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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사역자들의 삶(23)
2016년7월3일(일)
고전12:8~10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어떻게 하면 사역자가 되는가? 물론 성경도 많이 알아야 되고 한데 그런 것은 누구나 공부를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격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이 아니고 지식에 관계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더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식만으로는 사역을 할 수 없다. 기본적인 인격이 갖추어져야 한다.
연약함으로 자랑함
연약함이 무슨 자랑인가? 자연 세계, 즉 일차적 세계는 약육강식의 구조 안에서 생존한다. 크고 강한 자가 작고 약한 자를 잡아먹고 생존하는 것이다. 호랑이는 양을 잡아먹고, 양은 풀을 뜯어 먹고 산다. 예외는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다 그렇다는 것이다.
여러 번 말씀을 했다. 오늘은 연약함으로 자랑한다. 연약한 것이 무슨 자랑이냐? 세상에서 이런 자랑은 하면 할수록 병신이 된다. 자연세계, 우리가 사는 일차적인 세계에는 양육강식의 구조로 되어 있다.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그러니까 선하냐 악하냐 하는 이런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인간세계에서만 그것이 좋다 나쁘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약육강식을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세계는 전부 약육강식의 구조로 되어 있다. 크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생육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는 것을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잘못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호랑이나 사자는 양을 잡아먹고 산다. 개별적으로 생각하면 참~ 비참하다. 양이 잡혀가는 것을 보면 아무리 뛰어도 그 억센 놈한테 걸리면 한입감이다. 입에 물려서 끌려가는데 그래서 먹이가 된다. 양은 또 어떤가? 양은 풀을 뜯어먹고 산다. 풀은 가만히 있으니까 맘대로 뜯어먹고 산다. 밤새도록 이슬 맞혀서 키워놓으니까 양이 아침에 와서 뜯어먹어버린다. 그러니까 그것도 약육강식이다. “대어는 중어식하고 중어는 소어식한다.”는 말이 있다. 큰 고기는 중간고기를 잡아먹고 중간고기는 작은 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서로 잡아먹고 산다. 강한 놈이 항상 잡아먹는다.
치어를 양식하게 되면 매일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잉어같은 것을 새끼를 낳아서 키우면 한군데 그냥 놔두면 잉어가 다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 중에 강한 놈이 늘 잡아먹어서 제일 강한 놈만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놈은 먹는 놈은 먹는대로 큰다고 한다. 사람만큼 크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치어가 생기면 계속 건져서 다른 대로 옮겨야 한다. 옮기지 않으면 다 잡아먹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먹는 멸치 이런 것은 바다세계에서는 먹이감이다. 그래서 멸치가 많으면 고기가 많이 오고 멸치가 없으면 고기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해안에도 멸치를 안 잡아먹어야 고기가 많이 나는데 멸치를 싹~ 잡아버리니까 먹을 게 없어서 고기가 잘 안난다. 그러니까 멸치는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극에서 고래들이 새우를 잡아먹는 것을 보니까 몇 놈이 연합작전으로 새우를 몰아서 먹는 것을 보니까 하수구에 물들어가듯이 고래입으로 새우가 들어간다. 혹시 예외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다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개미도 떼를 지으니까 이길 수 있는 것이지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 그런데 흰개미떼가 가는데 거기에는 아무 동물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모든 것이 약육강식이다.
인간 사회 역시 한가지다. 자연 그대로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신학적으로는 이런 세계를 자연 계시의 세계라고 한다. 하나님도 법칙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사회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연그대로 조금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자연계시의 세계라고 한다. 일반계시의 세계, 여기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작용한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면 저것을 보고 어찌 가만히 놔둘 수 있나. 저 불쌍한 양이 잡혀갔는데 먹잇감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뭐하고 있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도 자연법칙에는 제한을 받는다. 만들어진 법칙을 하나님이 바꿀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저럴 때 왜 그냥 놔둡니까 이렇게 못한다. 그것을 일일이 간섭하게 되면 자연이 깨져버린다. 자연이 자연대로 살려면 그 법칙이 있어야 살아간다. 자연법칙 아래서 연약하다는 것은 운명이다. 멸치로 태어났으면 잡혀 먹는 것이 자기의 삶이다. 풀로 태어났으면 띁어 먹히는 것이 자기 삶이다. 거기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큰 틀에서 보면 그렇게 해야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랑이나 사자같은 것들은 개미떼처럼 많이는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이 만일 개미떼처럼 생산되어버리면 살아남지 못하고 자기도 멸종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숫자를 조정하게 만들었다. 작은 것일수록 새끼를 많이 까서 많이 퍼지고 큰 것일수록 새끼를 적게 낳는다. 이렇게 조정했지만 그 이상은 조정이 안 된다.
자연 법칙 아래서 연약함은 운명이다. 약육강식이 명확해질수록 더욱 비참해진다. 세상이 세상다워질수록 연약한 자는 생존마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최고 소원은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약육강식이 명확해질수록 약한 것은 더욱 비참해진다. 그래서 세상이 세상다워진다는 것은 약육강식이 심해진다는 뜻이다. 세상이 세상다워지면 약한 자는 생존마저 어려워진다. 인간이 그것을 법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도덕이나 율법을 만들어서 억지로 조정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무너지면 동물하고 똑같아진다.
그래서 인간의 최고소원은 강해지는 것이다. 누구도 눌리고 싶고 누구도 잡아먹히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최고소원은 강해지고 싶은 것이다. 나도 안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 지려고 발버둥치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주변을 시끄럽게 하게 된다. 질놈은 져야 하는데 지면 억울하다. 억울하니까 오만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되는 것이다.
아담은 능력자가 되려고 하나님을 거역했다. 이탈의 동기는 능력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다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소원은 강해지는 것이다. 연약함으로 은혜를 구하고 능력을 받아서 강해지면 인생의 한계와 운명을 벗어나리라 생각한다. 능력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셈이다.
아담은 왜 타락했는가? 왜 하나님을 떠났는가? 능력 때문이다. 선과 악이라고 표현했지만 선과 악의 내용이 아니고 능력이다. 이탈의 동기가 능력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의 세계는 지금 불교에서는 없다. 선도 악도 다 거짓이다. 사람이 다~ 만들어 놓을 것일 뿐이다. 그런데 능력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있다. 불교에서는 도력이 높은 사람, 도력이 낮은 사람이 있다. 그러면 높은 사람은 큰 스님, 적은 사람은 작은 스님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능력에 대해서는 겉으로 말을 못해도 속으로는 제일 원하는 것이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옛날 얘기가 아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 중에 더하면 사역자들,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사람들의 소원은 강해지는 것이다. 목회자의 세계에 가면 이것이 아주 강한 곳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는 50만명도 있고 약한 자는 세명밖에 안 된다. 그 세명이 자기하고 마누라 하고 아들 이렇게 셋이다. 그러니 얼마나 차이가 심하냐는 것이다. 하늘과 땅차이다. 세상에 이런 차이는 없다. 9급 공무원하고 대통령은 월급차이가 얼마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세사람 있는 곳에는 밥값도 안되고 심지어는 죽값도 안된다. 그런데 50만명이 되면 어찌 되겠나. 그래서 제일 심한 곳이 교회다.
