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상으로 해서 생긴 법정스님 이야기
/ 최종태(서울대 명예교수)
어떤 날 내가 불쑥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우리 집 거실에서 마주앉았을 때 이상하게도
나는 무언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법정스님한테 묻게 되는 것입니다.
길상사 윗방에서 있을 때는 그냥 차만 마시고 서로 보고만 있게 됩니다.
무슨 사무적인 일이 있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집에 있을 때만 얘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스님은 즉각적으로 답변을 하셨는데
“불가에서는 그럴 때 독화살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얘기는 한마디로 끝났습니다.
항상 그렇게 단 답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설명을 붙이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입니다.
듣는 순간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았는데
우선 방법이야 어떻든 우선 그 화살을 뽑고 봐라 할 것입니다.
이 화살은 어디서 왔으며 무슨 독이 묻었으며
어떤 약을 써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앉았다가는
그러는 동안에 독이 깊어 사람은 죽을게 아닙니까.
지금 이 순간 나는 우선 화살을 뽑는데 총력 해야 됩니다.
지금 이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 지금을 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 묻지를 않고 딴 얘기를 했습니다.
법정스님은 책을 많이 읽으셔서 말하기가 편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서 괜찮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 방면의 책들을 보셨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도 불편한 점이 없었습니다.
동서를 가리지 않고 중국그림 얘기를 했다가
서양그림 얘기를 했다가해도 서로 막히는 일이 없습니다.
스님도 나하고 얘기하기가 편했을 것입니다.
스님은 글을 잘 쓰시고 또 독특한 문체가 있습니다.
소설가도 일가를 이루어야만
자기 문체가 생기는 것인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틀림없이 젊어서 시와 소설을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스님은 읽히는 글을 쓰십니다.
남녀노소 간에 하는 직종의 어떤 사람이건 간에
무식유식을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읽힙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또 글에 매력이 있어서 한번 시작하면 책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글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정신의 매력이 있으면 글의 매력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또 무슨 일이었든가 저희 집에 오셨는데
그날 들고 오신 책이 「진리의 말씀」이란 책 이였습니다.
꼭 책을 한권씩 들고 오셨습니다.
토막글이라서 읽기도 편하고
아무데나 펼쳐서 읽다가 덮으면 되고
한두 편 읽다가 덮으면 부담이 없고 좌우간 편한 책이었습니다.
지금도 머리맡에 꽂혀있습니다.
이 양반 참으로 대단하다.
글도 딱 떨어지게 빈틈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고
그 정신의 높은 정도가 성인의 경지가 아닌가.
이것은 성인의 어록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알게 된 일인데 우연히 표지 모양을 보다가
“법정 옮김”이란 글자를 보고서 놀랐습니다.
「법구경」을 번역한 것인데
워낙 글이 잘되고 번역냄새가 없어서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법구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완전한 한국말로 법정의 말로 옮겨 적은 것이어서
내가 전혀 번역이란 생각을 못한 것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은 문장으로나 번역으로나 천재입니다.
그 책 진리의 말씀이 번역이란 것이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한번 또 우리 집에서 마주 앉았을 때의 일입니다.
내가 불쑥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우연히 불경공부를 하였는데
얼마 후에 하숙방 친구의 성경책을 집어 들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다 읽었다할 만큼 읽었다기보다
가슴에 찍혔다할 만큼 책장을 넘겼고 그게 뜻으로 읽혔다.
불경을 공부했는데 어째서
성서가 뜻으로 가슴으로 읽혔느냐? 하고 물었을 때
법정스님이 지체 없이 그야말로 총알같이 한 말씀이 나왔는데
“최 선생이 그 때 경을 읽는 눈이 열렸다” 그랬습니다.
1957년의 일인데 실로 40 여 년 만의 숙제가 단박에 풀렸습니다.
경을 읽는 눈이 열렸다!
그 한 말씀으로 나는 단박에 알아들었고
가슴속을 가렸던 거대한 산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더 묻지를 않고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흘러간 40년 동안 여러 사람한테 그 이야기를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한 터에 법정스님 한마디에 그야말로 단칼에 끝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통쾌한 일입니다.
직관. 꿰뚫는다는 것, 통달, 그런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평창동 가나화랑에서 내가 전시회를 하고 있을 때
하루는 덕조스님과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옆방에서 차를 마시는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20세기 백년의 세계미술사를 보면
화가들이 인간을 그리지 않았고
자연을 그리지 않았다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는 지금 기차를 타고 있는데 법정스님 책을 들고 있다가
심심해서 읽고 있는데 내 이야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읽어 주는데 전시장에서 최 교수를 만났는데
20세기 백년에 화가들이 자연과 인간을
그리지 않았다하는 대목이 있어 반갑다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그 말을 글로도 쓰고 사람들 만나면 말을 많이 했는데
법정스님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소수의 미술가들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추상 비구상하는 미술의 대세에 가려져서 별 볼일이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루오, 미국에는 벤샨, 독일에는 벡크만
이태리에서는 기리꼬등 좋은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자연에 대한 관심,
인간에 대한 관심은 접어놓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파괴, 물질이 범람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수십억의 인구가 기아에 허덕인다는 사실,
구원에 대한 외침은 그냥 메아리와 같습니다.
