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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본문<요21:18~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 오니이까 묻던 자러라(이하 중략..)
성경의 주제가 무엇인지 다들 아시지요? 신구약 성경 66권은 약1200년에 걸쳐 40여명이 쓴 책인데 놀랍게도 주제는 딱 하나로 귀결됩니다. 성경은 무엇에 대해 증거하는 책일까요? 예수님이 요5:39절에서 말씀도 하셨지만, 바로 예수 그리스도(IX)입니다. 그런데 어떤 예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이것이 성경 66권이 통일되게 가리키는 주제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이를 줄여서 표현하자면 십자가 복음입니다. 예수가 곧 복음이지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지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가 없으니까 택한 백성의 죄사함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없으면 모두 지옥행인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루시고 탕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고 여겨주시니 예수님의 피 공로가 곧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복음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일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렇게 십자가 복음이 곧 하나님 사랑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요..다시 말해서 그 십자가 복음이 믿어지는 자들에게 십자가 예수는 복음이고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전혀 무관한 딴 동네 이야기지요. 그들은 죄사함이나 영생이 아무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설령 하나님을 믿는다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대다수는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모르고 단지 십자가 복음(?) 이라는 용어만 사용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일들이 세상 복 받기 위해서 예수 찾고 하나님 찾지요. 또는 십자가 복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통해 구원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 하는 것들이 다 복음을 몰라서 인간의 의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성도의 죄사함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이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겪으시면서 처참하게 죽으셨나요? 또한 인간이 노력해서 죄가 깨끗해지고 구원이 주어진다면 역시 주님이 왜 죽으셨겠어요?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주님이 죽으신 겁니다. 이것을 알아먹으라고 주님이 죽으시면서 남기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찾고 구원을 얻기 위해 행함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의 행태는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잠시 요약하자면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오직 죄사함만을 목적하고 있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성도의 구원이 완성되었기에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구원이기에 기쁜 소식(혹은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은 다 가짜입니다.
자, 그럼 이런 중대한 십자가 복음인 십자가 예수를 하나님은 언제부터 작정하셨을까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릴 예수를 핵심 주제로 설정하신 후에 세상을 창조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구속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두 가지 역사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인류 역사와 그 안에 있는 구원 역사입니다. 이 구원 역사를 줄여서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이 두 역사의 흐름을 겔1장에서는 네 생물이 움직이는 큰 바퀴와 그 안의 작은 바퀴라고 표현합니다. 큰 바퀴는 인류 역사이고 그 안의 작은 바퀴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입니다. 그런데 작은 바퀴 안에 네 생물의 신이 있어 그 뜻대로 바퀴가 움직이니까 겉의 큰 바퀴라는 인류 역사도 따라서 흘러갑니다. 즉 구속사를 중심으로 인류 역사가 전개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네 생물(사자, 소, 사람, 독수리 형상)은 4복음서와 같은 개념으로 IX의 영을 상징합니다(골1:16)
다시 말해서 구속사의 핵심이 바로 메시야를 통한 대속의 구원이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그 구속사의 시나리오대로 인류 역사는 진행되다가 종국에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다 찾아지게 되면 인류 역사는 마감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로 이미 이 세상은 시한부 운명에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자, 중요한 것은 이 십자가 복음이 만세전에 예정된 것이라는 성경의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만 세 곳만 찾아봅니다.
<고전2:2, 6~8, 10>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롬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나신바 되었으며
<엡3:11>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12절을 보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하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사연이 뭐라고 합니까?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그 안이란 11절의 말씀인데, IX안에서 예정하신 뜻이란 바로 십자가 복음을 말합니다. 앞서 엡1:7절에서 이미 밝힌 대로 예수님의 피 뿌림의 은혜로 구속 곧 죄사함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면 결단코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죄가 해결되지 못했는데,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가기도 전에 타 죽습니다. 오직 주님의 피 공로가 나의 의가 되었기에 십자가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 거저 은혜로 구원 받은 이 내막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발로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잠시 요약하자면, 성경 전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라는 것이고, 십자가 예수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무엇을 말한다?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사랑의 대상이 된 우리는 전혀 사랑 받지 못할 죄의 저주 안에 있는 진노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인데 그런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죽여서까지 용서하시는 혜량할 수 없는 신비한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가 다 이것을 증거하고 노래하는 책인데, 지금까지 공부한 요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는 책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자신에 대해 묘사할 때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얼핏 보면 참으로 건방진 말 같지만, 요한의 입장에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을 읽는 우리 모두 역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암시를 주는 말입니다.
