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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살던 간첩 체포!! 깜짝 놀란 윤 /4성 장군 군 간첩!! 문재인 USB 공개 드디어 체포!! 신원식 경악!! 즉각 사형해
■ 민주당 제 발등 찍어
https://www.youtube.com/live/tBltD6cyfFU?si=LelHen8hz_LDuPYV
■ 정청래
https://youtube.com/shorts/ocBqURM32Nw?si=R9Lw1DPOSCmX5Ian
■ 대법관 간첩 드디어 잡았다.
https://youtube.com/shorts/JjJoSpg3vWQ?si=Ds9P8Y9fKtHoJdA5
■ 청와대 살던 간첩 체포!! 깜짝 놀란 윤석열 경악!! 당장 사형해라 충격적인 정체
https://youtu.be/SUwn9lDqiHM?si=xVz2CGA9D2qbP5-V
■ 4성 장군 군 간첩!! 문재인 USB 공개 드디어 체포!! 신원식 경악!! 즉각 사형해라
https://youtu.be/wcza8zRhKxo?si=Lnl9RdgHtDcGGmw2
■ 청와대에 살고 있던 간첩 잡았다.
https://youtube.com/shorts/EzmuJsBsQUU?si=WOi3mtjn-Qktz6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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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 반역자 김대중 노무현 계승하는 문재인은 분명 간첩이다!!!
● 김대중의 광주와 김일성의 북한이 야합한 5.18광주폭동, 화보의 글들 _ 글쓴이 : 지만원
● 대한민국의 한 애국단체가 35년 만에 밝혀낸 5.18광주폭동의 충격적인 진실
● 대한민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한다.
1.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폭동사건은 현 조선인민군원수인 리을설(1921)이 3성장군인 인민군 상장이었던 59세였을 때, 북한특수군 600명을 이끌고 광주의 반미-친북 세력과 연합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무장 내란 사건이었다. 북한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범죄를 범했고, 광주는 여적범죄를 범한 것이다.
2. 광주작전에 참전한 600명의 북한군사들 중 59명이 중장(2성) 상장(3성), 대장(4성), 차수(5성), 원수(6성)로 승진해 지금까지 권력핵심을 이루고 있다.
3. 이들 59명의 장군들과 3명의 민간인들은 35년 전, 광주에서 얼굴사진이 찍혔다. 이들의 얼굴은 현재 북한 장군들의 얼굴 사진과 정확히 일치한다. 전문적인 영상분석 기법으로 분석한 결과와 과정이 이 책에 수록돼 있다. 이들 영상 분석 자료들은 한 시스템분석 학자가 12년 동안 연구해서 2014년 말에 발표한 연구결과와 정확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매우 효과적인 전달수단이 되고 있다.
4. 이 충격적인 진실을 대한민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가기관에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포진되어 사실상 대통령과 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대한민국 광주 게릴라전에 참전했던 북한군 장군들리을설 부각 계급 별 명단 특기할 인물 62광수 리을설: 인민군원수, 5.18광주 게릴라 참략전쟁의 총 지휘관. 북한에서는 “천출명장의 전설적인 항일투사”로 알려진 전설의 인물, 현재 인민군 서열 1위. 36광수 최룡해: 당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총정치국장. 2014년 10월 4일,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황병서, 조선로동당 대남 담당 비서 김양건과 함께 2014년 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깜짝 참석했다. 23광수 황병서: 현 인민국총정치국장, 제4광수 김격식: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에 파견, 2010년 제4군단장으로 인민무력부 총정찰국장인 김영철의 명을 받아 천안함을 폭침, 2015년 5월 10일 갑자기 숙청당함.
제14광수 김영철: 인민군 정찰총국장으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공격을 주도했고, 황장엽 암살 지령을 직접 내렸으며, 소니픽처스 해킹을 직접 지사한 인물
제31광수: 연형묵, 1931년생, 광주에 왔을 때는 49세였다. 그는 군관출신으로 김일성 호위병이라는 경력을 달고 있다. 1988~92년 사이에 총리를 지내면서 남북 총리회담을 주도했다. 2005년 10월 의문사를 당했는데 김정일의 눈 밖에 나 암살되었다는 설이 파다하다.
제5광수 김정각, 김정일의 영구차를 호위한 8명 중 사람. 인민군대장, 총정치국 제1부국장 5.18 폭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2년 동안 연구한 이유 한국에는 5.18 폭동을 민주화의 성역으로 고착시키려는 세력이 있고, 이들이 사실상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종북 공산주의 세력인 것이다. 이들의 권력은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5.18민주항쟁’에서 나온다. 그들이 1980년 5.18일부터 한국의 독재정권을 상대로 광주에서 무장 항쟁을 벌여 “반미-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성공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5.18’과 ‘민주화’라는 단어만 나오면 대통령도 언론도 주눅이 들고, 법과 정의와 논리가 사라진다. 오직 그들이 주장하는 무자비한 억지가 통할 뿐이다.
5·18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와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북한군 200여명은 계엄령을 집행하기 위해 광주 시내에 위치한 전남대학교에 주둔한 공수부대 1개 대대(400명)를 찾아가 돌멩이 공격을 가해 공수부대 요원 7명의 얼굴에 피를 흘리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광주폭동은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5·18광주시위는 국가를 상대로 한 ‘반국가폭동’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때 아닌 ‘민주화’라는 광란의 쓰나미를 맞는 불운을 당하게 됐다. 광란이 휩쓸고 간 사회는 전과는 단절된 딴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사회인식도 대법원 판결도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문명이 사라진 원시림 사회에 김영삼 정권의 사생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라는 흉측한 괴물이 탄생했다. 헌법에서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능멸하고, 헌법이 불법으로 규정한 관심법과 마녀사냥에 의한 인민재판까지 동원하여 5·18에 대한 정통역사관을 뒤엎고 좌익세력과 ‘양아치로 대표되는 무산계급’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시등극시켰다.
반역을 저지른 5·18세력이 오히려 '대한민국 역사에 화려한 획을 그었다는 민주화운동'으로 등극하여 대한민국을 깔고 앉아 입법, 사법 행정 모두를 호령해오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오직 '5.18민주화역사'만 존재하고 이승만의 건국역사와 박정희의 산업화역사는 악의 축인 것으로 짓밟혀왔다.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고, 김일성만이 위대한 지도자라는 역사관을 대한민국 국민과 학생들에 강요해 왔다.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됐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헌법파괴세력’이 됐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 동지’로 모시는 용공세력이 충신세력이 되고, 반공세력이 역적세력으로 전락한 것이다. 5·18 이 하나가 국가의 정통성을 뒤바꿔 놓은 원흉인 것이다.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국가기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너무 많이 포진해 있다.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총본부는 전라도이고, 전라도 사람들로 구성된 한국의 제1야당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국회를 마비시키고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35년이 지난 지금 나타난 객관적 분석결과와 사진 증거들에 의하면 이 엄청난 파라독스 뒤에는 북한이 있었다. 5.18 폭동은 광주의 총사령관 김대중과 북한의 총사령관 김일성이 야합한 적화통일 시도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자 김일성은 “지금이 결정적인 시기”라고 판단하고 소규모의 특수군을 꾸준히 남파시켜 1980년 5월에는 특수군 집단만 600명, 그리고 그들에게 군수물자와 정보를 제공하는 등 수를 알 수 없는 고정간첩들이 확보됐다. 이들 600명은 한국의 계엄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광주와 국가 사이를 이간하고 국가전복을 위한 무력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왔다.
이간수단은 두 가지, 하나는 유언비어였고, 다른 하나는 북한군이 광주사람들을 총과 살인도구로 살해해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이라고 선동하는 것이었다. 유언비어는 “정부가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기 위해 전라도를 미워하는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보냈다” “전두환이 계엄군에 환각제를 먹여 마구 죽이고 있다” “공수부대원들이 여자들만 보면 옷을 벗기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서 청소차에 던졌다” 는 등의 허황된 것들이었지만 광주의 개념 없는 계급들은 이에 넘어가 북한군에 동조했다. 북한은 침량행위를 한 것이고, 광주는 적과 내통-합세하여 여적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북한은 해마다 5.18사건을 남한보다 더욱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으며,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5.18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 결론은 2002년부터 2014년 9월까지 만 12년 동안 한 시스템공학자의 끈질긴 연구 끝에 비로소 도출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015년 5월 5일부터, 이를 증명할 시각적 증거들이 몇몇 반공 전문가들에 의해 수집됐다는 사실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장내란을 주도했던 북한군사 59명이 2,3,4,5,6성 장군들이 되어 북한정권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북한에 생존하는 유일한 인민군 원수 1명과 8명의 ‘차수’ 모두가 광주작전 참전자들이다. 또 다른 3명의 광주 폭도는 2010년 5월 17일 평양에서 거행된 5.18 제30주년 기념식장 로얄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2006년 북한을 탈출하여 지금 현재 서울 근교에 살고 있는 가명 김명국도 1980년 5월, 광주작전에 참전했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해마다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기념하고, 북한군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총질을 한 5,700명의 광주인들을 국가유공자라며 보상금을 지불하고, 매년 최상급의 연금을 지불하며, 그 자식들에는 각종 시험과 취직에서 총점의 10%를 가산점으로 부여하고 있다. 5.18은 확실히 대한민국을 점령한 점령군 사령부인 것이다.
● 북한특수군이 광에서 보인 위력
전국계엄령 발동으로 광주는 물론 나라 전체가 공포로 얼어붙었던 5월 18일 아침, 젊은이라면 멀리에 나타난 경찰들만 보아도 오금을 저리며 꼭꼭 숨던 그 시각에 북한특수군 200여명이 계엄군의 집결지인 전남대학을 찾아가 돌을 던져 7명의 공수대원에 큰 부상을 입혔다. 광주에서는 200여명의 대학생이 모일 수 없었고, 이런 배짱과 능력을 가진 대학생들도 없었다. 그동안 광주-전라도 지방에서 암암리에 북한과 연계하여 반정부활동을 벌이던 이른바 좌경 운동권의 리더들은 모두 숨거나 잡혀갔다.
