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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린도후서 3:6-18
제목: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설교 개요
I. 모세, 영광, 수건: 출 34:29-35
1. 모세의 직분: 출32:14(중보적 역할)/ 출33:11 (대면하여 말하다)
2. 모세 얼굴의 광채: 출 34:29
II. 모세와 새 언약의 직분 1
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직분 모두에게 영광이 (고후3:6-7)
2. 없어질 모세의 영광과 영광이신 그리스도 (고후 3:9-11)
3. 계속되는 영광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
III. 모세와 새 언약의 직분 2
1. 수건을 쓴 첫 번째 이유: 백성들의 죄와 두려움
2. 수건을 쓴 두 번째 이유: 얼굴을 주목하지 않도록 (고후 3:13)
3. 직분의 외적인 영광과 성령이 주시는 복음 직분자
4. 말씀을 받는 성도들의 영광 (18절)
IV.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후 3:16)
1. 복음 전하는 직분자의 확신, 담대함, 자유
2. 복음을 받는 성도들이 누리를 자유
생각해 볼 문제
1.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에서 모세가 수건을 써야 했던 이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지금도 수건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의 마음을 덮고 있는 현상은 어디에서 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나는 언제 나의 마음에 수건을 덮고 있습니까?
2. 말씀을 받는 고린도 성도들이 언제 어떻게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른다고 바울은 설명합니까? 자신이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을 보는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 고쳐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3. 새 언약의 성도들이 누리는 확신, 담대함, 자유는 어떻게 주어집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담대함과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서로 확인해 봅시다.
I. 모세의 영광과 수건: 출애굽기 34:29-35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의 비중은 신약에서는 종종 예수님과 비교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사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송아지 형상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으로 삼고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출 32:10) 그 때 모세는 그 맹렬한 노를 멈추도록 간구함으로써 백성에게 화가 내리는 것이 멈추었습니다.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했습니다. (출 33:11) 그 증거가 보통 사람인 모세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 영광, 수건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런 단어들은 34장에서 모세가 두 번째 주신 둘 돌판을 받아서 백성에게 돌아오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보면 모세는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 (출 34:29) 모세가 하나님과 말했기 때문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 광채 때문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렸습니다.(출 34:35)
모세의 직분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중보자에 해당되는 일,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며 말한 것 때문에 그 증거로 하나님은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했습니다.
II. 모세와 새 언약의 직분 1
바울은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에서 모세에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 와서 새 언약의 직분을 말합니다. 6절에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직분자로 적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 언약의 직분자로 합당한, 적합한 것을 어떤 것이겠습니까? 바울은 이를 구약의 최고 직분자 중에 하나인 모세와 비교합니다.
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직분 모두에게 영광이 (고후3:6-7)
7절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옛 언약의 직분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있었습니다. 바울도 이를 인정합니다. 율법 조문의 직분에 영광이 있었다면 지금 성령안에 있는 말씀의 직분은 확실히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8절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 있지 아니하겠느냐
모세직분 영광과 영의 직분이 가진 영광의 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함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을 봉사하는 모든 직분, 구약의 모세이건, 신약의 사도이건 이들 모두에게 확실하게 영광이 있습니다.
2. 없어질 모세의 영광과 영광이신 그리스도 (고후 3:9-11)
모세의 영광은 출애굽기 34장 29절에만 한 번 언급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비추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짜 영광, 진짜 광채가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은 곧, 예수님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습니다. 참 광채, 하나님의 참 영광이신 예수님 때문에 이전의 영광은 더 이상 영광으로 여겨지지 못했습니다. 10절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영광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얼굴의 영광은 없어질 모세와 달리 영원합니다.
3. 계속되는 영광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
영광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도 영광이 있고 이 영광 또한 계속됩니다. 4장 4절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는 것을 말하는데 그리스도, 영광, 복음, 광채가 나란히 소유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광이요 빛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도 영광, 광채와 연결돕니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 됩니다. 모세 직분안에 영광이 있었지만 그 영광은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의 영광이 왔을 때 없어질 것이 되었습니다.
III. 모세와 새 언약의 직분 2
1. 수건을 쓴 첫 번째 이유: 백성들의 죄와 두려움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다시 보면 모세는 수건을 자신의 얼굴에 써야 했습니다. 쓴 이유는 모세 얼굴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를 더럽혔다가 완전히 전멸할 상황이었습니다. 모세의 중보가 있었지만 그들이 이 일을 계속하면서 삼천명이 죽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8절) 모세 얼굴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 영광으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광채로 비취 때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2. 수건을 쓴 두 번째 이유: 얼굴을 주목하지 않도록 (고후 3:13)
그러나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는 또 하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5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얼굴 광채를 보는데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같은 맥락에서 13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라고 반복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에 광채를 주목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수건을 썼습니다. 왜 모세의 얼굴 광채를 주목하면 안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 얼굴의 광채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전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모세 얼굴 광채만 주목하고 거기에 빠져 있습니다.