요한사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을 알았기에 사랑의 관점에서 성경을 썼던 것이지요. 요한이 기록한 요한 일이삼서 역시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에 대해 쓴 성경이고, 요한계시록 역시 택한 백성의 구원에 대한 사랑의 서사시입니다. 알고 보면 계시록의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과정은 우리 육신의 가치와 자랑을 심판하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간작하게 하여 신랑과 신부의 혼인으로 종결되잖아요.
계19:7절을 보면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는데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뭘까요?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생명으로 삼아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붙잡고 감사와 찬송하는 삶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는 뜻입니다. 옳은 행실 즉 의의 행실은 사람의 행함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말합니다. 사람의 행함은 단 1%도 천국에 끼어들어갈 수 없지요.
그것이 계21장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이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서도 거룩한 성을 보니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우리 구원 받은 성도의 영적인 모습을 비유와 상징으로 그려낸 것이지 천국의 물리적 모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요한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받았고 누린 자였습니다.
그가 쓴 요한복음을 지금까지 2년 남짓 걸쳐 공부해 왔는데요, 특별히 어느 부문이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전체가 다 ㅎ님 사랑이 배여 있어 중요하니까 잠시 요약을 한번 해 보지요.
요1장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분이 성육신 하여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빛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고발이지요. 여기서 세상은 보편적 세상이 아니라 소위 믿는 자들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겔1장에서는 작은 바퀴에 해당되는 구속사의 세계라고 표현 했습니다(일반 이방 세계는 평가 자체가 필요 없음)
그럼 믿는 자들의 세상이 왜 어둠일까요? IX가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 행함을 의로 삼고 있었기에 어둠인 것이지요. 창1장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땅이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 가운데 있다고 표현하잖아요? 왜냐하면 하늘로 표현된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라서 그런 겁니다(창1:1절 하늘이 쌍수임). 하늘이 쌍수라는 것은, 두 하나님이 있는데 자기백성들이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게 아니라, 인간의 행함에 따라 복과 구원을 주시는 이방인의 신 같은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섬겼기 때문에 어둠인 것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합 왕 때에 이스라엘이 섬긴 하나님이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바알과 앗세라 신을 하나님으로 섬겨 왔잖아요. 한마디로 풍요와 다산(형통)을 주는 하나님으로 오해하여 전혀 다른 하나님을 섬겨 왔으니 우상 숭배를 해온 셈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을 갈멜산에 다 모아놓고 죽여 버리지 않습니까?
요1장에서 어둠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종교지도자들은 율법 행함을 의로 삼고 구원을 따내려고 했었기에 어둠이었고 그 어둠이 은혜의 복음을 믿지 아니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영접하여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형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증거 합니다. 복음을 믿는 자들은 자기 실력이 아니라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2장은 가나의 혼인잔치 표적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시작을 혼인잔치로 막을 연다니까요. 6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니 포도주가 되었다는 말은 6째 날에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복음을 퍼다 주니까 잔치 집이 기쁨으로 바뀌더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사랑이니까 기쁜 거지요. 그 망극하신 사랑을 접하여 받은 자들은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3장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된다는 파격의 말씀을 하십니다. 물은 복음이고 이 복음을 들을 때에 성령의 역사로 믿음이 생성되어 거듭나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신 것이지요. 이어서 복음의 진수인 요3:16절 “ㅎ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세상도 구속사적인 세계인 작은 바퀴를 말하는 거지 인류 전체의 세상이 아닙니다.