길상사 맨 윗집은 법회 날이 되면 응접실 같았습니다.
덕조스님의 차 만드는 솜씨는 일품이였습니다.
구경만 해도 차 맛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 날은 좀 번잡했습니다.
날씨는 청명하니 좋은 계절 이였습니다.
어떤 풍채 좋은 젊은 스님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시면서 큰 소리로
“저 그만 내려 갈 랍니다. 큰 스님 절 받으십시오.”
말을 맺기도 전에 손이 방바닥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법정스님 벌떡 일어나면서 만류를 하시면서
“나 큰 스님 아닙니다.” 하시면서 맞절을 하시는데
내게는 그 풍경이 대단히 인상적이였습니다.
보기에도 좋고 법정스님도 예상 밖의 그런 사건을 만난 모양인데
그 대처하는 모습이 진실되고
방안에 여러 사람이 앉아있었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관음상을 길상사마당에 만들게 된 것은
갑자기 법정스님이 해보자 해서 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한 일이고
평소에 만들고 싶다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했습니다.
오래된 일입니다.
명동교구청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났을 때
언젠가 내가 관음상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데
천주교회가 나를 파문하는 게 아닐까요,
그랬더니 아니라면서 일본 천주교 박해시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천주교신자들이 기도할 때 관음상을 놓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딘가 안 보이는데다
십자(十字)표시를 했다는 얘기도 해주셨습니다.
당시 기독교신자 작곡가 나운영 선생이
찬불가를 만들었다 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들릴 때였습니다.
그러던 뒷날 동화작가 정채봉 씨 하고 누가
법정스님 만나서 얘기가 된 것이고 일이 급격히 진행된 것입니다.
내가 만들면 현대조각으로 내 작품으로 만든다는 얘기인데
그게 만만치 않은 일이란 것은 다들 아는 이야기이고
법정스님한테 이야기가 된 것은
그 분이면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전한 것입니다.
그게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일은 즉각 추진되었습니다.
합시다. 해서 스님이 저희 집에 인사차 오셨습니다.
1999년의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일체 없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내가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을지 궁금한 표정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스님의 마음은 다 만들고 현장을 마지막에 갔을 때도
길상사 마당에 세워놓고서도 점안식을 하던 날도
그 후로 돌아가시기까지도 일체 표정이 없으셨고
신기한 것은 나도 일체 걱정이 없었고
불교신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염려 등이 정말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서로 마음을 믿었기로서니 그럴 수가 있는가,
정말 감사한 일이고 어찌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첫날 만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관음보살이 들고 있는 병은 무슨 병입니까."
스님의 대답이 "정병(淨甁)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무슨 관입니까"
"화관(花冠)이다."
"손은 왜 들고 있습니까."
"구고(救苦)이다."
마치 준비해온 것처럼 즉문에 즉답이었습니다.
그러고 다음날 일을 시작했는데
세 시간쯤 흙을 붙이고 나니 다 되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 보기에도 좋아서 길상사에 전화를 했는데
보통은 덕조스님이 받는데
그 날은 법정스님이 그 방에 앉아 계셨던지 받으셨습니다.
당황해서 내가 “관음상 흙을 붙였는데 다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랬는데 “그런가요? 지금 가겠습니다.”
그러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또 내가 당황해서 그게 아니라 내 감으로 된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며칠 걸릴 테니 연락할 것이니 그 때 오십시요! 그랬다.
스님하고 무슨 일이 되면 격식과 간격이 없어서
시간과 거리개념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000년 4월 관음재날 점안식이 있었고
나보고도 한마디 하라 해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 무슨 경계가 있는가."
스님은 가시고 빈 마당에 지금도 서 있는
나의 석조관음상은 조금은 외롭게도 보이지만
지금도 열심히 웅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 간의 문제에 대해서 현대의 종교미술에 대해서
불교미술의 역사에 대해서 끝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작가 이종승 기자와 만났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법정스님을 7년간 따라다녔는데
사진 한 점을 건지지 못했다 그런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했더니 하루도 안 빠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길상사를 드나들었지만
법정스님의 환한 얼굴사진을 다른데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40대의 것이라 했습니다.
자기가 찍은 데에는 이상한 그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길상사를 안 맡았더라면…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만 볼일이 아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이란 말이 있지 않느냐
어둠 끼가 있는 얼굴이 진짜 아름다운 법정의 얼굴이다 그랬습니다.
