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이 철저하다는 텔레그램의 'n번방' 성착취 사건이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러시아에서는 5년전 쯤에 'n번방' 사건과 유사한 '흰긴 수염고래(Синий кит, Blue Whale) 챌린지(게임)'란 사건이 터졌다. 러시아어 Синий кит는 단어 그대로 '푸른고래', 혹은 '대왕고래', '흰긴 수염고래' 등으로 번역된다.
둘 다 SNS 메신저의 '비밀스러운 개인 공간'을 활용한 '신세대 형'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그 SNS(텔레그램과 브콘닥테 vK)를 개발한 이도 같은 사람이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브콘닥테'라는 '메신저'를 만들고, 푸틴 대통령 정권의 '메신저 소스' 공개 명령을 거부한 뒤 독일로 망명한 니콜라이, 파벨 두로프 형제다. 두로프 형제가 독일에서 텔레그램을 개발할 때 '보안성'의 최대한 높인 이유이기도 하다.
'흰긴 수염고래' 게임 사건과 브콘닥테, 두로프 형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n번방' 사건외에도 또 있다. SNS상에서 이루어진 '온라인' 범죄를 고발한 영화 '서치 아웃(곽정 감독)'이다.
9일 개봉되는 이 영화는 SNS 팔로우에게 '하룻밤 공포 영화 보기' 보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동안 외부와 소통을 단절하기',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기' 등의 미션을 준다. 러시아 10대 청소년들을 자살로 몰아넣은 '흰긴수염고래 게임'의 미션들과 같거나 유사하다.
‘흰긴 수염고래 게임'이 러시아에서 사회문제화한 것은 2015년 쯤이다. 리나 팔렌코바라는 10대 여성이 열차에서 자살하면서 부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첫 고래'라는 평가를 받으며 '흰긴 수염고래 게임'을 10대 청소년들에게 널리 알려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당시 SNS '브콘닥테' 메신저에 빠져 있던 10대들은 ‘돌이킬 수 없는, 단 한번의 선택’이라는 문구에 '흰긴 수염고래' 게임을 시작했다. 자신의 신상 정보를 간단히 입력한 뒤 관리자가 내주는 과제를 수행하고 만족감을 얻는 '퀘스트 게임' 형식이니 딱 '젊은 취향'이다. 무려 50일간 매일 현실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미션을 받고 이를 수행한 뒤 ‘#BlueWhalechallenge’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인증 사진을 업로드하면, 또래들 사이에 존재감도 한껏 올라갔다.
게임 초반은 진행자가 정한 지정곡 듣기, 공포 영화 보기 등 아주 간단한 미션이 주어졌으나 단계가 올라갈수록 칼로 자신의 팔에 '흰긴 수염고래 새기기' 등 자해를 요구하는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 던지기'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여기서 머뭇거리는 10대들이 어디서나 많게 마련이다. 이때 게임 진행자는 성공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머뭇거리는 젊은이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포기하면, 신상 정보를 공개해 세상과 영원히 ‘단절’ 시킨다며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50일 동안 조금씩 단계를 높여온 과제들을 하나씩 수행하는 동안 자연스레 최면에 걸렸다는 게 당시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그렇게 '흰긴수염고래 게임'을 하다 자살한 청소년은 러시아권에서 130명으로 추정된다. 결과는 'n번 방' 사건과 마찬가지로 주범과 공범이 잡히는 것으로 끝난 듯했다. 주범 격인 필립 리스(본명 필립 부데이킨)은 3년 4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2019년 4월에 출소했다고 한다. 공범도 비슷한 형량을 선고받았다.
영화 '더 서치'의 스토리도 비슷하게 전개된다. 경찰 지망생 '성민'(이시언)과 취업 준비생 '준혁'(김성철)이 사는 고시원에서 자살 사건이 벌어진다. 준혁에게는 죽은 학생의 ID로 수상한 메시지가 도착하고, 의문을 품은 두 사람은 SNS 범죄를 파헤치기 위해 뛰어든다. 잇딴 피해자들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와 있는 단서들. '흰긴 수염고래' 사진과 목에 고래 문신이 그려진 의문의 남자,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여신의 이름을 딴 ID '에레슈키갈' 등등...
다행히 영화에서는 '흰긴 수염고래' 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정반대 '버전'이 있다. SNS '인플루언서'인 준혁이 자처한 '소원지기'다.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어들이 자신의 미션을 성공하면 무료로 도움을 주는 역할이다.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게 '온라인 관련 사건'인 모양이다. 이제 더이상 현실과 온라인을 떼놓고 살 수 없다는 증거다. 10여년 전쯤에 터진 '현피'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10대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했던 '현피'는, 이제 많이 잊혀진 단어이지만, 온라인서 논쟁을 벌이던 청소년들이 실제로(현실에서) 만나 싸우거나 죽이는 사건을 말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충격적인 '흰긴 수염고래' 사건이 등장했고, 진행자들은 잡혔지만, 그 여운은 아주 길었다. 터키에서는 지난 2017년 한 10대 소녀가 '흰긴 수염고래' 챌린지 게임을 즐기다 마지막 미션(자살)을 수행하기 위해 아버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지금도 누군가 그 게임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터키 소녀의 자살 당시, '흰긴 수염 고래'의 진행자 필립 부데이킨이 복역 중이었는데, 누가 그녀에게 미션을 제공했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러시아 언론은 '흰긴 수염고래'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비슷한 게임들이 브콘닥테에는 적지 않았다고 했다. 'f57'과 'Разбуди меня в 4.20(Wake Me Up) 등이 '흰긴 수염고래'와 경쟁을 벌였다고 했다. 텔레그램에도 'n번방'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흰긴 수염고래'와 'n번방'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기에 가장 자극적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