그러니까 인간의 기본적인 소원은 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가 인생이 약하니까 하나님 잘 믿고 은혜를 구해서 능력을 받고 강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세상 방법으로는 내가 능력이 없으니까 하나님에게 내가 능력을 받아서 강해지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참 좋은 것같지만 본성은 똑 같은 것이다. 인생의 한계인 운명을 벗어나려고 한다. 인생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능력에 있다. 선도 행하려면 천사같이 행할 수 있는데 능력은 마음대로 안 된다. 결국 능력이 사람의 궁극적인 소원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을 찾겠냐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모든 욕심이, 아무 욕심이 없어도 기본적으로 강해지려는 욕심이 있다. 자기가 살아남으려니까 그렇다.
아담은 사단에게까지도 능력을 구했다. 인간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며 일차적 세계를 지배하려면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사탄이 와서 말할 때 ‘아~ 이것이 사탄의 말이구나.’하고 알았지만 왜 사탄의 말을 따랐던가? 전능자가 되고 싶고 인생의 한계와 운명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인간은 뭔가? 능력이 없으니까 부족하다는 것이다. 불완전하다. 부족하다는 것은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일차적인 세계를 지배하려면 능력이 필요하다. 어디가도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능력이 없어도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다가 장사를 하면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야~ 똑 같은 장사를 하는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돈이 있다고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능력이 있어야 장사를 할 수 있다. 돈 버는 사람에게 이러니저러니 할 것이 없다. 다 능력이 있어서 돈을 버는 것이다. 특혜를 받아서 버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특혜를 받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나 특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지 능력 없는 사람에게 특혜를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경제개발을 할 때 외국에서 차관을 빌려왔다. 빌려온 그 돈을 누구에게 줘야 손해를 안 보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정주영氏를 도와줘야 하고 이병철氏를 도와줘야 했다. 그래야만 돈이 불어나니까 그렇다. 처음에 그 돈을 농촌에 뿌려봤다. 그런데 돈이 회수가 되지 않았다. 돼지 한마리씩 사주고 산양을 한 마리씩 사주고 했는데 그 돈이 회수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실패했다. 그 다음부터 유능한 사람에게 돈을 주었다. 그것을 잘못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가 살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니까 일차적인 세계에서는 능력이 필요하다.
능력이 없으면 자기 분수를 알아서 자기 분수에 만족하고 살아야 그래야 행복하다. 그런데 능력이 없으면서 욕심이 많다. 희망은 크다 이러면 고생한다. 내 분수를 넘어간 것이니까 그렇다. 나는 천만을 벌면 딱 맞는 사람인데 1억을 벌고 싶다고 하면 고생하는 것이다. 천만원 벌면 만족하다고 하면 괜찮은데 남은 10억을 버는데 나는 왜 1억밖에 못버나 이렇게 되면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 분수대로 백만원 벌 사람이 있고 천만원 벌 사람이 있고 일억벌 사람이 있고 그렇다. 다 능력이 다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세계를 알게 되면 세상에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할 일이 별로 없다. 다 법칙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할 만큼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누가 돈을 벌지 말라고 했는가? 누가 달음질을 천천히 하라고 했는가? 다 빨리 하라고 한다. 자기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억지로 못하게 한 게 아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아! 내 분수는 이것이구나!’ 이렇게 알아야 한다. 자기 분수를 알아서 분수만큼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된다면 세상은 허무하지 않겠는가? 너무너무 살벌하고 말이다. 지금 경쟁 시대에 들어와서 이것을 굉장히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신자유주의라고 해서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할 수 있고 없는 사람은 처지고 이런 세계로 돌입했다. 이것은 전 세계가 다 똑 같다. 한 판에서 돌기 때문에 이것을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달려가는 데 너무 혼자 달려가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뒤돌아서서 어느 정도 복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왕창 무너질 것이라고 했는 데 안 무너진다.
우리는 이 일차적 세계를 보면서 잘못했다 잘했다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렇게 생긴 세계다. 산에 가 보면 뻐꾸기는 무슨 새의 둥지에 자기 알을 까놓고 간다. 요즘 산에는 뻐꾸기가 많이 운다. 그놈이 지금 알을 까러 와서 우는지 새끼를 데리러 와서 우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까놓았는데 자기 새끼들이 나오면 남의 새끼들은 밀어내서 다 죽인다. 그러다 이놈이 크면 밖에서 뻐꾹뻐꾹 부르는 어미를 따라서 날아가 버린다. 참 이거 너무 잔인한 세계다. 어미는 자기 알인 줄 알고 먹이를 물어다 먹인다. 얼마를 나르겠는가? 하루에 수 없이 나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먹여 놓고 나니까 크더니 어디로 날아가 버린다. 그것을 보고 ‘뻐꾸기 너는 정말 교활한 놈이다. 너 같은 놈은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이러고 있으면 되겠는가? 이것은 할 수 없다. 뻐꾸기는 그렇게 사는 놈인데 어쩌겠는가? 본능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세계를 보는 우리의 입장은 ‘거기에도 하나의 법칙이 있구나.’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잘 살려면 그 법칙을 이용해야 한다. 법칙을 이용해야지 원망하고 있으면 안 된다. 잘 활용을 해야 된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면 너무 비참하다. 인생이라는 게 너무 쓸쓸하고 비참하고...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을 봐도 어떤 때 보면 ‘참 아름답다.’ 이러다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잔인하다.’ 이렇게 되어 버린다. 독사가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을 보라. 한 번 뱀에게 물리면 그냥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그게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고통이 덜하지 않겠는가? 야금야금 들어간다. 그런데 이 놈이 머리부터 먹히면 차라리 숨이 막혀 죽으니까 괜찮은 데 다리부터 물렸다. 그러면 이놈은 죽을 때까지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마지막에 목만 남는다. 그러면 아직도 안 죽어서 눈을 깜박거리고 있다. 개구리가 뱀에게 물려 죽는 것을 보면 정말 비참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살면서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세계만이 전부라면, 우리의 모든 것이라면,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만일 이 생뿐이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 그랬다. 이런 세계에서 연약한 자는 설 자리가 없다. 강한 자는 욕 얻어먹고 연약한 자는 설 자리가 없다. 다른 세계가 있어야 하겠다. 이런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참된 자랑
바울은 자기도 자랑은 많지만 자신의 연약함만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며 그 안에 그의 능력이 머무르고 약할 그때에 곧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열어 보여 준다.
바울은 지금 참된 자랑을 하고 있다. 자기도 이런 저런 자랑할 게 많지만, 1차적인 세계 안에서 자랑이 있지만 자신의 연약함만 자랑하겠다고 한다. 무슨 자랑이 있기에 연약함만 자랑하고 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그 안에 그의 능력이 머문다고 한다.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그리고 약할 그 때에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가 있겠는가?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또 약한 데 머무르고, 그 약할 때 강해진다는 것이다.
