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던 전傳
박희주
(13)
우리 서로를 죽이고 바보스럽게 살아버린 지난날, 깨닫고 알려 노력했던 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개만도 못한 역사, 기록하고 싶지 않은 마지막 세기여. 교활한 참으로 가증스러운 조종술에 놀아나버린 다신 찾을 수 없는 시간들. 죽음이 두려웠다면 죽음=행복이라는 믿음을 주는 선지자를 갖지 못한 우리의 불행이었을까. 인간이 자기에 반하는 인간을 죽인다는 것, 그러고서 영웅이 되고 지도자로 받들어진다면 우리의 문명은 아직도 절름발이, 기필코 파멸은 오리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늘의 뜻이라는 마르크스 레닌의 기발한 착각은 수억의 민초를 실험의 구렁텅이에 빠뜨렸고, 망나니들의 발광에 별 의미도 없이 죽고 죽이는 사람들.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고 지배하기에 국가라는 게 필요하다면, 국가를 운영하기에 이데올로기가 도입되었다면, 국가여, 이데올로기여 영웅과 함께 뒈져다오.
영웅이 낳고 자람에 그만한 피의 대가가 꼭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을 찢어놓고 아이의 우주를 뺏어간 영웅이여, 어디 감히 민족을, 겨레를 들먹이는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민초를 우롱하지 말지니, 유사 이래 배신만 당한 그들에게 하늘일랑 없었다.
섬뜩한 방부제의 포말 속에 껍데기만 남은 채, 무엇을 위하여 우리에게 누가 영웅을 보여주는가. 바보스러운 너무나 바보스러운 안타까운 현실에서 환상을 보았던가. 악마의 노리개로 살아온 잃어버린 시간이여. 저주스러운 역사여. 거들먹거리며 기록한 영웅의 역사여. 도구의 시대여 여기에서 멈춰라. 우리 모두의 비극은 거기에서 싹텄다. 석기시대 인민들이여, 누굴 위해 돌을 갈지 말지니, 우리에게 영웅은 필요 없다.
(14)
아이야, 아비는 병신이었다. 부끄러워 마라. 겉을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인하는 짓이니, 나는 내 몸에 대해 부끄러워할 새가 없었다. 어디 하늘이 내려준 목숨 아닌 것 있으랴. 어디 하늘을 거역하고 존재하는 생명 있으랴. 하찮은 미물도 존재 이유가 있느니, 나는 살아 움직였고 그 살아있음을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나를 조롱했던 자들, 그들은 마음의 병신들이니라. 나는 조금 불편했을 뿐, 홀로서기에 더뎠을 뿐. 부모 얼굴 한번 보지 못했으나 더한 사랑을 받았느니라. 멸시는 나를 키운 영양제, 조롱은 내 정신의 회초리, 업신여김은 내 의지의 단련이었다.
할아버진 일본으로 떠난 후 돌아오지 못했다. 할머닌 만주로 떠난 후 돌아오지 못했다. 무엇이 그들을 떠나도록 했을까. 어째서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을까. 엉망진창 앞이 캄캄하여 꿈도 꿀 수 없었던 우리나라, 사지 멀쩡한 이 땅의 잘난 족속들, 마음의 병신들 탓이었느니. 남의 피와 땀과 눈물의 열매가 달디 달아 그들의 육신은 잠시 잠깐 편안했을 줄 모르나 양심의 역사는 영원히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느니. 너희 조부모는 비록 희생물에 불과했으나 현실을 이겨내려는 순전한 정신만은 내게 남았느니라.
병신이었던 내게 다시 더 심한 병신이 되게 했던 육이오. 이 또한 마음의 병신들이 벌인 꼭두각시놀음이었다. 그들은 죽지 않아야 할 수백만을 죽였고 헤어지면 안 되는 천만 이산가족을 남겼다. 그들 족속은 일찌감치 피난을 가거나 해외로 도망쳐 죽지도 않았고 헤어지지도 않았다. 육체의 병신은 혼자만 외롭고 서러울 뿐, 마음의 병신은 남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치나니. 들었잖느냐, 나라와 민족까지도 서슴없이 팔아먹는 짓거리를. 부모와 형제까지도 탐욕의 먹잇감이 되었던 것을.
