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고자 한 사람들의 최후
사도행전 14:8~18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일차 선교 여행을 떠났을 때에 루스드라 지역에서 전도할 때에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집회 중에 치료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너무나 놀라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서 신이라고 생각하고 사도 바울이 알아듣지 못한 당시 지방 방언인 루가오니오 방언으로 소리를 칩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저 조용히 현자처럼 자리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뒤에 계신 분은 제우스 신이고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사람은 제우스 신의 전령인 헤르메스 신이다.”
그 루스드라 사람들은 집회 중 강단에서 점잖게 앉아 있는 은혜스러운 바나바를 제우스라 생각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바울을 제우스 신의 전령사인 헤리메스 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회가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도시 밖에 있는 제우스 신당지기인 제사장을 불러서 세상에 내려온 제우스 신과 그의 전령사 헤르메스 신에게 제사하자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제물인 소 한 마리를 끌고 오고 신을 치장하는 화환들을 만들어 달려와서 바울 일행의 숙소 앞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몰려왔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숙소에서 쉬다가 영문을 모른 채 집밖에 몰려든 사람들이 법석대는 모습을 보면서 헬라어로 이유를 물어보고서는 깜짝 놀랍니다. 그 원주민들이 그들을 신으로 생각하고 몰려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사도들은 질겁을 하고 집밖으로 달려나와서 제사 준비에 한창이던 그들 가운데 뛰어들어 말립니다. 자기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참 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만물을 다스리고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햇볕과 비를 내려 곡식을 거두어 살게 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시라면서, 우상이나 사람이나 어떤 나무나 돌이나 짐승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일을 절대 하지 말라고 탄원하며 절규하듯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흥분했던 감정을 간신히 가라앉아서 두 사람에게 제사 드리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만 아니라 세상에는 사람을 신으로 생각하며 경배하려는 경향들이 늘 있어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자기를 태양신 라의 아들로 스스로 부르곤 했습니다. 나중에 메대의 왕 다리오 시대에도 간사한 신하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국무총리 다니엘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제거하려고 다리오 왕에게 삼십 일 동안 누구든지 다리오 왕 외에 어떤 신에게 무엇을 구하거나 기도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어기면 누구든지 지위 고하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사자굴에 던져넣는다는 조항을 넣어서 왕의 어인을 찍어 조서를 발령하였습니다.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왕의 조례를 선포하는 것인데도 그 때의 다리오 왕이 달콤한 아첨의 말을 가지고 접근한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여서 그 조례에 왕의 도장을 꽉 찍어서 발령을 냈습니다. 이는 그 만큼 사람의 마음 속에 신의 자리에 올라 신의 반열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경배를 받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향은 사람이 권력을 쥐고 그 힘을 맛보면 맛볼수록 그러한 욕망의 덫에 걸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 헤롯 아그립바 1세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미치광이 황제 가이오 즉 별명이 칼리쿨라로 불리웠던 황제의 친구지간이어서 그 배경을 힘입어서 팔레스타인의 분봉왕이 되었다가 황제의 은덕으로 자기 삼촌 헤롯 안디바를 내어쫓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이르는 큰 영토를 차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기의 권력에 도취한 그는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오직 목회에만 힘쓰는 하나님의 종들을 감히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군인들을 시켜 세배데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체포하여 칼로써 처형을 했고 또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니까 또 다시 사도 베드로까지 체포하여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사도 베드로를 감옥에서 빼냄으로써 그 일을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참으로 간이 부은 행동을 이렇게 거듭한 것입니다. 그 직후에 헤롯 아그립바 왕이 가이사랴 야외 연극장에서 아침 일찍 연설할 때에 그 자리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 당시 두로 시돈 사람들은 헤롯 왕의 관할 아래 있는 지역에서 나는 양식을 얻어야 하는 간절한 필요 때문에 그 자리에서 왕에게 환심을 사는 아첨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때 헤롯 왕이 아침 햇살이 비출 때에 연단에 서서 연설을 할 때에 그 은으로 장식한 옷에 비춰 반사하는 빛을 발하면서 연설을 하자 시돈과 두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이 아첨의 말 외에도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행한 말들 중에 이런 말도 했다고 랍비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소서 우리가 지금까지는 한 인간으로서 당신을 존경해왔으나 앞으로는 당신이 멸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는 데 동의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왕이 그들을 꾸짖지 않았고 그들의 아첨의 말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일 직후에 왕이 고개를 쳐들고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줄 위에 올빼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로부터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한 올빼미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보고 감옥에 갇혀 있던 독일인 죄수 한 사람이 풀어서 말하기를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요 높은 관직에 오를 것이지만, 후일에 또 다시 올빼미를 보면 오 일 안으로 죽을 것이요 이것이 새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의 뜻을 보여주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금 그가 연설한 직후 사람들의 찬사를 받아들이자 곧장 그의 눈앞에 올빼미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 때부터 배에 통증이 엄습하더니 결국 오일 만에 죽고 말았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봉왕의 자리에 오른 지 7년째 되었을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고 온갖 사치를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 결국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먹었다가 하나님의 추상같은 심판을 받아 그렇게 순식간에 고통 중에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승승장구하게 되고, 그의 인격과 신앙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권력과 부와 인기와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가 주어질 때에 결국은 분별력이 없어지고 미련해지고 간이 붓고 자기를 신처럼 생각하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결국 스스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방영된 티브이 내용 중에 이단 교주들이 자기들을 신으로 주장하여 거기에 넘어간 이들이 엄청난 성적 착취와 정신적 착취와 노동 착취와 자유를 다 잃어버린 채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을 고발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단 교주들은 자기를 신으로, 신의 유일한 대리자로 행세하면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세뇌시키면서 결국 모든 것들을 앗아갔습니다. 