300명의 특수부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20사단 지휘부가 5월 21일 오전 8시에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해 매복했다가 공격해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지휘부 차량 14대를 빼앗았다. 지프차를 먼저 빼앗은 목적은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그들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단장 차 등을 본 아시아자동자 직원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에 키를 꽂아주었다. 아침 9시, 아시아자동차에는 총 600명의 북한특수군이 집결했다. 이들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4시간 만에 털어 5,408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그리고 탈취한 무기들로 80-85명의 광주시민을 쏘아놓고 이를 공수부대의 만행으로 뒤집어 씌웠다. 6회의 교도소 공격도 단행했다. 이런 작전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을 능가하는 세계 최정상급의 특공작전에 해당할 것이다.
드디어 그들의 싸움 상대인 공수부대가 구사일생으로 광주시 외곽으로 도망을 갔다. 광주시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계엄사령부의 조치였다. 이때까지 계엄군에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당시 1성장군인 제11공수여단장 최웅은 지프차를 타고 철로를 건너다 스나이핑을 당해 운전병을 잃고, 병사 5명의 호위를 받으며 밤새내 무등산을 헤매다가 무등산 정상에 주둔한 방공포대가 깔아놓은 지뢰밭을 용케도 통과하여 방공포대에 3일간 머물다 본대와 합류했다. 세계 최정상급 살인기계로 훈련된 북한특수군이 아니라면 광주에 출동했던 3개 여단 10개 대대 총 4,000명 정도의 공수부대를 이렇게 몰살지경으로 몰아넣는 작전을 펼 수는 없었다.
5월 21일 밤, 이들은 2,700명의 수용자가 들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6회에 걸쳐 공격하였다. 북한으로부터의 무리한 명령을 맹목적으로 수행하느라 죽은 것이다. 여기에서 490명에 이르는 북한군이 죽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북한군은 8톤 규모의 TNT에 뇌관과 도화선을 연결해 2,100발의 폭탄을 전남도청에 조립해 놓았다.’ 담뱃불만 던지면 히로시마가 되는 것이었다. 전라도에 민주화시위는 없었다. 북한특수군에 내통-영합한 내란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2014년 10월에 발행된 ‘5.18분석 최종보고서’에 명쾌하게 분석돼 있다.
● 어제의 역적과 충신이 오늘은 정반대로 뒤바뀐 한국사회
5.18이라는 역사사건을 놓고, 1980년의 충신과 역적이 1996년에 뒤바뀌었다. 이런 기현상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이변이다. 이렇게 국가정체성이 뒤바뀐 것은 당시 선동과 거짓을 전문으로 하는 좌익세력이 한국사회를 사실상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으로 분열되어 반목과 충돌을 반복해 왔다. 해방 후 남한에서 발생한 수많은 소요사태들은 북한의 조종을 받는 남한좌익들이 일으킨 반국가 폭동이었다. 이런 불법한 폭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의 역사학계를 미리부터 장악했다. 학생들에게까지 교과서를 통해 북한을 미화하고 남한을 태어나서는 안 될 부끄러운 집단, 곧 북한에 흡수 돼야할 임시 집단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국가는 이를 시정할 능력을 상실했다. 국가기관의 요직들을 좌익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역사학의 펜대를 장악하여 과거의 모든 기록들을 부정하고 자기들이 조작한 내용들을 사실이라고 기록해왔다.
생일 없는 사람 없고 생일 없는 국가 이 세상엔 없다. 그런데 매우 부끄럽게도 경제 10위권을 자랑하는 한국에는 건국절이 없다. 2008년 8월 건국 60주년을 맞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건국절 제정을 시도하였지만 남한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이라는 존재와 건국절이라는 개념이 5.18의 숭고한 민주화정신을 훼손한다며 취소하라 명령했다. 2008년, 보훈처에서 많은 돈을 들여 광주 5.18묘지에 ‘건국 60주년 기념’ 조형물을 설치했다가 5.18단체들이 ‘건국개념은 5.18의 숭고한 이념과 배치되는 것’이라며 당장 철거하라 반발했고, 이에 따라 보훈처는 즉시 철거해야 했다. 드디어 ‘대한민국 건국’ 이라는 6개 글자는 박근혜 시대인 2014년에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교육부 장관의 지시로 삭제된 것이다. 이 정도로 대한민국은 북한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왜 광주와 북한이 저지른 내란행위를 대힌민국국민과 국제사회에 먼저 호소하는가?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한국정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경악해야 할 국가는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이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방송과 인터넷에 확산되는 것을 차단시켜왔다. 박근혜 정부는 매우 수상하게도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봉쇄시키고 있는 김정은과 관계개선을 추구해왔다. 이런 시점에서 나의 연구결과는 박근혜 정부에 매우 불편한 진실임에 틀림없다.
세계가 놀라야만 할 이 새로운 발견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에 대해서는 침략사실을 물어야 함과 동시에 UN에 이 사건을 회부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전라도에서 신격화되어 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과 그를 추종하여 북한특수군 600명을 광주로 끌어들여 그들과 함께 총기를 들고 대한민국에 항적한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적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형법 제93조(여적)는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박근혜 정부는 이런 강력한 조치를 취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지금의 박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이른바 5.18세력의 횡포에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이고, 국가기관의 주요 포스트들과 언론계를 장악한 종북세력에 주눅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력과 맞서서 지난 12년 동안 투쟁해온 이 책의 저자는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이슈화 시켜 국제사회로 하여금 대한민국 정부가 가야할 길을 열어주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에게는 방송출연이 철저히 금지돼 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가 방송과 언론을 통제하여 이 새로운 진실이 확산되는 것을 원천 봉쇄시키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집단과도 같다.
● 국가가 5.18역사의 진실탐구 노력에 가한 탄압ㆍ학대사실
진실을 탐구하는 나에게 한국정부가 가한 탄압과 학대의 역사는 5.18폭동사건의 본질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196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하여 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소령과 중령 때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 위치한 미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시스템분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과 석사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이전한 경우는 미 해군대학원 창설 이래 처음 있었던 사례였고, 박사논문에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를 실은 것도 학교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 나는 한국 국방연구원에서 8년 동안 국방문제를 연구하다가 1987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를 했다. 1990년 귀국하여 군사 및 시스템경영에 대한 베스트셀러 책들을 썼고, 기고, 방송출연, 강연 등으로 10년 동안 수입 좋은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이런 나의 행복했던 인생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북한에 국부를 퍼주는 행위에 대해 나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앞장서서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KCIA 부장인 임동원을 시켜 나를 도청케 했다. 2005년, KCIA의 도청사건이 사회 이슈화 되면서 무제한으로 도청을 주도한 KCIA 수장인 임동원이 감옥에 갔다,
1999년부터 임동원은 KCIA의 차장인 김은성과 통신정보국장에게 직접 지시하여 매일 나를 도청하고 감시케 했다. 김은성 차장은 차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일 같이 지만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임동원으로부터 추궁당했고, 그런 일이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이었다고 검찰조서에 진술했다. 임동원의 이런 행위로 인해 대기업들과 예약돼 있던 수십 개의 강의들이 순식에 날아갔고, 방송, 기고가 일순간에 중지됐다. 이러한 손해와 불법 감시로 인한 고통은 일순간 공황으로 엄습했다. 2006년 나는 임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한국 재판부는 겨우 2,000만원만 배상하라 판결했다.ㄷ
2002년 8월, 나는 김대중이 김정일의 총독처럼 행동한다는 3,500자의 칼럼 형 광고를 냈다. 김대중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요동쳤다. 5.18유공자단체들이 광고문 중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됐다’는 45자의 문구가 ‘신성한 5.18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두 가지 폭력을 가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어깨 12명을 서울로 데려와 내 사무실을 부수고 아파트 대문과 자동차를 파괴했다. 경찰은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웃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가족들은 경찰의 사전 제보로 피난을 할
(마7:16-20)“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삽입
이어서 광주검찰청 최성필 검사가 경찰 4명(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을 서울 근교 나의 집으로 보내 6시간 거리인 광주로 압송하였다. 수도권 국민을 광주로 잡아가는 것은 형사소송법 제4조 ‘토지관할 규정’에 어긋났지만 김대중 정권 당시의 광주는 법 위에 군림하는 점령군 사령부로 행세했다. 아들 벌되는 4명의 경찰은 나의 팔을 뒤로 젖힌 채 수갑을 뒤로 채우고 이동하는 6시간 동안 모욕적인 방법으로 육체적 린치를 가했고, 화장실 사용도 거부한 채, 언어폭력을 가했다. 검찰청에 도착해서도 최성필 검사가 또 다른 2시간 동안 수갑을 뒤로 채우고 곧 때릴 듯한 제스처를 쓰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이웃 여성 검사가 나타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판사들이 고함을 지르고 탁자를 치며 노려보았다. 공포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101일 동안 나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었다.
이후 누구든 5.18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지만원처럼 당한다는 정서가 한국사회에 팽배했다. 5.18은 광주가 지키는 성역이었고, 한국 좌익세력의 성지였다. 2002년부터 2008년 초까지 7년동안, 나는 5.18사건에 대해 재판한 1996-97년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18만 쪽을 모두 분석하여 1,720쪽 분량의 다큐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4권으로 발행했다. 여기에도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와서 독특한 특수전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5.18단체들이 또 고소를 했다. 5.18의 숭고한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나는 5년 동안 재판을 받았다. 판사로부터 ‘피고인은 언제든지 구속될 수 있다’는 예비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총 25회의 공판을 치렀다. 재판을 받으면서 나는 5.18에 대한 책 3권을 더 발행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확실하게 왔다는 결론을 낸 책들이다.
