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두기'[횡설수설/서영아]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 이런 홍보 문구를 내세운 2011년 영화 ‘컨테이젼’(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세계가 현실이 돼버렸다. 무려 9년 전에 오늘날의 코로나19 사태를 미리 본 듯 그려냈다. 박쥐에서 시작된 최초 감염자로부터 일상 ‘접촉’만으로 3개월 만에 전 세계 10억 명에게 감염이 확산됐고, 아무도 집 밖에 나서지 않게 돼 텅 빈 거리 풍경이 오늘 감염 공포에 빠진 도시들과 유사하다.
▷이쪽은 현실세계. 작은 꾸러미를 길 중앙에 두고 마스크로 무장한 두 사람이 멀찌감치 떨어져 마주 선 장면이 신문에 실렸다. 중국 베이징의 KFC, 피자헛 등이 2월 초부터 시작한
‘비접촉 배달 서비스’란다. 배달 직원이 고객이 원하는 곳에 피자를 놓고 안전거리인 2m 뒤로 물러서면 고객이 다가와 챙겨가는 식이다. 사람 간 감염이 일어날 수 있는 2m 내 접촉을 피한다는 취지다. 런민왕에 따르면 이 밖에도 다양한 ‘비접촉’ 판매 방식이 등장했다고 한다. 고객과의 사이에 2m 나무판을 놓고 이를 미끄럼틀 삼아 만두를 건네고 잔돈은 국자에 담아주는 만두가게가 있는가 하면, 고객이 온라인 주문 뒤 지정된 무인공간에서 제품을 찾아가게 하는 서비스도 있다.
▷전문가들은 감염병의 지역사회 확산을 줄이기 위한 두 가지 전략을 권한다. 즉, 모든 유증상자와 잠재적 감염자들을 이동 없이 그 자리에 있게 하는 ‘움직이지 않기’, 그리고 2m 이내 비말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코로나19의 특성을 감안해 사람 간에 거리를 두는 ‘거리 두기’ 전략이다.
▷‘거리 두기’가 강조되면서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총선 풍속도도 크게 바뀔 듯하다. 정치인들로서는 선거철에 유권자들의 눈도장을 찍는 데 악수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었지만, 이제는 언감생심이 돼버렸다. 대안 인사법으로 소개되는 ‘주먹 인사’니 ‘팔꿈치 인사’도 ‘2m 안전거리’를 지켜야 한다면 힘들어진다. 신인의 경우 마스크를 쓰고 시민들에게 얼굴을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떤 기발한 ‘비접촉 선거운동’ 방법이 생겨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전쟁이건 재난이건 일이 터지면 그 사회의 취약한 계층이 가장 힘들어진다. 신천지 대구교회를 제외하면 취약계층 돌봄 시설에서 집단 발병이 많다고 한다. 사람 간에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어도 약자들에 대한 마음은 가까워질수록 좋은 것 아닐까. 바이러스라는 작은 존재가 사람들 간의 직접 접촉을 막고 서로를 고립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다. 타인을 바이러스 덩어리로 여기고 경계해야 하는 현실은 코로나19 확산이 던져주는 새 풍속도 중 참으로 씁쓸한 대목이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나는 알 것 같았다 / 김영교
코로나의 '거리두기'가 옛 작품 연습장을 기웃거리게 했다. 몇년 전이었을까? 그 해 서울풍경 단상이펼쳐졌다. 같은 제목으로 먼저 글 쓴것을 날짜 확인하고 올린다.
-시내에 나가면 여자 가득한 곳 세 곳이 어딘지 나는 안다. 여탕, 손톱 미장원, 만원사례의 고급식당, 여성 전성시대를 놀라면서 바라본 그날의 감회, 오돌도돌 별미였다. 모두가 보통 이상으로 아름다웁다. 생기펄펄 넘치고 윤기나게 반짝이고 있다. 당당함으로 출렁대는 햇빛 가득 여자의 바다였다.
