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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불과 반딧불
성냥불과 반딧불이 똑같은 불빛을 내는 것 같지만 다릅니다. 성냥불은 작은 입김에도 꺼집니다. 불꽃이 바깥 공기에 노출돼 있어 그러합니다. 그러나 반딧불은 비바람에도 빛을 잃지 않습니다. 그 빛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냥불은 금방 꺼집니다. 겨우 자기 몸을 태우며 불빛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딧불은 생명에서 나오는 빛이기에 오래 타오릅니다. 성냥불은 그을음을 남기지만 반딧불은 오염 물질을 한 점도 배출하지 않습니다.
물질과 명성은 잠시 계급장을 단 성냥불과 같습니다. 모든 계급장이 안개처럼 사라지면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허무의 그을음만 가득합니다. 반딧불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으며 섬겼던 예수님의 성품과 닮았습니다. 이 불빛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하늘과 이웃들에게 기억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맛을 잃은 소금
한 여론조사 기관이 최근 발표한 내용을 봤습니다. 한국인의 종교에 관한 조사였는데, 마음을 무겁게 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크게 와닿았던 건 비종교인의 종교 호감도였습니다. 비종교인 중 개신교에 호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은 6%에 불과했습니다. 호감이 가는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은 61%였고, 종교가 사회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82%였습니다. 마음으로만 느끼고 있던 것을 수치로 확인하는 것 같아 묵중한 통증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두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 했습니다.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게 아니라 소금‘이다’라 하셨습니다. 목표에만 머물러 있는 건 일종의 핑계입니다. 소금은 썩는 걸 막기도 하고 맛을 내기도 합니다. 소금의 성격 중 빠뜨릴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갈증입니다. 소금을 접한 이는 갈증을 느낍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이 우리를 보며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
국뽕
‘국뽕’이란 말이 있습니다. 국가와 마약인 히로뽕을 합성한 신조어입니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과도하게 도취했을 때 조롱하듯 사용하는 말입니다. 자국의 좋은 점을 홍보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지나치면 과유불급이 됩니다.
그런데 랜선상의 장난이나 밈(meme) 수준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국뽕에 취한 사람이나 국가가 존재합니다. 분별력 없이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중화사상에 취해 세상의 모든 것이 중국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본처럼 폐쇄성이 강한 사회 속에 살면서 자기 나라가 최고인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지나친 국가 중심적 사고로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일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나라도 완전치 않습니다. 모두 강약, 공과, 장단이 존재합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국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사상으로 무장해 세상을 바르게 분별할 때입니다.
이성준 목사(인천수정성결교회)
사랑합시다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복수와 응징, 사이다 같은 징벌과 보복이 주요 주제란 생각이 듭니다. ‘악은 악으로 갚는다’란 식의 설정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가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합니다. 이는 악한 공격에 억울하고 답답할지라도 악한 방법이 아니라 선한 방법으로 악을 이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4~7)
그래서 사랑하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 평안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며 살며 사랑으로 악에 지지 맙시다.
변성우 목사(여의도순복음시흥교회)
하나님으로 감동하시게 하라
며칠 전 아들이 보냈다며 먹음직스러운 양갈비가 배달됐습니다. 고마웠지만 마침 식사를 배부르게 한 직후라 음식을 먹는 게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때 아들이 전화해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 인증샷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겨우 몇 점을 먹고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마가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다음에는 뭔가를 보내기 전에 먼저 상의를 했으면 좋겠구나. 엄마는 사실 음식보다 네가 옆에 있는 게 더 좋아.”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아니라 내가 보기에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일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지혜의 왕 솔로몬의 예배와 간구가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감동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하듯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하루를 사십시오.
전담양 목사(고양 임마누엘교회)
믿음의 배수진
미국 유학 중 비자를 갱신할 일이 있었습니다. 첫 딸을 낳을 때 극빈자 의료지원을 받았는데 하필 그때 그런 경우 비자를 잘 갱신해 주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선 아기 없는 가정인 것처럼 서류를 내면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유학길을 열어줬듯 비자 갱신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딸의 이름을 서류에 썼습니다. 믿음의 배수진을 치고 미 대사관으로 갔습다.
