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여행은 머릿속 그림과는 늘 다른 선을 긋는다. 하회마을을 서둘러 돌아본 뒤 낙동강과 어우러진 마애솔숲과 마애습지를 보려던 계획은 결국 접어야 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도무지 버스 시간이 맞질 않았다. 마애리로 가려면 하회마을에서 46번 버스를 타고 풍산읍내로 간 뒤 다시 11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하지만, 풍산읍에서 마애리에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 두 번, 오전 7시와 오후 5시 50분밖에 없다. 막차를 타고 가더라도 해가 진 뒤라 할 일이 없고, 첫차를 타고 들어가면 하루 꼬박 마애리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게 시내버스 여행의 묘미이자 한계다.
◆한옥에는 군불을 때야 한다
하회마을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집은 양진당(養眞堂)과 충효당(忠孝堂), 화경당(和敬堂)이다. 마을 중앙길 오른쪽에 있는 화경당 북촌댁(北村宅)은 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정조 21년(1797년) 지중추부사를 지낸 류사춘이 작은 사랑과 좌우 익랑을 세웠고, 철종 13년(1862년) 증손자인 류도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안채와 큰사랑(북촌유거), 중사랑(화경당), 작은사랑(수신와) 등 72칸에 이르며 주춧돌만 남아있는 안채 별당을 더하면 아흔아홉 칸이 된다.
이 집은 호조참판을 지낸 학서 류이좌의 8대 주손인 류세호(61) 씨가 지키고 있다. 류 씨는 안채에 산다. 그는 "방이 냉골"이라며 멋쩍어했다. 땔감을 아끼기 위해 낮에는 불을 때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북촌댁의 가풍은 '수신와'(須愼窩)로 압축된다. 어려운 이웃을 의식하며 항상 검소하고 겸손하라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적선지가(積善之家`착한 일을 많이 하는 집)'로 이어진다. 노비들이 따로 일가를 이뤄 살게 한 것이나 소작료를 5할 이상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 강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려고 3년 동안 모아둔 춘양목을 모두 풀어 강에 띄우고 불을 지펴 사방을 밝게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자부심과 긍지는 현재 북촌댁의 모습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저는 내부 개조를 하지 않습니다. 요즘 고택들은 정부지원을 받아서 바닥에 전기패널을 깔고, 창문에는 방충망과 도르래를 달고, 벽에 단열재를 넣고, 기름보일러까지 넣습니다. 이게 껍데기만 한옥이지 어떻게 전통 고택입니까?”류 씨는“나무와 흙으로 지은 한옥은 반드시 군불을 무조건 때야한다”고 강조했다. 목재 가옥의 가장 큰 적인 흰개미와 습기를 막고, 집을 오래도록 유지하려면 군불이 필수라는 것이다. 장작과 관리인 인건비까지 더하면 이 집을 유지하는데만 연간 7천만원이 든다.
마당을 정원으로 꾸미지 않고, 집 뒤편과 담장 주변에만 나무를 심는 것도 한옥을 지키기 위해서다. 자동차업체에서 영업본부장까지 했던 류 씨가 하회마을로 온건 지난 2007년이었다. 그는 "40대 중반까지는 한옥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은퇴를 앞두고 3년간 한옥학교에 다니며 석공과 와공, 목수, 구들장 등 분야별로 배웠다. 아내와 세 자녀는 경기도 분당에 산다.“이 겨울에 혼자 있으면 진짜 적적해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책무'라는 생각에 버티고 있는 거죠. 가끔 아내가 오면 정말 식겁하다가 돌아가요. 워낙 옛날 그대로니까."
류 씨가 내준 윗상방은 나무 탄 냄새가 연하게 풍겼다. 할머니의 오래된 방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기름보일러가 있어도 아궁이에 군불을 땠다. 가마솥에 물을 끓여둬야 손자가 따뜻한 물에 세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궁이의 나뭇가지는 타닥타닥 불똥을 튀기며 타들어갔고, 할머니의 가슴에서 늘 향긋한 솔가지 냄새가 났다.
다음 날 아침, 류 씨가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깼다. 대충 눈곱만 떼어내고서 류 씨 뒤를 따랐다. 대문 밖 초가집 안에는 차려진 12첩 반상을 받기 위해서다. 잡곡밥과 간이 심심한 된장국, 두부조림, 버섯, 계란, 나물 등이 놋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있다. 짜디짠 간고등어는 굽지 않고 쪄냈다. 안동 양반 스타일이다.
대충 옷을 몸에 꿰고 전날 밤 투숙했던 황흥규(58)`정선희(54`여) 씨 부부와 함께 북촌댁의 구조와 유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화경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시험지다. 정조는 신하들이 낸 시험지에 일일이 붉은 먹으로 점수를 매기고 평을 남겼다. 조선판 '빨간 펜 선생님'인 셈이다.
안채는 한옥에서 보기 드문 2층 구조이고, 할아버지가 머무는 북촌유거(北村幽居)에서는 동쪽으로는 화산, 북쪽에는 부용대와 낙동강,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을 볼 수 있다. 북촌유거 뒤편에 있는 소나무는 하회마을을 감싸고 흘러가는 낙동강의 형상과 완전하게 일치한다고 해서 '하회송'이다. 류 씨의 설명을 듣고 나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짐을 챙겨 하회마을 입구에서 낮 12시 46번 버스에 올라탔다.
◆상처는 나아도 흉터는 남는다
40여 분을 달려 안동역 인근 교보생명 앞에서 내렸다. 도산서원을 거쳐 봉화 청량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67번 버스를 타야 한다. 도산서원 입구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5차례 운행한다. 거리는 27㎞, 30~4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다. 오후 1시 10분 버스를 타려다 우선 점심부터 해결하고 떠나기로 했다. 안동호에서 잡은 민물고기 매운탕을 그냥 두긴 아쉬웠다.
