
그만이더군요. 시집가서 일년 지나면 평범해지고 이년 지나면 바보가 되고 삼년이
지나면 식모가 되고. 그리구.....
신신옥 : 그만하세요. 저는 그렇게는 안 될 테니까. 모를 일이예요.
말이란 건 거의 안 하던 분이 욕까지 하니.
5번 : 미안합니다. 저 사람들하고 무슨 말을 해요? 나는 출감하면 한국말을 다시 창조하려
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신신옥 : 뭐요?
5번 : 그것 보세요. 가장 중요한 말도 믿지 않거든요. 그렇게 됐어요. 미안합니다. 보기를
들기위해 한 말입니다. 말이 통하질 않아요.
신신옥 : 상대에 달렸겠지요.
5번 : 그럴 수도 있겠지요. 자,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동안 벌써 대 여섯척의 배가 지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가 볼까요? 하기야 제가 반장이니 명령도 할 수 있으니까.
신신옥 : 네, 복종하겠습니다. 반장님.
5번 : 흥! 기분이 좋군요. 복종을 강요당하는 것은 싫지만 복종을 요구할 때는 통쾌한데요.
그래서 정치란 아편 같은 모양이죠? 갑시다.
(5번이 밧줄을 메고 나간다. 신신옥이 그 뒤를 따른다. 99번과 소장이 들어온다.)
99번 : (소장에게) 정위치는 천막 앞이요.
소장 : 아직 범인을 못 잡았는데 차라리 천막을 볼 수 있는 곳에 매복하면 어떨까? 숨어서 지키는 거지.
99번 : ...그건 좋지 않아요. 비겁해. 예방이라고 하던가? 당당한 모습을 보여서 훔칠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이 남자다워. 골목에 숨어 있다가 택시를 잡는 교통 순경은 존경을 못 받습니다. (소장이 천막 앞에 앉는다.) 다 어디갔어?
(99번 퇴장한다. 암전)
제 5 장
소장 : (관객에게) 천여 명을 통치하던 이 소장의 신세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서는 지금 맡고 있는 일이 최상입니다. 20일이 지났습니다. 허기 진 배를 안고 이 무인도의 새 이주민들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혹시나 지나갈지 모 를 배를 기다리며 연명하고 있습니다. 요 며칠사이에 이상한 일도 일어났었습니다. 어 떤 날 밤이었습니다. 달이 유난히 밝았습니다.
(무대가 어두워지며 달이 보인다.)
저는 99번, 아니 주석의 명령대로 이 천막 앞에서 졸면서 식량을 지키고 있었고 감시 반을 맡은 5번과 신신옥...0번이라고 하던가요? 두 사람은 먼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감시는 한 사람이 하기로 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둘이서 감시를 하 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장이 천막 앞에 앉아 존다. 잠시 후 동굴 속에서 비명이 울리며 김화자가 뛰어 나 온다. 모두 그 뒤를 따라 나온다.)
고여사 : 왜 그래?
김화자 : 무서워요.
18번 : 꿈을 꾸었나?
김화자 : 꿈이 아니에요. 진짜예요. 누가 나를 겁탈하려고 했어요.
고여사 : 저런!
김화자 : 잠결에, 몸에 무거운 것이 누르는 것 같기에 눈을 떴더니 글쎄, 남자예요.
18번 : 그런 야만인 같은 짓을!
고여사 : 짐승이지. 같은 가족들처럼 지내야 하는데.
(5번과 신신옥이 나온다.) ...신옥아!
신신옥 : 네?
고여사 : 내 옆에 오너라.
(신신옥이 고여사옆에 온다.)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 (99번에게) 당신은 주석이 아니요? 책임을 지고 범인을 찾아주세요.
오박사 : 경찰은 뭣하는 물건이야?
소장 : 나? 경찰은 한 명 뿐이요. 그 한 명도 식량을 지키노라 정신이 없어요.
오박사 : 경찰이 하나 뿐이라 지만 우리의 인구와 비례하면 많은 셈이지.
33번 : 흥! 인구가 적으니까 누가 인구를 늘리려고 저 아가씨를 괴롭혔군!
18번 : 시끄러워요!
고여사 : 하여튼 범인을 찾아주세요. 주석은 식량을 훔친 도둑도 못 잡았어요. 그런데 이번 엔 이렇게 끔찍한 일이 또 일어났어요. 책임을 지고 찾아서 처벌해 주세요.
33번 : 아니, 그 범인이 꼭 남자라는 법은 없지 않아?
18번 : 그럼 여자란 말이야?
33번 : 그럴 수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김화자 : 시끄러워요. 분명 남자예요.
33번 : 증거를 대시우.
고여사 : 그렇다니까! 남자란 이렇게 뻔뻔스럽다니까 모든 남자가 다 그래요.
안중팔 : 고 여사, 말조심하세요.
신신옥 : 안 선생님은 본래 고상한 분이니까 이번 일과는 관계가 없을 거예요.
안중팔 : 뭣이?...... 음.
고여사 : 하여튼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러다가 우리 여자들이 하나도 무사할 수 없을 거예요.