4장은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셨고,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던 38년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38년 동안 꿈쩍도 못해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실체를 고발하는 모형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항상 죄 앞에서 실패하는 자들이 우리들이지요. 그렇게 수족을 못 쓰는 중풍병자들이 주제를 모르고 물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가려고 행함에 기를 쓰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폭로입니다.
6장은 오병이어의 표적입니다. 하찮은 보리떡은 나사렛 거지 예수를 상징하고 다섯은 율법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복음으로 바꾸어 주사 자기백성을 구원할 생명의 씨를 마련하시는 비유인데, 두 마리 물고기는 두 증인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은 율법 가르침을 받던 유대인을 복음으로 바꾸어 구원하시는 비밀을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7장은 초막절의 의미를 풀어 주신 내용인데, 역시 십자가 복음을 통해 자기백성을 구원하시는 내막입니다. 8장은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을 복음으로 자유케 하시는 내용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다 도망갔다는 말은, 아무도 율법 행함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주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이라는 선언입니다.
9장은 나면서부터 소경을 안식일에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소경 맞지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 사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매무지한 자들이라는 고발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하십니다. 즉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안다면 예수를 믿어 구원 받겠으나 자신이 잘났다고 하면 예수가 필요 없으니 멸망이라는 뜻이지요.
10장에서는 주님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나 다른 양들은 도망간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들려질 때,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 같은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는 복음을 좋아하지만, 자기 의가 넘치는 바리새인 같은 자들은 복음을 배척한다는 말씀이지요.
11장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허물로 죽어 썩는 냄새가 나는 자들이라는 폭로입니다. 이 와중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믿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십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와 이를 목도한 사람들은 죽어도 살리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았잖아요.
‘세상에 세상에!~ ,육신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를 알게 되니까 부활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비단 그들뿐입니까? 우리 역시 믿음으로 나사로의 소생을 확신하니까, 이것이 살아서 믿는 믿음이지요. 이제 우리에게 육신의 죽음은 어떤 두려움도 주지 못합니다. 그저 잠시 휴식에 들어가는 잠자는 것일 뿐이지요. 그것을 가르치시려고 나사로 사건을 조성하신 겁니다.
12장은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서 나드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입니다. 주님을 만왕의 왕으로 대접해 드리는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주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
무슨 의미라고 했지요? 예루살렘 성은 율법의 본산지를 상징합니다. 주님 스스로 자원해서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죽으시러 들어가시는데 그 때 십자가 나무에서 흘리시는 피를 밑에 매여 있는 고집 센(자기 의로 굳어진) 나귀새끼인 저와 여러분에게 흘려 내리게 해서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내막을 담고 있습니다.
창49:11절의 유다에 대한 예언대로 포도주로 비유된 주님의 보혈로 인한 죄사함입니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포도나무는 무엇을 상징하지요?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주님의 보배피를 말합니다. 그래서 요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무릇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저절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배 피를 믿는 자가 감사와 기쁨과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게 열매이지, 무슨 행함과 공로를 쌓는 게 열매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리고 13장부터 16장까지 유명한 다락방 강화입니다. 13장1절에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잖아요. ‘주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말은 주님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시는 사랑이라는 뜻과 그 사랑을 받는 자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버리지 않는다는 두 가지 엄청난 내용을 함축하는 사랑입니다. 제발 이 사랑을 믿고 받아 누리시길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세족식이 있고, 주님이 일러준 말로 다 깨끗하지만 가룟 유다만이 깨끗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택자와 불택자가 구분됩니다.
