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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상력과 묘사가 부족한 당신의 문장을 위하여
묘사를 하면 정말 잘 쓸 수 있나요?
글쓰기에서 묘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묘사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글쓰기를 글쓴이의 생각과 정보, 주장 등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강박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 글쓰기는 의미와 주장을 전달하는 성격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생각이나 정보 등을 전달하는 것은 글쓰기의 중요한 기능이다.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게 생각이나 정보 등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글쓰기는 오히려 창조적이고 감각적인 글인 경우가 많다. 감각적이고 감동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때 글쓰기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이때 중요한 글쓰기의 방법이 바로 묘사이다.
글이 감각을 드러낼 때 그리하여 감각적인 글쓰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때 그와 같은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것이 아름답고 잘 쓴 글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이러한 감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직설적인 표현은 대체적으로 상투적인 수사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결국 이러한 양상으로 글을 썼을 때 그 글은 매력을 지니지 못한 채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 된다.
이처럼 생각이나 정보 등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는 이유는 글감에 대한 판단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글쓴이가 드러내는 생각이나 주장 등의 판단이 대체적으로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해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런 글에 드러난 글쓴이의 생각과 주장은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또한 일차적인 감정 상태로 판다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감상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글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글이 되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이 되기 쉽다.
노숙인―고단한 삶
실패한 삶
가난
실직
고통
슬픔
패배자
노숙인을 소재로 글을 쓸 때 많은 이들이 노숙인에 대한 감정과 판단을 앞세워 노숙인을 포현하고자 한다. 노숙인을 ‘고단한, 가난, 실직’ 등의 상투적인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럴 경우에 그 글은 노숙인에 대한 상투적인 판단을 통해 글쓴이의 생각을 앞세운 진부한 글이 될 수박에 없다. 당연히 그러한 내용의 글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판단을 앞세운 것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뻔한 내용을 담게 된다. 거기에 더하여 뻔한 내용을 담은 글의 수사법은 대체적으로 상투적인 꾸며 쓰기를 할 개연성이 많다. 상투적인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면 글쓴이가 생각하는 협소한 범위 안에서 글감을 파악하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글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협소한 생각과 표현에 갇히기 때문에 신선한 표현과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글감을 소재로 글을 쓰지 않으면 된다. 이러한 글감은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물론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글감 역시 좋은 글이 재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에는 글감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감각이 필요하다.
①산동네―가난
②노점상―가난한 삶
③폐지 줍는 노인―고단한 삶
④구걸하는 사람―고통스러운 삶
제시한 글감 역시 위와 같이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판단을 하기 쉽다. 그러나 판단을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묘사를 하면 진부한 생각에 갇히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묘사 유형의 글은 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이미지인 묘사를 앞세움으로써 글쓴이의 진부한 생각과 판단으로부터 놓일 수 있다.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글감의 이미지이다.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글감의 이미지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의 단순한 형태에 한정되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표현된 묘사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통해 글쓴이의 사유까지 제시할 수 있다. 이미지가 그저 눈앞에 펼쳐진 시각적 기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글쓴이의 주장과 판단 등을 직접 말하고자 하는 강박적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실 묘사는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지와 의미를 별개의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미지와 의미를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생각은 사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나무’를 통해 느끼는 편안함이나 긍정의 정서는 나무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감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시원한 나무 그늘의 모습 그리고 초록색이 전달하는 감각을 표현하여 나무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 인식을 통해 ‘나무는 어떻다’고 직설적으로 설명할 때가 많다. 나무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느낀 생각 등이 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느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묘사하지 않고 글쓴이의 생각을 곧장 말하려고 한다. 이때 나무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나무를 통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글쓴이의 진부한 생각뿐이다. 이렇게 나무를 인식할 때, 나무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전달하지 못하고 진부한 자연의 일부로 전락할 뿐이다. 다음 사물이 주는 감각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①나무―생명력 넘치는 삶의 충만함
②빌딩―도시의 삭막함