33번 : 고 여사 도요? 나 참!
고여사 : 뭐요? 나도 여자예요! 김화자양! 짐작이 안 가요? 누구 같아요?
김화자 : 글쎄.... 어둡고.... 너무 놀라서......
고여사 : 하여튼 결말을 냅시다. (신신옥에게) 너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한 밤중에 남자하 고 숲속을 싸다니냐? 그것도 보통 남자도 아닌데.
신신옥 : 제 일은 걱정마세요.
고여사 : 뭐야? (당황의 빛을 감추려는 듯) 하여튼, 주석, 해결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 리 여자들은 아침에 바다로 나가 자살해 죽겠어요.
33번 : 하필이면 아침에 죽나?
99번 : 시끄럽다. 그래 날더러 범인을 찾아내라는데...., 자 여배우를 덮친 사람은 나와. 없어? 엊그제 범인 취급을 받던 것이 난데 날더러 범인을 잡으라니... 하여튼 저 5번하고... 경찰은 아닐테고... 물론 나도 아니고...
33번 : 그렇다고 해서 또 하루 종일 끼니를 굶는 것은 아닐 테지?
고여사 : 우리 여자들은 굶을 필요가 없어요. 모두 피해자니까. 김화자양! 왜 소리를 지르고 나오냐 말야! 꽉 잡고서 증거 될만한 것을 손에 쥐어야지. 상식이 아냐?
김화자 : 제가 언제 이런 변을 당했나요? 처음인데.
고여사 : 그럼 뭐 경험자가 있나?
안중팔 : 자. 잊읍시다. 이만큼 문제가 됐으니까. 범인도 뉘우치겠지요.
혹시... 꿈결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고...
김화자 : 꿈은 아니예요!
18번 : 나도 그런 꿈을 한번 꾸었어.
김화자 : 저는 그렇지 않아요!
33번 : 자! 주석! 어떻게 할꺼요?
99번 : 이런 일이 자주 생길 줄 알았다면 주석을 맞지 않았을걸. 좋아 경찰! 천막에 들어가 몽둥이를 가져오시오. 토끼를 잡던 몽둥이.
소장 : 왜?
99번 : 가져 오라니까요!
(소장이 천막으로 들어간다.)
5번 : 왜 그래요?
오박사 : 우리 남자들을 팰 생각인가?
(소장이 몽둥이를 들고 나온다.)
99번 : 분명 이것은 남자의 짓이야. 그러나 범인은 나오지 않아. 그러니 주석인 내가 책임을 져야해.
33번 : 무엇 때문에?
99번 : 몇 천만원을 훔치거나 사람을 떼죽음 시켜놓고도 사표 한 장만 던지면 무사한 그런 지도자는 싫어. 그것들 때문에 우리는 못 살았어. 나도 주석을 그만두면 이 일은 끝나 나, 싫어! 우리만은 책임을 져야해. 자, 경찰관! 나를 범인으로 알고 후려갈겨. 어서!
때리지 못하면 내가 경찰을 패 죽일테다.
오박사 : 주석! 그건 너무해!
99번 : 닥쳐! 못 때리면 경찰은 죽는다. 어서!
소장 : 할 수 없군! 미안해!
(소장 99번은 내려친다.)
99번 : 힘껏!
소장 : 그래!
99번 : 좀 더!
소장 : 알았어!
(소장이 계속 패더니 몽둥이를 내던지고 돌아선다. 99번은 그대로 쓰러져 있다. 모두 숙연해진다.)
김화자 : (가까이 가서) 미안해요. 저 때문에....
99번 : (아픔을 참고 일어서며) 자. 반장들은 남고, 다른 사람은 들어가 자도록 해.
(사람들은 동굴로 들어간다. 소장은 천막 앞에 가 앉는다. 18번, 33번, 그리고 5번이 남는다.)
99번 : ... 내가 매를 맞았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야. 앞으로 이런 일이 자꾸 생길 지도 몰라. 너희들은 반장이야. 나 혼자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처리할 수 없어. 반원들을 잘 감시해. 일을 할 때뿐만이 아니라 쉴 때나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야.
33번 : 정보 활동을 하라 이말이군.
99번 : 뭐라 불러도 좋아. 너희들이 사건을 일으키면 죽을 줄 알아. 하기야 몰라. 그 여배우 덮친자가 이 속에 있는지도
33번 : 나는 절대 아냐.
99번 : 그리구 5번.
5번 : 왜?
99번 : 휘발유는 항상 준비하고 있지? 지나가는 배가 있거든 불을 질러. 불을 지르면 배가 가까이 올 거야. 그때는 모두 소리를 지르고 옷을 벗어 흔드는 거야.
.5번 : 알고 있어요.
99번 : 자. 그럼 들어가 쉬도록 해. 참, 5번은 어째서 밤에 감시를 혼자만 하나?
5번 : 그렇지 않은데.... 둘이 교대로 합니다.
99번 : 나는 알고 있어. 너는 이틀 밤을 새웠어. 오늘은 자. 경찰이 여기서 감시를 할테니까.
