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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사랑하는 마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21:1-11)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심과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은 한 단위이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날 때 큰 무리가 따른다(마20:29).
큰 무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여리고 백성들이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에 두 소경이 앉았다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는다.
이에 예수께서 눈을 만지니 곧 보게 되어서 그들은 예수를 좇는다(마20:29-34).
이러한 여리고 정복 상황은 가나안 정복의 선취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께서는 두 제자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을 것이니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
누가 말을 하면 주께 쓰시겠다고 하라”
고 말씀하신다(마21:2-3).
이처럼 천국 왕께서는 백성의 나귀 새끼를 징발하신다.
나귀 새끼를 징발하신 기사도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하는 말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이다(눅19:28).
이러한 예루살렘 입성 기록은
승천할 기약이 차가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내용과 상응한다(눅9:51-53).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다.
여리고에 이르러서는 믿음이 있는 소경과(눅18:35-43)
삭개오를 천국 백성으로 구원하신다(눅19:1-10).
율법 아래에서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소경과 삭개오를 천국 백성으로 구원하신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무리는 당장 하나님 나라가 임할 줄로 생각하였다(눅19:11).
이에 예수께서는
“귀인이 먼 나라로 가서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
종들의 수고를 따라 유업을 다시 분배할 때 있는 자에게는 더 많이 줄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눅19:12-27).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을 거절하는 악한 자는 심판하시고
자신에게 나아온 신실한 자들에게는 유업을 주시는 천국 왕이시다.
나귀 새끼에 대한 기록도 마가복음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있는 것을 보거든”
이라고 기록하고(마11:2)
누가복음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너라”
고 기록한다(눅19:30)
이처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멍에를 메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만 나귀와 나귀 새끼라고 기록한다.
이는 유대인들은 새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는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짐승이다(민19:2, 삼하6:7).
이처럼 마태복음은 나귀 어미와 새끼를 함께 언급한다(마21:2).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일에 대해서도 마태는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라 하라”
는 스가랴서를 인용한다(슥9:9).
그리고 마태복음만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고 기록한다(마21:3).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종말의 천국 왕으로서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왕은 백성이 가진 소유를 징발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자신이 원하는 나귀 새끼를 징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마태는 예수께서 종말의 천국 왕이심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멍에를 메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모세율법에 따르면 첫 맏물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이러한 원리는 사람이나 짐승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모세율법은 짐승의 초태생은 여호와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첫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사람이 타지 않는 나귀 새끼를 징발하여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초태생과 맏물을 여호와의 것으로 드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드릴 수가 없었다.
만일 십의 십을 드린다면 모세율법을 어긴 불의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마태는 스가랴서를 인용하면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정형 어구를 사용한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심은 겸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마태는 스가랴서를 인용하여 예수께서 겸손하심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는 스가랴서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는다.
스가랴서의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르라”
라는 내용을
“시온의 딸에게 이르라”
고 변형하여 인용한다.
이는 구원 역사적인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하나님의 방문과 구원을 약속하면서 크게 기뻐하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은 율법의 최고 통치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는 곳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율법의 통치를 시행하는 본산이다.
이러한 율법의 본산인 예루살렘에 예수께서 입성하신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방문은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종말의 심판을 통보하기 위함이다.
예루살렘은 율법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본산이기 때문이다.
이는 천국 왕을 거절하고 대적하는 배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태는 스가랴서를 변형하여 인용함으로
종말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아들,
곧 천국 왕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성읍에 방문하심을 강조한다.
무리의 환호 가운데 입성하는 모습은 왕의 모습이다.
외국에 나갔던 왕이 귀환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무리가 외치는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내용이다(렘31:7).
무리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까는 것은 왕을 지극 정성으로 영접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찬양한다(마21:7-9).
이처럼 마태복음만이 무리가 입성하는 예수를 찬양 내용을 소개한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기록한다.
이는 마태복음 대상자인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정통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일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이루어진 일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할 때 무리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찬양한 것이다(마21:9).
그러나 마가복음은 찬양 내용에 대해서
“호산나, 찬양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기록한다(막11:9-10).