14장은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하나 되는 복된 소식에 대해 말씀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본래 목적은 죄사함을 통해 의롭게 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영원 전부터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성령)을 보내신다고 갈4:6절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5장은 좀 전에 언급한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16장은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책망이란 바로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로서, 성령 받기 전에는 죄도 모르고 의도 모르고 심판도 모르는 소경이요 철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인 복음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율법 가르침을 어린아이의 양식으로 표현하고 복음을 장성한 자가 먹는 단단한 양식으로 표현합니다. 율법은 누구나 들으면 쉽게 공감하는 차원이기 때문이지요. ‘~하라, ~하지마라는 율법의 정신사고’는 천연적인 사람들이 듣기에 너무도 공감이 가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윤리 도덕적 잣대로 교훈하는 목사들이 차고 넘치는 것은 영적인 내용을 모르니까 착한 사람,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되자, 사회의 귀감이 되자고 떠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성품 좋은 인격자로 양성시키고자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게 아닙니다. 윤리 도덕적 고상한 인격자는 불자나 천주교나 기타 종교에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이 성화되어 거룩한 자가 되는 게 아니라 오직 IX의 십자가 공로만 기뻐하고 높이고 자랑하는 자를 얻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아들이 영광 받으시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변화되는 데 구원 목적이 있지를 않습니다.
17장은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5절에서 하시는데,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영화를 지금 가지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십니다. 창세전에 가졌던 영화란 창세전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장차 하나님 백성의 죄를 대속하려고 아들 자신이 죽음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아들이 자원했다는 창세전 언약을 줄여서 ‘창세전에 가진 영화’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는 아들 자신의 자원한 십자가를 보고 그리도 기뻐하셨으니 이제 십자가를 잘 지게 해 주셔서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라는 뜻을 말합니다. 아들 예수님은 자기 원함이 전혀 없고 오직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이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구원받은 자들이 아들 예수만 높이고 자랑하는 것을 그토록 바라시는 것입니다.
18장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심판을 당하시는 내용입니다. 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한번,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한테 한번, 빌라도에게 두 번, 헤롯 대왕에게 한 번,.. 총 5번을 심문당하시고 19장에서 드디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20장에서 부활하신 후 빈무덤을 보고 놀래는 마리아들과 제자들이 등장하고, 21장에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 고기를 못 잡고 허탕친 제자들에게 주님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에 큰 물고기 153마리를 그물에 가득 잡는 내용과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주시는 비유를 통해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시는 내용, 그리고 지난주에는 베드로에게 갑작스럽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푹 찌르시는 질문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의 “네가 니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너는 나를 사랑하지 못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먹어 이놈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주님을 아가페로 사랑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것은 뭐지요? 내가 성령을 보내서 너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도록 할 것이라는 주님의 주권에 대해 미리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 마지막 단락입니다.
<요21:18~19>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의 말씀에서 베드로의 ‘젊어서’와 ‘늙어서’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젊어서’란 자신이 가능성과 자신감을 갖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겨 덤벼드는 속성을 가진 때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내 자아가 살아 있을 때(육신을 따르는 삶)를 말하고, ‘늙어서’란 자기부인이 일어나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아는, 자아가 죽어 있을 때(영을 따르는 삶)를 말합니다.
이전까지 베드로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만 행하는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자기 자아가 죽은 자로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의 삶을 인도할 성령께서 일하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실패가 영적으로는 아주 귀한 것입니다. 수많은 실패와 넘어짐을 통해 자신에게 절망할 때를 ‘늙어서는’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를 이끌고 갈 ‘남’이란 영으로 등장하실 주님의 영(성령)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육을 입으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인도하셨지만, 이제 영으로 임하실 성령께서 베드로를 인도해 줄 것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주님께서 베드로를 그가 원하지 않았던 길로 인도하신 것처럼, 영으로 임하신 주님 역시 베드로를 그가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가 보여 왔던 삶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의 길을 가로 막는 삶이었습니다. 마16장에서 주님께서 최초로 십자가의 일을 언급하셨을 때 이를 막았던 자가 베드로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체포당할 때 이를 저지하려고 검을 휘둘렀던 자가 베드로였습니다.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서 예수의 죽음을 막아보고자 마지막까지 온 힘을 썼던 자가 베드로였습니다. 이것이 젊은 베드로가 보였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이 오셔서 베드로가 그토록 가기를 거부했던 그 십자가의 길로 그를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베드로는 결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십자가의 길로 이끌어 가고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성도들의 삶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갈5:17절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 벌어지는 일은 육신의 소망과 성령의 소망이 서로 충돌하고 싸우는 일입니다. 이 싸움에서 성령이 결국 이기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백성에 부합한(은혜 아는) 자로 만드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육신의 소욕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마치 윤리 도덕적인 세상이 말하는 그런 죄를 탐하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기도해서 그 힘으로 죄를 안 짓도록 하여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야하는 것이 성령의 소욕이라고 말합니다. 틀려요 맞아요? 그런 생각이 곧 육신의 소욕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나요? 그렇다면 지금 죄 짓는 당신은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겠네요?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소욕은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행함으로 하나님께 잘 보여서 칭찬받고 사람들에게도 신앙 좋은 사람이라고 박수갈채를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열심과 정성을 빗댄 용어입니다. 왜 잠도 설쳐가며 새벽예배에 나갑니까? 뭔가 남보다 더 특별한 열심을 내야 더 점수를 딴다고 여기는 탐심이 육신의 소욕입니다.