33번 : 주석, 미안해.
99번 : 쓸데없는 소릴랑 마. (달을 보며) 빌어먹게... 왜 이렇게 달이... 밝아. 들어가.
(33번과 5번이 들어간다.)
(99번이 바위에 앉아 먼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잠시후 소장쪽을 본다.)
... 소장님.
소장 : 응? 나? 왜 또 갑자기 소장이야?
99번 : 미안합니다.
소장 : 미안한 건 이 쪽이요.
99번 : 들어가 보세요. 오늘밤은 잠도 안 올 것 같으니 내가 지킬께요.
소장 : 무슨 말을... 99번은 주석이야.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려면 몸도 돌봐야해. 자. 들어가 자.
(소장이 99번의 어깨를 친다. 99번이 말없이 들어간다.)
(관객에게)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 조그만 섬에 열명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음 식이 많을 리가 없습니다. 골짜기의 샘터도 마르기 시작하여 이제는 물도 배급제가 되었고 하루에 한끼를 먹던 끼니도 줄어만 갑니다. 가파른 해안선으로 해서 물고기도
제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모두 쇠약해졌습니다.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사람은 안중팔 입니다. 그 엄청난 체구가 잘 먹고 잘 마시던 옛 습성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동굴에서 안중팔이 나온다. 천막 쪽으로 걸어온다.)
안중팔 : 수고하오.
소장 : 왜... 잠이 안 와요?
(안중팔 머리를 흔든다.)
소장 : 그래도 눈을 붙여야지.......
안중팔 : ...체면이 없는 것 같은데...... 좀 ... 도와주시오. ...... 미칠 것 같아.
배가 고파 죽겠소. 내 요구하는 건 뭣이든 줄 테니 먹을 것을 좀 주시오. 내 몸을 보시오. 자, 봐주시오. 뭣이든 요구대로 할테니까.
소장 : ...요구가 있습니다.
안중팔 : 말해 보시오.
소장 : 들어가 주무시오.
안중팔 : 휴.... 인정도 없군요. 내, 고행에 돌아가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소장 :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내 직책이니까. 일생을 이렇게 살아왔소.
안중팔 : 직책? 죄수들이 준 직책인데.......
소장 : 선생도 그 사람들이 만든 법에 따라 살고 있지 않소? 자, 들어 가시오. 우리는 이런 생활에서는 속수무책이요. 저 사람들이 없으면 벌써 끝장이 났을지도 몰라요. 무리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안중팔이 머리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간다.)
(5번이 기타를 들고 나와 바다 쪽을 향해 앉는다. 조용한 기타 소리만 난다. 신신옥이 나와 그의 뒷모습을 본다. 소장은 고개를 숙이고 자는 척 한다. 신신옥이 서서히 5번 곁으로 간다. 기타소리 멎는다.)
신신옥 : ...그대로 계속하세요. (앞을 보며)... 밤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저 바닷물을 봐요. 은 빛이예요.
5번 : ...그러니 더욱 집 생각이 나죠?
신신옥 : 집? ...저는 혼자예요. 눈치만 보면서 살다보니 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 았어요. 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기타를 계속해요. (기타소리가 난다. 신신옥이 5번 옆에 앉는다.) 이렇게 조용히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야릇한 음악을 들으면 서...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잠시후 고 여사가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윽고 두 사 람을 본다. 말을 걸까 하다가 참는다. 분노와 근심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기타소리가 멎는다. 5번과 신신옥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어 해변으로 뛰어내린다. 고 여사가 그 쪽으로 뛰어간다.)
고여사 : 신옥아! 신옥아!
소장 : 고 여사.
고여사 : 어떻게 그럴 수가! 하필이면 저런 종류의 남자하고.
(이때 무대 한쪽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삽시간에 붉은 빛이 무대를 덥는다.)
소장 : (일어나며) 불을 붙였는데.
고여사 : 불이에요!
소장 : 그럼 배가 지나가는 게 아냐?
5번 : (무대 밖에서) 배가 지나간다!
소장 : 그렇군!
(5번과 신신옥이 뛰어 들어온다. 불이 활활 타오른다.)
5번 : 배가 지나간다!
(5번과 신옥이 서로 껴안는다. 고여사가 그 모습을 보고 털썩 주저앉는다. 동굴에서 사 람들이 뛰어나와 해안가를 본다. 모두 소리를 지른다.)
오박사 : 저기 있군! 분명히 배야! 큰 기선 같아. 불이 환한데.
안중팔 : 살았군!
18번 : 구세주야!
(99번은 돌아서서 기쁨의 눈물을 닦는다.)
99번 : 5번! 그리구......0번!......수고했어!
오박사 : 분명 여기를 봤을 거야. 저렇게 불이 활활 타니. (상의를 벗어 흔들며) 여기다! 어 이! 여기다!
김화자 : 난 앞으로는 교회를 나갈래. 하나님은 분명 있나봐.
33번 : ......배가 가까이 오질 않는데? ......오히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 같아.
(일순 정적이 흐른다.)
오박사 : ...그런 것 같은데, 점점 불빛이 작아지는데!
