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 질문의 요지는 인간이 축생으로 윤회과정에서 실제로 태어날수 있는가?입니다. 흔히 화를 잘 내면 다음 생에 독사로 태어난다든지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받은 많은 보시를 갚기위해 소로 태어난다든지 하는 말을 듣는데요. 그런데 어떤 스님 말씀은 그건 독사같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지 인간과 축생은 너무 종이 달라서 왔다갔다 할 수 없는 거라고도 들었어요. 이런 문제는 경전으로 접근할지 과학으로 접근할지 모르겠는데요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입니다.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생의 인간이 내생에 다시 인간이나 그 이상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 지구상에 근 79억 명의 인간이 살고 있지만,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의하면, 남들처럼 대충 살아갈 경우, 우리 대부분 내생에 짐승이나, 아귀 또는 지옥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초기불전에서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 '손톱 위 흙(爪甲上土)의 비유'를 통해 이 점을 가르치십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잡아함, 맹구경(盲龜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잔나비 못 곁에 있는 중각 강당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비유하면 이 큰 땅덩이가 모두 큰 바다로 된 때에, 어떤 눈 먼 거북이 있어 수는 한량이 없는 겁인데 백 년에 한 번씩 그 머리를 낸다. 바다 가운데 뜬 나무가 있어 오직 구멍 하나가 있는데,바다 물결에 떠 흐르면서 바람을 따라 동서로 떠도는 것과 같다. 눈 먼 거북이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어 바로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될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이 눈 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는 바람을 따라 혹은 바다 서쪽으로 갈 것이요, 남북과 사유를 두루 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겠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말씀하시었다.
"눈 먼 거북과 뜬 나무는 비록 서로 어긋나더라도 혹은 서로 만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로서는 오취에 떠 흐르면 잠깐이나마 사람 몸 받기는 저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겨서 한량이 없는 악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네 가지 진리에 대하여 아직 밝게 알지 못하였으면 마땅히 힘써 방편으로써 왕성한 욕망을 일으켜 밝게 알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 조갑경(爪甲經)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손톱으로 흙을 찍어 가지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내 손톱 위의 흙을 많다고 하느냐. 이 땅덩이의 흙을 많다고 하느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손톱 위의 흙은 매우 적고 적을 뿐이요, 이 땅덩이의 흙은 매우 많아 한량이 없어서렁·내지, 셈이나 비유로 견줄 수가 없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손톱의 흙과 같이 모든 중생들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것 도 또한 그와 같고 그 형상이 가늘고 잘아서 볼 수 없는 것 은 땅덩이의 흙과 같으니라.
...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중생으로서 부모 있음을 아는 것 도 또한 그러하니라.
땅덩이의 흙과 같이 중생으로서 부모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 도 또한 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중생으로서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땅덩이의 흙과 같이, 중생으로서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나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으며, 지옥과 같이, 그와 같이 축생·아귀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중생으로서 사람 세계에서 마치고 도로 사람 세계에 나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땅덩이의 흙과 같이, 그 모든 중생으로서 사람 세계에서 마치고 지옥에 나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으며, 지옥과 같이 축생·아귀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이렇게, 인간이 내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 힘들다는 점에 대해서 <불교신문> 칼럼에 기고한 적이 있고, 그 기고문이 제 책 <불교 하는 사람은 ...>에 실려 있는데,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13. 인신난득(人身難得)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아인슈타인이 ‘우주 종교’라고 극찬했듯이 불교의 많은 가르침은 현대의 과학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의 우주론이 그렇고, 불교의 생명관이 그렇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어림짐작해 보아도 너무나 타당한 가르침이 한 가지 있다. 인신난득, 즉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학은 ‘확률론’이다. ≪잡아함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맹구우목(盲龜遇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을 가르치신다.
맹구우목이란 ‘눈먼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남’이란 뜻인데,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날 때 인간의 몸을 받을 확률’은, ‘온 땅덩이가 바다로 변했을 때 수명이 무량겁인 눈먼 거북이가 바다 밑을 헤엄치다가 숨을 쉬기 위해서 100년에 한 번씩 물 위로 올라오는데 우연히 그곳을 떠다니던 나무판자에 뚫린 구멍에 목이 낄 확률’보다 더 작다고 가르치신다. ‘눈 뜬 거북이’라면 그 나무판자를 겨냥해서 물위로 올라올 수 있기에 판자구멍을 찾아 목을 들이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먼 거북이가 태평양 같은 바다에서 여기저기 떠다니는 한 장의 나무판자를 만나서 그 구멍에 목을 넣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은 그보다 더 작다.