똑같은 “북한특수군 개입” 표현으로 인해 나는 2002년과 2008-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2002년 재판에서는 광주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08-2012년 재판에는 수도권인 안양과 서울에서 1,2,3심 재판을 받았는데 모두 무죄로 판결됐다. 이는 5.18세력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변으로 인식됐다. 수도권 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광주 5.18단체들이 70명씩 법정에 나타나 폭행을 했다. 방청하러 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40대 여성을 뒤로부터 공격하여 귀가 찢어져 얼굴과 바닥에 피가 흘렀고, 귀걸이가 분실됐다. 손톱을 세우고 나의 얼굴을 긁어놓겠다며 덤비기도 했다.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워 3차례의 휴정을 유발시켜 결국 재판을 파행으로 몰고 갔다. 아버지 벌되는 노인들을 향해 일당 얼마씩 받고 왔느냐, 느그들이 5.18에 대해 뭘 안다냐 등 반말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손가락으로 턱을 치기도 했다. 이렇듯 광주의 5.18유공자단체 사람들은 지금도 북한사회처럼 문명사회를 등지고 있다.
2012년 12월 27일은 5.18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표현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날이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와서 작전하고 갔다’는 금기의 표현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2개의 TV방송국들이 2013년 1월부터 나를 여러 차례 초대하여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는 증거를 물었다. 이 출연 사실은 “5.18분석 최종보고서‘ 209-210쪽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행자들이 모두 나의 결론에 공감을 표했다.
그 후 5월까지 많은 탈북자들이 방송에 출연하여 5.18은 북한이 저지른 것이라는 증언들을 했다. 이중 가장 괄목할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5.18 광주에 실제로 참전했던 사람이 탈북하여 현재 서울근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TV에 출연한 사진이 위 저서 100쪽에 있다. 그리고 그가 소속됐던 침투조직 도표가 99쪽에 있다. 둘째,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이 소개됐다. 위 책의 89쪽에는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이 TV에 출연하여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내용을 폭로하는 사진이 있다. “5.18은 북한이 저질러놓고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고, 사태 직후 대남공작부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나의 연구결과가 사회일각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광주사람들이 좌익 정치인들과 정부 당국자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내가 출연했던 2개 방송국들을 공격하고 보훈처와 전두환의 사저 앞에서 폭력시위를 했다. 방송국 건물 벽에 토마토와 계란을 투척하고 쇠뭉치로 유리벽을 타격하고,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들에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이 장면은 위 보고서 214-227쪽 사진들에 나타나 있다. 2013년 5월이었다.
이에 당시 국방장관 김관진(현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국방부의 판단”이라고 발표했다. *이 내용을 토스 받은==> 정홍원 국무총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총리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했다.
2013년 6월 10일,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민주주의 근간을 허무는 망언을 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반하는 표현은 역사왜곡이고, 역사왜곡은 반사회적 행위로, 이에 가담한 사람들의 인터넷 글에 대해서는 삭제 등의 조치를 취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증언시킨 방송들은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제재할 것이며 역사 왜곡 자들은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통령 직속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나서서 국무총리의 발언에 상응하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5.18에 대한 방송을 중지시키고, 2개 방송국 진행자들에게 감봉을 포함한 중징계를 내렸다. 방송진행자들에게 사과방송을 강요했고, 방송 출연자들에게는 영구적인 방송출연금지 조치를 취했다. 북한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게 하는 이변이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것이다.
5.18에 대한 나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방송하지 못하도록 차단한 방송통신심의원원회는 이어서 인터넷 공간까지 차단했다. 2013년 5월 7일, 유튜브에 게시한 동영상(제목: “5.18광주에 북한특수군600명 왔다“)을 2014년 7월 10일에 나에게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슬쩍 한국측 접속을 차단시켰다. 이어서 2014년 10월 23일,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5.18연구결과물 28개를 무단 삭제한 후 수십 개의 글을 삭제하였다.
2014년 11월, 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런 불법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국가가 학문의 결과를 검열(Censorship)하고 차단하고 삭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5년 6월 12일, 서울행정법원 김국현 판사는 5.18에 관한 한, 1997년의 대법원 판결내용 이외의 그 어떤 연구결과나 증거도 허용되지 않으며, 소수의견은 다수의 의견을 왜곡할 우려가 있으므로 차단돼야 한다는 요지의 실로 전근대적인 판결을 내렸다.
“5.18에 대해 1997년의 사법적 판단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도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다는 실로 충격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는 북한의 인민군 재판소에서나 있을 법한 판결이다.
더구나 이 판결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진 찍힌 폭도 3명의 얼굴과 2010년 5월 17일, 평양에서 거행된 제30회 5.18기념행사장의 로얄박스에 앉아있는 3명의 얼굴이 일치한다는 사진 분석 자료를 제출한 이후에 내려졌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돼 있는 것이다.
나는 60세-72세에 이르는 황금기의 인생 12년을 진실탐구에 전념했다. ‘이 진실탐구는 대한민국을, 악령과도 같은 5.18세력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격려 받아야 할 이런 노력을 단지 대한민국에서 했기 때문에 나는 지난 12년간의 인생황금기를 국가에 차압당했던 것이다. 이상의 탄압에 더해 나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확산하는 불명예스러운 대명사를 여러 개 얻었다. “지만원은 미친 사람이다. 그의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 “지만원은 말이 안 통하는 극우 극단주의자다” “지만원은 정신이 돈 친일파다” 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이 말들에 가장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사회생활을 하는 내 가족들이다.
_ 2015.06.20. 지만원
광주사태의 숨은 영웅들 :폭도들과 북한군이 전남도청에 TNT 폭발장치 설치하였을 때 자기 목숨 던져 광주 시민 구한 계엄군 광기민주화운동 2007.09.18. 18:05
만일 용감한 계엄군이 빨리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언제 광주를 쑥대밭과 잿더미로 만들지 모르는 8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누가 도청에 설치하였는지 밝혀지기 전에 5.18 광주 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급하다. 아마 광주사태 사진을 찍고 영상울을 제작한 조총련계 한민통이 그 폭탄 설치를 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 폭탄을 당시 광주에 있었으되 광주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설치하였다. 그렇다면 십중 팔구 그들은 한민통이었다. 한민통이 일본 기자의 신분으로 미리 광주에 들어와 대기하고 있다가 광주사태 사진을 찍었을 때 그들의 목적을 사실 보도가 아니라, 속이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이 과연 민주화 운동을 위해 그 어마어마한 폭탄을 도청에 설치하였겠는가?
비록 5월 21일에 20만명의 시민군이 200여명의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었으나, 5월 22일부터 광주시민들 대다수는 수습파 혹은 온건파 편에 섰다. 여기서 수습파 혹은 온건파는 시민의 무장과 폭력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시민들을 말한다. 강경파(혹은 투쟁 지도부)가 계속 유혈 투쟁을 선동하였을 때 광주 시민들은 "저 사람들 빨갱이 아니야?" 하며 이상한 눈초리를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 절대 다수였던 온건파의 입장에서도 광주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수습파 학생대표는 김창길이었다.
25일 오후 5시경 수습위원 김기홍 변호사가 자기를 만나러 도청에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폭약이 폭발하면 직경 4㎞이내가 잿더미가 되어 버리므로 이를 지키고 있다며, 3일동안 잠을 못 잔데다가 인원이 부족하여 지키기 어려우며, 언제 폭도들이 들어와 폭발시킬지 모르니 어른들이 함께 지켜달라고 울며 호소하였다.
김창길 외에도 폭약을 관리하는 시민군 몇명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광주시를 대폭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폭약 유출을 막았다. 때로는 막무가내로 폭탄을 빼앗아가려던 시민군 동료들과 싸워야 했다. 며칠째 잠을 못 자면서 다이너마이트 유출을 감시하던 이들은 광주시의 안전을 위해서는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지 못하던 중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이 극비리에 이들과 밀통하고 군인 한명을 보내 25일~26일 양일간 도청 지하실의 TNT 뇌관을 모두 제거하게 하였다. 다른 시민군에 발각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상황에서 이것은 광주시를 다이너마이트 폭발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행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계엄군이 도청 지하실의 다이너마이트 뇌관분리작업에 성공한 날이 광주에서 해방구의 마지막 날이었다 (참고로, 해방구는 민주화 운동과 짝을 이루는 명칭이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과 짝을 이루는 명칭이다).
김창길 학생은 숨어있는 영웅이었다. 계엄군이 폭탄 뇌관을 제거해 주기 전까지 며칠째 그가 밤을 새우며 폭탄 점화와 폭약 유출을 막았기에 광주시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는 일본군의 북침을 막은 이순신 장군과 북한군의 남침을 막은 전두환 장군 못지 않은 구국의 영웅이요, 광주시를 지킨 자랑스러운 광주 시민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광주 시민들은 이 숨은 영웅을 기억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1996년 10월 10일자 광주일보에도 계엄군이 도청 폭탄뇌관을 제거해 준 사건이 보도되어 있으나 김창길 학생의 이름이 빠져 있다. 비록 수습파를 차별해서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느나, 대신 시민군의 증언을 토대로 광주일보가 보도한 도청 폭탄 사건은 다음 글에 소개한다.
[출처] 광주사태의 숨은 영웅들 ::폭도들과 북한군이 전남도청에 TNT 폭발장치 설치하였을 때 자기 목숨 던져 광주 시민 구한 계엄군|작성자 아이러브
좌익들이 부인하기 시작한 전남도청의 TNT 폭탄 역사 최근글 2014.12.20. 22:40
전남도청의 다이너마이트 폭탄 역사
전남도청에 2천여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탄으로 조립돼 있었고, 5월 24일 김창길은 이 사실이 너무 기가 막혀 전라도 계엄분소(전교사)에 은밀히 알렸다. 소준열 계엄 분소장은 배승일 문관을 2일동안(25,26일) 도청으로 보내 폭탄을 해체시켰고, 김창길 등 온건파 학생들은 그의 신변을 보호해주었다.