부쩍 마른 막내 누이를 뭘 좀 먹이겠다고 별러온 오라버니의 배려, 무참히 꺾이었다. 어떤 모임의 단체예약 때문에 점 찍었던 전통 한식 식당은 차질을 빚었다. 그날 우리의 막힌 발걸음을 부랴부랴 예약으로 불러준 곳이 그 유명하다는 샤브샤브 음식점이었다.
식당 실내는 냉방도 절도있게 잘 돼있고 친절하게 안내되었다. 우선 화장실 부터 청결했다. 색깔도 깨끗한 실내장식- 여백을 강조, 조잡스럽지 않은 균형감각이 나의 호감을 샀다. 종업원들의 서비스도 전문성을 띠고 친절한 미소와 말소리는 금상첨화였다. 고객의 필요에 즉각반응을 보이며 움직이는 동작 역시 민첩했다. 분위기도 격조있고 일류식당의 면모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 단골들의 발길을 끌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 식당에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왜냐하면 음식 맛이 훌륭해 나같은 국외손님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접대에 부응하고도 남는듯했다.
내가 놀란 일은 그 커다란 식당 홀 가득 그 분주한 점심시간에 식사하는 손님들 전부가 여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젊고 나이 들고의 차이는 있을망정 모두 여자손님들이었다. 직장 여성도 있고 가정주부도 있고의 차이, 모두가 옷 잘 입은 세련된 여성들이었다. 우리 테이불의 오라버니만 남자, 주위 모두가 깔끔한 여성 손님들이었다.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시식해보고 아마 저녁 식탁에 올려놓을 식사준비 요리학습 공부하려고 외식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여자들 뿐일까. 경이의 눈에 비친 여성포화 그림, 아름답고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넥타이들은 그러면 어디서 점심식사를 하는 걸까? 저렴한 대중식당을 선호하는 것일까? 밤은 남자들의 불야성, 판도가 달라질까? 지금 세상이 얼마나 속도 세상인데 싶어 성장의 모습으로 점심시간을 허느적 한가하게 보내는 실태를 현장 조사라도 하고 싶지만 이틀 후 여성만원 점심 나라를 떠나야 하는 출국날짜가 약속되어 있었다.
훌훌 날아오면서 기내을 살펴보았다. 여자들 숫자가 역시 많았다. 위풍 당당, 그만큼 여성활동을 필요로 하는 사회 범위가 넓어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여성 전문성, 여성 우수성이 사회 한 복판으로 전이되면서 여권이 펄럭이는 축복받은 땅으로 변하고 있다. 친구딸은 최 연소자로 사번고시에 합격, 아버지 뒤를 잇는다 신문이 대서특필한 기사를 기억하고 있다. 이 예를 뒤로하고... '자녀 안가지기'가 유행처럼 번지는 요즈음이 아닌가? 점심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자녀가 없는 가정부재의 저녁식탁까지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과연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 해방된 것일까? 키천크로스 잇 아웃(kitchen close, eat out)시대 도래인가,
주부를 부엌에서 어느정도 해방시킨 패스트 훗이나 인스탄트 훗이 알조를 하고 목하 인기를 끌고 있다. 성인병에 그 기여도도 무시 못할 수준이라고 한다. 방부제와 조미료에 건강이 위협당하는 위기감이 여성식당과 무관하지 만은 않은 것 같다, 고국의 앞날이 염려되는 게 나만의 기우일까!
-오래된 글 하나 발견해서 언젠가 그런 느낌을 가진 때가 있었구나 하고 옛 추억에 잠겼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미국도 한국도 코로나 창궐로 겪는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불편의 이점은 미루고 미루던 내 작품 설합이 정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암튼 코로나, 이것 또한 사그라져 사라질것이다. 기필코 오고야 말 그날을 기대해 본다.
*윤승은 판사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