정명석이란 사람이 그러하고, 이재록이라는 사람도 그러하고, 박태선 장로도 그러하고, 박명호라는 사람도 그러하고, 신옥주라는 여자 교주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일들은 많은 이단 사이비 집단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살아서 영생한다는 승리제단 조희성 씨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조희성 교주가 감옥에서 죽은 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우리나라 여러 곳에 승리제단에 속한 곳이 있습니다. 자신을 유일한 신적 대리자로 추켜세우면서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면서 사람들을 부추기는 이런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결국은 다 타락과 부정과 축재으로 점철되고 결국은 비참한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저 하나님의교회 여자 하나님을 섬기는 곳도 그러할 것이요 자기를 마지막 시대의 목자로 가르쳐서 추앙하도록 만드는 신천지 이만희 씨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타락은 인간이 신으로 추앙받으려는 욕망이 내재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였던 마귀 역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던 자였기에 그는 이렇게 사람들 마음속에 교만한 마음을 품고 신이 되기를 원하고 사람들의 경배와 찬사를 받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 스스로 속아서 그런 일을 자행하고 결국 자기가 신인 줄 알고 그런 찬사와 경배를 받으면서 처절하게 패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일부 타락한 신유 사역자들 중에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서 결국 자기를 신격화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목회자들도 그 존경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사를 강력하게 뜯어 말린 행동이 당연한 것이지만 그 반대의 태도를 취할 위험도 우리의 내면세계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영적 경각심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심지어 다윗도 그를 죽이려던 사울이 죽고 주변 모든 이방 민족들의 항거와 도전을 다 물리치고 평정하여 성공의 절정의 시기를 만나자 경건했던 삶의 태도를 버리고 자기는 하나님의 법에서 예외라도 되는 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나라의 왕이라도 된 듯이, 자기의 부하의 아내를 탐하고 악을 행하고 충성스러운 그 부하를 전쟁터에서 고의적으로 화살 맞아죽이도록 간교한 술수를 쓰고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를 삼은 대역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아무 일 없는 듯이 하나님도 모르는 듯이 여전히 왕노릇을 태연하게 일년 넘게 행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른 듯한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벼락치듯 찾아와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과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통하여 연단받고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야 다윗은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비기려는 자기 안에 본성을 깨닫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그의 고향 베들레헴에 진치고 있을 때에 다윗 왕이 성문 옆 우물 물을 마시고 싶다는 말을 듣고 목숨을 걸고 세 명의 부하들이 단독으로 움직여 적들의 진지를 격파하고 그 물을 가죽 병에 담아 와서 왕에게 바쳤을 때에 다윗은 이 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그렇게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바쳐야 하는 충성은 하나님께서만 받아야지, 한낱 인간인 다윗 자신이 받을 것가 아니라고, 다윗은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사람을 보내어 사도 베드로를 자기의 집에 모셔왔을 때에 베드로를 맞이하면서 고넬료가 바닥에 발 앞에 엎드려 절하자 베드로가 그를 급하게 잡아 일으키면서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고 말했던 것도 바로 다윗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귀양살이할 때에 환상 가운데서 하늘의 보좌와 천사들의 말들을 전해 들을 때에 영광스런 빛 가운데 있는 천사가 그에게 말할 때에 두 번이나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천사는 사도 요한을 제지하면서 자기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니 자기에게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리곤 하였습니다. 타락한 옛 뱀은 자기를 하나님처럼 행세하면서 광야에서 기도하던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에게 절하라고 경배하라고 요구하였던 것과 완전히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여러 일들과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항상 우리 안에 타락한 인간 자신의 본성과 마귀와 악한 영들의 부추김으로 인하여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교만함이 내재해 있음을 기억하고 늘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에게 기회만 주어지면, 그러한 환경과 여건만 주어지면 우리가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심지어 다윗조차 그러했었던 점을 기억합시다. 심지어 사도 바울조차 그럴 위험이 있을 만큼 많은 은사와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기 위하여 할 수 없이 그에게 강력한 육체의 가시를 심어주어서 교만할 수 없도록, 자기가 단지 사람에 불과하며 너무나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못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기도한 끝에 그것을 밝히 깨달아 알고서는 자기에게 가시가 있음으로 인하여 약할 때 강하게 되는 역설적 은혜가 있음을 깨닫고 크게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면서 권세와 재물과 인기와 성공과 건강과 평안과 형통함을 주실진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항상 기억합시다. 내가 잘해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운이 좋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님을 항상 기억합시다.
세례 요한이 했던 이 말씀,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27)
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은사도, 재물도, 세상 지위와 교회 직분도, 건강도 평안도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기억하면서, 항상 겸손 또 겸손하길 힘써야 하겠습니다.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드림으로써, 교만과 넘어짐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으며,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끝까지 쓰임받는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