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을 시작하면서.
우주와 삶의 근원에 관한 궁극적 진리를 찾는다는 면에서 종교와 과학과 철학은 그 목표가 같다. 차이가 있다면 과학과 철학은 궁극적 진리를 찾고 있는데 비하여 종교는 궁극적 진리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우주와 생사에 관한 근원적인 가르침을 주고 이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사물의 근원에 관해 묻고 생각한다는 면에서 철학 또는 과학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성자의 체험에 바탕을 둔 종교적 가르침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지며 삶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 우리가 종교를 이해하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자와 같은 직관적 깨침이 없는 보통 사람이 종교적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종교적 진리가 과학적 뒷받침을 받는다면 인간이 그 종교적 진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진리를 이해한다면 삶의 방향은 자연스레 정해질 것이다.
삶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서 가치관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면, 삶을 이루는 크고 작은 행위나 선택들이 방향성을 유지하도록 판단하는 것이 철학(哲學)이다. 그런데 철학은 문학과 역사와 함께 할 때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흔히 인문학을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하는데 철학적 문제에 수반되는 다양한 사유와 감성을 정확하게 표현하여 사람들끼리 소통하게 하는 것이 문학(文學)이다. 또한 인간은 나와 남을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데,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역사(歷史)다. 이렇듯 종교와 인문학은 한 사회의 가치체계와 행동패턴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종교와 철학과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자연과학도 인문학의 토대 위에서 그 의미를 다할 수 있는 것이고 불교 역시 불교학이라는 인문학의 뒷받침이 있어야 불교의 참뜻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리라 믿는다. 이런 이유로 이 칼럼에서는 우주와 생사 등 근원적인 문제에 관하여 불교와 과학과 인문학의 바탕 위에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무아론과 윤회에 대한 고찰
불교는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종교라는 평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평을 들을 정도로 불교교리는 합리적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론(無我論)은 깊은 깨침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척 곤혹스럽게 들리는 말이다. 불교가 업(業, Karma)과 윤회(輪廻)를 말하고 인과응보와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말하면서 영원한 자아(自我)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받아드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금생에 선행을 하여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불교의 목표는 아니지만 육도 윤회(六道 輪廻)는 불교적 윤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을 존재론적으로 보는 한 무아론은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론적 사고(思考)가 세상을 보는 유일한 방식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다음 글을 살펴보기로 하자.
“세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물이 있는 것 같다. 돌멩이나 깡통처럼 그 성질만 나열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과정으로서만 이해할 수 것들이다. 사람이나 문화 같은 존재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들이다. (돌멩이 같은 것들은 사람이 ‘어떤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 그러나 이렇게 사물을 ‘어떤 것’들과 과정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착각이다. ‘어떤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서서히 변하는 것과 빨리 변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우주에는 사물과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빠른 과정과 느린 과정이 있을 뿐이다. --- 우주가 사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환상은 고전역학을 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사람이 사물을 기술할 때는 보통 그 사물의 상태에 관해서 말한다.) --- 각각의 실험은 어떤 순간에 고정된 그 입자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긴다. 일련의 측정은 각각의 정지된 순간을 촬영한 영화의 정지된 영상과 흡사하다. --- 상대론과 양자론은 우리 우주가 과정들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가 어떤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환상이다. --- 우주는 많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사건은 과정의 가장 작은 부분 또는 변화의 가장 작은 단위로 구성될 수 있다. --- 사건들의 우주는 관계론적인 우주다. 모든 성질들은 사건들 사이의 관련성을 통해서 기술된다. 두 사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 인과관계다. --- 우주의 인과적 구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인과적 구조가 시간에 다라 어떻게 변하는가를 결정하는 법칙을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이라고 한다.”
위의 글에서 물리학만 아니라면 이 글의 출처가 불교경전이나 논서라고 해도 이상한 데가 없을 것이다. 이 글의 출처는 스몰린(Lee Smolin)이라는 물리학자가 쓴 “양자중력(量子重力, Quantum Gravity)의 세 가지 길”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 있는 글 가운데 몇 군데 따서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위의 인용문이다. 다만 이 인용문에서 ( )속에 든 부분은 이 칼럼의 필자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을 사건 중심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사건 중심으로 인간을 기술하면 무아론이 된다. 상주불멸의 ‘아(我)'란 없고 오취온(五取蘊)이 인과관계를 맺고 인과관계를 갖는 사건이 부단히 계속되는 것이 불교의 윤회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