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외2편
엄마는 늘 칼을 직접 갈았다 나는 엄마가 칼 가는 모습을 가만
히 지켜보곤 했는데,
숫돌에 나를 올려놓고 물을 묻혀 가며 써억 썩 갈 때마다 나는
날 좋은 칼이 되어 당신을 베고
큰 봄이 둥치째 무너져 내리는 걸 처음 보았다
칼날이 들썩이지 않도록 칼배에 손가락을 단단히 고정하고 아
래위로 일정하게 밀고 당기면
칼날이 서는 소리에 쓰리고 아픈 세월이 한참은 더 지나야 했
는데
칼이 무딜수록 더 다친다는 말,
겉과 속의 밀도가 완전히 다른 토마토가 이 빠진 칼 아래 뭉개
질 때
칼을 통째로 망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칼은 내가 갈 줄 알
아야 한다고
뭇국을 끓이거나 도려내고 싶은 토마토의 붉은 속이 많을수록
잘 썰리는 칼날의 각도가 있는 거라고
그 봄 무너진 계절의 둥치에 앉아
언제든 자신을 벨지도 모르는 나를 매일같이 마주하면서 엄마
는,
달의 행방
오늘밤 달은,
그곳으로부터 왔다가 이곳을 떠났다.
누구도 달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오고 간 길도 알지 못했다.
달이 며칠 동안 머물렀던 자리엔
막 꺼내놓은 계절 한 벌과
다 세어보지 못한 풍뎅이 같은 밤별 몇.
그리고, 슬픔이
울부짖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오래 앉아 있었다.
달은 이곳에서 하나의 길을 따라간 게 분명했다.
거기에서 달은
또 다른 한 길을 따라 나아가겠지.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갔는데
풀벌레는 무엇이 비통해서 저리 울어댈까.
달이 오고 간 길은 알지 못해도
그곳으로부터 왔다가
이곳을 떠나는 소리가 작지 않다.
수박의 정치학 1
화요일은 아파트 단지 내에
싱싱한 과일 트럭 행상이 오는 날
겉과 속이 다른 독점 권력이 진열대마다 놓이고
수박 위에 수박이
또 수박이 쌓여서 하나의 거대한 수박이 되어간다
상인들 눈치를 살피며 모여든
아파트 주민들은 개인인가 집단인가
속이 상했거나 설익은 것일지라도
우린 하나니까
익명에 숨으면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역사란 그런 것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이므로
거기에는 온건 중도도 있고 합리적 보수도 있고 기득권에서 팽
당한 기회주의 세력도 있으므로 다만,
이 판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
트럭 행상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상인들과 함께 반란을 꿈꾸며 트럭 행상의 뒤통수를 칠 것인가
단지 내에 오래 살다 보니 기득권이 되고
특권을 얻다 보니 점점 기득권 논리에 빠져들어
수박 위에 수박이
또 수박이 쌓여서
하나의 거대한 수박이 되어가는 사람들
그러나 큰 흐름에는 어긋남이 없다
역사란 그런 것
<시작메모>
오늘은 그리운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능사와 두꺼비, 그 오묘한 관계
오늘은 산에 올랐다가 커다란 능사 한 마리를 보았답니다. 독은 없지만 성질은 사나운 뱀이지요. 능청을 떠는 사람을 두고 ‘능구렁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뱀 말입니다.
경북 청송에서는 이 능사를 ‘기러기’라고도 부른다는군요. 비 오기 전날 밤이면 꾸륵꾸륵 이상한 소리를 누가 들어도 새소리처럼 낸다고 해서 그렇답니다.
실은 이 능사와 두꺼비 간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암컷 두꺼비는 번식을 위해 능사를 찾아가 그 앞에서 깐죽거리며 약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러다 능사가 성질을 못 이기고 두꺼비를 삼키면, 두꺼비는 뱀의 뱃속에다 알을 낳지요.
결국 능사에게 잡아먹힌 두꺼비나 두꺼비를 삼킨 능사는 죽고, 알에서 나온 두꺼비 새끼들이 어미와 능사의 살을 자양분 삼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능사는 이렇게 될 줄 알고 결코 두꺼비와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두꺼비는 안전한 곳에 제 알을 낳아 새끼를 길러낼 목적으로 기를 쓰고 능사에게 먹히려 안간힘을 쓰는 거랍니다.