배승일 문관은 참으로 어려운 공적을 남겼다. 당시 국가는 그에게 보국훈장을 수여했지만 좌익정부는 그의 훈장까지도 박탈했다. 그러나 그는 행정법원에 소송을 걸어 2007년 1월 훈장을 되찾았다. 그 훈장은 누구보다 광주인들에게 가장 고마운 훈장이었다,
207.1.16 연합뉴스보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 설치된 폭발물을 제거해 시민을 구한 배승일(53)씨가 광주 진압 관련자로 분류돼 취소당했다가 소송을 통해 되찾은 훈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1996년 광주일보는 100 회에 가까운 특별취재 기사를 냈고, 그 79회째 기사를 1996년 10월 10일에 내보냈지만 지금은 검색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도청의 다이너
마이트 사건 자체를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 광주의 약점이 들어 있는 기사들과 자료들이 포털에서 무더기로 사라지고 있다. 필자는“수사기록으로본1`2.12와5.18” 제2권367-371쪽과 http://systemclub.net/0518_2005.htm 에 게재돼 있는 보도내용을 아래에 공개한다. 그런데 광주일보 특별 취재판에서는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배승일 문관과 김창길의 이름을 제외시켰다.
[출처] 좌익들이 부인하기 시작한 전남도청의 TNT 폭탄 역사 |작성자 jmw8282
207.1.16 연합뉴스보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 설치된 폭발물을 제거해 시민을 구한 배승일(53)씨가 광주 진압 관련자로 분류돼 취소당했다가 소송을 통해 되찾은 훈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1996년 광주일보는 100 회에 가까운 특별취재 기사를 냈고, 그 79회째 기사를 1996년 10월 10일에 내보냈지만 지금은 검색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도청의 다이너마이트 사건 자체를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 광주의 약점이 들어 있는 기사들과 자료들이 포털에서 무더기로 사라지고 있다.
필자는“수사기록으로본1`2.12와 5.18” 제2권 367-371쪽
http://systemclub.net/0518_2005.htm
에 게재돼 있는 보도내용을 아래에 공개한다. 그런데 광주일보 특별취재판에서는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배승일 문관과 김창길의 이름을 제외시켰다.
1996년 10월 10일, 광주일보 특별취재반 보도 내용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제2권 367-371쪽에서 또는 http://systemclub.net/0518_2005.htm
● 실록 5.18광주항쟁사 제 79회 道廳 폭탄뇌관제거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민군들이 광주인근 지역을 돌며 무기확보에 나선 결과, 상당수의 무기와 폭약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도청 시민군의 화력은 기관총.카빈소총.M1소총등 총기류 2천5백여정, 수만발의 실탄, 다이너마이트등 폭약류, 이중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이너마이트. 특히 대한석탄공사의 화순광업소 광부들이 8t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을 싣고 光州에 와 전남도청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것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광주와 인근지역에서 구한 모든 총기와 탄약류는 일단 도청 2층 식당에 모아졌고 그중 폭약류는 다시 지하실로 옮겨졌다. 이를 관리했던 팀은 폭약류 관리반. 폭약반으로 활약했던 梁홍범씨(당시 20세)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자. 당초 폭약반은 9명으로 시작됐다. 23일 梁씨를 포함한 9명이 처음으로 회의를 열고 위험한 물건이니만큼 철저히 지켜야 하니 원치않는 사람은 폭약반에서 나가라고 하자 2명이 나가고 7명이 남았다. 이후에도 2명이 줄어 항쟁 마지막까지 폭약반에 남은 사람은 모두 5명. 文영동.金영복.梁홍범.朴선재.姜남열씨였고 이중 文영동과 金영복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폭약류량은 약 리어카 2-3대 분량. 폭약반은 도청내의 사람들에게도 접근이 쉽지 않았다. 자그마한 실수로 지하에 있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도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근 지역이 폐허로 변하기 때문이다. 폭약반은 폭약반출을 철저히 금지했다. 어쩔 수 없이 폭약을 주어야 할 경우에라도 폭약을 박스에 반정도만 채우주었고 그럴때마다 책임자들을 불러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막무가내로 폭약을 가져가려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서 소위 '계엄군과 내통'으로 알려진 뇌관제거 사건이 벌어졌다. 25일 오전 10시께. 폭약관리반 文영동.金영복씨등 3명이 지프를 타고 상무대로 들어갔다. 文씨 등은 당시 전교사에서 金基錫 부사령관을 만나 "우리는 도청에서 폭약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폭약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뇌관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이들은 그 증표로 다이너마이트 뇌관 6백-7백개를 가져갔다.
文씨 등은 이날 오후 2시께 도청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전교사에게 문관이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관파견을 요청한 文씨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으나 폭발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뇌관제거를 해야 한다는데 폭약반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날 밤 9시께 폭약 제거를 위해 문관 1명이 들어왔다. 문관은 사복을 입었었고 몽키스패너 2-3개와 작업도구를 가져왔다. 그 문관은 촛불을 켜고 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신형 수류탄과 이미 조립해 놓았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분리작업을 했다. 새벽1시까지 일을 했으나 폭약이 워낙 많아 그 날밤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일을 끝내지 못한 문관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金영복씨의 안내로 도청을 빠져나갔다. 문관은 다음날인 26일 오전 다시 도청에 들어와 폭약반들과 함께 뇌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지하실 폭탄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이 도청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폭약관리반이 계엄군과 내통했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으나 폭약관리반원들은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들은 지하실에 있던 폭약류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선의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들이 폭약류를 사용 가능하게 보관했더라면 계엄군 진입 당시 시민군이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럴 경우 光州는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뇌관을 제거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했던 이들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 보다는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梁씨는 "뇌관을 제거해 안전하게 보관한 자신들이 역사의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지금도 폭약반이 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실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뇌관 제거는 전교사 金基錫 부사령관과 도청항쟁지도부와의 교감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은 96년 7월 15일 5.18 22차 공판에서 나와 "전교사 부사령관으로서 광주시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판단아래 25일 항쟁지도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폭약반을 소개받았고 이날 오후 폭약반 대표 文영동씨등 3명을 만난 뒤 뇌관제거를 위해 특수요원 파견에 합의했다"고 증언했다.
또 지난 85년 6월 7일 尹誠敏 국방장관이 국회 국방위에 출석, 발표한 '光州사태 보고'라는 문건에도 "도청지하실에 모아둔 폭발물의 폭발방지를 위해 폭약반의 양해아래 특수요원 투입, 폭발물의 뇌관과 신관을 분리하는데 성공, 광주시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밝힘으로써 신군부와 항쟁지도보와의 사전교감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취해졌던 뇌관제거. 결국은 계엄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엄군이 재진입하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겠다며 버텨왔던 시민군. 마지막 보루였던 폭약류의 뇌관이 제거되자 도청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신군부는 그들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폭약류 뇌관이 제거되자 상무충정작전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특별취재반>
2014.12.20. 지만원
[출처] 좌익들이 부인하기 시작한 전남도청의 TNT 폭탄 역사 |작성자 jmw8282
[스크랩] Re:김대중 다시보기 (증거 목록)| ◈… 자유게시판 봉양| 2005.04.24.13:04
1. 김대중은 김정일에 충성하는 골수 좌익입니다
(1980. 5월, 김대중 자필 진술조서)
김대중은 80년 5월 17일 체포되어 수사 받는 과정에서 5월 20일과 5월 25일 2차례에 걸쳐 자술서를 썼습니다.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1945년 9월경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했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좌익 백남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았음.
4. 해방 당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형편이었으므로, 좌익분자와 도 같이 일하게 되고, 공산주의에 대해 서 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
5. 1949년 친구의 형이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음.
6. 6.25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집에 숨어있다가 2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7. 정치보위부에서는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 "이 새끼가 아직도 반성못했다",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배신자라고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 갔음.
8.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東京)에 갔다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했음.
9. 그 후 미.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인의 접촉, 한민통의 결성 하고,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 1973년 8월 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10. 1973년 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지부를 두고자 모색했으며, 총본부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화, 캐나다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1980. 7, 국가보안법 위반행위 및 내란음모죄: 사형)
1980. 7. 31일, 검찰은 김대중의 성장 환경, 해방 후의 좌익활동, 한민통의 조직 및 좌익 활동, 폭력시위, 광주사태 선동 및 배후조정에 관해 단죄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민통을 결성하여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가면서 좌익 활동을 했습니다. 한민통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자입니다. 지금의 민주당도 "국민회의"였습니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고 사살한 문세광이가 한민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 직후에 들어왔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을 했습니다 (988년 11월 18일국회 광주 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신경식 의원)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한민통은 좌익인 광동희가 발행하는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공산당 선전지였습니다.
김대중에 적용된 법조문은 1)형법 제90조 제1항, 제2항, 제 87조 2)계엄법 제15조, 제 13조, 계엄포고령 제1조 제1항 3)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4)반공법 제5조 제1항 5)외국환 관리법제35조, 제17조 제1항 6)형법 제37조, 제 38조였습니다.
그의 좌익행각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제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 10·26 사태로 인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 녹음 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켰다.(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호: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3일 징역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의말).
2.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만엥씩 받았다는 수사기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 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수 없습니다.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1971년 20만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 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4. 일반에게 노출된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입니다. 이것 말고도 김대중은 61억엔을 받았다는 설을 포함해 많은 말들이 돌고 있지만 아직은 이를 수사할 조직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이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북한에 퍼다주는 것은 이 빚을 10배 이상으로 갚으라는 김정일의 요구라고들 하지만 이 역시 심증만 가지 확증은 없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그 개연성이 있는 한 공론화돼야 한다는 것이 2002년도의 대법원 판결입니다.
첫째, 김대중은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 자금도 사용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세도 졌을 것입니다. 그 중에 북한 돈이 없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가 북한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20만 달러라면 지금의 수백억원에 해당합니다.
셋째,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고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정일로부터 노출됐습니다. 넷째,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북한에 퍼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산 관광객이 가거나 안 가거니 무조건 1년에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고 1인당 300달러씩 정산해주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몰래 준 돈도 수십억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미국이 공식적으로 밝혀 준 것은 아직 4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이 네 가지는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김일성과 좌익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금을 받았는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가 좌익으로 정치 일생을 출발했고, 좌익들과 조직을 만들었으며, 좌익들과 꾸준히 연대해왔고, 지금도 좌익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장인 김정일 찬양)
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라고 평가했습니다. (2000년)
1)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2)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2. 2000년, 제3차 ASSEM회의를 김정일 외교장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통령의 직분을 망각하고 김정일 영업부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북한과 수교하라고 종용했습니다.