김화자 : 이렇게 환한 불을 보지 못할 리가 없는데?
안중팔 : 어떻게 된 거야? 점차 멀어지는 것 같은데?
오박사 : 빌어먹을!
33번 : 아니, 저 배에는 장님만 탔나!
99번 : ...멀어져 가. 우리의 신호를 못 봤을 리는 없는데.
신신옥 : (5번에게) 어떻게 된거지?
5번 : 바보같은것들. (돌을 주어서 배를 향해 던지며 울먹이는 소리로) 이 병신 같은 것들아
(김화자가 소리내서 운다.)
안중팔 : 역시...... 운명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군.
김화자 : (미친 듯이) 우리 다 죽고 맙시다. 죽어요! 더 이상 뭘 참아요!
오박사 : 완전히 사라졌어!
(사람들이 주저앉는다. 고여사가 신신옥의 손을 잡아 바위쪽으로 가 앉으며 얘기를 한다. 신신옥은 머리를 숙인 채 듣고만 있다.)
안중팔 : (울먹이며)...25일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오박사 : 이대로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99번 : 누가 죽는데?
김화자: 이제 또 무슨 희망이 있어요?
99번 : 좋다! 죽을 놈 앞으로 나와! 내가 죽여준다.
안중팔 : 여보 주석, 우리는 본래 죽는다는 말을 많이 하는 민족이요. 좋아도 죽는다고 하니 까. 그 말을 곧이 듣소?
(사람들이 실신한 것처럼 앉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99번이 배가 멀어진 방향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암전.)
제 6 장
(아침이 밝아온다. 사람들이 무대에서 서성댄다. 안중팔, 오박사는 몽둥이를 들고 있다. 고여사와 김화자, 신신옥은 깡통과 쟁반을 쥐고 있다. 밧줄이며 쇠줄로 엮은 그물을 33번과 5번이 들고 있다.)
99번 : 자. 다 준비가 됐지? 33번하고 5번은 이 그물을 펴들고 정상에서 기다릴 테니까 몰 이꾼들은 해안가 에서부터 몰고 오는 겁니다. 고 여사하고 여배우, 0번 아가씨...... 나 도 같이 가지. 여러분들은 몰이꾼입니다. 깡통이니 쟁반을 요란하게 치면서 토끼를 언덕으로 모는 겁니다. 그러면 토끼가 언덕으로 올라 올 거예요. 토끼들이 그물에 오 면......
안중팔 :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치지!
99번 : 그렇습니다. 인정사정 없습니다. 그물에 부딪치는 순간, 안 선생, 오박사는 사정없이 때려 잡는 거야.
오박사 : 놓치면 어떻하지?
99번 : 계획대로 하면 놓칠 리가 없어요. 이 섬의 토끼들은 사람을 모르니까 좀 우둔할 꺼 요. 한두 마리는 잡았지만, 이번에는 몽땅 잡는 거야. 우리 밤낮 우거지 국만 먹을 거 요?
33번 : 천만에!
99번 : 그리고 18번 물을 끓여. 잔치를 하는 거다. 다 자기 할 일을 알았지요? 자 우리 떠나 기 전에 사기를 올려야지. 삼삼칠 박수다. 시---작.
(박수를 친다.)
틀렸어! 안중팔씨가 틀렸어. 해보세요. 삼삼칠입니다.
(안중팔이 박수를 친다.)
안중팔 : 어때요?
99번 : 됐어요! 자 다같이. 하나 둘 셋!
(일제히 박수를 친다.)
됐습니다. 그럼 갑시다. 자 몰이반은 이쪽으로!
안중팔 : 타격대는 이리로!
(모두 나가고 소장과 18번만 남는다. 18번은 돌을 부딪혀 뿔을 내기에 바쁘다.)
소장 : (관객에게) 토끼는 쉽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점심때는 푸짐한 토끼국을 먹을 생각이 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 세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일 행은 배고픈 것도 잊고 피곤을 극복했습니다. 토끼를 잡았을 때는 기쁘기만 했습니 다. 저녁 4시가 넘어 일행은 위풍도 당당하게 귀환했습니다. 토끼 요리는 허기진 우 리들에게 무한한 입맛을 돋구었습니다.
물론 토끼를 요리할 때는 안중팔씨 일행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들은 새삼 이러한 환경에서는 99번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느꼈 을 겁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사람들은 또 불안에 싸였습니다. 식량이 또 바닥이 나기 시작했고 가뭄에 물도 말라붙어 얼굴만 쳐다보며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29 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소장이 나가고 잠시 무대가 빈다. 새소리가 난다. 먼 곳에서 파도소리가 들린다. 33 번이 이름모를 풀을 한아름 들고 들어온다. 18번이 이마에 묻은 땀을 씻으며 새끼에 매단 물고기를 들고 들어온다.)
33번 : 호,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18번 : 내가 잡은게아니예요. 99번이 잡았어. 그게 무슨 풀인데?
33번 : 몰라. 먹을 수 있을거야.
18번 : 어떻게 알아요?