자연 세계 안에서는 이런 것이 없다. 1차적 세계를 가지고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하려면 없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세계를... 우리가 지금 교회에 온 것은 다른 세계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1차적 세계를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면 안 된다. 누가 어떠니 누가 어쩌니 다 1차적 세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자세히 봐 보라. 순모임 할 때나 뭘 할 때나 누가 어떻고 누가 어쩌고, 또 이런 것 때문에 걸려서 교회에 못 나오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걸리는 일이 항상 있다. 항상 있는데 걸려서 교회에 못 나오는 사람만 손해다. 이게 이상하다. 남을 걸리게 하는 사람은 훨훨 다른 데로 날아가 버린다. 내가 언제 남을 걸리게 했는지 그것도 모른다. 훨훨 다른 데로 날아가 버린다. 참 이상한 세계다. 그러니까 이것을 모르고 대구교회 생활을 하면 아주 문제가 많다. 그러면40년을 다녀도 늘 걸리기만 하다가 만다. 40년 동안 한 번도 비약을 못하니까 날아가지 못했으니까
바울은 분명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세계, 교회는 다른 세계다. 부활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 교회다. 그러니까 다른 세계다. 부활로 인해서 생겨난 세계니까. 죽었던 사람이 소생해서 만든 세계가 아니고 완전히 죽어서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이 와서 만들어진 것이 교회다. 그러면 이 세계도 다른 세계다. 교회 온 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된다. 이것을 알기만 하면 아주 쉽다. 아주 쉬운데 이것을 모를 때는 긴가 민가 헤매게 되고 생각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지게 된다.
‘교회를 오면 좋을 줄 알았더니...’ 처음에 올 때는 굉장히 좋았는데 와서 보니까 이 구석에는 이렇고 저 구석에는 저렇고 눈이 밝아져서 사방이 다 보인단 말이다. 그래서 걸려서 못 살겠다 한다. 그래서 교회를 뜯어 고쳐 보려고도 하고 원망도 하며 여러 가지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교회가 뜯어 고쳐 보려고 해도 뜯어 고쳐지지도 않고 자기만 힘드니까 안 되는 사람은 나가 버리고 세상에 나가서 5년이나 10년 씩 돌아다니다가 가 보니까 또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시 또 돌아온다. ‘그래도 거기가 낫구나.’ 그래서 다시 돌아온다.
이차적 세계는 법칙이 다르다. 자연법칙이 아니라 은혜의 법칙이 작용한다. 이 법칙은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신다.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다른 세계에 와 있다. ‘나는 똑 같은 사람인데 무슨 다른 세계냐?’ 그게 아니다. 다른 세계다. 이것은 이차적 세계다. 이차적 세계인데 이차적 세계는 법칙이 다르다. 1차적 세계와 같은 법칙이 아니고 다르다. 공중의 법칙과 땅의 법칙이 다르고 물속의 법칙이 다르듯이 다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기 때문에 물속의 법칙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새는 공중에 살기 때문에 공중의 법칙에 따라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차적 세계는 법칙이 다르다. 자연 법칙이 아니고 은혜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 법칙은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는 법칙이다. 은혜의 법칙은 자연 법칙처럼 기계적으로 딱 주어진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는 법칙이다. 그래서 이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둘로 갈라져 있는 셈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는 자연 계시의 세계고 다른 하나는 특별 계시의 세계다. 교회는 자연 계시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 계시의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자연 계시의 세계 속에 속해 있지만 교회라고 하는 이 자체는 특별 계시 안에 속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어떻게 지었는가? 사람을 처음부터 자연계시 안에서 사는 자로 만들려면 강한 자로 만들어야 했다.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대신할 자를 만들려면 그렇게 만들어서 자연 계시를 지배하게 만들려면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가장 강한 자가 지배할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을 지으실 때 강한 자로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을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라.’ 고 했다. 얼른 생각하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아 자식을 많이 낳아서 씨족을 많이 퍼트려서 이러 저렇게 잘 살아라.’ 이런 말 같다.
그렇게 하려면 강한 자를 만들어야 했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도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부르면 되는가? 히틀러 같은 사람을 불러야 했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와 같은 사람을 불러 놓고 말해야지 아브라함과 같이 올 데 갈 데 없는 사람을 불러 놓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공중에 나는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시더라.’ 그게 말이 되는가? 말이 안 된다. 나 같은 사람을 불러 놓고 ‘육군참모총장 해라.’ 하면 되겠는가? 참모총장하려면 참모 총장이 될 만한 사람을 시키는 것이지 아무나 시키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땅을 지배하라고 해 놓았지만 사람을 강한 자로 지어 놓지 않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강한 자로 지으시지 않았다. 형상을 나타내려고 흙을 사용했고 열매를 얻으려고 산 혼을 찾았으며 배필을 삼으려고 갈비뼈를 취하셨다. 다 연약한 것들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그는 연약함 안에서 자신의 필요를 채우신다.
형상을 나타내려고 하면서 무엇을 사용했는가? 흙을 사용했다. 당신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려면 흙을 가지고서는 안 된다. 아무 것도 아닌 흙을 가지고 어떻게 위대하신 분을 나타내겠는가? 이것이다. 옛날 고대 왕국에서 제왕들이 자기들을 나타낼 때 전부 동상 같은 것을 해 놓았다. 다니엘서에 보면 큰 동상이 보였다고 한다. 머리는 금이고 가슴은 구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엄청난 신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흙을 가지고 그것을 짓겠는가? 흙으로 하면 금방 무너질 것인데 흙으로 어떻게 큰 왕을 만들어 내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흙을 사용했다고 한다. 푸석푸석한 흙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는 흙을 사용했다. 빚은 대로 되는 흙을 사용했다. 흙은 그렇다. 자기를 빚은 대로 모양이 만들어진다. 초 모양으로 만들면 초가 되고 개 모양으로 만들면 개가 된다. 흙은 아무나 주무르는 대로 된다. 만진 대로 된다. 아이들이 흙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다. 만들고 싶은 데 그렇다고 칼을 쓰겠는가, 톱을 쓰겠는가, 무엇을 쓰겠는가? 못하니까 흙을 주면 그것을 가지고 하루 종일 주무르고 논다. 다음 날 또 한다. 그 다음 날도 또 한다.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도 지치지 않고 질리지 않는다. 장난감은 몇 십 만 원짜리를 사 줘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만이다. 오래 가지고 노는 놈은 멍청한 놈이다. 머리가 좋은 놈은 하루 가지고 놀면 안 논다. 똑 같으니까. 아이들은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흙이 제일 좋은 장난감이다. 그런데 이 흙을 부모들이 못 주는 것은 옷을 버리니까 못 주는 것이지 흙만 갖다 주면 장난감을 하나도 사 줄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
열매를 거둬야 하는 데 산 혼을 만들었다.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산 혼이 되었다고 한다. 산 혼은 우리의 정신세계인데 이것은 우리의 심장이 멎어 버리면 같이 멎어 버린다. 병원에 가서 보면 이렇게 삐삐삐 하다가 끝나 버리면 그냥 일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면 죽었다는 것이다. 하늘에 구름이 돌아다니다가 바람 불면 그냥 없어진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산 혼이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니다.
배필을 삼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취했는가? 갈빗대다. 갈빗대는 우리 몸에서 가장 약한 뼈다. 잘못하면 갈비 부러진다. 충격 받아도 부러지고 눌려도 부러진다.