조갑상토란 ‘손톱 위의 흙’이란 뜻이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손톱 위에 흙을 퍼 올려놓고서 이 흙과 대지의 흙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많은지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스님들은 대지의 흙이 훨씬 많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람으로 살다가 인간계나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자는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적고 아귀나 축생, 지옥 등 인간계 아래에 태어나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이 많다고 가르치셨다. 현재 전 인류의 수는 70억에 가깝다고 한다. 그런데 맹구우목과 조갑상토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70억 인류 가운데 전생에 사람이었던 자는 거의 없고, 내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자는 거의 없다. 참으로 무서운 가르침이지만,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나의 지금 이 몸은 원래 1/10mm도 안 되는 한 점의 수정란이었다. 어머니의 자궁 속 수정란이 풍선처럼 부풀어서 지금의 이 몸으로 자란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이런 작은 수정란에서 현생의 삶을 시작한다. 불전의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서는 죽은 중음신이 수정란에 반영되어 잉태되는 과정을 “식(識)에 의존하여 명색(名色)이 있다.”거나 “식이 입태(入胎)하여 명색이 자라난다.”고 표현한다. 인간이나 짐승, 새나 곤충, 벌레나 물고기는 그 크기와 외형이 각양각색이지만 그 출발점인 수정란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유전자를 갖는 세포핵과 원형질로 이루어진 단세포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세포는 자라서 새가 되고 어떤 것은 물고기가 되고, 어떤 것은 모기나 파리, 개미나 벌이 되고, 어떤 것은 송아지나 돼지, 강아지가 되고 어떤 것은 인간이 된다. 인류의 수가 70억이라고 하지만 이는 매일매일 지구상에서 형성되는 온갖 생명체들의 수정란 수와 비교하면 태평양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의 양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인신난득이다. 어떤 유행가에서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고 읊조리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상의 생명체의 수도 그런데, 불전에서는 삼천대천세계에 온갖 생명체가 가득하다고 가르친다. 화가 김환기가 그림으로 표현한 김광섭의 시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가슴을 저민다.
요컨대, 현생에 내가 사람인 것은 생명의 세계에서 참으로 기적적인 일입니다. 웬만큼 선하게 살지 않는 이상 내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내생에 혹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도 그 다음생에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게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생에 인간으로 태어나 불교를 만났으니,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아예 생명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해탈, 열반의 체득을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인간으로 나서 불법까지 만난 건 로또맞기 보다 더한 기회를 맞이한 것이군요. 무지와 방일로 흘러보내는 시간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약간 상상에 가까운 의문들이 생깁니다.
지구의 인구는 계속 증가해 왔는데요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 오게 된 것일까... 축생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동물로서 어떻게 선업을 쌓은 것일까... 이 생에서 맺은 인연들이 내생에 또 만난다는데 인간되기가 그토록 어렵다면 어떻게 만나는걸까... 등등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듭니다.
언제나 풍부한 전거를 제시하며 깊이있는 답변해주시니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댓글에 몇 가지 질문 올리셨기에 간단하게 답합니다.
1. 지구 상에서만 윤회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전 우주적으로 윤회가 일어납니다. 불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온 우주를 삼천대천세계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서 북두칠성 자리 근처의 행성에서 살던 생명체가 지구 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또 혹시 지구 상 생명체가 전멸하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온 우주의 어느 행성에 태어납니다. 축생이 인간이 되기도 하지만, 불전의 가르침에 근거할 때, 외계의 생명체가 인간이 되기도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2. 동물로서 선업 쌓는 이야기가 본생담 등의 불전에 실려있긴 하지만, 육도 윤회의 세계에서 인간계 이외의 천상이나 축생계, 아귀계, 지옥 등의 세계는, 인간으로 살면서 지었던 선업과 악업(욕계에서 천상으로 올라가게 하는 선업이나 삼악도로 떨어지게 하는 악업), 그리고 부동업(색계, 무색계에 태어나게 하는 선정 수행의 업)의 과보를 받는 곳이라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선이나 악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세계에서 연기(緣起)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인간계가 업을 짓는 곳이고, 다른 곳은 주로 그 과보를 받는 곳입니다. 과보가 소진되면 다시 다른 곳에 태어납니다.
계속된 질문아닌 질문까지 답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중생의 감각과 인식의 한계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듯합니다 겸손하게 꾸준히 정진하라는 당부로 듣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