33번 : 어제 먹어 봤어. 그런데도 살아있잖아? 푹 삶아 봐. 흥.
18번 : 왜요?
33번 : 배는 고파 죽겠는데도 18번 옆에 있으면 이 몸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이상한데.
18번: 뭐요? 나 참! 오늘 밤 또 그랬다가는 저 여배우처럼 소리를 지를 테요.
33번 : 뭘 그래! 다 알면서. 이것봐... 저리가.
18번 : 정신 나갔어? 대낮에. ... 밤이면 또 몰라도...
33번 : 그래? 알았어?
18번 : 99번한테 들켰다가는 혼이 날거야.
33번 : 천만에. 사랑은 지옥에서도 할 수 있어. 누가 사랑을 막아.
18번 : 이게 사랑이야? 장난이지. 남자란 참! 아마 여자께나 많이 울렸을 거야. 고 눈썹이며 눈 좀 봐요.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게 생겼는가? 뻔히 속셈을 알면서도 걸려드니 여자 란 약한 동물이야.
33번 : 18번 말이 맞다. 그렇지만 망주석 팔아서 번 돈 여자한테 다 바쳤다. 누가 나를 망쳤 는데? 돈 바치고 몸 바치고... 그래도 욕을 먹으니!
18번 : 자, 저리가요. 사람들이 볼라.
33번 : 보긴 누가? (18번의 손을 잡으려고 한다.) 이것 봐!
18번 : 저리 가라니까! 배가 고파 죽겠다고 하면서도! (김화자가 바께츠를 들고 들어 온다. 33번이 잡았던 손을 황급히 놓고 돌아서며 노래가락을 부른다. 천천히 걸어 나간다.)
김화자 : (18번 곁으로 와 바께츠를 놓고) 참 알 수 없어요?
18번 : 뭐가요?
김화자 : 저분 말이에요. 이런 판국에서도 저렇게 여유있게 노래까지 부르니.
18번 : 속만 태우면 뭘해요?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아가씨 불 좀 피워 줘요. (18번이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김화자가 차돌을 들고 불을
피우려고 애쓴다. 손가락을 다쳐 아야! 소리를 낸다. 18번이 나온다.)
18번 : 왜? 손을 다쳤군요? (김화자의 손을 보며) 피는 안 나는군.
김화자 : 난 못하겠어요.
18번 : 누군 뭐 태어나서 부터 알았나?
(18번이 능숙하게 불을 피운다.)
김화자 : 못하는 것이 없네요.
18번 : 흥. 불하고는 관계가 깊지.
김화자 : 네? 아, 집에 불을 질렀다지요?... 모르겠어요. 겉으로 보기엔 그럴 분이 아닌 것 같 은데.
18번 : 사람은 언제든지 변한다오.
김화자 : 그 사람이 아직도 미우세요?
18번 : 그 사람? 아아니. 다 잊었어. 아가씨도 T.V에서 볼 때하고는 달라요. 그 연속극 있 죠? 장군의 딸인가 하는? 거기서는 못하는 일이 없던데. 부엌일도 잘 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사랑도 예쁘게 하고.... 참을성도 있고.
김화자 : ... 그건 다 가짜예요. 가짜 속에서 사는 저를 봤어요. 이런... 진짜 생활에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18번 : 형무소의 남자들도 아가씨를 좋아했어요.
김화자 : ... 비교적 인기는 있었던 폭이예요. 고생도 많이 했지만.
18번 : 고생이라뇨?
김화자 : 모를 거예요. 그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창피해서 말을 못 해요.
18번 : 하기야 나는 T.V에 나오는 아가씨의 얼굴을 보았지만 남자들은 아가씨의 목에서부 터 밑에만 보더군요. 애인이 있어요?
김화자 : 애인이요? 수없이 많지요. 애인이 되려고 하면 다 받아들여야 하니까 제가 이런 고생을 해서 싸요.
18번 : 하기야 우린 남자들 때문에 고생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니까. 그러니 그저 그런 줄 알고 살면 마음이 덜 아프지.
김화자 : 혹시... 혹시... 우리가 이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
18번 : 식모로요?
김화자 : 아니에요.
18번 : 그럼 가정부로요?
김화자 : 네. 가정부...
18번 : 그게 그거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에 약속을 하지 말아요. 우리 여자는 약속을 믿 다가 늘 손해만 보니까 확실한 건 지금 요때...
김화자 : 이 순간...
18번 : 그렇지. 지금 이 순간만이 확실해요. 자, 이것들이나 씻어 옵시다. (김화자와 18번이 풀이며 물고기를 들고 일어선다. 이때 고여사와 5번 그리고 신신옥이 들어온다.)
신신옥 : 수고하세요. (김화자와 18번이 나간다.)
고여사 : 거기 좀 앉거라.
(5번은 그대로 선다. 신신옥이 바위에 비스듬히 앉는다.)
......나는 이틀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다. 많은 생각을 했단다. 너를 처음 알게 된 그 날부터 오늘날까지의 일을 회상도 했고. 너는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러나 나 도 너에게 할 일은 다한 것 같다.
신신옥 : 잘 알고 있어요.
