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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역설, 하나님의 나라(씨 뿌리는 비유 3, 마 13:10~23)
역설은 말이 안 되는 말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약할 때 강하다, 풍요 속의 빈곤, 고독한 군중,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등이 있습니다. 또 예를 들자면 일본은 자판기 천국이라고 합니다. 우동자판기, 도시락 자판기, 햄버거 자판기에 학습지 자판기도 있습니다. 심지어 장수하늘소 자판기도 있답니다. 자판기가 이만큼 많다는 말이지요. 많아서 좋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천국은 원래의 천국이라는 좋은 의미보단 ‘너무 많다’는 의미로 전달이 됩니다. 이케아에서 연필을 무료로 나눠주니까 손님들이 한 움큼씩 가져간 모양입니다. 이 모습을 본 누군가가 ‘한국은 거지 천국이다’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여기서는 천국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역설적인 표현들은 말 그대로 보면 안 됩니다. 주의 깊게 그 의미를 되새겨야만 합니다. 이러한 역설은 듣는 사람들에게 다소간의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흔들어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지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 비유에도 이러한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셨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를 연상하며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 할 때, 그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와 다른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그가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 혹은 완악한 마음입니다.(15) 완고한 마음은 단순히 굳은 마음, 딱딱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선입견을 말합니다. 이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로 착각하게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그 자체로만 떼어서 좋은 신앙의 이야기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가지의 마음 밭이 있는데 우리는 이 중에 좋은 밭, 옥토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자는 단순한 논리로만 받아들여서는, 비유로 말씀하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의도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 즉 완고한 마음 완악해진 마음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좋은 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입견, 고정관념을 밝히는 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가 의도하는 바입니다. 완고한 마음은 천국 말씀, 즉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라는 씨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완악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씨가 뿌리내리지도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이유가 원인이 뭘까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갖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나라”라는 개념에 대한 매우 강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 자체가 역설적인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셨을 때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와는 다른 개념으로 그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들을 때에는 ‘하나님의’보다는 ‘나라’라는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은 사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나라’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존재이고, 나라는 우리가 현실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삽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주변에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들도 여행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또는 TV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접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들이 작동하는 방식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라’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선입견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들었을 때에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나라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에 사실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 나라의 선입견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그 자체가 비유입니다.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입니다. 이것을 나라라고 번역했지만, 원래는 “왕의 나라, 왕국, 왕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왕국 중에도 강력한 통치자인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바실레이아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국, 혹은 하나님의 제국이라 번역할 수 있습입니다. 바로 여기서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제국은 강력한 지배력에 의해 통치됩니다. 세상의 나라는 “지배 권력”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지배체제이고 위계질서를 강조합니다. 지배체제에서는 힘이 가장 세고, 소유가 가장 많은 자가 왕, 황제가 되지요. 그런 세상은 성공신화, 승자독식, 약육강식, 무한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힘과 권력과 부에 따라 사람들의 서열이 정해집니다. 황제의 자리에 가까울수록 그 사람은 귀인 대접받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뭇 사람의 부러움을 삽니다. 반대로 권력에서 멀수록 죄인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국”이라고 할 때, 하나님과 제국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힘과 능력이 무한하시지만, 그것을 제국의 황제가 하듯이 마구 권력을 휘두르는 분이 아닙니다.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위에서 군림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돌보시고 섬기시고 사랑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율법도 무섭고 딱딱한 계율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의 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겠지요. 