이것들은 다 연약한 것들이다. 흙도 그렇고, 산 혼도 그렇고, 갈빗대도 그렇다. 다 연약한 것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흙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용한다면, 자기는 영이기 때문에 늘 변형을 해야 한다. 오늘은 이런 모양이지만 내일은 저런 모양이어야 한다. 오늘은 호랑이 모양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사자 모양이 필요하다. 모레는 토끼 모양이 필요하다. 흙은 그때그때 빚어서 만들면 되지만 돌로 해 놓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은 흙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혼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각인 데 하나님은 오늘은 이렇게 생각하고 내일은 저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혼이라는 놈이 딱 고정되어 있으면 오늘은 이렇게 생각하는 데 내일은 저렇게 생각할 수 없다. 안 그렇겠는가? 우리의 생각을 보라.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데 아침에 올 때 생각 다르고, 지금 생각 다르고, 오후에 순모임하고 갈 때 생각이 달라진다. 계속 달라지는 데 계속 달라져도 그것을 다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끊임없이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거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컴퓨터 같은 경우는 기계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 법칙을 떠나면 잘 안 된다. 기계적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칙을 떠나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은 기계적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한다. 생각은 자유라고 한다. 생각이 왜 자유인가? 이것이 산 혼이기 때문에 그렇다. 생각은 자유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왜 연약한 것으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연약함 안에서 자신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다. 우리는 강한 것이 있으면 내 필요가 다 채워지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은 강한 것으로 자기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연약한 것을 가지고 자기 필요를 채운다.
형상을 만들 때는 흙이 필요하고 생각을 바꿀 때는 산 혼이 필요하고 배필이 필요할 때는 갈빗대가 필요하다. 자세히 보자.
형상을 빚기 위한 흙
하나님은 실재이시고 형상은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절대적 갈망은 자신을 나타낼 형상이다(창1:26참).
형상을 빚기 위해서 흙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실재이시고 형상이 없다. 우리 마음이 있는데 마음은 모양이 없다. 그러니까 마음이 나타나려면 뭐가 필요한가? 어떤 형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 마음이 똑같이 한 개만 있으면 같은 형상을 가지고 표현하겠지만 내 마음이 아침마음이 다르고 점심 마음이 달라진다면 그때그때 형상이 달라져야 한다.
내 마음이 무엇을 잡고만 싶고 집고만 싶다면 손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걸어가고 싶다면 손을 가지고 못 간다. 그때는 발이 필요하다. 내 마음이 앉고 싶다면 그러면 뭐가 필요한가? 궁댕이가 필요하다. 손으로 앉겠는가, 발로 앉겠는가. 그러니까 그때그때 늘 변형을 해야 한다.
실제는 있지만 형상이 없는 분이다. 그러니까 절대적 갈망은 무엇이냐? 자신을 나타낼 형상이 필요한데 거기에 적합해야만 된다. 그러려면 늘 바꿔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흙처럼 토끼 만들어 놓았다가 강아지를 만들어 놓았다가 맘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한번 토끼로 만들어 놓으면 영원히 토끼이고 한번 강아지로 만들어 놓으면 영원히 강아지이고 이러면 안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해 본다면 ‘ 아 하나님은 흙이 필요하구나.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흙은 자기 모양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빚은 대로 된다. 자기 모양이 없는 사람은 빚은 대로 된다. 그런데 자기 모양이 강하게 있는 사람은 빚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러니까 야곱은 왜 그렇게 어려웠는가. 야곱은 모양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십 년 동안 주무르고 흙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다.
왜 우리가 연단을 받는가? 내 모양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양, 고유한 모양, 고유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쓰이기가 어렵다. 불 끄러 가라고 하면 쓰기가 좋았는데 우물 청소 하러 가라고 하면 못 쓰는 사람이다. 우리 교회도 그렇다. 잘 봐라. 어떤 것은 어떤 면에는 참 좋은데 어떤 면에는 아주 못쓴다.
그런데 만약 흙이라면 이런 면에도 쓸 수가 있고 저런 면에도 쓸 수가 있고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필요할 수 있어야 한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그러려면 제주도를 보낼지 강원도를 보낼지 마음대로 보낼수 있어야 한다. 제주도로 가라고 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하고 강원도로 가라고 하니까 ‘아 나는 강원도는 못 가는데요.’이러면 곤란하다.
CCC에 들어가니까 김 목사님이 우리 간사들을 모아놓고 하는 말이 ‘우리는 campus crusade다. 그러니까 십자군이라는 것이다. 군대나 마찬가지이다. 어디로 가라하든지 그대로 가야한다. 언제든지 그만 두라고 하면 그만둬야 한다. 직장이 아니다.’이것이 세상에서 보면 완전히 독재중의 독재다. 우리나라 독재 중에 이만한 독재가 없었다. 독재 어쩌고 하지만 그런 독재가 어디 있냐? 어디로 가라하든지 가야하고 언제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둬야 된다. 왜? 우리는 군대니까 그렇다. 복음을 전하는 군대입니다.
와 그 말을 들을 때 권세가 느껴지더라. 권세 있구나. 4년 동안 내가 교단에서 뭐하다 왔느냐 하면 그 권세에 저항하다가 왔다. 부당합니다. 부당했고 부당했으니까 내가 싸우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CCC에 와보니까 뭐 피하다가 뭐 만난다고 교단에서는 노골적으로 하지 않고 음성적으로 하던 것인데 이것은 노골적으로 내 놓는데 권세가 확 느껴지더라.
그래서 내가 거기서 알았다. 내가 사람들하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권위하고 싸우고 있었구나. 내 위에 권위가 있었는데 내가 그 권위를 몰랐구나. 그날 나는 얼마나 충격적이고 시원했는지 모른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오면서까지고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원한을 가지고 있던 것이 싹 날라 가버렸다. 종이 축이 바람에 날려 가버리듯이 싹 날아가 버렸다.
왜? 나는 그 사람들한테, 나한테 괴롭게 한 사람들한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하고 싸우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 알아지니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 트레이닝을 맞춰준 상대 선수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권투연습을 하는데 하루 종일 받쳐주는 상대가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고 편지를 썼다. 총회장 하던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죠.’ 알고 보니까 그것이 나 때문에 고생했던 것이더라. 그래서 싹 날아갔다. 원한이 일점도 없이 날아갔다. 그러니까 거기서도 자기가 미안하다고 하더라. 내가 미안하다고 하니까 자기도 미안하다고 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렇게 충격적이고 그렇게 통쾌하게 모든 문제가 싹 날아가는 것은 처음 봤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신기하다.
뭐 거기서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나올 때 내가 그랬다. 교회가 금권으로, 교권으로 이렇게 부당한 행동을 한다고 하고 거기를 나올 때는 다시는 교회는 안 들어간다고 하고 나왔다. 어느 교회를 들어가도 다 그럴 것이다. 어느 교단을 가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철저히 한을 품고 나왔다. 그러니까 CCC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전도기관이지 교회는 아니니까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가니까 우와 호랑이가 확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나를 시원하게 하던지.