3. 많은 돈을 뿌리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으면 로버트 김을 석방해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정일 식견 있는 지도자입니다. 국제금융을 동원하여 북한을 도와 줍시다" 하다가 THIS MAN의 경멸적인 호칭을 얻고 힘이 빠져 돌아왔습니다.
(적장과의 내통행위)
1. 김대중은 김정일로부터 동지적 사랑도 받고 깊은 은혜도 입었다 합니다. 일본잡지 문예춘추 2000년 12월호에 실린 김정일의 육성녹음입니다. 중요한 것만 발췌합니다.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태양정책’을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1999.2월).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1999.11월).
2. 김정일의 추가적인 폭로가 무서워서인지 김대중은 200.3월에 베를린 선언을 기획하여 김정일에 접선해 줄 것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2000년 6.13 및 6.15일 90분간의 단 둘이 차 속에서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일생동안 색깔로 의심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북 관계에서 만이라도 투명해야 했습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단 둘이 갈 때에 40분 올 때에 50분간 일행을 이탈해 따로 밀담을 갖는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합니다. 남북한 관계의 특성과 그의 색깔론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 국민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했습니다. 초법행위요국가보안법 위반입니다.
3.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지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4. 북한의 사상 최대의 전력증강과 훈련 사실을 국민에게 속이려 했습니다. "2000년의 전력증강은 과거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이래 최대 규모였다"는 연합사령관의 보고내용은 쉬쉬하고 감췄습니다.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했습니다. 2001년에 대대적으로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한 6.25행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5. 북한의 적화통일 행사에 많은 이적단체들을 여러 차례 보내 김정일에 충성을 보였고, 저들의 적화통일에 동조한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6. 2001. 2월, 미국방문 전, DJ는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당했습니다. 1973년 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맞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2년후인 1975년 월맹은 순식간에 월남을 삼켜버렸습니다. 800 - 1,200 만이 재교육 캠프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7. 지난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삭감시키라고 했습니다. 반 DJ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반공전선 와해)
1. 국가통수권자로 전쟁은 없다고 선포한 것은 군.민의 안보정신을 허무는 이적행위였습니다.
2. 적을 의심해야할 위치에 있는 군 최고 통수권자가 적을 의심하지 않으면 내통자로 의심받아야 합니다.
3.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감싸야 할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스스로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개정 또는 철폐를 주장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던 좌익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공공연히 활동하도록 격려했습니다.
5. 임동원, 한완상, 이태복 등을 포함한 좌익용공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습니다.
6.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북에 보내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홀리도록 하고 그 언론사 사장들이 국내에서 김정일 찬양론을 펴게 했습니다.
7. 국정원으로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해 김정일 초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일이 식견 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선전하게 했습니다.
8.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를 데려다가 전쟁은 없다고 교육했습니다. "110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붙들어 둔 것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식의 교육을 했습니다. 모두를 뒤집어서 교육했습니다. 많은 언론사 간부들이 교육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9. 초등학교 교과서에 김정일 사진을 실었습니다. 학생의대부분, 초등학생의 90% 이상이 김정일을 멋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0. 전교조의 좌익 용공 교육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남침 통로 열기)
1. 2000년12월까지 지뢰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열흘 묵던 나그네 하루가 급한 식으로제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타당성 분석과정 없이 경의선을 환상의 실크로드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침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남측 길만 열어주었습니다. 북으로 가는 통로는 지금도 막혀 있습니다.
3. 2001.6월, 북한에 제주해협 통항권을 주자고 있고, NLL도 개방하며, NLL일부를 북한에 떼어내 줄 것을 시사했습니다.
4. 연천의 제5땅굴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천연동굴"이라고 못박았습니다.
(한국군의 손발 묶기)
1. 현장지휘관에게 부여된 "UNC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먼저 쏘지 마라", "청와대에 먼저 보고하라"며 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적장에 군자금 대주기)
1. 러시아에서 받은 돈 14억7천만 달러를 안 받을 테니 그 대신 러시아가 북한에서 받을 돈50억 달러를 받지 말라는 거래를 했습니다.
2. 알게 준 돈은 5조 규모입니다.
3. 모르게 준 돈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미국이 그 일부를 폭로해 주었습니다. 2000년도 한 해에 4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비밀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미의회 조사국(CRS)은 2002.
2. 25, 의회에 한.미 관계 보고서’에서 미CIA와 주한미군 사령부가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밝혔습니다. "정부는 1999년과 2000년 어느 날까지 현대를 통해 "비밀리"에 4억달러를 북한에 주었다. 관광대금 4억 달러도 주었다. 총 8억 달러가 갔다. 그 중 4억 달러를 무기 구입에 사용했다"는 요지였습니다. CIA는 2001년1월 이 내용을 한국정부에 경고했지만 한국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러주기를 강행했다 합니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2002. 3. 27 일간지들)
4. 업체들에게 북한 투자 및 지원을 강요하고, 대북지원에 나서는 업체에 세무조사를 면제해주었습니다.
5. 2년전에 환했던 평양시내가 지금은 깜깜하답니다. 전기가 무기제조 및 땅굴 굴착에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은 북한에 경수로 용량과 맞먹는 50만 KW의 전기를 공급하려다 미국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6. 금강산 사업으로 퍼준 돈, 비밀리에 상납한 돈, 앞으로 임동원이 북한에 약속할 돈 이외에도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에 지원한 돈은 쌀, 비료, 투자비 등이 2조 4천억입니다. 필자의 조사로는 현 정부에 들어 이제까지 북한에 퍼 준 돈이 다음과 같이 집계됐습니다.
1) 2000.9.28: 60만 톤(3,120억원)
2) 6회에 걸쳐 104만톤(4,660억원)
3)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 1조864억원
4) 1999년 한해 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 업체 당 평균 745억 원.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 1.2배이며 지방세의 20배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5) 99년10월6일 현대가 20인치 칼라 TV 3만대를 북송(445만 달러: 58억원)
6) 99년8월16일 대한제당이 연간 2만톤(60만 달러)씩 북한에 제공(31억원)
7) 99년11월27일 삼성이 172만 달러를 투자(22억원)
8) 2000년 1월 25일 현대아산이 190만 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 반출(25억원)
9) 2000년2월 8,863평 짜리 평양실내 체육관 준공(450억원)
10) 평화자동차 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이 3억 달러 투입(4,000억원)
11) 2000년 3월7일 삼성전자가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 달러를 투자(52억원).
12) 2000년3월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 달러를 부담(10억원)
13) 내복 1,000만벌(600억원)
14) 2000년 3월6일 축협에서 계란 1천만 개, 새마을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15) 2000년 4.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총계 2조3,892억 원이다.
7. 앞으로 더 가는 돈: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고,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합니다. 군사분계선-개성 12㎞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하겠다 합니다(2002,4.23한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 합니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 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 합니다(한겨레 2002.04.12)
4)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북에 쌀 50만톤을 수송한다 합니다(세계일보 2002.4.24).
(반공 역사 말살하기)
1. 2000년10월1일, 이어서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으로 정의했습니다.
2. 어이없게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베트남 대통령에게 한국군 파병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본 것입니다. 2001. 8. 23일, DJ가 천득렁 베트남 주석 환영만찬에서 “우리가 불행한 베트남전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 고통을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를 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한겨레 21의 "아!몸서리 처지는 주월한국군의 양민학살"론과 맥을 같이 하는 색깔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한겨레 21. 강정구, 한홍구 같은 사람들은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월맹군을 민족해방군, 미군/한국군을 반역군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이 가세한 것입니다.
3. 여수-순천, 4.3 반란사건을 일으켜 방화 살인한 좌익들을 통일의 역군으로 둔갑시켰습니다.
4. 13년전, 7명의 경관을 죽이고 11명의 전경에게 주상을 입힌 동의대 좌익 데모학생을 민주화투사로 명예회복시켰습니다.
5. 13년전, 과격한 불법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전교조 교사 1,139명에을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켰습니다.
6. 좌익 대모를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켜 최고 2억까지 보상합니다. 반면 국가의 부름을 받고나가 싸운 고엽제 환자들과 전상자들은 약값조차 제대로 대주지 않고 있습니다.
6.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한총련에까지 명예회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7. 과거의 사법부 재판의 권위를 몇 명의 수상한 무명인물들이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짓밟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법부가 현재의 "민간심의위원회"보다 못한 것입니다. 과거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고 공산주의 통일정권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9. 애써 잡은 63명 간첩은 영웅 취급해서 보내주고, 국군포로, 강제 납북자는 쥐어박고 입을막습니다.
10.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극진히 대접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115명의 유족은 홀대하고 학대합니다.
11. 국군 포로를 이산가족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12. 좌경 데모는 보호하고, 보수 데모는 차단합니다.
13. 국정원, 기무사, 경찰의 간첩 잡는 활동을 은밀히 차단합니다.
(언론의 입막기)
1. 46개 언론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합의케 했습니다
2. 언론사들에게 "햇볕정책"에 악영향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합의케 했습니다.
3. 언론사 죽이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과 동아를 죽이려 했습니다. 국세청 800명 인력의 半인 400명을 풀어 60-90일간 세무조사를 폈습니다. 서울방송에51명, 조선일보에 50명, 동아일보에 35명, 중앙일보에 24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도 가담했습니다.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들어 언론을 잠재우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국가가 도둑을 맞아도 짖는 개가 한 마리도 없게 만들려 한 것입니다.