이 땅을 보아라. 병신이 된 조국을, 허리가 부러져 오도 가도 못 하는 이념의 맞상대, 실험의 도구로 전락한 신세를. 그러고도 정신 차리지 못한 그들은 오늘도 반쪽으로 찢긴 조국을 갈가리 찢기 위해 고향산천을 더럽히지 않느냐.
애비가 병신임을 부끄러워 마라. 하나에서 열까지 떳떳한 이시던 나라를 보아라.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입이 째졌어도 하지 못할 말 없고 눈이 돌아갔을망정 세상은 바로 볼 줄 알았다. 다리가 뒤틀리고 포탄에 날아갔지만 가지 못할 곳이 없었어. 귀가 멀었다고 듣지 못한 말 있더냐.
인생은 극복이다. 돈이 없다고 공부 못한다고 잘나지 못했다고,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눈이 없어, 포기할 텐가? 찾아라. 공의를 믿지 마라.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에 살면서 부끄러워해야 할 자들은 바로 그들, 목적의 절름발이, 나만 아는 귀족들이니라. 귀족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귀족이 사라진 건 아니다. 노예라 부르지 않는다고 노예가 사라진 건 아니다. 이십세기 들어와 널리 쓰이게 된 평등을 너는 믿느냐. 자본주의의 자유로운 경쟁을 너는 믿느냐. 애비는 태어난 순간부터 천덕꾸러기 이방인이었다. 평등도 경쟁도 아예 없었다. 애걸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기대하지 않는다마는 진정한 평등과 경쟁은 똑같은 조건의 출발이다.
이룸은 그 세대의 몫. 왕에서 왕 나고 종에서 종 나는 세습이란 말을 사전에서 지워라. 우리의 뇌리에서 완전히 없애야 패권은 사라질 수 있느니. 성공과 실패가 대물림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철학, 결코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온. 이제 나는 병신을 거부한다. 나는 병들지 않았다. 장애가 있을 뿐. 조금 느릴 뿐. 누구나 그럴 가능성 앞에 있는 것들 아니냐. 사지가 멀쩡하지만 마음이 비뚤어진 자들, 나밖에 모르는 자들, 누가 죽든 말든 탐욕이 넘쳐흐르는 자들, 병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거들먹거리는 자들, 나는 그들을 병신 중의 병신, 상병신이라 부른다. 그래서 호통치며 맘껏 조롱하리라. 또한 맘껏 멸시하리라.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업신여기리라. 그래도 싸다. 어찌 몰랐을까 잘난 역사마저 상병신의 자기표현임을.
네 마음의 순수를 나는 믿는다. 부러워 마라. 물들지 말아다오. 그들을 부끄러워하여라. 만들어진 역사보다 만들어갈 역사를 생각하라.
무덤을 파라. 지배의 공식 피라미드보다 깊은 역삼각형의 무덤을. 그들이 들어갈 무덤, 잘난 역사라고 믿어온, 인과응보의 무게에 짓눌려 다신 태어나지 못할 썩어빠진 정신의 무덤을. 그게 공의가 아니겠느냐. 공의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역사 아니랴.
나는 안다. 한 선각자의 순수를. 오로지 민족과 울민을 위하여 나아갔던 그의 행보를. 감히 닮고 싶은 거다. 그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빤히 보이는 상잔의 비극이.