그래서 그분을 말씀을 듣고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고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게 그렇게 됐다. 충주에 있다가 청주로 갈 것으로 생각을 했고 거기서 오라고 했는데 갑자기 대구로 가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 밀려났던 것이다. 내가 청주로 가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청주로 차고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대구로 밀려온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옛날 같았으면 ‘이것이 왜 이래. 분명이 약속을 다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렇게 연구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분명히 그 사람이 치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또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속이 상하고 ‘아 저 사람이 교활하게 저런다.’ 고 했을 것인데 누가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내 앞에서 권위가 대구로 가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나는 예밖에 없다.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말없이 그랬다. 나는 생전 대구를 모르는 데이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그분도 좀 당황하더라. 두말없이 간다고 했다. 왜냐하면 좋은데 보내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자기가 지금 좌천해서 보낸 것인데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니까 당황하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목사님 제가 이 CCC에 있는 한 목사님이 제 머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더라도 목사님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하나님 말씀으로 알고 가려고 합니다.’그랬더니 그때야 한숨을 푹 쉬더니 ‘아 이 목사님 큰 복을 받겠습니다.’그러더라. 인간적인 생각을 했다가 그때 자기도 마음이 확 놓인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이의가 없었다. 대구에 가서 일이 잘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전혀 생각한번 안 해봤다. 그때 나를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나를 흙으로 만들어 놓았다. 조각을 하기에 딱 좋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그 양반이 조각한데로 된 것이다.
나올 때도 전보 한 장이 떨어져서 몇 월 며칠까지 근무하고 그만두시오. 그때 삼십 명 정도가 감원이 됐는데 서울에 올라가니까 웅성웅성 하더라.한 삼십명을 감원해놓으니 어땠겠는가. 그런데 나는 전혀 뒤숭숭하지가 않다. 이렇게 내가 오늘 교회에 있을 줄 알고 뒤숭숭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전혀 앞길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당연히 나가라하면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길을 예비해놓지 않았겠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이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 달 동안 있으라는 것을 있고 나왔다.
우리 형제들이 나온 것이 이십 명 정도 되는데 아무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몰랐다. 아무도 내가 나와서 뭘 할 것인지 물어본 사람도 없고 나도 나와서 뭘 하겠다고 한 말도 없다. 그냥 나는 할 말이 없다. 뭘 하겠다는 계획이 없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고 우리 형제들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는다. 믈어 봤으면 내가 대답하기가 옹색할 것인데 뭔가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아무도 안 물어본다. 신기한 형제들이다. 대구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너무 좋다. 말 잘 안 하는 게 아주 좋은데 모르겠다. 속으로는 걱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일체 한 사람도 물어본 사람이 없다. 지금 여기에 다 앉아있다.
나는 그냥 나대로 나와야 하니까 나왔는데 형제들이 그냥 따라 나온 것이다. 나오니까 할 수 없이 모임을 했다. 모임을 하니까 자리가 좁아서 좀 넓은 데로 갔다. 좁으니까 또 좀 넓은 데로 갔다. 그래서 여기가 열 번째이다. 열 번 이사한 자리가 이 자리이다. 늘 좁아서 이사했다. 좋은데 가려고 한 것이 아니고 좁으니까 또 옮기고 좁으니까 또 옮기고 했다.
흙이 되면 빚어지기기 쉽다. 위에 사람이 쓰기가 쉽다. 너무 쉬운 것이다. 내 모양이 없으면 빚은 데로 된다. 혹시 나를 빚으시는 분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뱀의 모양으로 만든다고 해도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뱀의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나한테는 책임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책임질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너무 편한 것이다. 흙은 자기 모양이 없기 때문에 빚은 대로 된다. 그러니 자신의 형상으로 빚으려고 하는 하나님에게는 흙이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얼마나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는가.
고령토라는 흙이 있는데 그릇 만드는데 가면 그 흙을 쓰는데 이 흙은 아주 가늘다. 그래야만 도자기가 된다. 그것을 가지고 도자기를 만드는데 가보면 이것을 완전히 떡치듯이 친다. 안에 있는 공기를 빼내기 위해서 계속 두들기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에는 쫙쫙 늘려서 판자처럼 만든다. 자장면 집에 반죽을 만들 듯이 그런 식으로 흙을 만든다. 그래서 그 판자조각으로 흙을 만든다. 그것을 돌려가면서 연결하면 항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려니까 그 흙이 도공의 손에 의해서 자유롭게 움직여져야 한다. 자유롭게 움직여져서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거친 흙도 안 되고 뻣뻣한 흙도 안 되고 아주 가는 흙이어야 한다. 그러니 연약할수록 얼마나 귀하냐는 것이다. 이게 할렐루야 할 일이다. 연약할수록 귀한 것이니까, 혹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그래도 좀 강한데 좀 나한테는 좀 과한 말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조금만 기다려 봐라. 조금만 기다려보면 그 의문이 풀릴테니까.
열매를 얻기 위한 산 혼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이 생명은 영생을 위한 씨인 것이다. 땅 위에는 씨가 많다. 씨를 받기 적합하기 때문이다. 씨는 연약한 흙에서 자란다. 생명의 하나님은 씨이신 자신을 심어 영생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두 번째는 열매를 얻기 위한 산 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은 이대로 있으면 쓸 때가 없다. 이 생명이 영생하는 것이 되려면 씨앗으로 땅에 뿌려져서 열매가 되는 것처럼 산 혼이 그것을 받아서 키워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이 사랑이든지 뭐가 되든지 한다. 저절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태양은 열이다. 그러면 태양이 있어서 저절로 온도가 맞추어진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면 하나님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사랑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을 통해서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새로 번역이 된다. 생명의 하나님이다 하면 생명이지만 열매는 아니다. 생명의 하나님이다 하면 이 열매는 씨로 다시 뿌려져야 열매가 된다. 그렇지 않고는 열매가 되지 않는다. 열매로 되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다.
땅에는 씨가 많다. 여러분 밭에 가보면 왠 잡초가 그렇게 많은지! 뽑고뽑고 뽑아도 한 움큼 계속 나온다. 잔디밭을 키워 보세요 뽑아도 계속 잡초가 나온다. 농사를 짓는데 어려운 것은 잡초 때문이다. 그래서 독한 제초를 뿌리고 한다.
왜 땅에는 잡초가 많은가? 씨를 뿌리면 잘 나기 때문에 그렇다. 날라 다니다가 아무데나 그냥 땅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씨들에게는 흙이 최고로 좋은 것이다. 금보다 좋고 은보다 좋다. 금덩어리 위에 씨가 떨어 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 씨는 말라 죽고 마는 것이다. 흙에 떨어지면 아무 씨라도 다 난다.
씨는 연약한 흙에서 자라난다. 생명은 연약한 흙에서 자란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씨이신 자신을 어디에 심어서 영생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영생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삶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그러니까 이 삶을 거두어 들이려면 산 혼에 뿌려야 한다. 우리에게 다른 동물들이 많은데 왜 사람을 선택했을까? 다른 동물은 혼이 있어도 이것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혼이 못 된다. 그런데 사람은 씨를 뿌리면 그것을 열매로 낼 수 있는 그런 흙이다. 흙은 흙인데 이것은 씨를 뿌려도 안나 나도 금방 죽어 버리는 흙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을 뿌리면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딱 거둘 수 있는 흙이다. 이것을 보고 산 혼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아까 김계분 자매님! 귀가 열린 것이 감사하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귀가 열렸다는 것이 씨가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귀가 열려야 씨가 들어온다. 귀가 맥히면 씨가 못 들어온다. 그러니까 귀가 먹은 사람은 좀 곤란하다. 그래서 요즘은 수화도 하고 그러는데 옛날에는 귀가 먹은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신다.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이것은 내가 다른 세계를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우리 이차적인 세계는 듣고 사는 것이다. 타고난 난 것이 아니고 씨는 연약한 흙에서 자란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씨이신 자신을 어디에 뿌려야 되냐? 열매 거둘 곳에 뿌릴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씨가 한 없이 뿌려져도 열매가 나는 데가 있고 안 나는 데가 있다.