대사관 담당 영사는 심사하며 학교 이름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유학 중인 학교는 스탠퍼드 대학교였는데,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릴랜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교’입니다. 영사는 시골의 이름 모를 대학으로 안 듯합니다. 스탠퍼드대의 정식 명칭임을 밝히니 영사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비쳤습니다. 이후엔 서류 내용을 문제 삼지 않고 통과시켜줘 무사히 비자 갱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은 홍해이고 뒤는 애굽의 군대가 쫓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하나님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믿음의 배수진을 쳐야 할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손석일 목사(서울 상일교회)
사랑과 집착
사랑하면 어느 정도의 집착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집착’입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지나치게 흐르면 ‘악한 집착’이 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러나 집착은 조급합니다. 사랑하면 늘 감사하지만 집착하면 늘 불평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을 믿으나 집착하면 의심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집착은 감옥처럼 구속합니다.
사랑은 ‘너’를 위하지만 집착은 ‘나’를 위합니다. 사랑하면 희생하지만 집착하면 폭력을 씁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을 성숙하게 하지만 집착하면 상대방을 미숙아로 만듭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들지만 집착은 그 사람을 나같이 만들려고 합니다. 사랑하면 그를 스타킹(Star, King)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집착하면 상대방을 스토킹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과 가까워지지만 집착하면 상대방과 멀어집니다. 그리하여 사랑은 불꽃을 만들지만 집착은 재를 남깁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불을 꺼야 할 때
손바닥처럼 작지만 115년 동안 섬을 지켜온 교회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 따라 이젠 연로한 노인들이 남았습니다. 예배당도 세월하고 무관할 수 없어 지붕에서 비가 새기도 하고, 바닥이 삐걱거리기도 합니다. 천장의 전구도 어두침침해 성경과 찬송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밝은 LED 전구로 교체하고 몇 군데를 손봤던 봉사는 의미 있었습니다.
이 교회의 한 교우 가정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다 평소 궁금했던 걸 물었습니다. 혹시 밤에 소라를 잡으러 나갔다 밀물에 갇힌 적이 없는지 말이지요. 바다를 잘 아는 사람들도 아차 하는 순간 그런 일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들고 있는 불을 꺼야 해요.”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으면 오히려 바다 쪽으로 들어가기가 쉬운데 그럴 때면 불을 끄고 사방의 어둠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불을 끄는 것이라는 말은 이 시대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기에 충분했습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
무릎을 꿇게 하는 성구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영국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카칠라는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됐을 때 기도하는 법을 몰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신앙생활이 계속되면서 기도의 방법은 알게 됐지만 정작 기도가 가장 필요한 고난의 순간에는 절망과 두려움으로 오히려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마저 말씀으로 극복하고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카칠라 기자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기도할 힘을 주는 5가지 성구’입니다.
1.‘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장 14-16절)
2.‘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장 12-17절)
3.‘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장 6-7절)
4.‘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하박국 3장 2절)
5.‘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장 6절)
기도를 할 수조차 없다고 느껴질 때가 진짜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로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다시 주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아멘!!
주님,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말씀을 통해 다시 기도할 힘을 얻읍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가진 것을 활용하라
1895년 프랑스 파리의 그랑카페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루미에르 형제가 만든 첫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단순히 기차가 도착을 했다가 다시 떠나가는 짧은 영상을 보기 위해 돈을 내고 모였습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스크린 속의 기차를 보고 놀라서 도망을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루미에르 형제가 영화로 큰 돈을 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루미에르 형제는 영화산업에서 곧 손을 뗐습니다.
단순히 어떤 장면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도 따라 시작할 수 있기에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루미에르 형제의 말처럼 사람들은 단순한 화면을 보는 것에 슬슬 지루함을 느껴 더 이상 영화를 보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나고 화면 편집이라는 기술이 개발되고, 짧은 장면들을 이어 이야기를 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영화 산업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루미에르 형제는 영화라는 기술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 기술의 가진 미래는 20년 뒤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할 힘이 있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의 천국을 보장하는 말씀의 능력을 믿음으로 활용하십시오. 아멘!!
주님,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알고, 그 능력대로 구하는 믿음을 주소서.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씀을 근거로 구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한 가지 차이점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고든 바이런과 월터 스콧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먼저 두 사람은 작품 하나로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됐습니다. 월터 스콧은 ‘스코틀랜드 민요집’으로 당대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고, 바이런은 ‘헤럴드의 순례’라는 책으로 성공을 한 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다리에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애에 대한 관점으로 인해 두 사람의 인생은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바이런은 다리의 장애를 심각한 콤플렉스로 여겼습니다. ‘절름발이’라는 말을 어쩌다 했다는 이유로 첫사랑과도 헤어졌고,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작품으로 얻은 인기와 명예를 적극적으로 즐겼습니다.