(15)
어디 하나 가릴 것 없이 샅샅이 파헤쳐지고 능욕당하여 부끄러움마저 사치스러운 산하. 우리가 누구인가 깡그리 잊어버리고 가냘픈 숨소리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때 형형한 눈빛으로 뚫어질 듯 응시하며 포효를 기다렸었노라. 해방은 결코 감격할 일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쓰레기, 아무 쓰잘데기 없는 쓰레기 되어 버릴 곳마저 찾을 수 없는, 실체도 없는 것이 바람이 되어 왔던가. 지쳐버린, 피라미드 압제에 지긋지긋하게 지쳐버린 간절한 소망이 바람에 휩쓸려 속수무책으로 출렁출렁. 우리에게 남은 시련이었던가.
더러운 욕심, 개에게나 던져줄 권력으로 말라비틀어진 눈물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 허기진 창자의 욕구를 채우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바지자락 붙잡는 철딱서니의 망동천지. 아, 대륙의 모진 풍상 겪으며 비로소 찾아온 사랑아, 왜 이래야만 하는가. 눈을 부릅뜨고 노량으로 향했던 백의종군의 심정으로 평양으로 갔었다. 눈이 시뻘건 여우, 여우, 여우. 그 현란한 춤에 홀려 시곗바늘은 거꾸로 돌아가고.
되돌아오는 삼팔선에서 목을 놓아 울었네. 그는 보았네, 내일을, 피바다를, 우리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살육을. 구경꾼들 음흉한 미소 지으며 박수치고 떠드는데 서로의 숨통 끊어 놓질 못해 안달 난 두 마리의 한심한 투견을 보았네. 같은 어미에서 태어난 종자들, 조롱거리였네. 기어코 둘 다 쓰러져 구경꾼들 입맛대로 깊은 상처만 남았네. 그래도 숨을 헐떡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으르렁거려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네. 그는 보았네. 가장 소중한 젊음이 서로를 죽이려 피땀을 흘리는 못나디 못난 소모전을.
그는 또 보았네. 주체탑 하늘을 노리는 우상의 장막을, 부패탑 땅을 울리는 독재의 합리화를, 전지전능한 우상의 활약으로 하해 같은 은혜에 기쁨으로 사는 로봇을, 물질만능의 타락으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괴리를. 그는 보았네. 신의 죽음을, 세습을, 앵무새를. 굶주림은 신도 어쩔 수 없음을, 철권자의 말로를, 갈가리 찢겨진 반의 반쪽을, 처녀의 드러난 배꼽과 탐욕의 무한질주를.
아, 우리가 누구였던가. 누구의 책임이며 누구의 장난인가. 백두대간 호랑이의 웅혼한 기개, 포효는 끝내 사라졌단 말인가. 그는 통곡했네. 가슴이 뻥 뚫리는 허망을 안고 갔네.
오늘날 서울과 평양을 넘나드는 수많은 김구, 김구.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얘기하는가. 내 이름 남기지 않을 하얀 가슴으로 썩어빠진 반신불수에 질질 흐르는 고름을 짜내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맹랑한 종교를 넘어 영원히 변치 않을 이 강산을 닮게 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제발 정신 차려다오. 야바위꾼 손아귀에 백 년을 놀아났다. 깨어나고 벗어나서 똑바로 보아다오. 이천칠백만보다 오천만보다 칠천칠백만이 듬직하고, 십만보다 십이만보다 이십이만이 널찍하잖은가. 남남북녀 북남남녀 진돗개 풍산개 어화둥둥 내 사랑. 보았잖은가, 지바의 푸른 한반도 깃발에 세계가 뜨끔, 그 땅의 사람들이 오줌을 지리던 것을.
낡은 옷 더러운 모자 훌훌 벗어던지고 깨벽장이(開闢長) 되어 나를 비우고 너를 비우고 옹골찬 풀무질로 담금질 끝내는 날 한 많은 아리랑고개 거뜬히 넘어가리. 비로소 선각자의 너털웃음소리 들리리라.