형상이 있어야 나타낼 수 있고 열매가 있어야 먹힐 수 있다. 하나님은 열매로서 양식이 되어 사람 속으로 들어오신다(요6:35~58참). 하나님은 육체가 될 수 없으나 그의 말씀(씨-열매)은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거처)이 되셨다(요1:14참).
형상이 있어야 나타낼 수 있고 열매가 있어야 먹힐 수가 있다. 우리가 보통 열매를 먹는다. 열매가 되어야 먹어지지 열매가 안 되면 못 먹는다. 그래서 열매가 되면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씨가 열매가 되어야 사람이 그것을 먹게 된다. 열매로서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 열매만 사람 속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속으로 직접 들어올 수가 없다. 하나님 내 안에 계십시오. 하나님이 이 좁은 가슴 속에 어떻게 와서 계시며 이 뱅댕이 속 같은 속에 어떻게 들어와 계시겠습니까! 아침 점심 간에 변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떻게 와서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 속에 들어 올 수 없다. 하나님이 양식이 되어서 들어온다. 양식이 되려면 씨가 누구에게 떨어져서 열매가 되어진 것을 그것을 먹고 산다. 우리가 듣는 말씀은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말씀은 그 열매를 먹는 것이다.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 속에 들어온다. 요한복음 6장 35절부터 58절까지 여러분들이 찾아보면 이 말이 쓰여 있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생명의 열매다. 그런데 예수를 먹는 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님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하나님은 육체가 될 수가 없다.
요한복음이 참 신기하게 쓰여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다 했으니까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하나님이 육체가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육체가 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육체가 될 수가 없다. 그 말씀이 육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말씀은 열매가 되니까 그렇다. 씨에서 나온 것이 열매고 열매가 말씀이니까 그 열매를 먹고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 열매를 먹으면 그 열매와 함께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데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오시겠는가 못 들어온다. 그 말씀으로 밖에는 우리에게 들어올 수 없다. 그 말씀이라고 해서 성경책이다. 이런 말이 아니다. 열매 즉 인격을 통한 열매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다.
법궤 안에는 말씀이 두 돌판에 있었고 돌판은 광야의 성막이 되어 그 백성의 중심이 되었고, 말씀은 인격의 장막이 되어(요1:14)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법궤 안에는 말씀의 돌 판에 있었다. 광야의 성막 안에 가장 중심부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법궤가 있고 법궤 안에는 두 돌 판이 있었다. 그 돌판 안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법궤 안에는 말씀이 두 돌 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 되었는가? 광야에서 성막이 되었다. 막을 아무리 세워 놓아도 그거 없으면 성막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돌 판에 즉 말씀에 있다.
이 말씀이 육체가 되어 이런 말이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은 돌 판으로 있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래서 광야에서는 그 성막이 백성의 중심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의 중심이 되는데 하나님이 중심이 되된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중심이 된 것이다.
말씀은 인격의 장막이 되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가운데 장막이 되시매 이렇게 되어있다. 이것은 교회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철저하게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장막이다. 말씀이 사람이 된 장막, 말씀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장막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1차적인 사람이 아니다. 1차적인 사람은 흙으로 빚어진 사람이고, 2차적인 사람은 말씀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그러니 씨이신 하나님에게 무엇이 귀중한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흙(산 혼)이다. 산 혼은 씨를 먹고 열매를 생산한다. 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씨이신 하나님에게 무엇이 귀중하겠는가? 사람 속에 들어와서 사람의 생명이 되려고 하는 분에게 무엇이 귀중하겠냐는 것이다. 열매를 얻을 수 있는 혼이 아니겠는가! 산혼. 흙(산혼)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산 혼이 되더라는 것이다.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연약함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산 혼은 씨를 먹고 열매를 생산한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격으로 생산해 낸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된다. 말씀을 듣고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알아들어지면 나는 알이지는 것을 통해서 밥 먹듯이 딱 먹고 소화가 되면 나는 내 삶이 달라진다. 내 삶이 달라져서 다른 사람 앞에 갈 때는 그 사람에게 빛이 된다.
전에는 내가 가면 어둡던 곳이 이번에는 내가 가면 밝은 빛이 된다. 전에는 내가 가기만 가면 시끄럽던 곳이 이제는 내가 가기만 가면 조용해진다. 전에는 내가 가기만 가면 캄캄해지던 곳이 이제는 내가 가기만 가면 밝아진다. 이것이 다 변화다.
요번에도 어느 자매가 와서 간증을 하는데 그 자매가 대단히 복잡한 자매였다. 자기가 돈을 놔두어도 어디에다가 놔두었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디다가 투자 했는지도 모르고 어디다가 맡겨 놨는지도 모르는! 그만큼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 간증한 것을 들으니까 어디서 바람이 와서 그것이 날아가 버렸는지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옛날에는 자기가 열등감이 있어서 무엇인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막 헤맸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를 무시하면 어떠냐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그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것이 절에 가서 10년 도를 닦아도 안 된다. 도 닦아서 될 일이 아니다. 갑자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하겠는가 남이 무시하면 어떠냐고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조용해져 버렸다. 싸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지고 자기가 인정받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생활비도 옛날에 적게 준다고 난리를 했다. 그런데 적게 주면 적게 먹고 살면 되지! 이렇게 하니까 간단하게 됐다. ‘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해 버리나!’ 저렇게 완전히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언제 번데기가 저렇게 날아가는 나비가 돼 버렸는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버렸다. 신기한 일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들어오면 확 사람이 바꿔지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니 하나님 에게는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자신의 씨가 심어져서 거기서 열매가 되어 사람 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어 생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화가 되어야만 우리 생명이 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우리 속에 들어와서 소화가 안 되면 내 생명이 안 된다. 소화가 되어야 내 생명이 된다. 아무리 좋은 것 먹어 봐도 소화 안 되는 사람은 소용없고 오히려 설사만 하게 된다.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무엇이 중요한가? ‘아! 그 연약함이 중요하구나!’ 산 혼은 연약한 것인데 심지어는 사탄이 와서 씨를 뿌려도 할 수 없이 내야 되고 도둑놈이 와서 씨를 뿌려도 내야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씨가 딱 뿌려지니까 하나님의 열매가 열려서 그것을 사람이 먹으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변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하고 옛날하고 많이 다르다. 코도 나오고 뒤통수도 나오고 그렇다. 왜냐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잘 먹어서 그렇다. 옛날에는 못 먹어서 뒤통수 나온 애들이 없었다. 그래서 반에서 뒤통수 나온 사람은 놀림감이었다. 짱구라고 놀림감 받았다. 요즈음 아이들 뒤통수가 다 나와 있다. 이것은 잘 먹은 덕이다. 눈도 조금씩 파래질지 모른다.(하하하) 그러니까 먹는 대로 된다.