(기막힌 거짓말)
1) "이 김대중은 돈을 돌보듯 합니다"(1967)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명백히 해둡니다"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행한 DJ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2)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 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1997)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뿐 아니라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1997.10. 8일 관훈클럽)
3)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2002.6)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국민 여러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드렸으나 결국 저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2002.6.21 일간지 일동)
4) 2002.07.10, “국민 여러분께 한없는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2002.7)
김대중씨가 박선숙 대변인을 통해 차남 홍업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수재, 조세포탈 및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홍업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가 발표된데 대해 한 말입니다. 검찰은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48억을 받았다고 공소했습니다. 현대에서 16억, 삼성에서도 5억을 받았고, 이 2개 업체들로부터 매달 5천만원을 받았다 합니다. 임동원한테서도 때때로 2,500만원, 신건 한테서도 1,000만원씩의 상납을 받았다 합니다(2002.7.11 조선, 중앙).
홍업씨는 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 안에 숨겨 놓고 그 앞에 가구를 쌓아 놓고 지냈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부정한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홍업이가 검찰에 숨긴 사실, 검찰이 또 점수 따려고 감싸준 사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더구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서 송정호 법무장관에게 수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는데도 이 정도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6.11일 오전, 국무회의가 끝난 직후 이한동 총리가 법무장관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합니다. "어른이 매우 섭섭해하십니다. 어떻게 한 집안에서 두 자식을 구속할 수 있느냐고 하시더군요. 불구속 수사는 도저히 안 되는 건가요?
5) "이 김대중은 일생동안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적 없습니다"(1997).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하고는 다릅니다".(1997. 10. 8일 관훈클럽)
6)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가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1997).
"하나 첨부하면 제가 집권하게 되면 청와대 비서실을 대폭 축소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비서실로 만들고 모든 국정은 국무위원들과 협의해서 하겠습니다. 지금 보면 이 나라에서는 청와대 비서관 회의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국무회의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해요. 청와대에서 국민이나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안지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장관에게 전화 한 통 하면 쩔쩔매고 그대로 따라가야 해요. 이건 이 나라 헌법 질서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도 앞으로 시정할 것이기 때문에 비서들 자신들이 정치를 농단하는 일은 저희 집권하에서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1997. 10. 8일 관훈클럽)
7) "이 김대중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2000),
"노벨평화상은 한국국민 모두의 업적으로 받은 상이니 만큼 저는 상금(11억2,222만원)을 노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습니다".(중앙일보 2000.12.11)
8)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 김대중의 것입니다"(2001)"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2001. 12.10 조선일보).
9) "노벨평화상금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2002)."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 6.15 기념관을 지을 것이다".(2002.5.20 중알일보, 세계일보, 신동아 2002.6월호)
10) "김정일은 나쁜 놈입니다"(1997).
"저는 김정일을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인 사람, 어렸을 때부터 안하무인으로 컸고 71년부터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그래서 대단히위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위험한 사람을 다루는데 있어서 정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저는 김정일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하지 않습니다".(1997.10.8 관훈클럽)
1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2000년)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2000. 2.28. 독일 슈피겔지)
12)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약을 개정시키겠습니다"(1997).
"저는 집권하면 북한에 대해서 분명히 따질 것 따지고 짚을 것 짚고 그래가지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하겠습니다. 그 가장 전제조건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서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노동당 규약은 북한에 있어서 헌법 이상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1997. 10. 8일 관훈클럽)
13) "김정일에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2002).
그는 김정일에 알게 모르게 현금과 쌀로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 5조원 규모입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이 입을 열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그가 물러나기 전에 그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입니다. 노벨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김정일과 함께 상을 받지 못해 죄를 지은 기분이리고 말했습니다.
14) 1980.3.26일 김대중의 YWCA 초청 연설문입니다. 그의 사기성이 잘 나타나 있는 연설문입니다.
나는 내 일생의 교훈으로써,「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배반하지 말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국민의 편에 서라」는 것, 이것이 내 인생과 정치의 신조입니다. 우리 집 가훈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첫째가「하나님과 국민에게 충실하라」입니다.
둘째는「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된다」이며,
셋째는「절대로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입니다(박수, 옳소! 환호).
나는 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돈과 하나님은 같이 섬길 수가 없고, 돈과 양심을 같이 섬길 수가 없다. 돈은 먹고사는 데 부족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부를 가지게 되면 부의 노예가 되고,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으로부터 격리되고, 그리고 교만해지고 타락한다. 따라서 만일 너희들이 경제계에 나가서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등등 경영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만일 부자가 되면 아버지와 너희들과는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최대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셋째입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을 맡게 되면 봉사할 것입니다(박수, 환호).
그러나 국민과 양심을 버리고「무슨 수단을 쓰든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죽으면 죽었지 추구할 수 없는 길입니다.(옳소! 박수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한다면, 나는 다음 정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없습니다. 왜? 첫째,경제만 보더라도 박정희씨가 아주 망쳐 놓았습니다(박수. 옳소! 환호). 이것을 맡아 놓고 수습한다는 것은 마치 다 파먹은 김칫 독에다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옳소! 박수).
4년 동안 뒷치닥거리나 하고 나면,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뒷치닥거리를 하고나면 4년은 끝나는 것입니다(웃음, 박수).
통솔하는 문제 등등 다음 대통령의 짐이 여간 무겁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누가 한 4년쯤 해서 실컷 고생하고난 뒤 그때쯤 내가 맡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박수, 환호)
여러분! 나는 아직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기서 공개할 수 없는, 그 동안 많은 치욕과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나를 바닷 속에 상어밥이 되게 던지려고 할때도,「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국민은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법정에섰을 때도 판사를 향해, 검사를 향해,『당신들이 나를 지금 재판하지만 역사와 국민은 내편』이라는 것을 얘기했습니다(옳소! 박수).
누구에게 천대를 받건, 누구에게 멸시를 받건, 누구에게 박해를 받건, 아니 오늘 생명을 잃건, 내 국민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국민만 나와 같이 있고, 내가 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할수 있는 한은, 김대중에겐 불행이 없고 김대중에겐 슬픔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박수, 옳소!)
따라서, 나는 지금 게딱지같은 국민주택에 살고 있지만(웃음), 국민을 배반하면서 부를 얻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국민을 택했습니다. 국민을 배반하면서 안전을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 신념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박수).
여러분!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는 내 스승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형님입니다. 나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나의 스승 예수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와 행복을 위해 싸운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박수).
북한은 한쪽으로는 대화를 하면서도 간첩선을 내려보냅니다.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 남한을 뒤집어엎겠다는 소위「남조선 해방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가의 안보와 반공의 태세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박수, 옳소!).
나는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넘치는 자유와 정의와 안정을 줌으로써 국민들이 이 땅에 정을 붙이고,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공산당 침투의 여지가 없는 공과 안보를 주장하는 것이 나의 정책이요 박정희씨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박수).
국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이 있는 곳에, 김대중이가 있습니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데 김대중이는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천 번 죽어도 국민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필요로하면, 우리 민족의 혼이 내게 명령하면, 나는 다시 열 번 납치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 번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 번 연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할 것을 다짐합니다!(옳소! 환호, 박수) (연설 끝)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대중)
1980.5.18일자 경향신문도 이날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로 김대중을 비난했다. 아래는 경향신문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김대중의 이력서)
1959년 6월 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 김대중의 전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져 음독 자살했다.
김대중은 그후 62년 10월 현재의 부인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김대중은 1945년 8·15해방 후 근무하던 일본인 해운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의 회사, 토지, 주택 등 여러 형태의 재산은 적산(敵産)이라 하여 미군정청이 인수했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른바 '적산불하' 로 출발한 한국의 기업은 많았다.
김대중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인 기업을 인수했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분했는지, 김대중은 1980년 계엄사에 제출한 자술서에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자료집 참조).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기자는 김대중의 회사 처분에 대해 위 경향신문의 기사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래는 시바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1982) 기사다.
"김대중씨가 급히 강원도로 피신을 하게 된 것은 해운회사의 부사장 나상수가 김대중씨를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는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다. 김대중씨가 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 떨어진다."
"김대중씨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 그 직후에 카톨릭 세례를 받은 것,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56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도, 횡령도 태연하게 한다는, 김대중씨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59년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제 지구에 출마, 낙선한 직후 새로운 횡령사건이 발각된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했다. 민주당 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조의금을 보내게 되었다".
"당 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 듯하다"
"61년 7월부터 김대중씨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그런데 선전부장 시절에도 횡령 사건이있었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 7백만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대중의 모략행위)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가 난립,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씨는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씨의 당선은 보장됐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61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이밖에 김대중이 각종선거전에서 저지른 폭력 및 흑색선거운동을 보면-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으며
▲목포시 만호동 상가주택을 철거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자기선거운동원을 측량기사로 위장, 주민의 불안감과 반감을 유발케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는 단순한 자동차사고를 여당 측의 암살음모라고 떠들어 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운전사의 운전부주의로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전복된 것이 조사결과 밝혀져 자동차 사고의 암살음모 주장은 결국 김대중이 조작한 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끝났다.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의 집 앞에 폭발물을 장치,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조사결과 이 폭발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용 딱총 화약을 은박종이에 싸서 배터리 전지
폭발할 수 있게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김대중 암살용 폭발물이었다면 이같이 조잡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김대중이 조카를 시켜 저지른 조작극으로 밝혀졌었다.
(김대중의 사기 행위)
김대중은 현재(1980)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 4억원, 동산 1억원 등 5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월 29일(1980) 복권 후에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경제적 이권, 정부 요직 등을 미끼로 각계인사로부터 무려 12억 원 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대부분 파렴치한 수법에 의한 것들이었다.
▲우선 1959년 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선거참관인 중 문수룡이 참관도중 급사하자 민주당에서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횡령 착복했고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다.