똑같은 감정을 드러낼 때에도 위와 같은 인식은 관념적이고 피상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지 못한다. 좋은 글은 생각을 무작정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피상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위와 같은 방식의 연상은 너무나 상투적이다. 물론 이러한 연상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상을 하는 사람들이 뻔한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장미를 붉거나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러하다. 글감을 상투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표현 역시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좋은 글은 구체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감각적이어야 한다. 거기에 더하여 상식적이거나 상투적인 표현을 하면 안 된다. 자신이 쓴 글에 나무와 빌딩에 대한 뻔한 판단과 표현이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나무와 빌딩에 대한 진부한 판단과 표현을 앞세우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만약 위에서 제시한 대상을 이미지 중심으로 드러낸다면 나무와 빌딩은 우리의 진부한 관념과 상투적 표현이 아닌 감각적이고 새로운 표현으로 바뀔 것이다. 나무를 보고 생명을 떠올리거나 삶의 휴식을 떠올리지 말자.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저 판단을 제거한 채 나무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나무는 새로운 감각을 지닌 대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쓸 때 눈이 아닌 마음과 머리로 쓰려는 습관이 있다. 마음과 머리에 기대지 않고 눈에 의지해 글을 쓸 때 감각적인 글이 나온다. 그리고 이때 나온 글은 단순히 멋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사유를 담게 된다. 또한 눈을 믿고 쓴 묘사의 이미지는 직접 말하지 않음으로써 곧바로 상징이 된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것을 표현한다고 모든 글이 좋은 묘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글이 묘사를 하려고 하자만 묘사가 아닌 설명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과 동시에 대상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글쓴이의 생각은 충분히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글쓴이가 제시하는 사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뻔한 생각을 말하는 것을 주제 의식이라고 오해한다.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직접 말할 수는 있지만 훈계하듯 너무 직접적이면 곤란하다. 오히려 이미지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의미를 숨겨놓았을 때 글은 상징적으로 주제를 드러냄으로써 수준 높은 사유체계를 제시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과 다르지 않은 작업이다. 눈으로 본 대사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생각을 덧씌우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이 생각을 덧씌우게 될 때 글은 어무나 뻔한 생각을 전달하는 데 그치고 만다.
사람들이 자꾸 생각을 말하게 되는 이유는 글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직접 표현해야 글과 글쓴이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뻔한 생각과 감정이 거칠게 드러나고 독자들은 그 글에 흥미를 느낄 수 없다. 물론 글은 글쓴이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을 말할 때 그 글은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말하고자 하는 생각과 감정이 중량감 있는 주제 의식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글을 아예 묘사만으로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과 머리로 생각하는 이성적 판단을 모조리 무시하고 눈으로 파악하는 이미지만 써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글을 썼을 때 이미지가 깊이를 지니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이미지의 나열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습을 자꾸 한다면 묘사를 통해 의미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묘사만으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글이란 글쓴이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장르이기 때문에 묘사의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든 사유와 감정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묘사만 하더라도 글에 생각과 사유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묘사를 하고 싶다면 설명하지 말아요
글을 쓸 때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마음속이 생각이나 느낌남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를 해야 하는 이미지까지 설명하려고 한다. 글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이 달려간다”라거나 “강아지가 밥을 먹고 있다”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문장은 언뜻 보기에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묘사인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상황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표현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이지도 않다. 설명은 상황이나 생각을 드러내는 정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실제 글을 쓸 때 묘사와 설명을 구분하여 쓰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가 묘사라고 생각하고 쓴 글이 사실은 설명인 경우가 무척 많다.
그만큼 묘사와 설명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같은 문장인데도 어느 때에는 묘사가 되기도 하고 어느 경우에는 설명이 되기도 한다. 설명에 가까운 문장인 경우에도 글이 전체적인 맥락에 따라 설명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만큼 묘사와 설명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글이 설명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글감이 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지점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고 전체적인 모습이나 상황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개괄적인 양상의 설명이 되는 것이다.
① 해가 저물고 있다
② 횡단보도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①번 문장은 해가 저물고 있다는 이미지를 묘사한 듯싶지만 이 문장에 드러난 묘사인 이미지가 아니라 ‘해가 저물고 있다’는 정보이다. 물론 이 문장을 읽는 사람은 해가 저물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문장을 읽는 사람에게 감각적 인식이나 구체적 이미지 등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장을 어떻게 표현했을 때 감각적인 묘사가 될까? 그것은 구체적 관찰과 표현에 달려 있다. 단지 해가 저물고 있는 장면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기보다 해를 둘러싼 장면들을 자세하게 드러낼 때 좋은 표현이 된다.
