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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통에 목선을 타고 피난 가는 교회친구를 배웅하러 나갔다가
엉겹결에 출발하는 배에 올라 남쪽으로 오게 되었고, 혈혈 단신 10살 나이에 고아가 되었지만
갖은 고생 끝에 모자 제조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회장님 얘기입니다.
1995년 7월 27일.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유엔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며 미국의 6·25전쟁
참전을 기념하는 기념비 제막식이 열리고 있었다. 6·25전쟁 휴전 42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
행사에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도 참석했다.
양국 대통령과 각료급 인사를 포함, 양국에서 50만명 이상이 참석했던 대규모 축제도 함께 열려
나흘 동안 축제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 뜻 깊은 참전비 개막행사에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낯선 두 사람이 초청돼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은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50대 한국인과 60대 미국인. 이들은 유명
정치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잘 알려진 연예인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이날 행사를
감격스럽게 여기며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이 중 한국인은 나였고, 평범한 미국인은 필라델피아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는 데이비드 비티 씨였다.
내가 비티 씨와 함께 이곳에 초청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워싱턴 6·25전쟁 참전기념탑에
이름이 새겨져서가 아니다. 그곳에 새겨진 것은 나와 비티씨의 6·25전쟁 스토리다.
기념탑 동판(銅板)에는 성공한 한국 기업가와 평범한 미국인 청소부의 극적인 만남과 이별,
재회(再會)가 각인돼 있다. 거기엔 진한 감동과 인간애가 넘쳤다.
미국 NBC TV는 1991년 3월 이런 나와 빌리의 이야기를 20분짜리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골든타임’에 방영했다. 세계 각국 언어로 5000만 부나 발행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도 1986년
6월호에 이 이야기를 썼다.
1940년 4월 18일, 나는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릉현 흥원진에서 신흥백화점을 운영하던
백동원(白東元)과 김숙녀(金琡女)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조부 백운휘(白雲輝) 장로는 3·1운동
당시 신의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됐으나, 탈옥(脫獄)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4년 7월 내가 다섯 살 때 부친은 장티푸스에 걸려 끝내 세상을 등졌다.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는 1945년 10월 가산(家産)을 정리해 평안북도 용암포(龍岩浦) 외가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벽돌공장 등 6개의 사업체를 운영했고, 우리 가족은 한경직(韓景職)
목사의 숭실학교 4년 선배인 이기혁 목사의 용암포 제일교회에 다녔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은 할아버지를 부르주아로 분류, 1946년에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1949년
용암포 일대에 장티푸스가 크게 돌았다. 어머니에 이어 나도 장티푸스에 걸려 폐렴증세로 죽을
고비를 넘기다, 외가에서 쌀 일곱 가마를 주고 페니실린 주사약을 구해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1949년 가을, 우리 가족은 다시 원산(元山)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인민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담임 선생님은 “미국과 남조선이 북조선을 공격해 왔다”며
전쟁발발 사실을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골로 피란 가야 한다”며 웅성거렸다.
공산당은 눈에 띄는 대로 청년들을 인민군에 입대시켰다. 내가 출석하는 원산 광석교회 청년
4~5명이 산 속에 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 공산당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식량을 날라다 주는 일을 맡았다. 인민군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스레 해야 했는데,
전쟁 초기 4개월간 한 번도 발각되지 않았다.
중공군이 개입한다는 소문이 들리던 12월 초 어느 날, 유엔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기독교인이 남아 있다가는 큰 화를 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가족이 함께 다니던 원산
광석교회 신도들도 함께 피란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육로(陸路)보다는 배를 빌려 남쪽으로
가기로 했다. 이것이 훨씬 안전할 것 같아서 였다.
우리 가족도 당연히 끼여야 했으나, 며칠 전 조부가 미군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피란을
가기 힘들게 되고 말았다. 조부를 홀로 남겨두고 피란을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교인들은 12월 7일
원산 갈마항(港)에서 함께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운명의 장난 같은 南韓行)
배가 출발하는 12월 7일 오후, 내 인생의 큰 분기점이 된 하루였다. 조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성학아, 피란 가지 못한다고 섭섭해하지 마라. 걱정 말고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자.”