남의 새끼를 위해 죽게 되는 능사나, 제 새끼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두꺼비나 참 슬픈 관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자연의 이치에 소름이 돋기도 한답니다.
풍산이의 산 생활
아아, 그리운 당신.
어느 날인가는 산에서 흰 풍산개를 한 마리 만났습니다. 얼마 전 알게 된 한 ‘자연인’이 키우는, 풍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입니다.
놀라운 것은, 자연인이 풍산이에게 벌써 일주일째 밥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풍산개 특유의 야생성을 길러주기 위해 일부러 밥을 주지 않는다는군요.
실제로 풍산개는 진돗개보다 덩치가 좀 더 크고, 추위와 질병에 끄떡없는 강인한 체력을 지녔답니다. 산짐승을 사냥하거나 맹수들로부터 주인을 보호할 만큼 용맹하기도 해서 사냥개로서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고 있지요.
하지만 저는 자연인이 자신이 키우는 개에 대해서만큼은 몹시 가혹하고 매몰차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달리 오지랖을 피울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별 수 없이 가만 두고 볼밖에요.
그해 가을에서 겨울까지 풍산이는 노루 여섯 마리를 잡아먹었습니다. 노루 뼈를 씹을 때는 새우깡 씹는 소리가 난다고 했던 자연의 말이 기억납니다. 먹다가 다 먹지 못한 부위는 아무도 모르게 땅을 파고 묻어두었다가, 배가 고파지면 또 가서 파먹고 온다는군요. 완전히 야생이 된 거지요.
자연인이 풍산이 몰래 노루고기가 묻힌 곳을 파보려 한 적도 있답니다. 그러면 풍산이는 두 귀를 뒤로 바짝 붙인 채 땅 위에 엎드려 꼬리를 흔들며 막아대곤 한다고요. 그리고는 자연인이 노루고기를 대신할 만한 것을 내밀었을 때서야 흥정을 성사시키기라도 하듯, 노루가 묻혀 있는 땅을 내어준다는 거예요.
저는 자연인과 풍산이의 산 생활이 갈수록 흥미로웠습니다. 그래, 생각을 발끝에 두고 부쩍 자주 산에 오르게 된 거랍니다.
세상에는 함부로 관여해선 안 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모두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산이나, 세상이나 그만큼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섬에서 지금, 하루만 더
당신, 오늘은 노을이 내려앉는 쪽으로 가 봅니다.
그곳에 고슴도치를 닮은 섬, 위도가 있거든요. 격포항에서 큰 걸음을 하면, 단숨에 건너 뛸 수도 있을 것처럼 지척인 곳. 가까운 듯하면서도 결코 가깝지만은 않은 섬. 지금, 그 섬에 가고 있습니다.
사실 위도는 고슴도치를 닮지 않은 고슴도치섬입니다. 떨어져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생김새만으로는 고슴도치를 연상할 만한 것이 없지요. 그럼에도 고슴도치 섬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지, 저는 금세 궁금해졌답니다.
이 섬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솔잎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하더군요. 실제로 위도의 소나무는 독특했습니다. 서해의 거친 바닷바람 탓에 키가 2m를 채 넘지 않았지요. 해풍에 시달리느라 허리를 곧게 펴보지도 못한 것이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키워놓은 것도 아닌데, 다들 이리저리 뒤틀리고 구부러져 있었거든요.
나무가 이러할진대 솔잎이라고 다를까요. 어른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작고 억센 것이 위도 소나무의 솔잎이랍니다. 바로 이 솔잎이 고슴도치 털을 닮았다 해서 ‘고슴도치섬’이 되었다는군요.
구불구불 해안 절경이 아름다운 신비의 섬, 위도. 버스 한 대, 택시 한 대가 고작이지만 걸음 놓은 발자국이 사라질까 차마 발을 뗄 수 없는 곳. 저는 이 섬에서 지금, 하루만 더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김형미 프로필
2000년『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제6회 불꽃문학상, 2014 한국문학예술상, 2016 서울문학상, 2016 서울문화대전 대상, 목정청년예술상, 아르코창작기금, 제8회 천인갈채상, 제2회 전국황토현시문학상, 2025 아름다운문학상 수상.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 『사랑할 게 딱 하나만 있어라』, 그림에세이 『누에 NU-e』, 그림소설 『불청객』, 동화 『승암산 올빼미』, 『내 비밀은 이거야』 등 다수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