②번 문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은 횡단보도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는 정보를 전달할 뿐 묘사가 전달하는 감각적인 느낌이 없다. 횡단보도는 어떤 모습인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그의 신발에 흙은 묻어 있는지 등 뒤로 바람은 불었는지 등을 관찰하여 더 구체적으로 표현을 해야 한다. 설명이 아니 묘사를 하려면 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구체적인 묘사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쓰고자 하는 대상의 표면만을 바라볼 때가 많다. 그리고 그마저도 대상의 전체적인 모습과 상황을 개괄적으로 바라보고 표현할 때가 많다. 이러한 표현은 묘사가 아니라 정보이다. 글이 설명적이 되는 것은 이처럼 정보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예문은 정말 좋지 않은 표현일 뿐일까? 사실 위의 문장은 좋은 표현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이때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은 제시한 문장 다음에 각각의 정황을 뒷받침하여 보여주는 묘사 문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위의 예문 다음에 나오는 문자이 정보를 전달하는 설명적 문장이라면 곤란하다.
① 해가 저물고 있다. 해변은 사람들로 왁자하다. 여름 해변의 저녁은 이렇듯 흥겨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② 횡단보도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신호가 바뀌자 그는 바쁘게 길을 건넌다. 그는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한다.
두 개의 글을 모두 정황을 개괄적으로 두루뭉수리하게 설명한다. ①번 문장의 경우는 해가 저물고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해가 저문다는 상황을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한다. 그리고 왁자한 해변의 모습 역시 어떻게 왁자한지 구체적이지 않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지, 아니면 상점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는지 등이 구체적인 정황이 없다. ②번 문장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횡단보도 앞에 한 사람이 서있다는 정보만을 전달할 뿐이다. 그 사람의 손은 어떠한지, 신발에 얼룩이 졌는지 등의 구체적 정황이 없다. 그것은 길을 건너는 장면이나 친구와 인사를 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① 해가 저물고 있다. 해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며 석양에 물든 바다의 출렁임을 고요히 펼쳐 보인다. 해변을 걷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말이 없고, 연인들은 폭죽을 터뜨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해가 사라진 수평선 위로 어둠이 되지 못한 빛이 희미하게 공중을 배회하고 있다.
② 횡단보도 앞에 소년이 서 있다. 소년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초록 신호등이 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소년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횡단보도의 이편과 저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가방을 힘껏 쥐고 있는 소년의 손등에 푸른색 핏줄이 선명하다. 소년은 단호한 듯 선명한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마음이 급하다. 바람이 불어오고 어디선가 날아온 신문이 횡단보도 위에서 어지럽게 펄럭인다.
위 두 글은 앞서의 글과 달리 구체적이다 특히 두 글의 첫 번째 문장은 앞서의 예문과 같지만 설명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첫 문장이 제시한 장면을 뒤의 문장이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문장을 포함하여 위의 글은 정보를 전달하는 느낌이 들지 않고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묘사는 이처럼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재현된다. 장면이나 정황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묘사가 아니라 설명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설명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상태를 설명하여 정보를 전달할 뿐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이 구체적인 묘사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글을 쓰고자하는 대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을 쓰고자 하는 대상을 낱낱이 쪼개서 매우 작은 단위로 나눠야 한다. 묘사는 구체적이어야 하는 것이지 개괄적인 덩어리로 파악하면 안 된다. 이를테면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는 식으로 대상과 사건을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보면 안 된다. 쓰레기를 치우는 장면 전체를 쓰기도 해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청소원의 손’을, 손의 ‘주름과 더께’를 주름과 더께에 드리운 ‘어둠’을 묘사했을 때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글이 된다.