조부의 말을 듣는 순간, 날 가르쳐준 선생님께 작별인사라도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정든 형들과도 작별인사를 해야 겠다고 맘 먹었다. 난 단숨에 갈마항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피란선엔 날 가르치던 선생님은 보이질 않고, 낯익은 얼굴만 40여 명 타고 있었다.
“성학아, 너 심부름 좀 해야 겠다. 곧 배가 떠날 예정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질 않았구나.
수고스럽지만 집마다 다니며 빨리 배로 모이라고 전해 주려무나.”
난 같이 피란 가기로 한 집을 일일이 찾아 곧 배가 떠난다고 알렸다. 그러나 집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얼마를 뛰어다녔는지 추운 날씨에도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피란
떠날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다. 나는 교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성학아, 수고 많았다. 우리가 산속에 있을 때는 식량을 열심히 날라 주더니 끝까지 고생하는구나.
너는 똑똑해서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무언가 모르는 서글픔이 가득 밀려오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피란선은 작은 목선(木船)이었다.
배가 항구를 벗어날 때까지는 통통선이 줄을 매달아 끌어주어야 했다. 나는 교인들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전송하기 위해 부두와 배 사이의 부교(浮橋) 발판 위에 올라 피란 떠나는 교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운명의 신은 이때 찾아왔다. 손을 흔드는 내게 멀찌감치 있던 이웃 형이 갑자기 “사탕 사 먹으라”며
돈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받기 위해 상체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통통선이 기적소리를 내며 출발했고, 그 충격으로 부두에 매어 놓은 발판이 빠지고 말았다.
빨리 배로 뛰어오르지 않으면 물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피란선에 올랐다.
“안 돼요, 전 같이 가면 안 돼요. 배를 멈춰 주세요.”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나의 작은
외침이 멀리 앞서가는 통통배에 들릴 리 만무했다. 통통배가 그 소리를 들었더라도 배를 돌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난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나를 기다릴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11살배기가 홀로 남행(南行) 피란선에 몸을 실은 것이다. 울고 또 울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배는 계속 남쪽으로만 향했다. 이제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할 도리밖에 없었다. 교인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처지였기에 내게 계속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이후 어머니 소식을 전혀 모르던 나는 1993년 중국을 왕래하면서 북한에 사는 친척의 편지를
통해 모친의 소천(召天)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남한에 외아들을 홀로 떠나보내고
눈물로 기도생활을 하다, 1962년 신의주 여자교화소에서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내가 17번 죽음의 고비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다. 아내가 졸업한
이화여대에 현대식 교회를 건립해, 어머니를 기념할 수 있었다. 이화여대는 교회 이름을 ‘김숙녀
메모리얼 교회’ 라고 명명해 주었다.
다시 6·25전쟁으로 돌아가자. 묵호에서 사흘 동안 두 끼밖에 얻어먹지 못했다. “밥을 달라”는
말도 나오질 않았고, 내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나는 ‘어린 거지’가 됐다.
피란민을 따라 포항을 거쳐 경주(慶州)에 도착했다. 배고픈 서러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불쌍한
이를 감싸주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이때 깨달았다.
옷은 때에 절어 반질반질한 상태였고,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 경주역 앞 신흥식당 청소부로
취직했다. 세 끼 밥을 준다는 주인의 이야기는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내게 최상의 근무조건이었다.
그러나 가게를 쓸고 닦는다는 것은 열한 살 된 소년에겐 벅찬 일이었다. 부엌일을 하며 그릇을 깨기
일쑤였다. “조심성이 없어 가지고… 더 이상 못 데리고 있겠으니 딴 곳을 알아 보렴.” 주인
아주머니의 한마디에 또다시 ‘거지생활’로 돌아갔다.