잉어는 먹는 대로 자란다고 한다. 사람도 먹는 대로 자란다. 2차적인 세계는 먹음에 따라 달렸다. 1차적인 세계는 땅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다. 그런데 2차적인 세계는 산 혼에서 나온 열매를 먹는다. 그것을 먹고 2차적인 세계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재가 되시고, 양식이 되시고, 영이 되시며, 사람은 하나님에게 형상이 되고, 만족이 되며, 몸이 되므로 함께 사는 삶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성경은 이 과정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재가 되고, 양식이 되고, 영이 된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형상이 되고, 만족이 되고, 몸이 된다. 원래 이렇게 되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실재가 되고, 양식이 되고, 영이 되어야 되었던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그의 형상이 되고, 그의 만족이 되고, 그의 몸이 되고 이렇게 되어야만 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영생이다. 영생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야 함께 사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왜? 결혼을 합니까? 완전해 지려고 결혼하는 것이다. 남자에 없는 것을 여자가 채워주고, 여자에게 없는 것을 남자가 채워주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없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어느 하나만 가지고 완전할 수 없다. 왜 희랍인들이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혼자 해보려고 하니까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둘이 연합해서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이 희랍인들은 모든 것이 객관화 되어야 한다. 어떤 것도 객관화 시켜서 그것을 다시 자신이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도 인간 하나를 딱 놓고 이것을 객관화시킬려고 한다. 그러니 불완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천년만년이 가도 완전해 질 수 없다. 역사 이래 지금까지 해도 완전해지지 않는다. 똑같다. 왜? 둘이 합해서 연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물이 다 똑같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 똑같다.
도 닦는 거 왜 어려운지 아는가. 혼자, 혼자 완전해 지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둘이 연합하면 도 닦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둘이 연합하면 도 닦는 것이 다 이루어져 버린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 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인도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아리안족은 희랍사람과 똑같다. 기질이 그렇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객관화시킨다. 자기도 자기를 객관화 시켜서 본다. 남이 나보고 뭐라 하는가 이것이 아니고 내가 볼 때 나는 뭐냐는 것을 찾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렵겠나. 아무리해도 공정하게 자기가 알아지겠나. 다 자기편이다. 그렇지 않는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
그러니까 영생은 둘이 연합해서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이 우주 안에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이 사람도 다는 모르겠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발부터 만들어 올라 온 것이 아니고 머리부터 만들어 내려간 것이 아니고 두 조각을 만들어서 붙였다고 한다. 맞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두 조각이라고 한다. 한가운데, 뇌도 양쪽 두 조각이다. 척추도 두 조각이 붙은 거라 한다. 낳을 때 잘못 붙어서 덜 붙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벌어져서 안 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고장이 나버린다. 그러니까 참 신기하다. 왜 두 쪽 만들어 붙였나. 콩은 왜 두 쪽인가. 알고 보면 너무 신기하다. 전부 두 조각이다. 그러니까 내 혼자, 나는 뭐 어떻다. 이렇게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뿐만 아니고 정말로 몰라서 그렇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된다. 남자가 자기 혼자 아무리 잘나봐야 뭐가 되겠는가? 남자 혼자 잘났다고 애기를 낳겠는가? 당연히 낳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못 생겼어도 여자를 만나야 애기를 낳는 것이지 자기 잘났다고 애기를 낳겠는가?
성경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둘이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이 세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이것은 도 닦는다고 모른다. 도 닦으면 닦을수록 점점 더 자기 혼자 선다. 혼자 서서는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는 약한 데서 완성되었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하나님의 창조는 약한 데서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약한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약한 데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약한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섬기는 것은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의 필요를 채움이다. 누가 그의 필요를 채우는가? 가인인가, 아벨인가? 인생의 연약함이 아닌가! 아담은 이 연약함을 숨기려고 하나님을 떠나 나무 뒤에 숨었으나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 연약함을 전시하셨다.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봉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상대방이 없는 것을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섬기는 것은 채워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없는 것을 내가 채워주는 것이 봉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가 세상에서 찾던 그것이 필요한가? 아니다. 하나님 필요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버리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시하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없었으면 하던 것을 필요로 한다. 에덴동산에서 그것 때문에 버리고 나왔다. 그 연약함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필요로 하니까 지어놓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나왔다.
길에는 가시덤불이 날 것이고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며 너는 흙이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이 말이 바로 그래서 나온 말이다. 자기 길을 버리고 갔다. 하나님이 쓰겠다는 것을 안 먹히겠다고 나왔으니까 그의 길은 당연히 가시덤불이 가로막는 길이고 당연히 저주받은 길이고 당연히 땀이 흘러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땀이 흐르지 않아야 된다. 순리를 따르지 않고 역리를 따른 것이다. 유교에서도 거기까지는 알았는데 근본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흥하고, 하늘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다. 그런데 그 순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 것이다. 순천(順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역천(逆天)을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를 채운다는 것은 무엇이 필요를 채우는 것인가? 내가 버리던 것이 하나님 필요를 채운다. 나는 필요 없다고 한, 나는 왜 이렇게 생겼냐고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
누가 그의 필요를 채우는가? 가인인가, 아벨인가? 가인은 강한 자고 아벨은 약한 자였다. 누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겠는가? 지금 우리의 생각으로는 가인이 채워야 된다. 왜냐하면 강한 자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니까. 동생이라도 죽일 수 있는 자니까. 그런 사람이 세상은 필요하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 그것이 우리가 소원하는 바다. 사람이 소원하는 바다. 그 사람이 하나님 필요를 채울 수 있는가? 절대로 하나님 필요를 채울 수가 없다. 자기 필요는 채울지 몰라도 하나님 필요는 채우지 못한다. 자기 필요가 혼자서 채워지지 않으니까 끝없이 불가사리(不可殺伊)처럼 먹어치우는 것이다. 불가사리라는 말이 모든 쇠붙이를 다 먹는다고 해서 나왔다. 한자로 써놓으니까 불가사리(不可殺伊)다. 리(伊)를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동성동에 가면 불가사리 양복점이 있다. 옛날에 불가사리란 모든 것을 다 집어 삼키는 것이다.
아담은 강하기를 원하다. 다 가인이 되기를 원한다. 아벨 되기를 싫어한다. 아벨은 그냥 죽었고 가인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울 사람은 누구인가? 연약함이 채운다. 아담은 연약함을 숨기려고 하나님을 떠나서 나무 뒤에 숨은 것이다. 우리도 우리 연약함을 숨기려고 하면 나무 뒤에 숨어야 된다. 그 나무는 무엇인가? 내 이름이고 내 돈이고 내 지위고 내 자랑이다. 내 연약함을 가리려고 하다 보니까 그 나무들 뒤에 숨은 것이다. 자기 연약함을 가리려고 일생동안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나무 뒤에 숨은 삶! 그것이 세상 삶이다.
그런데 예수는 반대로 십자가에서 그 연약함을 전시하셨다. 만인이 다 보도록 그 연약함을 전시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봐라. 그런데도 뛰어내리지 못하는 그것을 전시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여기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저것을 다 굴복시킬 텐데... 여기서 한 발자욱만 옮긴다고 하더라도 저 만 백성이 복종할 텐데...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아놓았으니까 못한다. 그 자리가 전시되었다. 왜 그랬는가? 그 연약함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의 연약함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점이 인생의 연약함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어서 전시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거기로 가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셔서 거기로 간 것이다.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라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만일 다른 길로 가게 하려면 다른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놔두셨는가? 그것은 아담이 자기 연약함을 숨기려고 나무 뒤에 숨었으니까 언제까지 네가 숨겠느냐? 네 모습을 한번 봐라. 그래서 예수님이 전시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 대신 죽었다. 우리 죄를 짊어졌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전시될 존재인데 우리를 다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야곱과 밤새 시름을 했는데 야곱이 한 사람이었으니까 다행이지 야곱이 대여섯 사람 되었으면 하나님도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이 영원한 것이고, 그것이 2차적인 세계 안에서 참 행복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가지면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다. 결혼을 열 번 해도 안 될 것이다. 결혼하고 열 달 살고 나면 시시해지는 것이다.