누가복음에서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기록한다(눅19:38).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행적 차이가 아니다.
이는 각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려는 목적과 주제의 차이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앞서고 뒤따르는 자들이 소리 질러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외친다(막11:9-10).
이는 오시는 왕에 대한 찬송을 두 번 언급하여 강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찬양한다(눅19:37-38).
이는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찬양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입성 때에 따르는 무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이다.
이러한 예루살렘 입성 때의 찬양은(눅19:38)
예수께서 출생하였을 때의 천군 천사 찬양과 상응한다(눅2:14).
그런데 예수 출생 때 천군 천사의 찬양은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할 때 무리의 찬양은
출생할 때 천군 천사의 찬양을 하늘의 질서로 완성될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천의 선취이다.
제자의 무리는 왕의 입성을 찬양하는 하늘의 찬양단이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찬양하는 제자의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고집하는 바리새인의 저항을 받는다.
무리 중에 어떤 바리새인이 제자들을 꾸짖어서 잠잠하게 하라고 예수께 요구한다(눅19:39).
이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고 말씀하신다(눅19:40).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후에
그들을 파견한 율법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며 멸망을 선포하신다(눅19:41-44).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앞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외친다(마21:9).
이처럼 예수를 옹위하며 찬양하는 무리는 천국의 왕을 환호하며 영접하는 백성이다.
율법 아래에서 예수께 나와서 믿고 따르는 천국 백성이다.
율법 아래에서 종(머슴)이던 신분에서 하나님 아들(자녀)로 온전케 된 백성들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 대한 반응도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무리의 환호 가운데 방해가 없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후에
저물매 베다니로 철수하셨다고 기록한다(막11:9-1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하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으며(마21:10),
이에 무리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말한다(마21:11).
이처럼 예수께서는 반역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이는 율법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광경과 예루살렘의 반응은
모든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 복음서에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이런 강조점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는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목적에 맞추어서
예수의 사역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마태가 인용한 스가랴서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방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말하는 내용이다.
스가랴서 본문과 마태가 인용한 내용을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다.
마태는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라고 기록한다.
이처럼 마태복음에서는 공의를 베풀며 구원을 베푼다는 말이 삭제되어 있으며 겸손을 강조한다.
그런데 마태는 스가랴서를 인용하되 예수께서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겸손하여’라는 말을 삭제하고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 새끼를 탔다고 기록한다.
왜 마태는 스가랴서를 변형하여 인용하는가?
예수께서 옛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언의 성취는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역사 상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선지자가 사역한 환경과 예수께서 오신 종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언급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이전에는 휘장의 장벽을 두고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셨으나,
율법 아래에서는 아무 때나 누구든지 나아옴을 금하셨으나,
이제 사람으로 오셔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천군 천사를 동원하여 악하고 음란한 관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지극히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자신의 성읍에 입성하신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한 왕을 보낼 것이다.
그는 공의로워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베풀 것이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너희에게 방문할 것이다.
그는 북쪽 에브라임과 남쪽 유다 사이의 전쟁을 끝낼 것이다.
다시는 칼을 의지하지 않는 평화로운 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라고 예언하였다(슥9:9-10).
이러한 스가랴의 예언은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그래서 마태는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 새끼를 탔도다”
는 정형 어구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의미를 설명한다.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께서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께서 겸손하신 천국 왕임을 강조한다.
이는 율법 아래에 계실 때와 대비하여 강조하는 내용이다.
율법 아래에서 자신을 거절하고 대적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즉시에 기근과 전염병, 이방의 칼날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종말에 오신 예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러자 많은 무리는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폈다.
앞뒤로 예수를 호위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놓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찬양한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리가 찬양하는 내용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시는 이여.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온 예루살렘 거주민이 소동한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
라고 묻는다.
이에 호위하는 무리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라고 말한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예루살렘,
예수를 대적하는 율법 아래 관헌들의 본산인 예루살렘의 심판과
예수에게 나아와서 믿고 따르는 작고 나중 된 자들의 구원을 말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마태는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께 나아와서 율법이 주지 못하는 참된 구원과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한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