아울러 청소원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면 좋다. 청소원의 등 뒤로 지나가는 바람을, 텅 빈 거리를 가로질러 출근하는 사람을 새벽 비에 축축하게 젖은 광고 전단지 등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각을 극대화해야 한다. 다만 청소원을 둘러싼 배경을 쓸 때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청소원을 둘러싼 배경의 모든 것들을 다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청소원 주변 배경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모두 글의 주제나 분위기에 적절한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의 주제와 분위기에 부합하는 장면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장면도 있다. 따라서 어떤 장면을 선택 또는 배제하는지는 청소원 자체를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글이라는 장르의 속성상 눈앞에 펼쳐진 모든 이미지를 빠짐없이 묘사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이외에 설명적인 글이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줄거리를 요점 정리하듯이 글을 쓸 때 역시 설명적인 느낌이 강하게 나타난다. 줄거리라는 정보를 개괄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설명적이 되는 것이다. 또한 줄거리를 쓰는 것은 설명적인 글이 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이고 감각적인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산문을 쓸 때 묘사가 아니라 줄거리를 쓰는 것은 설명적인 글이 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이고 감각적인 글을 쓰는 데 방해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산문을 쓸 때 묘사가 아니라 줄거리를 요점 정리하는 식으로 글을 쓴다. 줄거리를 요점 정리하는 글쓰기 역시 개괄적인 이야기만 있을 뿐이지 이미지가 전달하는 묘사의 감각은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설명을 하는 것이거나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묘사를 하고 싶다면 그리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줄거리를 정리하듯 쓰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영화 비평이나 서평 등의 글을 쓸 때 역시 줄거리를 요점 정리하고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면 매력이 반감된다. 이런 글에는 제대로 된 사유나 비평이 들어설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글쓴이만의 개성적인 감각이 들어갈 틈도 없다.
묘사는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묘사를 모르고서는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묘사의 힘을 믿고 쓰고자 하는 대상의 모습과 그것을 둘러싼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도록 하자, 이때 여러분의 머리와 마음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쓰지 말도록 하자, 머리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중심으로 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눈만 믿고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도록 하자. 우리의 생각과 감정? 물론 그러한 것들도 당연히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을 상투적이고 감상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생각과 감정 등은 의도하지 않아도 묘사의 가운데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묘사는 의도적인 노력을 했을 때 가능한 글쓰기의 방법이다. 따라서 묘사의 힘을 믿고 의식적으로 이미지를 그려야 생생한 감각의 묘사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부족한 당신의 문장을 위하여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순하게 기발한 생각이 부족하다거나 표현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글을 쓸 때 다음 문장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력은 모든 글의 처음이며 그것을 통해 글은 한층 새로운 표현과 세계를 제시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상상력이 제한되면 다양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고 그것은 곧바로 소재의 빈약함으로 나타난다. 도한 소재가 빈약하기 때문에 문장 역시 일정한 테두리 안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순하게 새로운 글감을 찾지 못한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상상력이 부족할 때 문장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버릴 수밖에 없다. 또한 상상력이 부족한 글은 글 자체에 생동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표현 자체도 상투적이고 진부한 장식적 수사가 되고 만다. 그런 만큼 상상력을 통해 글의 씨앗이 되는 세계를 넓히고 묘사를 통해 표현력을 확장한다면 금세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이때 상상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발한 발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소재, 줄거리, 생각 등등 쓰기라는 행위 이전에 파악해야 하는 말은 것들이 사실은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우리에게 상상하는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상상하는 방법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력이 사라진 거대한 산과 마주하게 되고 결국 글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자포자기의 심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에게 상상을 할 수 있는 힘이 차고 넘친다면 감각적인 글쓰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상상력만으로 글쓰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글을 쓸 때 멋진 문장에 대한 고민ㅇ르 하지 않을 수 엇ㅂ을 것이다. 멋진 문장! 그러나 멋진 문장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예쁘다기보다는 감각적인 문장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감각적인 문장은 단순한 문장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풍요로운 상상력 속에서 좋은 문장이 나오게 마련이다.