고여사 : 어디에 가나 너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랑도 했고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뒤에도 나는 너를 누구보다도 사랑했어. 하기야 나의 사랑이 너를 이런 곳에까지 끌고 와 고생을 시켰지만.
신신옥 : 그런 말씀은 마세요.
고여사 : 사실이니까. 그러나 내가 너를 붙들어 둘 수는 없을꺼야. 너도 평생 내 옆에서 지 낼 수는 없을 것이고.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몰랐을까? 아니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는지 몰라. 사랑 때문이야. 네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생각이었어. 결국......며칠 을 두고 생각했는데......나는 하루빨리 너를 놔주는 것이 너를 위해서는 좋을 것 같 다. 생각 같아서야......아니지, 운이 좋으면야 우리가 이 섬을 빠져나가 좋은 신랑을 내가 고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는 이 섬에서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대로 죽는거야.
신신옥 : 그럴 리가 없어요.
고여사 : (눈물을 흘리며)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야 할 것 같다.
김화자 : 무슨 말씀인데요?
고여사 : 육지에 못 올라갈 바에야 여기에서라도 좋으니 너와 나는 하루빨리 서로......독립을 해야한다.
오랜 결혼 생활은 흔히 불행을 동반하지만 짧은 결혼 생활에는 행복만이 있단다.
신신옥 : 짧은 결혼 생활이요?
고여사 : 우리 앞에는 며칠밖에 남아 있지 않다. 내 말을 알겠니?
신신옥 : 무슨 말씀을......
고여사 : (5번에게) 우리 신옥이를 사랑하나?
5번 : .......글세........
고여사 : 당장 결혼을 해도 좋다는 자신이 있나?
신신옥 : 어머니!
고여사 : 이 순간부터 나는 네 에미가 아니다. 육지에서는 체면 때문에 일하는데 지장이 있 었고 생각을 해도 직선적으로는 못 했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여 기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시간은 짧아. 불행한 애들끼리 죽기 전에 얼마 남 지 않은 시간을 서로 사랑해 보는 거다. 결혼을 하는 거다. 이 불쌍한 것들아.
(신옥이 울면서 고여사의 품에 매달린다. 5번에게)
청년의 과거는 이 애한테 다 들었어. 이 애는 이해가 많은 애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5번 : ...고여사님 말씀대로 우리 모두가 앞으로 며칠을 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둘 이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우리는 모두 지쳐 있어요. 식량이 떨어져서 모레부터는 이틀 에 한 번이나 먹게 되는 모양입니다. 멍하니 지나가는 배나 기다리면서. 그런데 무슨 결혼입니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신신옥 : 죽는다는 말일랑 하지 마세요!
5번 : 시끄러워! (고여사와 신신옥이 놀란다.)......미안합니다.
고여사님, 결혼을 하겠습니다.
(고여사가 머리를 끄덕인다.)
고여사 : 자, 같이가서 주석한테 허가를 받자.
5번 : 허가요?
고여사 : 그래야 되지 않겠니? 참 모를 일이야! 주석이 그때 얘기했지? 이렇게 사노라면 우 리들 사이에서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너희들이 결혼을 할 줄이야. 그것도 급하게 내일. 이 섬에 온지 꼭 한 달 만이군. 자 가서 사람들에게 알리자.
(세 사람이 나간다. 무대가 암전되며 하루가 지났음을 상징하는 마임과 희망에찬 음악이 들려온다. 33번이 중심이 되어 안중팔과 걸어 나온다.)
99번 : 부탁입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주석의 입장에서 명령합니다. 결혼식 주례는 안 선생 님이 맡아야 합니다.
안중팔 : 무슨 말씀을. 여기서 결혼식을 하는 데 주석이 주례를 해야 하지 또 누가 하겠습니 까? 뿐인가요, 신랑 신부도 그렇게 요구했구요.
99번 : 난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어요.
안중팔 : 주례란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99번 : 곤란한데......
안중팔 : 오히려 우리가 부탁하고 싶습니다. 자 , 그럼 저도 결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안중팔이 천막 쪽으로 간다. 99번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간다.)
소장 : 이리하여 이 섬에 표류한지 30일 만에 처음으로 경사가 났습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 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이렇게 불안한 결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죽 음을 앞에 둔 공포 속에서 거행되는 결혼식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안 고 억지 웃음을 띄며 결혼 준비에 바빴습니다. 신부의 옷은 배의 돛대에 찢어진 채 매달려 있던 천으로 만들었고 신랑에게는 안중팔씨의 옷을 입혔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혼 부부가 하룻밤을 지낼 신방입니다. 그래서 저 천막을 임시로 방으 로 꾸며 놓기로 했습니다.
(33번이 중심이 되어 배에서 뜯어온 판자와 창문을 써서 방으로 만들고 있다. 여인들 이 모포를 들고 나와 임시 카페트를 깐다. 18번이 뛰어 들어온다.)
18번 : 신랑 신부는 다 준비가 됐어요.
33번 : 아직 호텔방이 다 안 됐는데.