▲또 60년 4월~61년 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천7백 만원중 7백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다. 그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1972년 10월 김대중이 일본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 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 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를 조직했다.
http://www.systemclub.co.kr/ (출처)
대한민국의 역사 바르게 세우는 절차와 과정과 위대한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
왜 이렇게 많은 내용을 올리는지 아십니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역사를 바로 잡아 상벌을 주어야 합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국가로 그 순기능의 기능이 정지되었고 단 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건국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같은 지혜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건국이라는 것뿐입니다! 그 절차와 방법의 전략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 방법에 수많은 절차와 과정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이 같은 무질서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하나님의 의와 공의에 충족을 시켜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위하여 영적인 통로의 그릇이 준비되고 그리스도를 대한민국에 영적인 통치자로 모시는 영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통치할 그릇으로 즉 통로로 준비가 되고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를 주시고 그 통로의 사용하실 때 하나님께서 영으로 주시는 뜻에 따라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시 것입니다.
이때에 대한민국의 건국이후 역사를 바르게 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건국헌법이 제정[制定:제도나 법률 따위를 만들어 정함]되고 법령[法令:법률과 명령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공포[公布:이미 확정된 법률, 조약, 명령 따위를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림]된 이후 영적 건국 국가 통치에 될어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건국 이전에 범죄행위는 현재 헌법에 따라 처벌하고 보상하는 것입니다. 불의 불법을 모조리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의와 공의 심판을 하여 상, 벌을 주는 제재[制裁:국가가 법규를 어긴 사람에게 처벌이나 금지를 행함]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정과 절차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백성이 죄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민국의 왕으로 이 백성을 통치하시도록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상위법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대한민국을 통치하기에 용의한 헌법을 만들어 하위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건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김대중이는 분명한 북괴의 간첩이었습니다. 노무현 동일합니다.==>호남 찾은 문재인 “양강구도 무너졌다. 내가 김대중·노무현 계승한다. 광주 충장로 2만5000명 운집해 “문재인 대통령” 연호 2017-04-29
이 같은 김대중 노무현을 계승한다면 문재인은 100% 간첩입니다. 역적인 건국과 함께 김대중노무현은 부관참시 문재인은 사형이 확정될 것이다.
민족의 반역자 김대중 노무현 계승하는 문재인은 분명간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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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가 5ㆍ18 역사의 진실탐구 노력에 기한 탄업ㆍ학대 사실 _ 글쓴이 지만원
국가가 5.18역사의 진실탐구 노력에 가한 탄압-학대 사실 진실을 탐구하는 필자에게 한국정부가 가한 탄압과 학대의 역사는 5.18폭동사건의 본질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196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하여 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소령과 중령 때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 위치한 미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시스템분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과 석사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이전한 경우는 미 해군대학원 창설 이래 처음 있었던 사례였고, 박사논문에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를 실은 것도 학교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 나는 한국 국방연구원에서 8년 동안 국방문제를 연구하다가 1987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를 했다. 1990년 귀국하여 군사 및 시스템경영에 대한 베스트셀러 책들을 썼고, 기고, 방송출연, 강연 등으로 10년 동안 수입 좋은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이런 나의 행복했던 인생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북한에 국부를 퍼주는 행위에 대해 나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앞장서서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KCIA 부장인 임동원을 시켜 나를 도청케 했다. 2005년, KCIA의 도청사건이 사회 이슈화 되면서 무제한으로 도청을 주도한 KCIA 수장인 임동원이 감옥에 갔다, 1999년부터 임동원은 KCIA의 차장인 김은성과 통신정보국장(8국장)에게 직접 지시하여 매일 나를 도청하고 감시케 했다. 김은성 차장은 차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일 같이 지만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임동원으로부터 추궁 당했고, 그런 일이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이었다고 검찰조서에 진술했다. 임동원의 이런 행위로 인해 대기업들과 예약돼 있던 수십 개의 강의들이 순식에 날아갔고, 방송, 기고가 일순간에 중지됐다. 이러한 손해와 불법 감시로 인한 고통은 일순간 공황으로 엄습했다. 2006년 나는 임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한국 재판부는 겨우 임동원에게 2,000만원만 내게 배상하라 판결했다. 2002년 8월, 나는 김대중이 김정일의 총독처럼 행동한다는 3,500자의 칼럼 형 광고를 냈다. 김대중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요동쳤다. 5.18유공자단체들이 광고문 중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됐다’는 45자의 문구가 ‘신성한 5.18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두 가지 폭력을 가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어깨 12명을 서울로 데려와 내 사무실을 부수고 아파트 대문과 자동차를 파괴했다. 경찰은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웃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가족들은 경찰의 사전 제보로 피난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광주검찰청 최성필 검사가 경찰 4명(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을 서울 근교 나의 집으로 보내 6시간 거리인 광주로 압송하였다. 수도권 국민을 광주로 잡아가는 것은 형사소송법 제4조 ‘토지관할 규정’에 어긋났지만 김대중 정권 당시의 광주는 법 위에 군림하는 점령군 사령부로 행세했다. 아들 벌되는 4명의 경찰은 나의 팔을 뒤로 젖힌 채 수갑을 뒤로 채우고 이동하는 6시간 동안 모욕적인 방법으로 육체적 린치를 가했고, 화장실 사용도 거부한 채, 언어폭력을 가했다. "니미 씨팔 좃 같이,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씨발놈아, 네깟 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건드려, 이 씨발 개새끼 가다가 목을 비틀어 파묻고 가야 한당께,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처먹었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은 얼마나 받아 챙겼것냐, 부하 꽤나 잡아 쳐먹었을 거다. 이런 쥐새끼 같은 개새끼, 우익새끼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당께. 너 이새끼 가다가 죽을 줄 알아, 너를 때려 죽여서 파묻어도 증거가 남냐? 증거가? . ." 검찰청에 도착해서도 최성필 검사가 또 다른 2시간 동안 수갑을 뒤로 채우고 곧 때릴 듯한 제스처를 쓰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이웃 여성 검사까지 나타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이 자가 지만원이라는 그자 랑가? 어이, 이 보소, 얼굴 좀 들어 보소 잉, 당신 눈에는 광주시민 전체가 빨갱이로 보이요? 당신 눈에는 여기 있는 우리가 빨갱이로 보이요? 이 자도 인간이랑가 잉~, 참말로라 잉, 광주가 아니었다면 한국에 무신 민주주의가 생겼겠소. 어림도 없재이 잉~ 이 보소, 당신이 시스템공학 박사요 엥? 시스템공학이란 게 있당가, 어디서 학위를 받았소? 처음 듣는 건디 이거 가짜 아닝가벼, 좀 알아봐야 겠구만, 어이 좀 알아보소 엥~” 내가 광주지법에서 처음 만난 판사는 정경헌(1957, 전남 함평), 그는 10월 24일에 영장실질심의를 진행했다. 그는 필자의 변론을 맡은 광주출신 이근우 변호인(당시66세)에게 “변호인은 광주 시민들에게 무슨 욕을 들으려고 서울 사람의 재판을 맡았소”라며 아버지 벌 되는 분에게 모욕을 주었다. 이 때 무료변론을 맡은 서울변호사는 임광규, 정기승, 강신옥, 이종순이었다. 이근우 변호인이 필자의 경력과 훈장 받은 사실들을 나열하자 “시끄럽소, 지저분한 신문은 집어치우시오”라고 또 한 차례 면박을 주었다. 이어서 정경현 재판장은 필자를 삼킬 듯이 노려보면서 “당신이 광주에 대해 무얼 아요?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구속영장은 발부됩니다. 이상이오” 10월 30일,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다. 김용출 부장판사(1959년생 전남 장성)가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나의 형님도 아무런 죄 없이 계엄군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고초를 받고 왔소. 이런 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요?” 형사소송법 제15조는 지역정서가 작용하는 본 사건을 광주지법 이외의 다른 지역 법원으로 이송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필자의 서울지역 변호인들은 이 지역정서와 관할권을 이유로 관할이전신청을 3회씩이나 냈지만 광주지법은 이러한 법의 정신과 실정법을 무시했다. 대법원에 상고를 했지만 대법원은 검찰과 법원이 저질렀다는 그 정도의 사실들만으로는 광주가 지역정서를 가지고 재판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다. 대법관은 강신욱(재판장) 조무제(주심) 유지담, 손지열이었다. 나에 대한 판결문의 요지는 “5.18은 비상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등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벌인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5.18특별법이 규정해놓고 보상법으로 부상도 받고 있는데 사망한 자들이 마치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에 의하여 선동되어 일으킨 폭동인 것처럼 허위로 묘사하여 사자와 생자의 명예를 다 같이 훼손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5.18이 전두환의 내란을 분쇄하여 헌정질서를 수호하려고 일어난 성스러운 운동이고, 여기에는 불순세력과 북한특수군이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는 판결문이었다. 1심재판장은 전성수, 2심 재판장은 박삼봉이었다. 101일 동안 나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었다. 이후 누구든 5.18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지만원처럼 당한다는 정서가 한국사회에 팽배했다. 5.18은 광주가 지키는 성역이었고, 한국 좌익세력의 성지였다. 2002년부터 2008년 초까지 7년 동안, 나는 5.18사건에 대해 재판한 1996-97년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18만 쪽을 모두 분석하여 1,720쪽 분량의 다큐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4권으로 발행했다. 여기에도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와서 독특한 특수전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5.18단체들이 또 고소를 했다. 5.18의 숭고한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나는 5년 동안 재판을 받았다. 