여느 소년들처럼 구두통을 겨우 마련해 구두닦이로 나섰다. 텃세가 심해 “구역을 침범했다”며
흠씬 두들겨 맞는 일이 많았다. 하루 두서너 켤레를 닦는 구두닦이보다 미군(美軍)을 쫓아다니며
‘C-레이션’을 얻어먹는 편이 훨씬 나았다.
(김종만 일병과의 만남)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가 힘겨워 밤이면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며 기도했다. 날씨가 풀리면서 전황(戰況)은 유엔군이 공세로 전환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떴고, 무조건 고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안동(安東)을 거쳐 원주(原州)에 도착했을 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다. 기차는
없고 화물차만 가끔 다녔는데, 난 북쪽으로 가는 기차다 싶으면 무조건 기관차 아저씨에게 달려가
미군에게 얻은 C-레이션을 주며 태워 달라고 졸랐다.
원주에서 홍천(洪川)을 향해 걸으며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탈진한 나는 도로가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보니 오른쪽 바닥에 무엇을 싼 듯한 신문지가 보였다.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딱딱해진 찐빵 두 개가 담겨 있었다. 입 안이 깔깔했지만, 아주 조금씩
떼어 입에 넣었다. 그 마른 찐빵 덕에 이틀은 연명할 수 있었다.
홍천은 인민군과의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이다. 국군 105mm박격포 중대는 미 해병 1사단과
연합작전을 하던 국군 6사단 소속이었다. 1951년 8월 초, 홍천강가를 걷던 나는 국군병사 한 명이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고생이 많구나. 어때? 밥은 굶지 않니? 고향은 어디지?”
함경도 출신의 ‘김종만’ 일등병이란 명찰을 단 그 군인은 내게 친절했다.
우리는 이내 친해졌다. 김 일병은 내가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똑똑하다”며 학도병 출신인 최극
(崔極) 소대장의 승낙을 얻어 부대 막사에서 함께 지내도록 해 주었다. 박격포 중대의 심부름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부대는 일주일치 부식을 타면 이틀밖에 먹지 못할 정도로 보급이 부실했다.
나는 미군부대를 돌며 부식을 잘 충당했고, 부대원들의 빨래도 곧잘 해 귀여움을 받았다.
8월 말 전선 투입명령을 받은 박격포 중대는 나를 그곳까지 데리고 갔다. 실제로 한 사람의
군인 몫을 해냈다. 포(砲)의 장약(裝藥)을 나르고 거리를 재는 일, 지뢰 제거작업 등을 사복을 입은
채로 열심히 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척척 해냈던 것이다.
한번은 특수임무를 부여받아 적진(敵陣)에 침투했다가 고립되고 말았다. 우리 중대는 중공군 시체
사이를 누비며 배낭에서 강냉이 가루와 피 묻은 건빵을 꺼내 소대원들과 끓여 먹으며 숨어 있었다.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복을 입은 소년인 내가 항상 앞장서야 했는데 인민군을 만나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52년 1월, 박격포 중대는 지리산 공비토벌을 벌이던 8사단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에서 철수해 전라도 남원(南原)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첫눈이 내려 노면(路面)이 매우
미끄러웠다. 제천에서 충주로 가기 위해 박달재를 넘던 중 적의 장애물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부대원들이 탄 트럭이 미끄러져 수십 미터 낭떠러지로 구르는 대형사고가 났다.
34명 가운데 17명이 죽고 10여 명이 중상(重傷)을 입은 사고였다. 나는 기적처럼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차가 첫 번째 구를 때 군용천막과 함께 튕겨 나왔던 것이다.
우리 부대는 1952년 4월 다시 중동부 전선 양구 부근에서 96대대 M1포대 창설에 가담했다.