오박사 : (애들처럼 들뜬 기분으로) 우리 식을 마치면 한잔씩 합시다. 비록 술은 없지만....
소장: 자 , 준비가 됐어?
(99번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들어온다.)
자, 18번 준비가 다 됐군.
(사람들이 모인다. 고여사는 사과 상자에 앉는다. 99번이 정위치에 선다. 18번이 꽃을 달아 준다. 5번이 들어와 99번 앞에 선다. 이어 신신옥이 들어온다. 야생의 화환을 머 리에 두르고 있다. 김화자가 그 앞에서 솔잎을 뿌린다. 고여사가 일어나 눈물을 닦는 다. 18번도 뒤에서 서서 운다. 신신옥이 5번 옆에 선다.)
99번 : ...음, 이제... 여러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 두 젊은이는......부부가 되기 위해 여기에 섰 습니다. 하늘도 맑고......경치도 좋은데... 신랑 신부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지금 신랑 신부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소중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아름답다고 합니다...... 나는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몸 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보니......
이 젊은 부부는 살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바라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생을 이 섬에서 살다......그러나......내일을 모르는 우리들이지만...... 이 젊은 부부만은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김화자가 돌아서서 운다.)
자, 두 사람은 손을 잡아요.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 자기의 손을 그 위에 놓는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이러한 처지에서도 결혼을 하는 두 사람들 제발 보호해 주십시 오...... 자 주례의 말은 끝났어, 잘 살아. 하루를 사는 한이 있어도.
(고여사가 신신옥을 안는다.)
가만... 선물 교환을 잊었군. 신부는 해변가에서 캐 낸 맑고 흰 조약돌을 신랑한테 선 물하고, 신랑은 까만 산호 조각을 선물합니다. (신랑 신부가 선물을 교환한다.) 또 한 마디... 더워 주겠다, 기분나빠 죽겠다, 속상해 죽겠다, 좋아 죽겠다... 이런 말은 하지 마. (모두 웃는다.)
우리도 선물을 줘야지. 저 천막이요. 호텔방으로 알고 써요. 아직 다 안 됐지만 신혼 여행에서 돌아오면 완성될 거야. 자, 섬을 한 바퀴 돌고 와요. 그것이 신혼 여행이니 까.
(모두 신랑 신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무대 밖으로 나간다.)
고여사 : (주석에게) 수고가 많았어요.
99번 : 주례를 처음해서......순서도 틀렸고...미안합니다.
고여사 : 무슨 말씀을.
오박사 : 자, 축배해요.
(33번이 깡통이며 컵을 돌린다.)
오박사 : 자, 주례부터 한 잔 드시오.
(오박사가 술을 붓는다. 이때 5번이 신신옥의 손을 잡고 뛰어들어 온다.)
5번 : 주석! 배가 와요!
99번 : 배?
(모두 바닷가를 본다.)
오박사 : 배가 온다!
안중팔 : 이리로 막 오는데!
99번 : 자, 옷을 멋어 흔들어!
33번 : 에잇!
(모두 껴안고 춤을 춘다.)
그때 그 배가 알려줬나 봐. 우리를 보고서도 사정이 있어 못 왔지만 무전을 치거나 항구에 도착해서 말을 전했음이 틀림없어!
안중팔 : 이젠 살았구나!
99번 : 끝까지 버티기를 잘했어.
김화자 : 이젠 살았어! 주석! 수고가 많았어요.
18번 : 한 십분만 있으면 여기 닿을 거야.
99번 : 자, 안 선생, 아까 그 병을 가져와요! 축배다!
(안중팔이 못 들은 척하고 옆으로 피한다.)
병을 가져오라니까! 안 선생!
안중팔 : 왜 이래? 마시고 싶으면 네가 가져가.
99번 : 뭐! 아니, 방금 전에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한 것이 누군데?
안중팔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네가 갖다 먹어!
(오박사가 술병을 들더니 내던진다. 99번이 오박사에게 달려든다.)
안중팔 : 그 손을 놔!
(99번이 놀래서 주저앉는다.)
33번 : 야! 지독하군!
오박사 : 33번이랬지?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당신은 나같은 의사를 미워하지? 말해봐.
그렇잖으면 고발하겠어.
소장 : 오박사!
오박사 : 꼭 알아야 겠어요. 자 말해봐.
33번 : 듣고 싶소? 우리 어머니는 병원 안에도 못 들어가고 대기실에서 돌아가셨어요.
입원비를 선불하지 못해서요. 치료를 거부당했어요.
오박사 : 음..... 그게 내 병원은 아니었어.
(김화자가 핸드백에서 돈뭉치를 꺼낸다.)
김화자 : 이 돈 좀 봐요. 이젠 영 휴지보다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놔주길 잘했어요.
(33번이 팔짱을 끼고 김화자의 모습을 본다. 거의 노려보는 듯하다. 김화자가 황급 히 돈을 넣는다. 안중팔이 바위 위에 올라선다.)