판사로부터 ‘피고인은 언제든지 구속될 수 있다’는 예비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총 25회의 공판을 치렀다. 재판을 받으면서 나는 5.18에 대한 책 3권을 더 발행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확실하게 왔다는 결론을 낸 책들이다. 똑같은 ‘북한특수군 개입’ 표현으로 인해 나는 2002년과 2008-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2002년 재판에서는 광주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08-2012년 재판에는 수도권인 안양과 서울에서 1,2,3심 재판을 받았는데 모두 무죄로 판결됐다. 이는 5.18세력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변으로 인식됐다. 수도권 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광주 5.18단체들이 70명씩 법정에 나타나 폭행을 했다. 방청하러 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40대 여성을 뒤로부터 공격하여 귀가 찢어져 얼굴과 바닥에 피가 흘렀고, 귀걸이가 분실됐다. 손톱을 세우고 나의 얼굴을 긁어놓겠다며 덤비기도 했다.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워 3차례의 휴정을 유발시켜 결국 재판을 파행으로 몰고 갔다. 아버지 벌되는 노인들을 향해 “일당 얼마씩 받고 왔느냐”, “너그들이 5.18에 대해 뭘 안다냐” 등 반말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손가락으로 턱을 치기도 했다. 이렇듯 광주의 5.18유공자단체 사람들은 지금도 북한사회처럼 문명사회를 등지고 있다. 2012년 12월 27일은 5.18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표현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날이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와서 작전하고 갔다’는 금기의 표현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2개의 TV방송국들이 2013년 1월부터 나를 여러 차례 초대하여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는 증거를 물었다. 이 출연 사실은 “5.18분석 최종보고서‘ 209-210쪽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행자들이 모두 나의 결론에 공감을 표했다. 그 후 5월까지 많은 탈북자들이 방송에 출연하여 5.18은 북한이 저지른 것이라는 증언들을 했다. 이중 가장 괄목할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5.18 광주에 실제로 참전했던 사람이 탈북하여 현재 서울근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TV에 출연한 사진이 필자의 위 저서 100쪽에 있다. 그리고 그가 소속됐던 침투조직 도표가 99쪽에 있다. 둘째,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이 소개됐다. 위 책의 89쪽에는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이 TV에 출연하여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내용을 폭로하는 사진이 있다. “5.18은 북한이 저질러놓고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고, 사태 직후 대남공작부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나의 연구결과가 사회일각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광주사람들이 좌익 정치인들과 정부 당국자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내가 출연했던 2개 방송국들을 공격하고 보훈처와 전두환의 사저 앞에서 폭력시위를 했다. 방송국 건물 벽에 토마토와 계란을 투척하고 쇠뭉치로 유리벽을 타격하고,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들에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이 장면은 위 보고서 214-227쪽 사진들에 나타나 있다. 2013년 5월이었다. 이에 당시 국방장관 김관진(현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국방부의 판단”이라고 발표했다. 이 내용을 토스 받은 정홍원 국무총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총리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했다. 2013년 6월 10일,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민주주의 근간을 허무는 망언을 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반하는 표현은 역사왜곡이고, 역사왜곡은 반사회적 행위로, 이에 가담한 사람들의 인터넷 글에 대해서는 삭제 등의 조치를 취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증언시킨 방송들은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제재할 것이며 역사왜곡자들은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통령 직속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나서서 국무총리의 발언에 상응하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5.18에 대한 방송을 중지시키고, 2개 방송국 진행자들에게 감봉을 포함한 중징계를 내렸다. 방송진행자들에게 사과방송을 강요했고, 방송 출연자들에게는 영구적인 방송출연금지 조치를 취했다. 북한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게 하는 이변이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것이다. 5.18에 대한 나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방송하지 못하도록 차단한 방송통신심의원원회는 이어서 인터넷 공간까지 차단했다. 2013년 5월 7일, 유튜브에 게시한 동영상(제목: ‘5.18광주에 북한특수군600명 왔다’)을 2014년 7월 10일에 나에게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슬쩍 한국 측 접속을 차단시켰다. 이어서 2014년 10월 23일,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5.18연구결과물 28개를 무단 삭제한 후 수십 개의 글을 삭제하였다. 2014년 11월, 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런 불법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국가가 학문의 결과를 검열(Censorship)하고 차단하고 삭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5년 6월 12일, 서울행정법원 김국현 판사는 5.18에 관한 한, 1997년의 대법원 판결내용 이외의 그 어떤 연구결과나 증거도 허용되지 않으며, 소수의견은 다수의 의견을 왜곡할 우려가 있으므로 차단돼야 한다는 요지의 실로 전근대적인 판결을 내렸다. ‘5.18에 대해 1997년의 사법적 판단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도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다는 실로 충격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는 북한의 인민군 재판소에서나 있을 법한 판결이다. 더구나 이 판결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진 찍힌 폭도 3명의 얼굴과 2010년 5월 17일, 평양에서 거행된 제30회 5.18기념행사장의 로얄박스에 앉아있는 3명의 얼굴이 일치한다는 사진 분석 자료를 제출한 이후에 내려졌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돼 있는 것이다. 필자는 60세-72세에 이르는 황금기의 인생 12년을 진실탐구에 전념했다. 이 진실탐구는 대한민국을, 악령과도 같은 5.18세력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격려 받아야 할 이런 노력을 단지 대한민국에서 했기 때문에 나는 지난 12년간의 인생황금기를 국가에 차압당했던 것이다. 이상의 탄압에 더해 나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확산하는 불명예스러운 대명사를 여러 개 얻었다. ‘지만원은 미친 사람이다. 그의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 ‘지만원은 말이 안 통하는 극우 극단주의자다’ “지만원은 정신이 돈 친일파다‘ 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이 말들에 가장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사회생활을 하는 내 가족들이다. 2015.12.26. 지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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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국화답 청와대의 간첩
● 만국화답 : 청와대의 간첩
나는 宣覺者이다.(?)
현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宣覺者이다.
宣覺者 노릇에 충실하고자 머리 아픈 先覺者이다.
권력자들과 지식인들과 기득권자들이 나를 두고 엄포쟁이라고 하든 말든 나는 선각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불시에 천상에서 영감을 내린다.
그 이유는 내게 초능력이 없기 때문에 신통력을 대용해 내게 국가통치상 중요한 사안이나 먼저 발표할 글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는 반백살이 넘었어도 숫총각이라 밤이면 밤마다 나의 보지가 있었으면 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을 품는다. 그런데 내 전생에 아내로 짐작하는 꾀꼬리녀 일명 인디언처녀를 이해불가한 신체변화로 인해 1차절교한 이후 신체변화가 거의 정상이 되었기로 다시 사귀자고 글을 게시하였더니 또다시 괴로운 심정이 절벽아래로 떨어지듯이 솟구쳐 2차절교를 하였는데 이러한 변덕이 어인 까닭인고 하니 다름 아니라 천상에서 지금 연애할때가 아니니 근신하고 글부터 발표하라고 내게 영감 즉 뇌파지시를 내려 그리된 것이다.
덕분에 꾀꼬리녀에 대한 2차절교후 지난 한달간 어마어마한 혜안의 글들을 쉴새없이 게시하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사극영화 제작 법률> 을 작성후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왜 윤석열 대통령은 위헌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겼는가?” 였다.
이 생각에 이어 “왜 나는 지금 연이은 작문에 어지럽고 졸립고 피곤한데 난데없이 용산집무실 이전이 떠 오르는가?” 라고 반의한 후 “아! 또 영감인가보다.” 라고 판단해 근원을 고찰추론하여 보았다.
많은 지질학 지하탐사 전문가들이 휴전선 근처뿐 아니라 서울시내와 청와대까지 땅굴이 연결돼 있다고 폭로하였고, 도청은 인공위성으로도 가능하기에 전파차단벽을 설치하기 전에는 국가기밀을 보호할수가 없어서 용산국방부청사로 이전을 하였나보다 라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또 왜 자꾸 내게 영감을 내려주는가 라고 반의해보니 아 니가 차기대통령이 되도록 천상에서 결정하였으니까 내려주지! 라고 결론내렸다.
내가 이 지면에 아주 단순한 상식을 알린다. 한반도는 하나의 땅덩이지만 두 국가가 들어섰기에 천상은 둘로 나뉜다. 남한의 천상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존속을 바라기에 매번 정권마다 패망하지 않았고 200만표 이상을 부정선거로 도둑질 당하고도 겨우 25만표 차이로 윤석열 후보가 기적처럼 대통령이 되었음에 이것이 바로 천상에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증거가 되며, 마찬가지로 북한의 천상은 조선공화국을 아직은 패망시키려 하지 않기로 김정일 정권에서 북한주민이 무려 300만명이나 아사했어도 김대중을 통해 기사회생시켰고 세월호 침몰을 잠수함으로 일으킨 진짜 김정은이 천벌받아 뇌사로 뒤졌어도 가짜를 내세워 아직까지는 조선공화국이 유지되도록 하고 있음에 盡人事待天命이 되는 일도 있고 盡天事待人命이 되는 일도 있음을 알수 있다.
내가 감지하기로 청와대 근처에는 분명히 땅굴이 있다. 그리고 도청은 정말로 식은죽 먹기이다. 보호감시기가 곧 도청의 이중기능을 할수도 있고 직원의 몸에 도청기를 부착할수도 있고 일상용품을 도청기로 변형할수도 있고 건물밖 백미터에서도 음파탐지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어 감지하기로 현재 청와대에는 분명히 고위간첩이 있다. 나는 간첩적발을 누워 떡 먹기처럼 할수 있다. 영안이 트이거나 신통력이 필요치 않다. 그냥 간첩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녹음기를 들이대며 수백가지를 쏟아내면 제풀에 무너지는 단어나 표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거짓말탐지기나 재산추적이나 친족파악 등을 하지 않아도 단 십분만에도 알아낼수 있다. 지난 십년간 무수한 위장보수 지식인들을 분석하면서 간첩의 언변유형을 파악하였다.
또한 감지하기로 현 청와대의 간첩은 차기대통령으로 이재명이 당선되리라 기대하고 있으나 앞일은 천상에서도 모르는 것이니 식초는 그만 마시고 내가 대통령이 될수 있음을 확률상 딱 절반만 예상해 내가 출세하거든 즉각 청와대에서 자진사퇴하기를 바란다. 나는 청와대에 입성하기전에 청와대 직원 전부를 내가 면담해 간첩여부를 파악할 것이다. 경호원은 영감이 없는 자들이므로 간첩적발을 맡기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문재인의 치매흉내를 간파하였고 트럼프를 적그리스도라고 적시하였다.
만약 나의 경고를 무시하여 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청와대에서 근무하다가 내게 적발되면 용서없이 사형에 처할 것이다.
서기 2024년 8월 13일 화요일 아침 10시 6분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 후보준비자
萬局 李 龍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