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에 비가 내리면 곡식이 십리에 천석이 준다고 하죠?
처서즈음부터 오락가락하는 비는 오늘도 계속이네요.
피부에 닿는 바람이 시원한 걸 보니 가을로 접어들긴 한 모양이구요.
차창 밖으로 펼쳐진 들판은 바야흐로 노란 물이 들어가구요.
우리는 시집을 묶어야 하니 마음 먼저 바빠지네요.
오늘은 이론을 건너 뛰고 몇 작품 시를 감상하는 시간이었어요.
나팔꽃 / 권대웅
문간방에서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 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길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한 시간 / 서화성
한 시간이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쓰다가 단편소설은 읽겠지. 빠르게 걸으면 지구를 몇 바퀴 돌다가 몇 번은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겠지. 늦잠을 자거나 봄이 피다가 지겠지. 몇 번째 꿈을 꾸면서 울고 있을까. 공포 영화를 보거나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일지도 몰라. 다른 여자와 다른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머리를 감았다 말린다. 기다리던 버스가 지나간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누구는 몇 초 사이에 이상형이 다르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사라질까. 아니면 깨어날까. 아니면 엄청난 웃음이 생겼다가 사라지겠지. 단편소설을 읽다가 지구를 들었다 놓았다 하겠지. 화장실에서 졸다가 꿈을 꾼 적이 있었지. 다른 여자를 생각하면서 머리를 감은 적이 있었다. 그날은 몇 번째 버스를 놓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덤에서 숨 쉬고 있는지 몰랐다
폭포 / 문효치
물은 죽음을 향해 달린다
삶이란 무색 무미의 맹물인 것을
태어나자마자 도움닫기를 한다
급기야 벼랑 앞에 다다를 때
혼신을 다해 두 발을 박차고
허공에 몸을 날린다
감은 눈에서 번쩍하는 순간
아찔한 통증과 함께
잠시 스치는 통쾌함
그리고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맹물일 뿐이므로
빈 화분에 물주기 / 이근화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일까
누가 파 온 흙일까
마시던 물을 일없이 빈 화분에 쏟아부었더니
며칠 지나 잎이 나온다
욕 같다
너 내게 물 먹였지
그러는 것 같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몰라봐서 미안하다
그런데 끝까지 모르겠다
너 누구니, 아니 댁은 누구십니까
잎이 넓적하고 푸르다
꽃 같은 것도 피울 거니
그럼 정말 내게 욕을 하는 거야
안녕하십니까, 묻지 마 내게
당황스럽잖아 나더러 어쩌라고
계속 물을 주어야 한다
불안하면 지는 거다
그런데 더 주어야 하나 덜 주어야 하나
그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거다
너는 어디서 왔니
족보를 따지는 거다
상상하는 거다
너 아무것도 아니지
나의 몽상이구나
나란 망상이구나
죽고 없는 거구나
잘 살기란 온전하기란
불가능한 거구나
빈 화분에 물을 주며
나는 하루하루 시들어 간다
최선을 다해 말라 간다
옆으로 가는 사람들 / 홍미자
못 들은 척, 마주 앉은 얼굴들
마주 보고 앉기
지하철 좌석의 이 어색한 배치는
어쩌면 방관의 자세
어둠을 가르는 일은 바퀴의 몫으로 두고
그 고통이 남긴 궤적을 따라
사람들, 비켜 앉은 채 옆으로 간다
그들의 최선은
어둠과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는 것
삶의 긴 터널을 지날 때처럼
그저 시간을 견디는 것
해서 함부로 고개 돌리지 않는다
가끔 한 줄기 비명 같은 섬광이 일고
구부러진 길에서 커다랗게 휘청거릴 때조차
마침내 따뜻한 어느 플랫폼에 닿을 때까지
그렇게 불안을 통과하고 있다
나는 나를 묻는다 / 이영유(1950∼2006)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풍성하고 화려했던 언어들은 먼 바다를
찾아가는 시냇물에게 주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나뭇잎들에게는
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
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
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과
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거친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
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 덮일 때쯤
한곳에 숨죽이고 웅크려
나는 나를 묻는다
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
올라온다
언제 한번 보자 / 김 언(1973~ )
삼월에는 사월이 되어 가는 사람. 사월에는 오월이 되어 가는 사람. 그러다가 유월을 맞이해서는 칠월까지 기다리는 사람. 팔월까지 내다보는 사람. 구월에도 시월에도 아직 오지 않은 십일월에도 매번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사람. 우리가 언제 만날까? 이걸 기약하느라 한 해를 다 보내고서도 아직 남아 있는 한 달이 길다. 몹시도 길고 약속이 많다. 우리가 언제 만날까? 기다리는 사람은 계속 기다리고 지나가는 사람은 계속 지나간다. 해 넘어가기 전에 보자던 그 말을 해 넘어가고 나서 다시 본다. 날 따뜻해지면 보자고 한다.
처서 / 정끝별 (1964~ )
모래내 천변 오동가지에
맞댄 두 꽁무니를
포갠 두 날개로 가리고
사랑을 나누는 저녁 매미
단 하루
단 한 사람
단 한번의 인생을 용서하며
제 노래에 제 귀가 타들어가며
벗은 옷자락을 걸어놓은
팔월도 저문 그믐
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