3. 직분의 외적인 영광과 성령이 주시는 복음 직분자
바울은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쓴 수건의 목적을 왜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바울을 통해서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자의 영광을 주목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께 정복당한 포로, 하나님의 노예가 된 자, 하나님의 종의 형체와 삶을 살다가 죽음까지 내몰리는 포로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은 고린도전서 4장 9절이하처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 구경거리, 세상의 더러운 것, 만물의 찌꺼기 같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유력한 자들, 크다고 말하는 순회 전도자들은
- 화려한 언변, 호사스러운 외양, 높은 몸값, 이 편지만 가지고 가면 호화 숙식이 제공되는 자신의 후견인들이 써 준 추천서, 강력하게 나타나는 방언, 예언, 병고치는 능력등의 은사들로 무장했습니다. 그들은 신앙 세계의 셀럽들이었습니다. 누구나 봐도 그들에게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 광채를 보는데 정신이 팔려서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얼굴에 수건을 써서 모세 얼굴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마음에 수건을 덮고 있었습니다. 모세 얼굴의 광채는 아니지만 그들은 외형적인 것에 주목하다가 정작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4절과 15절에는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다,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복음 전하는 자의 외형적인 조건: 목사님, 피부가 참 좋으십니다/
교회의 외형적인 면: 교회가 참 파이팅, 으샤으샤합니다. 이 교회에는 활기가 없습니까? 이 교회는 따뜻하지 않아 보여요. 이 교회는...이 교회는...교회가 가진 외형적인 것에만 주목해서 정작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세가 수건을 덮어야 했던, 우리 마음에 수건이 덮여진 상태입니다.
4. 말씀을 받는 성도들의 영광 (18절)
반대로 출애굽기 34장에는 모세가 쓰는 것만이 아니라 수건을 벗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34장 34절에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주를 대면할 때는 수건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따라서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서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수건이 필요 없듯이 주께로 돌아갈 때는 수건을 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때 주는 곧 성령입니다. 주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실 때는 마음에 수건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서는 수건을 벗는 얼굴로 주의 영광을 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성령께서 사용해서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주실 때 거기에는 외형적 조건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만이 있습니다. 모든 외적인 조건을 버리고 말씀으로 달려가는 자들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더 이상 말씀 전하는 자들이 가진, 혹은 말씀 듣는 자들의 외적인 형편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영광과 광채를 찾을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IV.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후 3:16)
1. 복음 전하는 직분자의 확신, 담대함, 자유
복음 전하는 자는 고난 당하면서 끝까지 성령의 주시는 복음을 순전하게 전할 때 수건이 벗겨집니다. 그는 (4절) 확신 속에서 이 직분을 담당합니다. 12절 더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17절 그에게는 다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있습니다.
2. 복음을 받는 성도들이 누리를 자유
복음을 받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흐린 관계, 불편한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복음을 주시는 성령께만 집중하고 다른 외형적인 것에 중심을 흐리지 않을 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투명한 관계 속에서 확신을 가집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조건이 비록 약하고 어리석고 좀 비천하다 할지라도 자유를 누립니다.
*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직장에서 팍팍 진급하고 연봉도 세고, 학교에서는 늘 좋은 성적을 거두고 번듯한 학벌을 이루어야 복음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든 외적인 조건이 우리의 직분 수행에 아무런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직분자는 자유합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집니다. 우리가 처한 조건과 형편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규정하지도 내게 주신 직분의 일을 행하는데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리석고 약하고 죽음에 내몰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이 자신의 사도된 표라고 자랑했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조건들이 그의 직분과 그 수행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3. 마지막 질문: 바울은 왜 이 본문들에게 영광이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할까요? 영광은 원래 십자가의 죽음과 낮아지심 고난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1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면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이 곧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루터 목사는 십자가의 신학을 말하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출애굽기 34장의 모세 얼굴의 광채, 영광의 그림을 가져와서 영의 직분의 영광을 말했습니다. 영의 직분은 십자가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외형적인 조건에 매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순전한 복음 그 자체에만 주목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자신의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주목받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보배만이 말씀전하는 직분이나 말씀 듣는 직분이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질그릇이 질그릇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의 외형적인 조건은 낡고, 후패하고, 어리석고, 초라하고, 고난받고, 죽음에 내몰리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보배는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배가 아니라 그릇이 조건, 질그릇인가? 금그릇인가? 은그릇인가에 집중하면 우리 마음에 수건이 덮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영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부분을 내 육체에 짊어질 때 그 곳에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성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께로 돌아가 주의 영안에서 확신과 담대함과 자유를 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