당신이 멋진 글을 쓰기를 희망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것보다 먼저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기를 권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연상하는 상투적인 방법이 아니라 새롭고 낯선 방법과 대상을 떠올려 낯선 것들을 그려 보도록 하자. 우리들의 글쓰기가 재미없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것을 뻔한 줄거리와 뻔한 표현으로 쓰기 때문이다. 누구나 멋진 글을 쓰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과 문장을 되풀이한다. 새롭지 않아 낯설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글이다. 그런 글을 쓰지 않으려면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글쓰기의 낯선 매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확장하기 휘한 연상의 방법
상상력을 확장하는 연습으로 연상법을 사용해보도록 하자. A에서 B로, B에서 그리고 C에서 D로 단어와 정황을 연결하며 조금씩 낯선 장면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그러면 어느새 낡은 상상력이 새롭고 낯선 상상력이 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대부분의 상상력이 뻔한 구조 속에서 낡은 것이 되는 이유는 이러한 연상이 유사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연상 구조를 보도록 하자.
봄→꽃→벌→향기→따뜻함→행복
이러한 연상 방법은 세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연상되는 각 단계가 너무 유사한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유사한 관계로 연결되어 연상을 통한 상상력의 확장이 힘들다. 두 번째 문제점은 각각의 연상 구조가 사실은 연상 구조가 아니라 병렬식 구조라는 점이다. 병렬식 구조는 A→B→C→D로 전이되며 낯선 지접으로 나아가는 구조가 아니라 비슷한 것들의 열거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문제점은 연상의 구조가 구체적인 정황을 묘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과 ‘행복’이라는 관념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글감을 구체적인 이미지와 정황으로 파악하지 않고 관념적 인식으로 파악하면 글을 피상적이고 모호하게 된다. 그리고 피상적이고 모호한 글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요령부득인 글이 될 수밖에 없다.
봄―꽃
봄―벌
봄―향기
봄―따뜻함
봄―행복
각각의 단어가 ‘봄’과 병렬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 상상력을 극대화할 여지가 없다. 각각 연상된 단어와 정황은 유사한 부분도 있어야 하지만 다른 특성을 보여줌으로써 조금씩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각각의 단어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져서 낯선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씩 다른 연상 지점으로 나아가면 결국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는 유사성 속에서도 낯선 관계에 놓인다. 때문에 첫 번째 지점과 마지막 지점에 떠올린 단어와 정황은 상당히 다른 감각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에서도 유사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낯선 관계 속에서도 납득 가능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두 지점은 긴밀하게 연될 된 관계 속에서 낯선 감각을 전달하게 된다.
봄→장미화원→화원을 향해 몰려오는 폭풍우→비에 젖은 비둘기의 날개→공중을 향해 날아 오르는 비둘기→공중에 단단히 묶여 아득한 높이가 된 비둘기
각각의 정황이 연상법을 통해 유사한 듯 다른 정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상법은 유사한 듯하지만 그 연결이 상투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새로운 상상력이 가능하다 특히 이와 같은 연상법은 연상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할 경우에 더욱더 새롭고 낯선 관계와 감각을 전달하는 문장이 된다. 위 문장의 처음인 ‘봄’과 마지막인 ‘봄’과 마지막인 ‘공중에 단단히 묶여 아득한 높이가 된 비둘기’를 하나로 묶으면 신선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위의 예문은 연상법의 과정에 있는 문장 모두가 좋은 정황이지만 연상의 처음과 마지막을 직접 연결하면 낯선 정황끼리 연결되어 더욱 신선한 표현을 할 수 있다. 더욱이 두 개의 정황은 낯선 연결 구조로 이어진 것이지만 연상법을 통해 구성되어 파편화되지 않고 서로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① 봄은 공중에 묶여 아득한 높이가 된 비둘기처럼 펼쳐진다
② 아득한 높이가 된 비둘기가 봄의 공중을 향해 날아간다.