그러나 월터 스콧은 장애를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자기 작품에 수여되는 많은 상들을 정중히 거절했고 다만 많은 분들이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작가로써의 명성과는 달리 비참한 인생을 살다 간 바이런은 평생 동안 월터 스콧을 자신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과 명성을 바쳐서라도 월터의 행복을 사고 싶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환경적인 조건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알고 그 품에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행복의 조건임을 깨달으십시오. 아멘!!
주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을 더욱 허락하소서.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던 나는 하나님의 소중한 작품임을 기억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친구의 할 일
수잔 폴리스가 쓴 산문 ‘친구란’에 나온 글입니다.
‘우리 모두는 친구가 필요하다.
웃고 싶을 때, 울고 싶을 때, 외로울 때, 아플 때, 그리고 서러울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는 언제나 친구가 필요한 존재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상처가 아문다.
친구는 네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네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사람
또 즐거울 때 찾아오는 사람,
괴로울 때 찾아오는 사람,
친구는 네가 무엇을 하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친구는 너에 대한 진실을 너에게 말해주는 사람,
네가 경험하는 것을 항상 알고 있는 사람,
항상 너를 격려해주는 사람,
너와 경쟁하지 않는 사람,
너의 일이 잘 돼 갈 때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친구란 너의 일이 뜻대로 안될 때 위로해주는 사람이며,
서로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완전 할 수 없는 또 다른 너 자신이다.
그게 바로 친구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친구가 필요하다.’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필요하며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보다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이런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는 예수님이 나를 친구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아멘!!
주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동역할 귀한 친구를 보내주소서.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고 함께 해주는 진짜 친구가 되어줍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16일의 끈기
클레어 로마스는 말을 타다 실수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슬픈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후 ‘로봇 슈트’라는 인체공학 보조기 덕분에 걸음을 걸을 수 있긴 했으나 재활이 너무 힘들었고 특히나 8천만 원이나 하는 보조기의 가격이 더욱 문제였습니다. 클레어는 자신처럼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람들을 위해 더 저렴한 가격의 ‘로봇 슈트’가 개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마라톤에 참가해 기금을 모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훈훈한 의도와는 달리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재활 첫날 클레어는 고작 30걸음을 걷는데 그쳤고 마라톤 일정까지는 3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클레어의 남편과 딸은 엄마의 꿈이 지치지 않도록 늘 곁에서 도왔습니다. 마라톤 당일도 클레어와 뒤와 옆을 지키며 가족이 함께 지키며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비록 클레어의 완주는 16일이나 걸렸지만 어쨌든 클레어는 42.195킬로미터를 완주했고 결승선에는 그녀의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더불어 클레어는 ‘로봇 슈트’를 착용하고 마라톤을 완주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고 이 소식이 퍼져가며 마라톤을 완주한 당일에만 2억에 가까운 성금이 모였습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 날까지 완주하십시오. 아멘!!
주님, 창대케 하실 주님의 손을 믿으며 작은 발걸음을 떼게 하소서.
사명을 위한 아주 작은 결심일지라도 오늘 시작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노력이 아닌 은혜
‘래디컬’의 저자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은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할 때마다 애슐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애슐리는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더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나온 대로 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럼에도 믿음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진 애슐리는 더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경건 서적을 읽고, 기도를 통해 부르짖었으나 여전히 확신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침내 모든 시도를 그만두고 완전히 포기를 했을 때 예수님의 그의 마음속에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며 구원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목사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은 우리의 노력이 필요 없다 것이며 우리가 구원을 위해 위험한 곳으로 떠나고, 말씀을 달달 외우고, 하루에 10시간 씩 기도한다 해도 이런 행동으로 구원은 얻을 수 없기에 오로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만이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회개의 순종으로 참된 은혜를 누리십시오. 아멘!!
주님, 오직 주님의 공로로 얻게 된 은혜에 감사하게 하소서.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주님의 보혈을 생각하며 겸손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인생을 다시 산다면
85세에 세상을 떠난 켄터키 주에 살던 한 노인이 쓴 ‘내가 만약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란 시입니다.
‘내가 만약 인생을 다시 산다면
그때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더 우둔하게 살리라.
