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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덕수궁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다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33 14.07.30 11: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덕수궁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다

 


1890년대 덕수궁(당시 경운궁) 대안문의 모습.

대안문은 경운궁이 화재로 불탄 뒤 1906년 이를 재건하면서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덕수궁(당시 경운궁) 대한문(大漢門)의 옛 이름인 대안문(大安門)의 1890년대 모습이 사진연구가인 정성길(61) 대구동산병원 명예박물관장에 의해 20일 공개됐다.

정 관장은 “1896년쯤으로 추정되는 대안문 사진을 한 고사진 수집가로부터 입수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개하게 됐다”면서 “대안문 앞에 커다란 돌 등이 널려있는 것으로 봐서 고종의 황제 즉위(1897년) 전에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안문은 경운궁이 화재로 불탄 뒤 1906년 재건되면서 고종의 명에 따라 그 명칭이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한편 문화재청은 지난 2004년 4월 대한문 보수공사에 들어가 1년9개월 만인 지난해 12월말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이를 공개했다

 

 

1920년대 대한문(대안문)

 

 

지금의 대한문

 

 

 

덕수궁의 정식이름은 경운궁, 정문은 인화문

 

우선 덕수궁은 사실 덕수궁이 아닙니다.

덕수궁은 고종황제 퇴위후 황제위에게 밀려난 고종황제에게 부인 궁호일뿐이며 원 명칭은 경운궁입니다.

덕수란 조선시대초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던 태조에게 붙엿던 명칭으로 물러난 왕에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올리는 일종의 보통명사입니다.

덕수궁은 고종황제께서 아관파천(1987년)후 환궁하시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는데 이유는 이미 1880년대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 서양 여러나라와 수교하면서 공사관 부지로 떼어준 관계로 각국 공사관옆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즉 서양세력의 그늘을 이용하여 일본의 압박을 피해보려는 궁여지책이였지요.
이런 덕수궁은 1904년 큰 화제가 발생하여 약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수리를 거칩니다.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엿습니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 창경궁은 홍화문, 경회궁은 홍화문으로 보통 궁궐의 정문은 하자를 돌림으로 쓰죠

1896년 중건당시 부터 고종황제의 환궁이나 독립협회원들이 복합상소를 올리때까지도 인화문은 정문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엿습니다. 하지만 인화문이 정문이 된데는 아마 남향이라는 것만 고려된듯 보입니다 지형적으로 봤을대 앞이 가로막혀 정면으로 도로가 뻗어나갈수가 없기때문입니다.

 

1900년대 동문인 대안문을 뻗어나가는 방사상으로도로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안문은 도로가 모여들고 접근이 용이한 서울의 중심지가 되었고 경운궁의 주 출입문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궁궐의 정문과 마찬가지로 군대사열, 복합상소, 군중집회등을 벌일수 있는 넓은 광장이 자리하고 있어 정문노릇을 하게 됨에 따라 인화문은 자주 쓰이지 않는 문으로 퇴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문은 고종실록에 따르면 1904년 4월 14일에 일어난 경운궁의 대화재로 경운궁을 중건할때 공사를 하는 김에 대안문도 수리하려는 논의가 일어낫습니다. 고종황제는 이를 허락하면서 그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 상량명을 영돈령 이근명이 짓고 현판글씨를 특진관 남정철이 섰다는 기사에는 특별한 이야기를 찾기 어렵습니다. 즉 왜 고쳣는지는 추측을 할뿐입니다.

가설 1.
노다라는 일본 식민사학자의 "덕수궁사"를 보면
'건양 2년 2월 국왕이 노국 공사관으로 부터~그래서 광무 8년에 이르러 본궁이 하루아침에 화재 당한것은 크게 통탄할 일이지만, 점점 그를 복구함에 그 의미가 연장되어 정문의 개축 개호로 나타났던 것이다. 당신 한국은 일찍이 이미 지나와 종속관계를 이탈해서 새로 한번 도약해서 제국이 되었고 바로 한실(漢室)'의 흥융을 스스로 자임하고 있었다

"인화"란 구명을 그만 쓰고 "대한"이란 두 글자가 새로 본궁의 정문의 명칭으로 채택된 것이다'

즉 광무와 대한 제국으로 칭제 건원한 것을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이탈하여 한실의 응융을 자임한 것으로 보고 그러한 맥락에서 대한문으로 개칭하였다는 해석이다.
 

반박 : 그러나 칭제걱원이 중국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설명은 을미사변- 아판파천-경운궁 환궁- 칭제건원 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고종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있었다는 점을 호도하고 있으면 또 대한제국을 건설하면서 왜 중국을 주로 뜻하는 漢의 흥융을 내세웠다는데는 수긍이 되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 해도 왜 처음에는 대안문으로 했다가 10년이 지난 후에 고첬는가 하는 점도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가설2.
가설이라기 보단 속설이네요. 대안문의 안(安)자가 이등박문의 수양딸이 되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배정자, 러시아 웨벨공사부인, 그의 언니 손탁등이 양장에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 불길해서 바꿨다는 설인데 일국의 군주가 사는 궁궐의 정문 이름을 그런식으로 바꾼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아마 민심의 반영정도 일것입니다.

가설3.
대한문으로 개명한 주체가 이토오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조선 통감부이고 그 의도는 한(漢)자에 놈이라는 뜻있어서 즉 대한문이란 큰 도적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으로 개면했다는 설이다.

당시가 일제가의 국권을 탈취하기 위한 절차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던 중이며, 나라의 정신을 빼앗고 우리나라를 볼품없게 만드는데 온갖 방법을 다한 일제이기에 수긍이 많이 갔다.

반박 : 하지만 1906년 4월 25일은 통감부가 치된 2월 1일 부터 석달도 채 못된 시점으로 이토오 히로부미는 취임하지 않고 하세가와가 통감대리를 맡고 있는 상태여서 아직 정리도 채 안끝난 곳에서 이런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썼을까 하는 점과 한(漢)이 놈을 뜻한다는 건 보기가 힘든것이 한강, 북한산, 남한산, 서울의 다른 이름인 한양등에서의 한은 서울을 뜻하기도 했다.

가설4.
한은 보통 중국을 뜻하는 글자이므로 소중화 사상의 우리나라가 중국의 보호등을 원하는 뜻에서....라는데 당시 실정을 보면 말도 안된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께서 머물면서 조성된 궁입니다. 하지만 조선 말이 되면서부터 궁의 모습을 찾기 힘들정도로 쪼개져 버렸지요, 우리나라의 많은 궁들이 다 그러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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