박격포 중대와는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김종만 일병이 포차에 깔려 부상을 당했고, 최극
소대장도 공비토벌 도중 후송된 것이다. 나를 보살펴 주던 두 사람이 부대를 떠나자 나도
부대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1952년 5월, 나는 인근 미 해병1사단의 ‘쇼리(shorty·꼬마, 하우스보이)’로 일하는 친구를 통해
데이비드 비티(David Beattie)라는 미군병사를 알게 됐다. 나는 ‘비티’를 ‘빌리’로 알아듣고
오랜 동안 그렇게 불렀다. 빌리와의 만남은 나에겐 하느님의 축복이었다. 빌리는 21세로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다른 군인처럼 욕을 하거나 큰소리치는 일이 없었고,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그는 내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음식을 따로 챙겨주고, 미군과 쇼리가 함께
잘 수 없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침대 곁에 내 몸에 맞는 간이침대를 마련해 주었다.
“나도 너처럼 고아란다. 누님이 한 분 있을 뿐이지. 학, 용기를 잃지 마.”
빌리는 포성이 들려오는 벙커 안에서 “디스 이즈 어 컵, 디스 이즈 어 머신건(This is a cup,
This is a machine gun)”이라며 내게 영어도 가르쳤고, 독감에 걸렸을 때 약을 구해 먹이고
밤새도록 간호도 해 주었다. 나는 빌리를 통해 인간의 따뜻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맛볼 수
있었다.
빌리 일병은 105mm 자주포 사수(射手)였다. 어떤 날은 꼬박 24시간 포를 쏘아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빌리에게 몇 시간에 한 번씩 뜨거운 커피를 날라다 주곤 했다. 빌리는 밤늦도록
벙커에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빌리가 혹시 총에 맞아 죽었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날 미군 소위 한 사람이 새로 부대에 부임했다. 그때 나는 마침 포병 관측소(OP)에 있었다.
미군 장교는 도착하자마자 관측소 밖으로 나가 인민군 진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쉭~’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대포알이 날아왔다. 내가 “소위님,
엎드려요!”라며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소위는 귀청을 찢는 폭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의 피 묻은 군화 한 켤레만 뒹굴었다.
추운 어느 겨울날 밤이었다. 전령(傳令) 노릇을 하다 나는 중공군의 따발총 세례를 받았다. 잽싸게
얕은 계곡 속으로 뛰어들었고, 총알은 머리 위로 ‘쌩~쌩~’하는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언 땅에 몸을 붙이고 밤을 새웠다. 동이 틀 무렵,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어 보니 내 주위에 미군
시체 약 10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사격을 멈춘 중공군은 여전히 지척(咫尺)에 있는 참호(塹壕)
속에 숨어 미군 진지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미군복을 입고 있어 중공군에게 틀키면 사살(射殺)될 게 뻔했다. 꽁꽁 언 몸으로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계곡 속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어느 날, 미 해병1사단에 속해 있는 15세 미만의 모든 한국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직 13세밖에 안 된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멍해졌다. 빌리와 헤어져야 했던 것이다.
나는 “남아 있게 해달라”며 간청했으나, 빌리는 “고아원이 더 안전하다”고 했다. 난 짐을 꾸려
서울의 고아원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빌리가 보고 싶어 고아원을 나와 다시 빌리의 부대로 돌아갔다. 빌리 부대
병사들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1952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상병이 된 빌리가
내게 큰 상자 하나를 ‘선물’이라며 주었다.
“이게 뭐예요?” “열어보면 알게 될 거다.” 나는 포장지를 뜯어내고 상자 안에서 따뜻한 자켓 하나와
바지 몇 벌, 털장화 한 켤레와 가죽 단화 두 켤레, 그리고 옷가지를 끄집어냈다. 내 몸에 꼭 맞는
것들이었다.