되도록 심각해지지 않고
좀 더 즐거운 기회들을 잡으리라.
여행도 더 자주 다니고
석양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먹고 싶은 것은 참지 않고 먹으리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대신
순간을 맞이하면서 살아가리라.
간단히 꾸려 더 자주 여행길에 오르리라’
세상을 떠나기 전 대부분 후회하는 것은 큰 실수나 성공이 아니라 일상의 소중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귀하 하루에 담긴 은혜와 축복을 놓치지 말고 감사히 누리십시오. 아멘!!
주님,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한 하루가 축복임을 알게 하소서.
지나 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도록 매일 하루를 최선을 다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2절의 복음
독립운동가 서재필 선생이 감옥에 갇혀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때입니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쓰러져 누워있던 이상재 선생은 우연히 마룻바닥에 끼워진 작은 종이쪽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쪽지에는 마태복음 5장 38,39절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일본군에게 모진 고초를 당하던 이상재 선생은 이 말씀을 보고 오히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마음속에 이 말씀이 떠나지 않았고 결국 이 두 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그동안 같은 독립운동가인 서재필 선생으로부터 수차례 복음을 들었으나 그때마다 완강히 거절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순간에 우연히 만난 단 두절의 말씀으로 마음이 열렸고 복음을 믿게 됐습니다.
단 두 절의 말씀도 한 사람의 마음을 열고 변화시킬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복음이자 능력이기에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성도들의 의능력이자 본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십시오. 아멘!!
주님, 전하는 것만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복음의 힘을 알게 하소서.
언제든 전도할 수 있는 주보와 전도지를 준비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당신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2)
샬롬! 어젯밤엔 좀 주무셨는지요? 아무쪼록, 오늘 하루, 밝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6일자 ‘뉴욕타임즈’에 ‘건강을 위하여 하루 만보가 정말로 필요한가?’라는 기사가 실렸답니다. 결론은 ‘No’입니다. 걸음수가 중요한 게 아니고 시간, 즉 ‘하루에 30분 정도가 적당하다’는 겁니다. 물론, 본인 능력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준 상처보다, 자신이 그 자신에게 가한 상처가 더 클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자기 자신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자신에게 불친절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평소에도 거친 눈빛과 표정, 거친 말투로 자신을 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해도 자신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몸에 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비난하지 말자!’고 결심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삶은 ‘뜻대로 되는 일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삶의 고통과 불행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평소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라면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일반 사람에 대한 친절이 이웃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인 것처럼, 자기 친절 또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할 수 있습니다.
자기 친절 연습은 단순합니다. 자신에게 가끔 한 번씩 따뜻하게 주의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거칠게 대하는 ‘습관적인 반응’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거울을 보면서 가만히 자신의 눈동자와 눈 맞춤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색하더라도 지그시 바라보십시오. 어떤 이야기든지 충분히 귀 기울여 들어주고 안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말입니다.(출처; 좋은생각,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문요한)
의외로, ‘자기 자신이 지금 진정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이 장에 가니까, 그냥 생각 없이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레깅스 입는다고, ‘그 레깅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건지, 자신의 몸매에 어울리는 건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고, 남이 입고 다니니까 그냥 무조건 사서 입고 다닌다면, 그처럼 바보스런 짓은 없을 겁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삶은 행복하게 되리라 봅니다.(물맷돌)
[농부가 자신이 아끼는 소를 키우듯이, 나(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사랑의 밧줄에 매어 끌고 다녔다. 나는 그의 고삐를 늦추고 입에서 망을 벗겨서 편히 쉬고 잘 먹을 수 있게 해주며 직접 꼴을 먹여주기도 하였다.(호11:4) 유혹을 당할 때 거기에 빠지지 않고 이겨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약1:12, 현대어)]
“당신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오늘도 꽤 덥겠죠? 아무쪼록 무더위 잘 이기시고 건강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신과 전문의’가 ‘건강한 어른의 특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소중한 존재이며 우리 모두의 가치가 동등하다고 믿는다. 문제가 있으면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해결한다. 배우고 성장하고 변화한다.’