이번 목회자 모임에서 어떤 분이 25년 동안 전쟁을 하다가 여기에 와서 끝났다고 얘기했다. 처음에 결혼하니까 자매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반찬이 상에 가득차고 상이 모자라서 옆에 보조 상을 놔둘 정도로 잘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봇짐을 싸서 나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그 좋은 아내가 악처가 돼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여기에 와서 깨닫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니까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잃었던 아내를 다시 얻은 것이다. 요즘은 어떠냐고 하니까 요즘은 상이 가득해졌다고 한다. 강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 하나님에게는 더군다나 쓸모가 없다.
나무 뒤에 숨으려고 하니까 강해지고 강한체하게 된다. 자기를 숨기려고 하니까. 자기의 연약함이 드러날까봐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다. 연약함이 두렵지 않고 하나님에게 축복으로 여겨지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남 괴롭게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 연약함으로 주님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 존재를 채워야 하고 일에 동역해야 한다. 위대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채울 수 없고 강함으로 그의 일을 할 수 없다. 갈빗대는 가장 연약한 뼈다. 그러나 형상을 이루고 생명을 주관하며 하와=교회(배필)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 연약함으로 주님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사람이 말하는 가난함으로 하나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필요한 연약함, 그 본질적인 연약함으로 채우는구나.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혹은 복음을 전할 때, 혹은 전도할 때, 내가 유능해야 전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 그것이 아니고 내 연약함으로 오히려 그때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면 나는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고 있는 것이지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필요를 내가 채우면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채워주어야 하나님도 일을 하신다. 전기가 있으면 뭘 하겠는가? 전등이 있어야 불을 밝힐 수가 있다. 존재를 채워야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이 한쪽만 가지고 자기 일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채우면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동역하게 된다.
위대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채울 수 없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해서 하나님 존재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강함으로 그의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얼마나 지금 다른 길로 가는지 모른다. 세상은 당연히 그렇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세계마저도 위대함으로 강함으로 한다고만 생각하니까 빗나갈 수밖에 없다.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갈빗대는 가장 연약한 뼈다. 그러나 형상을 이루고 생명을 주관하며, 교회를 배출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연약함이 교회를 생산하지 강하고 위대한 것이 교회를 생산할 수 없다. 우리 중에도 강하고 위대한 사람이 없고 다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교회가 된다. 여기에 강하고 위대한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안 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만족시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었다. 아멘, 할렐루야!
예수께서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만족시켰다. 하나님도 만족시키고 사람도 만족시켰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고 2차적인 세계를 완성했다. 우리가 이것을 알면 내가 부족하니 안 부족하니,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부족해도 부족한 대로 쓸 수 있고, 안 부족해도 안 부족한 대로 쓸 수 있다. 일차적인 세게 안에서 부족하고 안 부족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쓰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만들어놓은 그 연약함을 쓰신다. 흙으로 만들어 놓은 것, 산혼으로 지어놓은 것, 갈빗대로 지어놓은 것, 이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여기 흙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는가? 산혼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는가? 갈빗대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무시하고 버렸다. 그러니 하나님이 쓸래야 쓸 것이 없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 들리면 흙이 귀중한 것이구나. 산혼이 귀중한 것이구나. 갈빗대가 귀중한 것이구나. 이것을 알면 된다. 너무 쉽다. 내가 흙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산혼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갈빗대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이다. 우리가 왜 힘들었는가? 흙이 안 되려고 하니까 힘든 것이다. 흙으로 벽돌을 만들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이다. 산혼을 가지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이다. 갈빗대를 가지고 등뼈를 만들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이다. 주신 대로 했으면 다 쉬운 것이다. 우리가 아무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왜냐하면 아미 다 만들어주셨으니까 우리가 그것을 만들 필요는 없다. 청소할 필요도 없고 밥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에 와도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갈빗대를 가지고 등뼈를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고, 산혼을 가지고 하나님 노릇할 필요가 없고, 선악을 판단하려는 자가 될 필요가 없다. 흙을 가지고 돌을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모든 고통은 거기서 온다.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없어지면 돈 벌기도 쉽고 다 쉽다. 이것이 있으니까 돈 벌기도 어렵고 모든 것이 다 어려운 것이다. 공부하기도 어렵고 돈 벌기도 어렵고 다 어렵다. 사람이 복잡해져서 사람 대하기가 어렵게 된다. 간단해져보라. 나도 사람 대하기가 쉽고 다른 사람도 나를 대하기가 쉬워진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을 깨닫고 우리가 그것을 알고 살면 우리는 이런 일을 해도 쉽고 저런 일을 해도 쉽다. 오히려 세상일도 알고 보면 쉽다. 돈 벌이하는 것도 쉽다. 내가 이것저것 가려서 할 필요가 없으니까 돈 버는 목적만 있으면 되니까 다른 것은 가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나무 뒤에 숨을까 하니까 이것 가리고 저것 가리려고 한다.
산에 들어가서 어느 나무 뒤에 숨으면 좋을까하고 나무를 한 번 골라보라. 학이라는 놈은 꼭 소나무에만 앉는다. 그래서 송학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소나무에만 앉으려고 하면 힘들다. 아무 나무나 앉으면 되는데 지 신세에 송학이라고 뽐내고 있으면 뭣하겠는가. 우리 연못에 고기 잡아 먹으려고 오는 놈이 고고한 체 하면 얼마나 고고하겠는가. 우리 눈 피해서 아침에만 두세번씩 왔다간다. 고기 잡아먹으려고. 사람 오면 도망치면서 딱 소나무만 찾아서 앉아서 점잖은 체 하고 있다. 알고 보면 꼴볼견이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사는 것이 아주 좋은 것이다. 연약함을 하나님이 쓰신다. 이것만 알면 된다. 그러면 감사가 된다. 나의 연약함을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이것을 평생 감사해야 된다. 내가 남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 때문에 다르다. 가령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말씀이 다르다거나 뭐가 좀 다르다고 하면 다 이것 때문이지 내가 잘해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책을 읽어도 3천권씩 읽었다고 한다. 100권도 못 읽는데 어떻게 3천권을 읽는가? 놀라운 사람이 너무 많다. 3천권을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세계다.
여러 분이 경험해보면 알겠지만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 사람을 만나보면 전혀 다른 세계다. 어제 그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활개치고 다니던 사람인데 오늘 보니까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왜 저러는가했더니 딱 한 번 세계가 바꿔지니까 모든 것을 다 안다. 신기하다. 한 가지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안다. 세계가 딱 바꿔지니까 모든 것을 다 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말이다. 연약함이 우리에게 복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가 다 버리고 무시하고 얕보고 그래서 우리가 동산을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주께서 연약함을 보이셔서 우리가 여기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내 인생의 위치를 찾은 것을 감사하고 당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이 귀중한 것을 우리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더욱 더 이런 자리로 이끌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그리고 더 유용한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