빌리가 미국에 있는 누나에게 내 사연을 담아 편지를 보냈더니, 성탄절 선물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생전 처음 칠면조 고기를 먹어보았다. 미군들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 오래전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성탄절을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휘발유 드럼통 폭발로 重火傷)
휴전을 얼마 앞둔 1953년 6월 어느 날, 내게 큰 불행이 닥쳤다. 적진에서 날아온 포탄이 휘발유
드럼통에 떨어지는 바람에 큰불이 났다. 나는 그때 막 냇가에서 멱을 감고 벙커로 돌아가는 길에
불덩어리가 된 ‘휘발유 벼락’을 맞았다. 본능적으로 부근의 얕은 냇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몸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그때 이를 본 빌리가 재빨리 파카 점퍼 한 장을
들고 뛰어와 내 몸을 감쌌다. 빌리는 의식을 잃은 나를 지프차에 태운 다음, 직접 차를 몰고 고개를
넘어 헬기 착륙장으로 데려갔다. 헬기는 나를 인근 화천 부근의 미군 야전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서 약 18시간이 지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발끝에서 머리까지 몸 전체를 붕대로 휘감고
있었다. 얼굴도 붕대로 덮여 있어 입만 빠끔 벌릴 수 있을 뿐이었다. 미군 간호장교가 하루에 두 번
내 몸에 감긴 붕대를 새로 갈아주었고, 때로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주기도 했다. 아름답고
친절했던 간호중위 생각이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빌리가 내 병상 옆에 앉아있었다. 꿈인가 싶었다. 전쟁 통에 군인이 부대를
떠나 먼 병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걱정 마, 곧 나을 테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널 낫게 해줄 거야.” 빌리가 말했다. 나는 입 주위의
붕대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눈을 깜박여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자 빌리는 나를 다시 찾아왔다. 무엇보다 빌리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돼 너무 기뻤다. 내 몸 상태도 좋아졌다. 빌리는 가슴 속에 뭔가 꼭 하고
싶은 말을 품고 있는 듯했으나 주저하며 l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떠날 때 나를 크게 껴안아
주고는 아무 말 없이 텐트 밖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나는 동해안 속초(束草)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나는 빌리 부대에서
일하는 한국 소년을 만났다. “빌리는 어떻게 지내니”라고 묻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야 빌리가 내 병상에 찾아와 아픈 내게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차마 못하고 돌아간 것을 알았다.
나는 속초 야전병원에서 19개월간 머물러 있었다. 몸이 좋아지면서 화장실 청소도 하고, 세탁실
일도 거들었다. 1955년 2월 나는 기적적으로 흉터 하나 없이 퇴원했다. 그때 내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한순간도 ‘빌리’를 잊은 적 없어)
나는 서울로 향해 한 달에 500환을 받는 일자리를 구했다. 남학생 모자를 만드는 공장의
마룻바닥을 쓸고 닦는 일이었다. 노는 날이라곤 설날과 추석 딱 이틀이었다.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잠은 공장의 마룻바닥에서 잤다. 마침내 공장장의 눈에 들어 판매원으로 발탁됐다.
18세 되던 해, 공장 하나와 판매점포들을 관리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19세 생일이 지나고 얼마 후, 나는 조그마한 가게를 세내 따로 모자공장을 차리는 모험을 했다.
매일 밤 자정이 넘도록 모자를 만들었고, 이튿날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재료를 골랐다. 장사가
무척 잘돼 반년이 지나 조수(助手) 한 명을 채용했고, 6개월 뒤 또 한 사람을 채용했다.
1965년 서울에서 산업박람회가 열렸을 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우리 회사 제품 전시장을
찾아 “나도 영안모자를 자주 쓰는 데 제품이 아주 우수해. 무역진흥공사에서 수출육성 상품으로
지원해도 좋을 것 같아”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후 무역진흥공사 주선으로 일본 수출을 시작했고,
프랭크 넬슨이란 유대계 상인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도 수출했다. 글로벌 기업 ‘영안모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로부터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성학 소년은 영안모자 회장으로 ‘세계의 모자왕’이 됐다.
1959년 모자 70개에 불과한 노점으로 출발했던 영안모자는 전 세계를 무대로 연간 1억 개
이상의 모자를 판매하는 모자회사가 됐다.