누군가가 당신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상대가 당신을 대하는 눈빛, 표정, 그리고 말투를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을 보자마자 바로 고개를 휙 돌리거나, 늘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안부를 묻는데 쌀쌀맞은 말투로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어떨까요? 물론, 마음이 상할 겁니다. 더 나아가, 당신이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데, 옆에서 “그럴 줄 알았어! 꼴좋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일 리 만무합니다. 당신을 좋아한다면, 기본적으로 따뜻한 눈빛과 말투로 대할 것이고, 당신이 힘들어 할 땐 공감과 위로를 보낼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눈빛과 말투, 그리고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실제 상담실에서 자주 묻는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낯설어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빛, 표정과 말투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향한 태도에는 너무 무신경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는 늘 자신을 만나고 있으며, 일정한 태도로 대하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거울 속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빛과 표정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은 단지 고통이 커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에 빠진 자기 자신을 위로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위로하기는커녕,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1차적 고통에 이어 2차적 고통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준 상처보다 자신이 스스로 가한 상처가 훨씬 큰 때가 많습니다.(출처; 좋은생각,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문요한)
자신을 학대하는 걸 ‘자학(自虐)’이라고 하던가요? 지나친 ‘나르시시즘’도 문제이겠지만, 자신을 비하하거나 학대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지만, 자존감이 없거나 늘 자학하는 사람은 아주 작은 시련에도 큰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자녀다.’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물맷돌)
[하나님의 자녀들아(하늘의 천사들이여, 쉬운성경) 여호와를 찬양하라. 영광과 권능을 우리 주님 여호와께 돌리고 높이높이 드높여라.(시29:1,현대어)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1)]
‘왜 내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샬롬! 지난밤엔 좀 주무셨는지요? 혹시 어젯밤도 열대야 때문에…? 아무쪼록 오늘도 내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눈(目)도 숨을 쉰답니다. 몸의 모든 세포는 산소를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데, 눈동자의 세포도 마찬가지랍니다. 눈은 눈물을 통해서 산소를 공급받게 된답니다. 눈물 속에 산소가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이 뻑뻑하면 인공눈물을 넣어줘야 한답니다.
암은 사람을 낮추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창조주 하나님께 매달리겠습니까? 하지만, 암에 걸렸을 때는 상황이 다릅니다. 병이 들어 옴짝달싹 못할 때,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극한의 상황이 역설적으로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암이 어떻게 축복일 수 있을까요? 제가 처음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던 날, 치료실로 내려가는 계단입구 벽에는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 저는 이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환난이 인내를 부르고 결국 소망을 이룬단 말입니까? 차디찬 기계 위에 누워 절망 속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환난 가운데서 무슨 소망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5년이 지난 지금 저에게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알게 하시고 인내하게 하시며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노력하는 사람만이 기적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왜 내가 암에 걸렸을까? 왜 하필 나인가?’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왜 내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어서 ‘내가 아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자, 저의 암 재발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항암치료가 거듭될수록, 하루 종일 구토하는 신세가 되고 보니, 저 자신이 손톱만큼 작은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제 입에서는 저절로 ‘하나님!’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출처; 희대의 소망, 전 연세대교수 이희대 박사)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소설가 최인호 씨는 5년간의 암 투병 끝에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도 투병 초기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삶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일부러 암에 걸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암에 걸리지 않아도 ‘삶의 진실을 깨닫기 위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물맷돌)
[저는 오직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들어온 모든 사실이 ‘주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진리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삼하7:22)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요1:14)]
제 마음속엔 이름도 모르는 동탄아줌마가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오늘 건강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얼마 전, 백신 접종하러 갔다가 혈압이 좀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름 알아보니, ‘약 처방보다는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원인들 중 저에게 해당하는 사항은 없었습니다. 단 하나, 체중이 문제였습니다. 운동량을 평소보다 배로 늘렸습니다. 그랬더니, 혈압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동틀 녘, 실눈 사이로 하얀 가운자락이 어른거리고,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야식집 영업을 마치고 새벽에 가게를 나선 것까지는 선명한데, 그 뒤론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눈을 뜬 곳은 병원응급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실려 온 것이었습니다. 위중한 환자들만 있다는 병실에 누워 ‘스텐트시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몸도 몸이지만, 가게를 비워둔 채, 날마다 늘어나는 병원비 걱정에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마다, 같은 병실에 있던 ‘동탄아줌마’는 “아들 보고 살아야 해! 몸이 중하지 돈은 나중이야!”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다행히 몸 상태가 호전되고 시술하지 않게 되어 한시름 놓게 된 어느 날, 동탄아줌마가 퇴원한다고 했습니다. 한 식구 같았던 아줌마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리려는데, 아줌마가 슬며시 저를 밖으로 불러내 봉투를 하나 쥐어주셨습니다. “입원할 때 갖고 왔는데, 난 쓸데가 없게 되었어! 얼마 안 되지만 이거 받아둬!” 깜짝 놀라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아줌마는 제 손에 봉투를 쥐어주고는 얼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라고 하니, 손을 저으며 저만큼 가버리셨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자그마치 50여 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속엔 이름도 모르는 동탄아줌마가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고마움을 어찌 보답해야 할지 동탄아줌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아줌마 덕분에, 저는 병이 많이 나아져 지금은 약물치료만 받고 있습니다. 저도 동탄아줌마처럼 어려운 사람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출처; 샘터, 강지혜)
