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주다
우정의 삽질
3월 13일, 내 친구 응규가 왔다. 그는 서울에서 아침 일직 전철을 타고 소요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다시 전곡에서 30분을 기다려 10시 30분 버스를 갈아타고 동이리까지 왔다. 시간상으로 지리산보다 먼 거리다. 원래는 전곡으로 마중을 나가려고 했는데, 미산면 봄맞이 대청소 행사에 참석하느라 마중을 나가지 못했다.
"친구 미안하군. 오늘 미산면 봄맞이 대청소에 참여하느라…사진도 좀 찍어주어야 하고 해서…"
"걱정 붙들어 매시게. 10시 30분 버스를 타고 가겠네."
너무나 고마운 친구. 고향의 향수가 물씬 풍겨오는 그리운 친구다. 우리는 11시경에 동이리 마을회관에서 만났다. 버스정류장과 마을 앞을 청소를 하고 있는데 버스에서 내리는 그를 만났다. 우리 집은 마을회관에서도 3km정도를 더 걸어가야 한다.
"일 많이 해 놓았네."
"나의 농사 사부인 자네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지. 하하하."
"칭찬 받을 만하네. 자네 농사 솜씨도 점점 늘어가는군."
친구가 오기 전에 텃밭의 흙을 쇠스랑과 삽으로 한번 뒤집어 놓았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곧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텃밭으로 갔다. 그가 오자 텃밭 일이 더울 탄력을 받았다.
그는 먼저 퇴비를 텃밭으로 운반하였다. 퇴비는 농작물을 파종하기 10여일 전에 미리 뿌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가스가 차지 않고 농작물에 좋다. 더구나 우리 집 텃밭은 순전히 모래땅과 자갈밭인지라 퇴비가 없으면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다.
친구와 나는 소위 어깨에 '가대기'하여 퇴비를 텃밭으로 옮겼다. 50포의 퇴비를 적당한 간격으로 옮겨 놓으니 비로써 농사를 지을 준비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퇴비가 부족할 것 같아 추가 신청을 해 놓았다.
퇴비에 대해서는 한 번 더 포스팅을 할 예정이지만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농촌에서는 퇴비 확보하느라 여념이 없다. 농협퇴비는 농지 경작 면적에 따라 배포를 해준다. 농협퇴비는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배부를 하지 않고 농지원부가 있는 농부에게만 배부를 해준다.
퇴비를 텃밭에 골고루 배치를 한 다음 우리는 호박구덩이를 팠다. 작년에도 3월 19일 날 호박 구덩이를 팠었는데, 금년에도 비슷한 시기에 파게 되었다. 금년에는 호박만 심는 게 아니라 이곳에 참외도 심을 예정이다.
"이렇게 구덩이를 파다보면 이 자갈밭도 옥토로 변하겠어."
"원래 밭을 개간하는 방법이 이런 방법이지. 구덩이를 매년 파다보면 자연스럽게 밭이 되고 말거든."
작년에는 호박을 10구덩이를 팠었는데, 이번에는 참외 구덩이까지 해서 15 구덩이정도를 팠다. 구덩이를 넓고 깊게 파야 호박이나 참외가 잘 자란다는 것. 구덩이에 퇴비를 듬뿍 주어야 늦가을까지 호박이 힘을 받아 줄기차게 열어주고, 익어간다. 호박도 늙을수록 힘을 받아야 한다.
호박구덩이를 파고 나서 밭 사이사이에 아직 개간을 하지 않은 자투리땅을 파서 추가로 밭을 더 만들었다. 농구대 밑에 있는 모래도 한쪽으로 치워 밭을 만들었다. 여기저기에 밭을 만들고 나니 금년 경작 넓이는 작년의 배 정도 될 것 같다.
퇴비뿌리기
다음에는 이랑에 퇴비를 골고루 뿌리는 작업을 했다. 삽으로 퇴비를 떠서 밭이랑에 골고루 뿌려 주고 갈퀴로 긁어서 퇴비를 덮어주었다. 두 줄에 한포 정도를 뿌렸다. 호박구덩이에는 세 구덩이에 퇴비 한포를 뿌렸다. 퇴비를 뿌리면 박토가 옥토로 변한다.
살구나무, 매화, 대추나무 등에도 퇴비를 뿌려주었다. 나무의 둘레를 적당히 파고 거기에 퇴비를 뿌리고 흙으로 덮어주었다. 아마 이 나무들은 일생에 처음 퇴비 맛을 보지 않을까? 퇴비를 머금은 나무들이 춤을 추는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작년에 만들어 두었던 퇴비를 땅콩 밭과 감자밭에 뿌렸다. 아직 완전히 숙성이 되는 않았지만 거의 퇴비로 변한 두엄이다. 이 퇴비를 모래땅에 뿌려두면 물 끼를 오랫동안 잡아두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앞으로도 퇴비를 더 만들 예정이다. 음식물 쓰레기와 풀 등을 섞어서 연도별로 구분하여 퇴비를 만들어 쓰기로 했다.
그런데 어제부터 어금니에 치통이 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지난주에 서울에 갔을 때 치과에서 점검을 했는데 잇몸이 좋지 않아서이니 칫솔질을 잘 학 피곤하지 않게 몸을 돌보라고 했다. 피곤하면 잇몸이 더 아픈 것 같다.
타이레놀을 먹어도 잘 듣지 않았다. 치과에 전화를 했더니 이가 아픈 것은 단순한 진통제로는 잘 듣지 않는다고 하며 처방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근처 약국에 가서 처방전을 팩스를 받아 약을 지으라고 했다. 약국은 전곡에나 가야 있다.
나는 전곡으로 가서 서울 옴니치과로부터 처방전을 팩스로 받아 약을 처방 받았다. 전방 오지에 살다보니 약을 사는 것도 수월치가 않다. 처방된 약을 먹고 나니 치통이 좀 가라앉는 것 같다.
이틀간의 작업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농사는 혼자 짓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하면 더 재미있고 훨씬 힘이 덜 든다. 멀리까지 와서 우정의 삽질을 해분 친구가 너무나 고맙다. 내일은 멀칭을 하기로 했다.
해가 벌겋게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다.
"멀리까지 와서 함께 벗을 삼아 농사일을 도와준 내 친구 응규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에게 항상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 드립니다. 또한 금년에 텃밭 농사가 잘 되어 금가락지를 찾는 분들에게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채소와 농작물을 맛볼 수 해 주소서……"
지는 해를 보자 나는 밀레의 <만종>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곳은 교회의 종소리 대신 사격훈련을 하는 대포소리와 총성 소리가 들려온다. "포성 소리를 교회의 종소리로 생각하면 되지." 저 포성 소리는 언제나 멎을까? 이 땅에 통일이 빨리 되어 포성소리가 멎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샤워를 하고나서 저녁을 먹었다. 작업을 한 뒤에 샤워하는 기쁨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 저녁을 먹고 나자 눈이 슬슬 감겨왔다. 그런데 아이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도봉산역이라고 했다. 내일(3월 16일)은 아내 생일이어서 서울에서 아이들이 오기로 되어 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려 소요산역으로 차를 몰았다. 집에서 소요산역까진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소요산역에서 아이들을 픽업하여 집에 돌아오니 밤 9시다. 친구와 나는 2층 다락방에서 곧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몸은 노고하지만 잠은 달다.
첫댓글 사모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두분께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함께하시어
행복하고 건강한 삶이 지속되길 기도드립니다..!!
농사는 한번도 안지어봤지만 여행기보다
농부일기가 더 가슴에 와닿는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