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의 열린연단을 많이 봅니다. 그동안 너무 몰랐어요. 너무 유익한 거 있죠. 어떤 책을 읽을까? 어떤 학자들의 좋은 책을 가려서 읽을까?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생각하자니 웹서핑도 굉장히 크군요. 거기엔 출판사의 선전도 포함되겠네요. 개인블로그도 보고 원래 읽어서 알던 사람들의 신간도 있을 수 있군요. 나름 넓게 읽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열린연단을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열린연단은 내게 물 반 고기 반이더군요. 한국에서 내놓아라 하는 학자들이 다 있더군요. 열린연단을 본다는 것은 내게 독서보다 더 큰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극히 일부겠죠.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긴 어렵겠죠. 그럼에도 한국 지식인과 지식의 층위 중 한 동향과 흐름을 보는 것은 틀림이 없겠죠.
내가 몰랐던 뛰어난 학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한국 지식인들이 나와서는 이것만큼은 빠뜨리지 않고 꼭 짚고 넘어간다는 거죠. 우리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폄하 되겠습니다. 아주 심합니다.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정도의 사회에서 우리를 자성하지 않고 폄하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분명 정상적인 사회는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부정과 폄하의 중심엔 세월호가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많은 교수들의 강의가 있습니다만 상당한 수의 교수들이 세월호 얘기를 부수적으로 혹은 기조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건축쪽 저명한 교수는 "일본도 부동산 투기가 성행하지만 한국 같은 그런 나라는 다시 없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고고학 학자는 일본의 어떤 책방엘 가도 일본/일본인에 대한 본질적인 책들이 한쪽 코너에 비치돼 있고 팔리고 있는데 한국은 우리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을 담은 책을 찾는 게 그리 쉽지 않다며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린 우리가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그냥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냥 잘 살기만을 바라며 삽니다. 가족을 부양하면서요. 굉장히 통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나 역시 잘난 사람 아니고 이런 부조리한 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고 있을 따름이죠.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 돼, 이렇게 자조하면서.
어쩌면 난 우리 부조리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 취미일지도 모르겠군요. 여기 송호근 교수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고루하지만 나는 재미있게 봤습니다만.
1시간 반에 걸쳐 근대 한국 사회를 장황하게 풀어내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게 1960년대 말입니다. 이게 요즘 사진인데 내가 교양없는 중산층의 서식처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이게 지금 보면 어딘지 알 수 있어요. 일부러 까맣게 다 지웠는데 항의할까봐. 교양을 갖추지 않은 공익에 대한 긴장이 없는 중산층이 대한민국 전체에 생겨난 거지요. 비단 여기만이 아니고 서울 시내에도 가득 차 있는. 거기에 과연 우리가 그런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그런 긴장을 가지고 올라온 중산층인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지요. 그 점을 밝혀내야 됩니다. 그 점을 밝혀내야 뭐가 풀리냐면,
이건 중산층이죠. 다 중산층들인데 어쩌면 중하층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들이 한국에서는 이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외국 사람들이 보면 "야, 번다해서 정말 좋다. 역동적이다" 이렇게 얘기할지 모르지만 자기의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차지하는 이 문제. 만약 여기서 옆으로 조금만 간판을 길게 하면 싸움이 일어나지요. 타협할 수 있는 방안이 없어요. 타협 못하는 건 우리 국회에서 충분히 보잖아요. 이 바다이야기는 전체를 다 가렸어요. 여기를 크게 하니까 다른 데도 엄청나게 크게 하잖아요.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좀 교양이 있어보여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건물 미관이라고 하는 것을 공익이라고 한다면 이 건물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를 최대한 주장하는 형태로 성장한 거죠. 이게1966년 사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뭐, 널려 있잖아요. 제가 잘난 척할 필요는 없지만 대학도 마찬가집니다. 대학의 모든 학과가 여기 다 들어있어요. 김밥, 식품영양학과, 게임학과, 한의대, 치대, 노래방, 음대, 체육대, 그다음에 신문대, 이 안에 있네. 중국어, 영어, 사실 대학도 교양없이 칸막이가 나눠져서 자기의 권리를 계속 주장하는 형태로 되어 있을 겁니다. 어떻게 그러면 컬럭티브 인텔리전스(집단지성)를 확대시키느냐의 문제는 시민사회의 경험층을 통과해야 가능하다, 쓰라린 맛을 봐야 된다. 그런데 쓰라린 맛을 안 봐서 상태가 이렇게 된 거지요. 그래서 결과는, 너무 제가 부정적으로 말씀드려서 죄송한데 원자화된 개인주의와 책임의식의 실종이다. 이게 두드러져 있고, 이게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 모습이 연출됩니다. 아마 여러분 가슴에 못을 박았을 테지만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어요. 이 장면 하나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가슴이 아프실 텐데 왜 이런 모습이 연출이 되는가. 300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왜 이 사람이, 대장이 여길 나와야 되느냐. 이걸 설명해야 돼요. 이 설명은 아까 얘기한 시민사회 100년의 역사에서 뭘 결층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인데 근대 시민사회의 기원을 찾는 것도 이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섭니다. 이 모습을 설명해내야 돼요........ 제가 한국 사회 연구하는 사람인데도 "be korean!"이라고 했을 때, 한국인답게 행동하라고 했을 때 다 알아들었을까? 공유 코드가 빠져 있어요. 이 빠져있는 것은 지난 100년 동안의 역사에서 그런 겁니다. 말하자면 성공의 위기의 징후죠. 우리는 성공했어요. 경제적으로. 그런데 사회가 저 뒤에 있고 정치가 저 뒤에 있고, 이런 상태의 갭이 있기 때문에 그 코드 자체를 못 만들고 있다는 거지요......최장집 교수님하고 중앙일보에서 대담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여줘봤습니다.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아주 극명하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첫째, 국가 역할이 외주화되면 될수록 책임은 소멸된다. 언딘 못 봤잖아요. 언딘이 무슨 단체인지 알 수가 있나, 그런데 국민들이 언딘이 오는 걸 봤어요. 저게 뭐냐, 외주한 거예요. 외주했는데 일은 외주를 받았어. 그런데 책임의식은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가면 갈수록 책임의식은 소멸되고 있다. 이걸 해결하라는 거지요. 지금 곳곳이 다 그렇잖아요. 한국 사회가 위험사회다. 그런데 이건 세계 공통이에요. 리스크 소사이어티는 맞아요. 그런데 한국은 약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걸 어떻게 고칠 것인가. 그 다음에 셋째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다. 비정규직은 책임의식을 면하고 있어요. 면할 수밖에 없어요. 윤리의식이 소멸되었다. 이걸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게 지금 우리가 시민 회의를 열어서 실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컬렉티브 인텔리전스를 통해서 시민사회 결층을 찾아내고 시민들이 공유해야 한다.
첫댓글 '원자화된 개인주의와 책임의식의 실종'
이라는 문제를 '시민회의'를 통해 회복하고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요즘 코리아스픽스의 원탁회의 기획들이 커져가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총체적 체증이네요 내가 걱정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걱정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