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과 '갑격'
최근 새로 생긴 우리말 가운데서 ‘갑질’이란 것만큼 성공적인 것은 없지 않나 한다. 두 음절로 간결하면서도 이미 존재하는 어떤 단어도 표현할 수 없는
뜻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그 말을 처음 듣더라도 당장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데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뉘앙스까지 같이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질’이란 말은 ‘칼질’, ‘양치질’에서와 같이 행위를 나타내지만 ‘도둑질’, ‘서방질’처럼 부정적인 행위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한다. 그리고 직업 혹은 직위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별로 훌륭하지 않게 수행할 때도 사용한다.무능해서 학생을 잘 가르치지 못하는 교사를 ‘선생질 한다’ 하고, 자격 없는 사람이 면장의 자리에 앉아 으스대면 ‘면장질 한다’ 한다.
갑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갑질 한다’ 하지 않는다. 자기 회사 직원인 사무장의 인권과 인격을 모독하고 비행기에서 내리게 한 대한항공 부사장의 행위가 ‘갑질’의 전형인 동시에 ‘갑질’이란 말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런데 ‘갑질’이란 말이 이렇게 쉽게 확산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이미 그런
현상이 만연되어 있고, 그것에 대한 불만이 턱까지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과 느낌이 한계점에 와 있는데 누군가가 ‘갑질’이란 말을 제시하니까 마른 화약에 불붙듯이 확 타오르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경쟁심이 강한한국인이 그렇게 버둥거리며 노력하는 것은 대부분 ‘갑’이 되기 위함이고, 그렇게 열심히 ‘갑’이 되려는 것은 ‘갑질’하는 맛 때문이다.
그런데 ‘갑질’이 많으면 많을수록 ‘을’의 기분은 그만큼 상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많이 좋아졌는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내려가는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갑질’이 너무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갑’이면서도 ‘갑질’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갑의 특권에 상응하는 임무를 다하는 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ilge)라 한다. 서양에는 로마시대부터 그런 전통이 있었다 한다. 전쟁이 나면 귀족들 자녀가 스스로 최전방에 나가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꺼이 돕는다.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2,000여 명이 전사해서 다른 어느 학교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류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6·25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다.
세계 최대 부자대열에 들어 있는 게이츠나 버핏은 엄청난 액수의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기부했다. 이런 것을 우리말로 ‘갑격’이라 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경주 최부자 가문과 같이 ‘갑격’을 실천한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기에는 너무 드물었다. 오히려 고위 공직자가 되려면 본인이나 자녀가 병역을 기피해야 하고, 재벌은 하나 같이 ‘똑똑하고’ ‘유능한’ 아들, 딸을 두어야 갑질 상속에 손색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는 갑질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다. ‘갑질’이란 단어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갑질하는 ‘갑’이나 갑질 당하는 ‘을’이 모두 갑질이 어떤 것인가를 당장 알아 차릴 것이고, 그것은 도둑질이나 서방질처럼 부끄러운 짓임을 깨달을 것이니까.
앞으로는 ‘갑격’을 갖추어야 ‘갑’의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v309.sendmail02.com%2FattachedFiles%2Fimages%2FSonbh.JPG)
글쓴이 /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부산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전 동덕여대 총장
·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전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