그리고 100년 역사의 미국 클라크 지게차와 50년 전통의 대우버스, 전화기 제조사업, 관광업
등을 운영하며 전 세계 44개 법인에 연매출 16억5000만달러(2008년)를 올리는 강소(强小)
기업으로 키웠다. 최근에는 교육사업(숭의학원)과 방송사업(OBS경인TV)에 진출했고 백학재단을
설립해 사회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국내시장의 영세 모자 제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시장엔 팔지 않고 수출만 한다. 현재 미국
메이저리거 야구선수 가운데 절반 이상이 내가 만든 모자를 쓴다. 내가 만든 모자 6000여 종은
스포츠용품 점에서 쉽사리 만날 수 있다.
나는 모자로 성공하면서 한순간도 내 몸에 붙은 불길을 파카 점퍼로 끄고 헬기로 옮겨준 빌리를
잊은 적이 없다. 병상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걱정하지 마, 곧 나을 거야”라고 하던 수줍은 표정과
음성도.
내가 처음으로 미국에 간 것은 1970년이었다. 거래선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바쁜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혹시 지나치는 사람 중에 빌리가 없을까 40대 중반의 남자만 보면
가까이 다가가곤 했었다.
1983년 9월 1일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기가 소련 전투기에 격추당해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나는 추락한 그 비행기를 바로 이틀전
탔던 사실을 기억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후 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를 고민하다 내가 쓰레기통을 뒤지며
연명하다 빌리를 만난 강원도 홍천에 6만 평의 땅을 마련해 고아원·양로원·병원·직업교육원
기능을 갖춘 ‘백학마을’을 세웠다. 특히 6·25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를 돕기 위해 고아 등
230명에게 무료급식과 유치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백학마을 OBS 김혜자센터’를 올해
건립한 것을 비롯해 아직 전쟁과 내전의 상처가 남아 있는 베트남과 중국, 스리랑카, 코스타리카
등 전 세계에서 자선활동을 벌이는 것도 빌리에게 입은 은혜 때문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자의 도움)
나는 1985년 어느 날 <리더스 다이제스트> 데이비드 리드 기자를 만나 공개적으로 빌리를
찾기 위한 인터뷰를 했다. 나는 빌리의 성도 몰랐고, 다만 빌리와 그의 부대 동료들 군복에 붙은
기장(旗章)에 ‘발길질하는 야생마에 올라탄 카우보이’가 그려져 있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미 국방성과 주한미군에 비치된 군대기록을 모조리 뒤진 결과,
6·25전쟁 당시 실제 홍천에 주둔했던 적이 있었다고 알려왔다. 빌리의 부대는 6·25전쟁 발발과
함께 동원된 와이오밍주 방위군의 일부로, 제300기갑 야전포병 대대였음을 밝혀냈다. 빌리는
내가 찾던 대원 900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다.
잡지가 1986년 6월에 나가자 미국 전역에서 내게 300여 통의 편지가 밀려들었다. 격려와
칭찬의 편지, 자신이 빌리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개봉했지만,
안타깝게도 빌리에 대한 결정적 제보는 없었다. 성과가 있었다면, 김종만 일병과 같이 머물 때
소대장이던 최극씨와 분대장 박홍수씨를 만난 것이다.
오히려 데이비드 기자가 미안해 했다. 그는 내게 33년간 FBI에서 첩보요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코틀랜드 존스 씨를 소개했다. 70세의 존스 씨는 “빌리 찾기야말로 내가 해온 일 가운데 가장
뜻 깊은 일”이라며 “무보수로 봉사하겠다”고 했다. 그 무렵 6·25전쟁 당시 300포병대대 A중대
상사로 복무하다 전역한 데이비스 상사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고 내게 연락을 했다.
그는 “빌리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4명의 한국인 쇼리 사진을 갖고 있다”면서 “이들 중 한 명이
백성학씨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에는 화상으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40년 전의 내 모습이
그대로 간직돼 있었다.
그의 편지로 빌리의 소속이 확인되자, 존스씨는 즉시 미 육본으로 달려가 1952년 6·25전쟁
참전 300포병대대 명단을 열람하고 빌리라는 이름 12명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하나하나 주소를
추적해 나갔다. 모두 내가 찾는 빌리는 아니었다. 존스씨는 A중대원들도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 누구도 빌리를 알지 못했다.