(16)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하늘이 내리는 비와 같이 모두가 누리는 축복, 온전하든 온전하지 못하든 기회는 똑같아 의무도 할 수 있을 만큼 불만은 없었다. 배우는 데 차별 없고 육신의 장애가 삶의 장애가 될 수 없는 능력 따라 살아가기. 탐욕이 설자리를 잃은 윤리, 자신의 땀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바로 선 충효,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올곧은 정신. 늙음이 보람이 되어 여한이 없는 이시던 나라. 나라가 개인을 제약하지 않고, 다수결로 억압하지 않고, 꿈을 심어주고 키워주는, 그래서 맘껏 자랑하고 싶은 나라.
이제 가리라. 나의 살과 뼈와 피가 그리는 곳. 나의 의식은 외면하지만 나도 모르게 달려가는 곳으로. 아무도 가지 못하는 상병신들의 휴전선 너머, 내게 익숙해진 체제를 넘어, 길들여져 어찌 살든지 가서 보리라.
우리의 문명은 괴뢰로의 심화, 머나먼 옛날 말을 타고 달리던 선인들, 초원을 지나, 자작나무 숲을 지나, 동토를 지나 바이칼에서 영혼이 쏠리는 곳까지 사슴의 무리와 어울려 호랑이 엉덩이 철썩이고 곰 이야기 들으며 산의 나무가 되고 강물의 한 방울이 되어 시간을 달렸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던 도도한 흐름. 숱하게 나타났다 사라져 간 사상. 휴전선은 새털만 한 시간의 무게도 지니지 못함을 아는가. 가고 오지 못하는, 천륜도 인륜도 저버린 야만으로, 상병신들의 돌이킬 수 없는 패륜. 엉겁결에 당하고는 참을 만큼 참았다.
가소로운 것들, 근시의 무리, 씨름은 끝났다. 야만의 상씨름은 끝났다.
나는 가리라. 반 동강 난 허리를 일으켜 어둔 영혼의 실핏줄이라도 뚫으리라. 아무것도 잴 필요 없이 한 가닥 또 한 가닥 잇고 또 잇는다면, 내가 가고 네가 오고, 우리가 가고 뜻이 있는 너희가 오고, 저 철책 터지는 날에 감격한 수천만이 오고 가리라.
어찌 서로가 남남일 수 있으랴. 어찌 서로가 못 본 척할 수 있으랴. 둘이 하나가 되어 뭉치는 날, 그 힘은 가늠할 수 없나니.
내가 가는 길, 내 마음이 가고 싶은 길, 내 영혼의 잔치마당 가는 길을 막을 자라야 구천을 떠도는 상병신들의 넋, 가소로운 패권주의자가 분명할지니. 넘어지고 깨어지고 피를 흘려 이 땅에 뿌려진다 해도 썩는 밀알로 남을 것이니, 나는 가리라. 내 영혼은 그대로 날아가리라. 내가 태어나 울지도 못했던 곳, 고향에 오고 싶어서 왔다고 말하리라.
<에필로그>
이시던 나라의 당아산.
어둠의 끝 무렵. 남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 무궁한 여백에 시뻘건 햇덩이 떠오르고, 조선소나무에 매달린 부풀대로 부푼 태극무늬의 기구(氣球).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북녘. 온 누리에 햇살 빛나자 내려치는 칼. 둥실 떠오른 소망, 가깝지만 먼 여행.
그가 간다.
갈 수 없었던 거기, 이쪽과 저쪽의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서린 철조망 너머, 강요된 이념도 세뇌된 정신도 감히 어찌할 수 없는 끌림의 땅으로 그가 간다.
바람이 아니었던, 몇몇 패권주의자의 묵계로 이름 지어진 비무장지대. 고라니 노루 산양 철새들의 천국.
아, 남과 북 양쪽에서 매섭게 길들여진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가 여지없었다.
탕! 탕!
풀을 뜯던 고라니 두려운 눈을 남기고 수초 사이를 거닐던 왜가리 비틀거린다. 무한을 날던 태극의 무늬 찌그러져 불안을 간직한 불모지에 불시착한다.
박희주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 「네페르타리」가 있다. 소설집으로「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 시대의 봉이」,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