이외에도 무궁무진하지요. 전도하기, 선교하기, 십일조, 각종 헌금, 주일성수, 성경읽기, 기도, 철야예배, 혹은 명절날에 명절을 안지내고 교회 예배에 모이기 등등..모두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잘 보이고 다른 신자들에게 좋은 믿음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는 속셈들인데 이런 것을 총칭해서 육신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뒤지지 않는 성미가 육신적 소욕을 발산하는 전형적인 모델이지요. 알고 보면 제자들 모두 ‘누가 큰 자냐’ 경쟁을 했는데 그 모든 일이 다 육신의 소욕 때문입니다(상 받기 위해 애쓰는 기독교인들 모두가 해당..)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인간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한마디로 죄로 죽은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보게 하여 항복시키는 게 성령의 소욕이지요. 이것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많은 실패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지금 베드로의 모습이지요. 그 잘난 척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깨가 푹하니 내려앉고 코가 쑥 빠져 있는.. 마치 배추에다가 소금 뿌려 절여진 것처럼 자신에게 아주 절망한 상태에 이른 모습.., 누가 한 일입니까?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결국 성령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장차 베드로를 이끌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은 너는 복음을 위해서 앞으로 일하게 될 거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영광이나 박수갈채는커녕 고난이 기다리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도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19절입니다.
19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성령에 붙잡힌 인생은 자기 원함이 삭제된 길을 가게 되고 결국 성도의 삶은 주님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으로 인도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아버지의 보냄을 받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삶은 한 마디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린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들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길을 가라고 아버지가 주님을 보내심 같이 주님도 우리를 보내십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며 그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일체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만 받으십니다. 우리가 받은 게 무엇입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죄사함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것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어떠한 고달픈 환경과 불통하는 여건일지라도 영생을 소유한 기쁨 때문에 심령은 평강과 안식을 누린다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 지경에서도 기뻐하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때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한다면, 그 복음이 능력이 되어 또 다시 택한 자들을 찾아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벧전3장에서 이것을 언급합니다.
<벧전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과연 그런 질문을 받는 삶을 살기는 하는 것입니까?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유일무이한 게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믿어지는 것은 내 실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너무도 잘 알았기에 벧후1:1절에서 우리가 다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노라고 선언합니다. 어떤 보석보다도 더 귀한 믿음을 받았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복음이 믿어져서 우리가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요1:13절에서 확인하였듯이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기 때문이니 어찌 우리가 큰 소망을 갖고 살지 않겠습니까?
<요21:20-22>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는 뒤 따르고 있던 요한을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의 불길한 죽음에 대해 언급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불안해져 있던 베드로가 마침 뒤에서 자신을 따르고 있는 요한을 보고는 그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까를 주님에게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같이 예수님이 따르다가 자신은 죽게 된다는데, 그럼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절)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실지라도 그것이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증인으로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내가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의 인생, 남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길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탐욕을 내려놓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소망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무지랭이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고귀한 사랑을 팽개치지 말고 이제 다른 택한 백성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을 증거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신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그 소명에 부응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