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고장[경기 별곡] 안성 1편
궁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고장
[경기 별곡] 안성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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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선호도 설문조사에서 대부분의 지역이 신라면을 선호하지만 유일하게 부산, 경남 지역은
안성탕면이 1위를 차지한다는 기사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원인을 살펴보면 영남 지역
소비자들은 구수한 된장 맛을 좋아해 안성탕면을 선호했다고 한다.
라면 이름이 왜 안성탕면인지 궁금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후에 안성탕면을 생산하는 '농심 공장이
안성에 있어서'라는 연유를 알고 나선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안성에 대한 관심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대학 시절을 지나 지금까지 안성을 간 적도,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성이 경기도라 하지만 서울과의 거리가 꽤 멀어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주나 경주처럼 관광도시로 이름을 날리거나 속초, 구례, 제주처럼 아름다운 바다와 산 등 이름난
자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안성이 잊힐 때쯤 우연히 유튜브에서 방영해 주는 오래된 사극을 한편 보게 되었다.
지금도 청소년 사이에서 일명 궁예 밈(인터넷상 유행하는 짤, 사진 등을 의미하는 단어)으로 알려져 있는
불후의 명작 <태조 왕건>을 말이다. 비록 해상도는 떨어지지만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열연을 펼치는 모습이
지금도 볼 만하다. 역시나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궁예지만.
그 궁예가 역사상 최초의 행적을 보인 동네가 안성이고, 지금도 궁예 미륵을 비롯하여 도시 전체에 미륵불이
꽤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게다가 경기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국밥으로 유명한 식당은 물론 옛 정취를
안성 시내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에겐 익숙지 않지만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안성으로 함께 떠나보도록 하자.
안성은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하고, 평택과 함께 충청도에 접해서 예로부터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주요 관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과거의 안성은 대구, 전주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장이 열리면서 번성했었고, 특히 안성맞춤으로 유명한
방짜유기가 전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남사당패의
최초 발생지가 안성의 청룡사라고 전해진다.
조선말 바우덕이라는 인물이 여성으로서 최초로 15세에 남사당패를 이끄는 위치에 오르고, 흥선대원군
앞에 가서 정 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수여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안성의 자랑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재의 안성은 경기도에 속해 있긴 하지만 다소 소외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순 없었다.
서울과 경기도를 이어주는 수도권 전철은 물론 일반 기차조차 지나가지 않는다. 평택-재천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경부고속도로 안성 ic에서 공도읍을 지나야 안성 시내에 닿을 정도로 불편함도 있었다고 한다.
안성이 과거에 비해 위상이 떨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국토의 큰 동맥을 형성하는 경부선
철도가 안성 대신 평택으로 지나가는 이유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 덕분에 당시
기술로는 철로를 뜷기 어려워 평야가 많고 비교적 평탄한 평택으로 철로를 놓는 바람에 안성의 역사가 바뀌어 버렸다.
안성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지역은 평택과 근접한 공도읍이다.
평택이 물류 중심지로 급속도로 발전한 덕분에 연담화가 된 것이다. 그 덕분에 공도지역에는 스타필드와 대형마트가
다수 입점해 있다. 하지만 안성 시내에 가면 옛 정취와 향수가 보존된 구역이 남아있고, 안성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어
반나절 산책하며 돌아보는 해장 코스로 알맞다고 생각한다. 후에 자세히 돌아보도록 하자.
우선 사방에 볼거리가 퍼져 있는 안성이지만 일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동쪽 끝에서부터 접근해보기로 한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일죽 ic로 가다 보면 일죽면 지역을 지나게 된다. 이 일대는 본래 일죽면과 죽산면 지역을
합쳐 죽산군으로 일제의 1914년, 부군 통폐합 전까지 안성과의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했던 지역이다.
충청북도와 경계를 접하고 있기에 음성이나 진천에 거주하며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 일대에도 답사할 만한 곳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데, 선조의 막둥이로 태어나 이복형인 광해군에게 핍박을 받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영창대군의 묘와 장독대의 풍경으로 유명한 서일농원을 찾아가 볼 수 있다.
현재는 일정상의 문제와 팬데믹 상황으로 가볼 수 없기에 아쉬운 대로 다음을 기약해 보기로 하고,
우선 예전 죽산군의 중심지인 죽산면 일대를 먼저 둘러보는 것으로 안성의 여행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죽산지역은 근대까지 행정구역상 중심지였던 만큼 수많은 부침이 있었던 곳이고, 특히 우리에겐 당대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역사의 현장인 죽주산성이 현재도 잘 보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일단 그 유명한 죽주산성으로 떠나보기로 한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겪었던 한반도지만 고려시대 9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백성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당시 전 세계를 누비며 도시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남김없이 살해한 몽골이었기에
동쪽의 작은 국가였던 고려가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항쟁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민초의 힘이라는 게 더욱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최 씨 정권을 비롯한 지도부는 수도를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생활에만 몰두할 뿐
국가 시스템이 강화를 제외하곤 거의 붕괴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몽골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구이저우 성 전투를 비롯해 처인성 전투에서는
적장 살리타이를 죽이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특히 충주성 전투에서 천민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 당시 고려는 향, 소, 부곡이란 천민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있었는데 처인성과 충주성 전투 당시 참여했던
천민들이 있던 동네가 부곡이었단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갈 죽주산성은 몽골의 3차 침입 당시 송문주 장군의 활약으로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고,
몽골이 물러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들어가는 길이 좁고 주변에 공사장이 있어
모래먼지로 자욱하다. 앞으로의 안성 여행이 마냥 탄탄대로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좁은 도로와 급경사를 오르다 보면 너른 터가 나오면서 죽주산성의 주차장이 드러나게 된다.
죽주산성은 경치가 뛰어나고 산성을 따라 트레킹 코스가 되어 있기에 주차된 차량들이 꽤 많았다.
이제 본격적인 죽주산성의 첫 발길을 떼며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