안중팔 : 자, 내 말을 좀 들어요, 좀 있으면 우리를 구해 줄 배의 선원들이 올 겁니다. 신문 기자도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 우리도 체통을 지킵시다. 무려 한 달 동안을 굴치않 고 살아 온 우리의 씩씩한 모습을 보입시다. 자, 각자 자기 옷을 입어요. (모두 옷 을 바꾸어 입는다.) 그리구... 우리 다같이 고생한 동지들! 모든 것을 잊읍시다. 여 기서 지낸 악몽을 말입니다. 자질구레한 감정은 다 버립시다.
(먼데서 비행기소리가 난다. 점차 소리가 커지며 저공으로 지나간다.)
고여사 : ......신문사 비행기까지?
(신신옥 곁으로 간다.)
신옥가 참 다행이다.
신신옥 : 네, 정말 기뻐요.
고여사 : 조금만 늦었으면 넌 저 남자하구 천막 안에서 잠자리를 같이 할 뻔했구나.
신신옥 : 네?
고여사 : 모든 것을 잊는 거다. 너 안중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지? 여기서 있었던 모든 것 을 잊어버리는 거다. 방금 있었던 결혼식두.
신신옥 : 그걸 어떻게 잊어요? 특히나 결혼식을?
고여사 : 아직 네 정신이 아니구나. 네 체면도 생각해라.
신신옥 : 잊는 것도 자유지만 기억하는 것도 자유예요. 저는 그렇게는 살 수 없어요.
20일 동안의 이 귀중한 생활을 어떻게 잊어요? 모든 것이 저에겐 진실로 받아들여 졌어요.
안중팔 :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아까 그 결혼은... 뭐라고 할까... 만화 같아. 고여사의 말씀을 따르도록 해요.
신신옥 : (99번에게 가까이 가서) 우리의 결혼식이 만화 같았습니까?
(99번이 신신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어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가장 아름다웠어요.
(고여사가 신신옥의 팔을 잡는다.)
신신옥 : 놓으세요! (울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바로 몇 분 전에 있었던 일을...... 그 아름다운 진실을 잊어요?
고여사 : 우리, 집으로 가는 거다.
신신옥 : 집? 거짓에 찬 그런 집, 거짓에 찬 그런 사회에서는 못 살아요!
(고여사가 신신옥의 뺨을 갈긴다.)
18번 : 너무해요!
(신신옥이 뒷걸음질치더니 무대 밖으로 뛰어 나간다.)
5번 : 어딜 가는 거야!
(머뭇거리다가 뒷 따른다.)
안중팔 : (고여사에게) 참으세요. 좀 진정하면 사리를 판단할 수 있겠지요. 자, 소장님 떠날 준비를 합시다. 수고가 많았습니다. (배의 엔진소리가 들린다.) 배가 가까이 오는 군.
소장 : 자, 99번 일어나.
안중팔 : 99번, 저 굴속에 들어가 내 가방을 가져다 줘요.
(99번 말없이 굴 쪽으로 간다.)
그리고 33번은 저 천막을 거둬야지. 18번은 취사 도구를 간직하고.
(비행기가 또 한번 저공 비행을 한다. 99번이 가방을 갖다 놓고 천막 쪽으로 간다.)
안중팔 : ......우리 30일 동안을 용케 견디어 냈습니다.
오박사 : 글쎄 말이외다. 그것도 죄수들 틈에서.
저 사람들은 배가 왔다는데 기쁘지 않은 모양이지?
(5번이 신신옥을 안고 들어온다. 모두 그쪽을 본다. 5번은 신신옥의 시체를 한 가운 데 눕힌다. 고여사가 시체를 안는다.)
고여사 : 신옥아! 신옥아!
안중팔 : 아니! 어떻게 된 거야?
5번 : 보면 몰라요?
(오박사가 신옥의 팔을 쥐고 맥을 본다. 이어 귀를 심장에 댄다. 머리를 흔든다.)
안중팔 : ......자, 다 같이 기도합시다.
고여사 : 이럴 수가 있니!
오박사 : ......참아야죠.
(고여사가 일어나며 바위 쪽에 가 앉는다. 김화자가 따라간다. 모두 머리를 숙인다. 5번은 흐느낀다.)
안중팔 : 이 곳을 떠나기 전에 깨끗한 장례식을 합시다. 이 고도에서 돌아가셨으니 생각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명예를 위해 자살했다는 사실은 덮어두는 것 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실이란 말해서 좋을 때가 있고, 해서 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오박사도 경험이
있을 겁니다. 환자에게 항상 진실을 말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해를
끼칠때도 있습니다. 고여사를 위해서도 우리는 이 사건을 덮어 둬야 하겠습니다.
자, 여기서 고이 잠들게 묻어 드립시다.
고여사 : 집에 모시고 가면 어때요?
5번 : 안돼!
안중팔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분은 병사를 하신 겁니다. 앓다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 각합시다.
소장 : ....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말이란 편리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자, 어서 움직여 봅시다.
안중팔 : 시체를 드시오. 해변가 양지 바른 곳으로 골라 잠들게 합시다. 자, 무엇들 해요?
어서!
(5번과 99번이 신신옥을 안는다. 그들을 선두로 모두 퇴장할 때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