이 세상에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수히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다만, 언론에 보도가 안 되고 있을 뿐입니다. 안 좋은 이야기라야 기사거리가 되는지, 언론에서는 대부분 나쁜 소식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으신 하나님은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물맷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시냇물과 연못이 있고 산골짜기에 샘물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땅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신8:7)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시133:1)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벧전2:19)]
저는 욕심 많은 야곱이었습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어젯밤도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신 건 아닌지요? 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눈(目)은 신체 중에서 노화(老化)가 가장 빨리 시작되는 기관이랍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질환이 ‘황반변성’인데, 그 증상은 다음과 같답니다. 시력이 감소한다, 찌그러져 보인다, 굽은 형태로 보인다, 시야의 일부분이 까맣게 보인다.
절름절름 걷는 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서 야곱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절대로 죽지 않는 죄’와 같은 ‘끈질긴 암세포’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었듯이, 야곱은 그의 ‘끈질긴 욕심’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지 않았던가요?
장자권을 갖고자 무던히 애를 썼던 야곱, 욕심을 채우려고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멀리 타향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야곱, 사랑하는 여인을 얻으려고 외삼촌에게 속임 당하면서 14년을 하루같이 보낸 ‘집념과 욕심의 사나이’ 야곱, 대식구를 이끌고 외삼촌 집에서 야반도주했던 야곱, 형 ‘에서’의 복수가 두려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했던 야곱, 부인과 자녀들과 온갖 뇌물들을 먼저 형에게 보내놓고 형이 공격하면 도망가려고 했던 야곱.
그 야곱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냈지만, 그러나 다리를 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한 번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째서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하셨던 걸까요? 야곱에게 환도뼈(허리의 뼈)는 인간의 무지와 한계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은 환도뼈 사건으로 그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어긋난 환도뼈’는 새로운 생명의 징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저는 욕심 많은 야곱이었습니다. 죽지 않고 있는 저의 암세포는 바로 저의 죄성(罪性)이었습니다.(출처; 희대의 소망, 전 연세대교수 이희대 박사)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소를 잃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외양간을 고쳐둬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약은 체, 잘난 척’은 어지간히 하면서도, 소를 잃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강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쓸데없는 욕심’과 ‘몇 푼어치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건강(인생)을 해(망)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물맷돌)
[악한 자는 자기 욕망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시10:3) 시기심과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약3:16)]
“왜요? 왜 하필 저인가요?”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오늘은 올해 73주년을 맞는 제헌절이자, 7월의 세 번째 주말입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주말이 되시길 빕니다. 요즘 유튜브에는 ‘고혈압은 병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현직 의사가 일본인이 쓴 책을 소개하고 있는 자료인데,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고혈압 상식과는 완전 상반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한 번쯤은 시청해볼만한 자료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모태신앙으로 평생 기독교교육을 받아왔지만, 그러나 저는 세상 앞에서 수치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저도 알 수 없는 너무나 큰 죄를 지어서, 평생토록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하나님한테서도 버림을 받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15세인 제가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기에, 하나님께서 이러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왜요? 왜 하필 저인가요?” 그리고 단단히 부탁드렸습니다. ‘눈을 고쳐 달라’고. 그 당시,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에 응답을 안 하고 계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꿈에서조차 하나님의 대답이 ‘노(No)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얼마나 위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계시는지’, 그때 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기독교방송의 ‘인생 상담’이라는 프로그램을 청취하던 중에,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는 ‘맹인으로 난 것이 그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성경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왜 이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나를 미워하며 열등감에 빠져 살았을까?’ 그때 저는 처음으로, 저의 실명(失明)이 죄의 대가(代價)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출처;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
여호와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악한 것이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혹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물맷돌)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만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습니까? 그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일 뿐,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다.(요9:1-3)]
“당신은 행운아라고 생각합니까?”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혹시 열대야로 인하여 밤잠을 설치신 것은 아닌지요? 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사정상 참석치 못해서, 또는 다른 이유로 돈을 보내야 하는데 계좌번호를 물어보기가 곤란할 경우, 카톡을 이용하면 됩니다. 카톡에서 우선 이름을 선택한 후, 맨 밑의 왼쪽에 있는 +기호를 클릭하면 ‘송금’메뉴가 보일 겁니다. 간단한 절차를 밟으면 송금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진짜 행운아다.’ 이런 마음만 있다면 어떤 일을 하든지 신이 납니다. 나를 행운아로 생각하니 즐겁고, 그러한 즐거운 마음 때문에 긍정적으로 일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행운아’라는 생각을 다시 지지해주는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 탓이나 운을 탓하게 됩니다.