도산서원에 가기 전에 한국국학진흥원 앞 도산면 서부리에 들르기로 했다. 서부리는 1975년 안동다목적댐 건설 당시 수몰민들이 이주한 집단 이주단지다. 1976년 안동댐이 담수를 시작하면서 안동시 와룡면과 도산면`예안면`임동면 일대 3천100여 가구, 2만600여 명은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등져야 했다. 멀리 떠날 수 없었던 수몰민들은 살던 곳에서 2㎞가량 떨어진 도산면 서부리의 산비탈을 깎아 조성한 집단이주단지로 옮겨왔다. 이주단지 주변에는 예안면 부포리와 천전리 등 마을 6곳에도 흩어져 살았다. 하지만, 산비탈 척박한 땅은 농사가 힘들었고,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차오르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차츰 고향을 등졌다. 1천300여 가구가 살던 마을은 200여 가구만 남았다.
도산면 서부리로 가는 국도 35호선은 오천 군자마을을 지나며 안동호를 만난다. 30여 분을 달려 서부리에 도착했다. 가방을 고쳐 메고 두리번거리니 평상에서 볕 바라기를 하던 할머니가 말을 붙인다. "뭐 하는 사람이요?" "버스 타고 여행 다니고 있어요." "아, 방랑객이구먼. 흐흐."
예전 마을 모습을 물어봤다.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는 가수들이 와서 노래도 부르고 그랬지." 당시 이야기가 궁금해져 다가서니 할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따라들어가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 호박죽 먹어야 해." "드시면서 말씀 좀 해주세요." "아냐 아냐 됐어." 쾅 닫히는 방문. 찬바람이 쌩 분다. 주춤거리다 자리를 떴다. 낯선 이방인에게 먼저 말문을 트던 할머니가 갑자기 왜 등을 돌렸을까? 마을에 남아있는 아픈 기억들. 고향을 떠나 무너져 가던 공동체에 대한 뼈저린 기억 때문이었을까.
서부리 마을의 시간은 1970년대에 멈춰 있었다. 틀에 찍은 듯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과 인위적인 자리 배치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30년은 훌쩍 넘은 옛 드라마 세트에나 나올 법한 간판과 상점들이 이어진다. 서부리에서 예안면 천전리 간을 운항하는 도선 경북705호도 적막하게 도선장에 묶여 있었다.
"옛날에는 풍산읍보다 큰 동네였어요. 초등학생만 800명이 넘었으니까." 추위를 이기려고 장작에 불을 때는 드럼통 옆에서 불을 쬐던 김기태(63) 씨가 그 시절을 떠올렸다. "보상금 받고 새 동네로 왔다고 잔치도 하고 그랬어요. 건물들도 그때 지은 거고. 근데 지금은 농사짓는 사람도 없고, 다들 자식들 도움으로 살아요.”
더 자세하게 묻고 싶었지만, 버스 시간에 쫓겼다. 오후 3시 20분. 안동시내에서 오후 2시 50분에 출발한 67번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다. 이 버스를 놓치면 오후 4시 10분에 안동시내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하고, 오후 5시가 돼야 도산서원에 도착할 터였다. 자칫 오후 6시 20분쯤 봉화 청량산도립공원까지 가는 막차를 놓칠 수도 있었다.
◆길 위에서 길을 묻다
도산서원 진입로 앞에서 내렸다. 도산서원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4차례만 운행한다. 시간에 맞춰 타지 못했으니 얼어붙은 길을 2㎞나 걸어야 한다. 30분쯤 걸었을까. 도산서원 입구가 보였다. 시간은 벌써 4시에 다다랐다. 도산서원은 오후 4시 30분까지만 관람이 가능하다. 안내도 한 장 달랑 들고 서둘러 들어갔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됐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 도산서당은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이다. 건물들은 간결하고 검소하다. 별다른 꾸밈이 없고, 쓸데없이 주변 경관을 해치지도 않는다.
잠시 둘러봤을 뿐인데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진다. 버스정류장까지 나오니 오후 5시. 1시간 20분은 더 기다려야 청량산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날카로운 추위에 귓불이 얼어붙는 듯했다. 발을 동동거리는데 20대 남자 2명이 버스정류장으로 다가온다. 또 다른 버스 여행자. 반가웠다. 한 달 전에 전역했다는 남기욱(23`서울) 씨와 김경훈(23`서울) 씨였다. 동네 친구 사이라는 두 사람은 열차와 버스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폭설이 내렸던 나흘 전 안동에 왔다가 경주와 부산을 들른 뒤 다시 안동에 왔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 삶은 비슷비슷한 생김새였다. 집과 학교가 오가는 길 전부였고, 방학에도 여행이라고 해봤자 스키장이나 숙소에서 노는 것이 전부였다. 20대에게 현실은 자신감과 두려움. 희망과 좌절이 묘한 줄타기를 한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기욱 씨.“요즘 정말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거든요. 저는 전공에 대해 관심도 많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취업보다는 박물관이나 학예사처럼 연구자가 되고 싶은데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너무 큰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경훈 씨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전공으로는 의학전문대학원이나 제약회사, 화학 관련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데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어요.”이들의 고민이 버스 미등처럼 희미한 빛을 남기며 사라지길 빌었다.
오후 6시 30분쯤 봉화 청량사로 가는 67번 버스에 올라탔다. 30여 분을 달리니 봉화군 청량산도립공원 집단시설지구다.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에서 얼큰한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찌개 국물을 넘기는 내내 “요즘 다들 대학을 나오는데 누가 시내버스 기사를 하겠냐”고 푸념하던 버스기사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