어떤가 봄을 진부하게 사용한 문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선한 표현이 되지 않는가? 우리들 작가들이 사용하는 문장이 신선함에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작가들이 사용하는 문자의 신선함에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작자들은 바로 이런 사례에서처럼 자신만의 개성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제시한 정황은 또 다른 장점을 지닌다. 각각의 개별 정황은 앞서 언급한 ‘봄―꽃―벌―향기―따뜻함―행복’처럼 진부하고 관념적이며 피상적인 정황과 달리 그 자체로 우리에게 ‘민적 인식’을 전달한다. 따라서 각각의 개별 정황만으로도 감각적인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꽃’보다 ‘장미 화원’이 훨씬 구체적인데 좋은 글을 쓰려면 피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그리고 ‘화원을 향해 몰려오는 폭풍우’, ‘비에 젖은 비둘기의 날개’, ‘공중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중에 단단히 묶여 아득한 높이가 된 비둘기’ 등의 정황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감각적인 장면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① 지하철―터널―어둠―끝이 없음―삶의 막막함
② 지하철―무료한 승객―고요한 오후―따사로운 햇살
③ 지하철―구걸을 하는 사람―찬송가―무심한 눈빛―외면하는 사람들―무료한 햇살
④ 지하철―플랫폼 벤치에 앉아 울고 있는 앨리스―터널―어둠―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두 개의 달과 해변을 걷는 앨리스―끝없이 타오르는 방풍림과 붉은 눈물을 흘리는 앨리스
지하철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글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흔한 만큼 진부한 정황이 될 가능성도 높다. ①, ②, ③번의 연상은 지하철과 연관된 상투적인 연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연상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지하철의 모습이다. 따라서 지하철과 관련하여 새로운 인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①번 연상은 관념적이고 개괄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어 불분명한 세계가 되며 ②번 연상은 지하철과 현대인의 삶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상투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③번 정황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지나치게 삼상적으로 바라보아 감상적 인식이 되었다.
이에 비해 ④번 연상은 심상적 묘사를 이용하여 낯선 장면을 펼쳐 보였다. 연상을 할 때 서경적 묘사의 양상으로 전개해도 무방하지만 연상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심상적 묘사의 방법으로 연상을 해도 좋다. 심상적 묘사로 연상을 하면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장면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글쓴이만의 주관적인 개성을 드러내기에 수월하다. 비현실이나 환상은 우리의 현식과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비현실과 환상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비현실과 환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이러한 연상을 통해 심상적 묘사의 특징 중의 하나인 글쓴이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기도 하다.
묘사가 부족한 당신의 문장을 위하여
글쓰기에서 묘사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묘사를 제대로 하는 사람도 드물 뿐만 아니라 묘사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묘사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거나 상황과 사건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글쓰기의 기본이 묘사임은 분명하다. 특히 문장에 대한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면 묘사를 통해 감각적인 장면을 표현해보기를 권한다. 의도적으로 묘사 쓰기를 연습하면 글의 감각과 완성도를 비교적 손쉽게 바꿀 수 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관념과 사유를 비교적 손쉽게 바꿀 수 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관념과 사유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자. 바로 그곳으로부터 수준 높은 감각과 사유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좋은 묘사를 통해 감각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 여러분이 눈으로 본 이미지만을 믿고 그것을 써보도록 하자, 물론 우리들의 생각이나 관념, 사유 등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눈으로 파악한 이미지를 묘사할 때 남다른 글의 감각을 얻을 수 있음을 믿고 노력해보자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사유, 관념 등은 묘사 유형의 글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묘사의 경우는 다르다 묘사는 연습하지 않을 경우 글에 드러나기가 쉽지 않은 글쓰기의 방법이다. 따라서 묘사적 글쓰기를 의도적으로 연습하여 감각적 글쓰기를 완성할 필요가 있다.
글을 쓰는 구체적 방법으로서 묘사는 단순히 표현 방버에 머물지 않는다. 묘사를 통해 드러난 이미지는 글을 쓰는 사람의 감각이며 상징과 사유를 드러내는 매개체이다. 또한 묘사는 글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고 감각적인 표현이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묘사는 단순히 표현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묘사를 수사적인 특성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묘사는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할 때 놓치기 일쑤인 감각적 표현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쓰기의 방법이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흔히 글쓰기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성적·논리적으로만 글쓰기를 바라볼 때 문제는 발생한다. 글쓰기가 이성이 아니라 감각적 태도를 취할 때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묘사는 이와 같은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다.