나는 젊어서 좋은 친구가 많았고 줄곧 좋은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 대학시절 예술의 길에서 만난
두 스승과의 인연은 큰 행운이라고 남들이 말합니다.
조각가로 김종영 선생 화가로 장욱진선생입니다.
두 분 다 돌아가실 때까지 특히 후년은 스승과 제자로
그야말로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1982년에 작고하시고 한 분은 1990년에 작고하셨습니다.
참으로 섭섭함을 넘어서 충격이었습니다.
기대고 있던 큰 나무가 갑자기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허전한 것이 3년이나 갔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뒤에 큰 스승을 또 만났는데
이번에는 종교의 길 가운데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을 만난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동갑이고 김 추기경님은 열 살 위입니다.
예술과 종교가 같지는 않지만 또 별로 다를 것도 없습니다.
예술 쪽에서 스승을 여의고
종교 쪽에서 스승을 만난 것은 순서상 잘 된 일입니다.
네 분이 다 똑같이 깨끗한 분들이고
마음은 넓고 여유가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아무튼 지금도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
어떤 날 김 추기경님을 만나서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두 분 스승이 있어서 잘 놀았는데
다 세상 뜨시고 요즘 심심하다 그랬습니다.
추기경님 말씀이 “하느님하고 놀아라.”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웃고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농담이 아니라
참으로 진리의 말씀 이였습니다.
명동에서 교구장 일을 내놓으시고 혜화동으로 가시고
또 미국 가셔서 한동안 쉬었다가 오셨다 하기에
내가 이제 용건 없이 추기경님 보고 싶다 했습니다.
그 날 얘기는 쓸데없는 얘기만 하다가
나중에 마음 비우는 얘기가 되고 정신이 번쩍 나서
비우는 문제는 나도 조금해 보았는데 잘 안되던데요 그랬더니
“나도 그래” 하시면서 웃으시더니
“죽어야 돼” 그러시더니
“15분이 더 있어야 돼” 하셔서 그 날은 정말 한가하게 웃었습니다.
김 추기경도 가시고 법정도 가시고
좋아하는 이들이 다 떠나가고 이제는 정말 기댈 데가 없이
하느님하고 놀 때인가 싶습니다.
추기경님이 병석에서 고생하시고 계실 때
강남성모병원에 갔더니 말끔히 세수하시고 옷도 새것으로 입고서
약속된 그 시간에 의자에 내려 앉아 계셨습니다.
늦잠자다가 아침미사를 빠뜨렸다고 수녀님
또 아줌마들이 놀려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추기경님은 말씀도 못하시는 형편인데
내 귀에다 대고 “밖에 나가서 얘기하지 마!”
그러시기에 내가 나가서 만천하에 다 글로 쓸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또 한바탕 병실이 떠들썩했습니다.
30분 쯤 웃다가 나왔는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구나,
그 힘드신 시간에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마음을 쓰셨구나 생각하니 저분은 참으로 성인이다
두고두고 내가 세상에 나와서
저런 어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바입니다.
법정스님이 병실에 계시다 소식 듣고
장 익 주교께서는 알려야하겠다 싶어 전화를 드렸더니
당장 가서 봐야겠다고 서둘러서
다음날 우리는 스님을 마지막 만나는 인사로 병실을 찾아갔습니다.
스님은 눈이 마주치자 누운 채로
“원(願)은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똑똑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퇴원하면 산에 눈 구경 갈 거라고 그래서
눈도 많이 왔는데 지겹지도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남고 저이가 가는구나, 우리의 인연이란 게 여기까지인가
마음 가누기가 어려웠습니다.
병실을 나오면서 내가 손 인사를 하였더니
스님도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한 해라는 시차를 두고 나의 종교의 길 스승을 두 분 다 여의였습니다.
두 분의 장례예절 모습은 세속의 일과 달라서
그 분들의 한평생 사신 것처럼
꽃 한 송이 없는 명동이고 꽃 한 송이 없는 길상사였습니다.
깨끗해서 좋았습니다.
전체가 한 송이 하아얀 꽃같이 신선하였습니다.
두 분이 없는 공백은 얼마나 더 갈지
사회가 심난할 적마다 생각나는 것은 나뿐이 아닐 것입니다.
두 분의 죽음을 생각하면 죽음 저 너머에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끝이 아니다하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여유, 승리라 할까요,
죽음이란 누구나가 통과해야하는 관문입니다.
두 분은 가시면서 세상에다 「희망」이라는 큰 선물을 놓고 가셨습니다.
명동성당에서 길상사에서 끝이 안 보이는
긴 조문행렬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냥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한마음으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풍경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길상사 개산(開山) 당시 천주교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들어
봉안한 석상으로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이다.
첫댓글 이 광음상을 조각하신 석공은
성모상만 전문으로 조각하신분에게
법정스님이 특별히 주문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