1988년, 데이비스 상사는 “A중대 모임을 갖고, 각자 갖고 있는 참전사진을 다 가져오면 그
가운데 빌리 사진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듬해 5월, 35년 이상 만나지 못했던 A중대 전우
14명이 캔자스시티에 모였다. 나는 14명이 가져온 1000여 장의 사진 하나 하나를 뚫어져라
살폈다.
2박3일 일정 가운데 이틀 동안 사진을 보았지만, 그의 얼굴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져 찾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37년 만에 빌리를 만나다)
다음 날 어느 사진을 들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며 사진 속 한 병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두 번씩이나 지나쳤던 사진이었다. 내가 그토록 찾던 빌리의 얼굴이었다.
“빌리다, 빌리! 드디어 빌리를 찾았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전우들에게 그 사진을
보였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전우들은 “이 친구는 빌리가 아니라 데이비드 비티”라고 했다.
당시 “비티, 비티”라고 부르던 것을 내가 빌리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데이비드 기자로부터 ‘비티’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존스씨는 전화번호부,
차량등록자 명단, 운전면허 등에서 이름을 찾다 결국 찾지 못하고, 그의 부인 ‘도레스 비티’의
이름으로 비티를 찾게 됐다고 한다. 아일랜드계 ‘고집쟁이’ 비티는 자기 집 전화도 자기 명의로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데이비드 기자는 “비티가 필라델피아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포트리치먼드에 살고 있다”고 했다.
데이비드 기자와 존스씨는 그곳을 방문해 비티 씨가 빌리임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3년여 ‘봉사’가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비티는 내가 그토록 찾았다는 말을 전해 주자, “그 사람이 왜 나를 찾겠다고 이처럼 고생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그 정도의 친절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데이비드 기자의 연락을 받은 지 정확히 5시간 만에 필라델피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6시간의 비행시간 내내 그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떨렸다. 이튿날 허름한 아파트에 어렵게
살고 있는 비티를 만났다. 다정한 미소를 그대로 간직한 비티와 37년 만의 해후였다.
나는 글썽거리는 눈물만 보였을 뿐 아무 말도 못했다. 비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학, 옛날보다 많이 컸군.”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비티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뜨겁게 포옹했다. 나는 흥분을 가눌 수 없었다. 그의 집 식탁에서 나와 비티는 6시간이나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서로 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1957년 제대한 비티는 그 후 20년 동안 부두노동자, 제빵공장 직원으로 일하다, 필라델피아
한 건물의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당 8달러의 임금을 받았고,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나는 비티에게 받은 은혜를 떠올리며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리라 결심했다. 비티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당신에게 받은 귀한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어요. 비티에게 좋은 집과 차를 선물하고, 자녀의 학비도 돕고 싶은데 허락해 주겠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비티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학, 난 너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 나는 지금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월부금이 끝나 가고, 월급을 절약하면 우리 식구가 지낼 만한 편이지. 난
지금껏 승용차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차도 필요 없다네. 자네의 뜻과 사랑은 충분히
받아들이겠네. 정말 고맙고 반갑네.”
나는 아무리 내가 떼를 써도 비티가 나의 호의를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와 굳센
포옹만을 남긴 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티의 세 자녀에게 대학 장학금을
전달했다.
고아였던 비티는 두 명의 양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라났던 것이었다. 전쟁 기간 중 받았던 선물도
누나가 보낸 것이 아니라 양어머니가 보내준 것임을 그때야 알았다.
비티와의 만남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0년 3월호에 ‘6·25 때 은인 찾은 모자왕 백성학’이란
제목으로 다시 한 번 실렸다. 나는 그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지금도 기억한다.