저는 한때 사람을 채용하기 전에 “당신은 행운아라고 생각합니까?”라고 꼭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행운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행운’이라는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얻게 되는 ‘뜻밖의 성공’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스스로 노력한 끝에 정당한 보상과 결과를 얻는 것도 행운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운아 앞에서는 제아무리 치명적인 위기라 할지라도 ‘성공의 구름판’이 되지 않고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인천공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저에게 행운이 찾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전 세계인이 오고 싶어 하는 공항, 전 세계 공항들이 배우러 오는 공항,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장 큰 자랑이 되는 공항, 그리고 모든 직원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공항을 만들어가는 행운 말입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직원들과 함께 그 꿈을 나누고 싶습니다.(출처; 우유곽대학을 빌려드립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대표 이채욱)
유튜브에서 ‘말의 힘’으로 검색하면, 말이 얼마나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입에서 바람직한 말이 나오기도 하고, 아니면 그 반대로 부정적인 언어가 나오기도 하는 겁니다. 고로, 우리는 평소에 늘 언제나 좋은생각과 좋은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물맷돌)
[액운이란 바르지 못한 자들에게만 따라다니는 것, 행운은 바르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따라다닌다.(잠13:21,현대어) 누구나 아는 대로, 축복하는 사람은 언제나 축복받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히7:7,현대어)]
내 인생, 내 십자가만 지고 가자!
샬롬! 새 아침입니다. 아무쪼록 무더위 잘 이겨내시고, 편안하고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소리 없는 실명(失明)을 부르는 질환으로 알려진 ‘녹내장’은 특이증상이 거의 없어서 위험한 단계까지 방치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녹내장은 시신경이 점차 약해지면서 시야가 좁아지는 질병인데, 눈이 이상하다 싶으면 조기진단과 함께 꾸준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혼 15년 차 40대 중반의 김 여사가 ‘요즘 자녀들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면서 상담을 청했습니다. 김 여사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늘 머릿속에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외국에 가서 살고 싶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오지에서 혼자 살고 싶다.’, ‘사람 자체가 싫고 신물이 난다.’라는 말이 맴돌고 있지 않으신가요?” 그러자 김 여사는 펑펑 울면서 “어떻게 제 마음을 그처럼 잘 아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왔습니다. 자기 십자가만으로도 버거운 인생인데, 아버지의 십자가, 어머니의 십자가, 동생의 십자가, 결혼해서는 시댁식구들의 십자가까지 짊어지고 살아왔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구절은 “자기십자가만 지고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내 인생, 내 십자가만 지고 가자!’라는 문구를 ‘휴대폰과 사무실, 주방의 냉장고와 화장실에도 붙여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인생문제를 푸는 마스터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무슨 부탁을 하든지, 그 십자가의 소유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내 십자가라면 흔쾌히 지되, 남의 십자가는 본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십자가를 남편에게 떠넘기는 일도 이제는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봐서, 자기 잘못도 인정하고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결심도 선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소풍가는 소녀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김 여사의 모습을 기대해봅니다.(출처; 가정과 건강, 상담학박사 이병준)
물론 타인의 아픔과 시련을 전혀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문제는,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괜히 오지랖만 넓어서 남의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할 게 아니라, 우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든지 짬을 내어 ‘어려운 형제와 이웃’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물맷돌)
[내 죄가 내 머리까지 넘쳐서 무거운 짐같이 되었으므로,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시38:4)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