전화를 하는 사람―소통
소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쓸 경우에 소통에 대해 직접 말하는 문장만으로 쓰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적인 글이 되고 만다. 화장실 문에 붙어있을 법한 아포리즘류의 표현으로 벅벅이 되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과는 먼 글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소통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뻔한 주장과 표현을 반복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하지만 전화하는 사람을 묘사하고 그 장면에서 전화의 상징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면 전혀 다른 성질의 글이 된다. 이때 글이 상징을 포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전화→두 사람과의 통화→(통화=소통)=소통
이런 관계를 통해 전화라는 사물은 소통이라는 의미화된 지점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때의 소통은 다시 사적인 소통에서 공적 의미를 지니는 소통으로 확장된다.
전화를 하는 사적‘소통→인문적 사유와 공적 주체로서의 ’소통‘(상징적 묘사)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 중에서 인문적 사유로서의 소통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을 포착하여 집중적으로 묘사하자.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공적 주제로서의 ‘소통’이 탄생한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가상과 실제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전화인데, 이때 전화를 묘사하면서 이편의 세계와 저편의 세계를 드러내면 두 세계를 오가는 소통의 문제를 언급할 수 있다.
이편의 세계------(거울)------저편의 세계
거울 역시 전화와 같이 상징으로 가득한 대상이다. 거울을 통해 우리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거울을 그저 글에 등장하는 단순한 소재로만 이해하고 글감을 사용하면 그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하지만 거울을 상징으로 이해하면 ‘허상과 실존’, ‘이편과 저편’ 등과 같은 깊이 있는 철학적인 주제를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은 이미 문학, 영화 등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이상의 시 「거울」에 등장하는 거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외에 거울과 유사한 유리 역시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 거울과 비슷한 상징으로 쓰인 적이 있다. 다만 이때 유리는 투명하다는 점에서 거울과 달리 단절 속에서의 소통을 상징한다. 이외에도 영화 <인셉션>에 등장하는 거울 역시 중요한 상징이다. 거울에 끝도 없이 투사된 주인공의 모습에서 세계의 중첩된 양상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거울을 깨뜨리는 장면을 통해서는 우리의 세계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떠올릴 수 있다.
먹는 행위―욕망와 결핍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나 결핍을 언급할 때에도 ‘욕망과 결핍’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투적인 주장이 나올 뿐이다. 이때에도 먹는 행위의 구체적인 장면 중에서 의미가 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하여 묘사를 해보도록 하자 그러면 먹는 장면은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의미 있는 상징을 드러내며 글이 주제를 보여준다. ‘먹는’ 행위는 무엇인가를 갈급한다는 점에서 ‘욕망’을 보여주는 행동이며, 비어 있는 허기를 채운다는 점에서 ‘욕망’을 보여주는 행동이며, 비어 있는 허기를 채운다는 점에서 ‘결핍’이라는 의미를 제시할 수도 있다. 영화 <중경삼림>에 등장하는 실연한 이후에 파인애플을 먹는 사람을 변주하여 묘사를 하면 결핍을 채우는 행위라는 의미 있는 글을 쓸 수 있으며 폭식증에 걸리거나 거식증에 걸린 사람을 묘사하는 것 역시 욕망과 결핍이라는 주제를 보여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멋진 글을 쓰기를 꿈꾸며 좋은 문장을 쓰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의 글쓰기 방법을 버리고 상상력 가득한 생각을 드러내고 묘사를 통해 글이 감각을 키우면 된다는 말이다. 상상력의 힘을 기르기 어렵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글을 써보도록 하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여러 방법을 통해 글쓰기와 상상의 새로운 방식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 풍요롭고 자유롭다면 그리고 묘사를 통해 그것을 감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쓰는 것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결국 글쓰기는 상상력과 묘사의 문제만 해결되어도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글을 쓸 때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상상력의 문제도 있지만 좀 더 멋진 나만의 표현을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인 경우도 많다. 그러면 결국 뻔한 이야기를 상투적인 문장으로 쓰게 된다. 또한 글쓴이는 감각적이지 못한 문장 앞에서 글쓰기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물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묘사 이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풍요로운 상상력과 묘사만으로도 우리의 글쓰기는 그동안의 글쓰기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조동범,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도서풀판 삼인, 2019, 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