“두 여인의 사랑이 한 평범한 미군 병사에게 전해졌고, 또다시 의지할 데 없는 한국 고아소년에게
연결됐다.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랑은 고아소년의 삶에 큰 힘과 용기가 돼 주었으며, 사업에 성공한
그로 하여금 수백 명, 수천 명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게 하는 바탕이 됐다. 진정한 사랑이 바탕이
된 선행은 그 자체가 바로 보답인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던 지난 4월 29일, 나는 미국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고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날 새벽 2시경, 비티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나보다 아홉 살 위였던 비티는
췌장암을 앓고 있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나는 5월 1일 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비티가 처음 내 도움을 사양하면서 던진 말, ‘너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선물인데, 나 말고 네 이웃을
더 많이 도와주라’는 그의 말이 영결식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1952년 5월에 처음 만나 2010년 5월에 영원한 이별을 했지만, 데이비드 비티가 내게 준 사랑,
우정의 참뜻은 가슴 깊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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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학 영안모자 그룹은 한때 연간 1억개의 모자 판매로 이분야 세계 1위의 기업이며 모자로만
연간 약 3,000억을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2000년대 이후 주변에서 퇴출직전의 부실기업을 맡아 달라고 하는 바람에 하나둘 인수하여
정상화시킨 기업들이 버스, 지게차, 학교(숭의학원) 등입니다.
지금은 버스, 지게차, 모자, 목장 등 매년 2조1000억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업의 특징은 공장과 사업체가 대부분 해외에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모자도
국내에서는 기존 중소 모자업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전량 해외판매를 주력으로 합니다.
지게차는 1917년 지게차를 최초로 만들었던 100년전통의 미국 클라크사를 폐업직전에
인수하여 지금은 창원공장, 미국 렉싱턴, 멕시코, 중국, 베트남 등에 공장을 둔 기업으로
키워냈습니다.
회장님은 어릴 때 고아였던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미군 병사를 못잊어 세계 여러 곳 가난한
나라에 모자 공장을 세울 때마다 그곳에 복지센터를 세워 이름을 미군병사의 이름을 따서
"빌리 사랑의 마을" 이라고 이름 짓고 우리나라 홍천을 비롯하여 세계 7개국에 전쟁고아, 노인,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 100% 자금을 지원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백학재단은 국가 지원 없이 민간자금으로 운영하는 시설인데, 1990년대부터는 영안모자의
해외 지사가 본격적으로 세워지면서 해당 지역에 백학마을을 함께 지어 마을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스리랑카·코스타리카·베트남·에티오피아·온두라스 등 세계 일곱 곳에 있는데, 그 지역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전쟁고아를 돕거나 노인, 장애인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지 가톨릭 단체나
국가에 필요한 시설을 기증해 직접 운영하게 하고, 우리가 비용을 지원하는 식이지요.
그들이 실질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입니다.
"2022년 창립 63주년을 맞은 작년 5월 5일, 장남에게 회장자리를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한 발 물러나 봉사 위주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제주도 대형 역사 박물관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어느 때보다 바쁩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영안역사기록관을 비롯해 단성사영화역사관,
보석역사관, 방송역사관, 지게차100주년역사관, 숭의역사관 등 자체적으로 역사관 사업을
진행해 왔어요. "
"이번에는 제주도에 100만m2(약 30만평)에 이르는 보유 부지에 대형 역사 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입니다. 2028년경 1차 완공할 예정인데, 제가 시작해서 3세대에 걸쳐 완성할 초대형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제가 종합역사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지난 200년간 인간이 야기한 환경문제를 교육하고
이로 인한 재앙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 지구에는 핵전쟁보다 무서운 환경 재앙이 닥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는 이미 심각하게 진행중이죠. "
"2050년에 지구 평균기온이 1.5℃ 올라갈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예측했는데, 2022년 현재 이미
1.1℃ 이상 상승했어요. 저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과 같은 종합 박물관
단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우주의 탄생부터 인간의 진화, 전기 방송 통신과 자동차, 종교 등에 대해
한 곳에서 알아볼 수 있는 종합 역사 박물관을 건립하고 이후 미국, 호주, 유럽 등 세계 곳곳에도
이러한 박물관이 생겨나 지구의 환경문제를 교육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제 여생의 마지막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종무 교수가 보내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