약자를 편들고(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나라가 아니라 협력하고(오리 가자는 자에게 십지를 가주라) 돌보며 책임지는(선한 사마리아인) 나라입니다. 힘의 논리가 아닌 비폭력의 논리(오른뺨 때리는 자에게 왼뺨을 대라), 섬김의 논리(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 십자가의 논리(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사랑의 논리(원수를 사랑하라)가 지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제국이란 말은 그 자체가 바로 역설적인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나라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시지요.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3~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와 같지 않다는 말씀이지요. 여기서 ‘이 세상 나라’는 어디를 말합니까? 로마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둘 다를 가리킵니다. 오히려 뜻밖에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가리켜 이 세상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35)는 말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 제국과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 지배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라고 오해하는 한 말입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더 큰지 서로 논쟁할 때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들을 ‘주의 나라’에서 주님의 좌우편, 즉 더 높은 자리, 더 남을 지배하는 자리에 앉혀주시기를 구했을 때에도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너희는 그렇지 않다.” ‘세상의 임금들은 주관하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과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과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힘과 권력으로 지배하고 통치합니다. 세상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주목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세상의 작동방식은 철저하게 지배라는 원리입니다. 더 많이 가진 자가 위로 올라갑니다. 더 힘 있는 자가 지배자가 됩니다. 이 논리에 의해 사회에서의 위치가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위계질서가 강조되지요. 더 높은 위치, 즉 더 지배하는 위치에 가기 위해 더 많은 힘과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부와 소유를 필요로 합니다. 없는 자들을 차별합니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갖지 못한 자들의 위에서 그들을 차별하고 착취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와 같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지 않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남을 지배하고 차별하려는 욕망들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씨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방식은 세상 나라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사고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씨가 우리 마음에 뿌려져도 열매 맺기가 어렵고 심지어 뿌리를 내리기조차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서 참 멀다, 하나님 나라의 씨가 뿌리내리기가, 열매 맺기가 이토록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말입니다.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누는 통치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함께 살아주는 방식이 하나님의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남을 지배하려하고 남보다 너 많이 가지려고 하며, 남보다 더 높아지려 하는 세상에서는 매우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는 자들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이 지배가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랑은 섬깁니다. 큰 자가 낮은 자를 섬기고, 그렇게 사랑과 섬김의 방식으로 함께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함께 사시는 것이지요. 함께 하려면 용납하고 받아주고 사랑하며 섬겨야 가능합니다. 지배하려하고 통제하려 들면 함께 하기 힘듭니다. 목사가 된 유명 연예인이 잉꼬부부인줄로만 알았는데 30년 넘게 아내를 때리고 억압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배하려 들면 함께 하기 힘듭니다. 요한복음 14:23을 보시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상태를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로 사랑으로 함께 거하는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지배자가 아닌 지배자요, 하나님의 나라는 나라가 아닌 나라인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회, 그래서 아무런 지배자도 없는 사회, 이런 사회가 가능할까요? 만일 가능해도 지배의 논리에 따르는 세상은 그것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 신대륙의 인디언 사회가 그런 사회였습니다. 인디언 사회는 유럽의 제국의 침략에 너무나 쉽고 허무하게 무너져버렸습니다. 혹자는 인디언들이 너무나 미개하고 야만적이어서 강력한 통치자와 그가 지배하는 나라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진 사악한 종족이요, 반은 인간 반은 짐승인 미개한 족속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고도로 높은 의식수준에 의해 움직이던 인디언 사회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이고, 또 철저히 유럽중심의 백인 우월주의에서 나온 사고입니다. 자주 말씀드렸듯이 인디언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평등의식, 자유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라가 없고 왕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지배라는 것, 지배자라는 존재를 극도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서부 영화에서 그려지는 인디언들의 잔인함과 포학성은 잊어야 합니다. 서구 백인 중심적 기독교 패권주의가 그린 철저한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이 왕이나 국가라는 제도를 갖지 못할 정도로 미개하고 모자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디언들이 큰 힘을 가진 지배자를 거부했고, 그런 지배자가 통치하고 군림하는 국가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왕이 없고 국가가 없었습니다. 만일 젊은 인디언이 고기를 많이 잡아 갖다 주면서 대단한 추장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되면, 다른 인디언들을 그를 무시합니다. 그가 그렇게 잘난 체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결국에 죽일 것이기 때문에 그가 잡아온 고기를 항상 무시한답니다. 인디언 사회는 많이 가졌다고 남보다 더 힘이 있다고 잘 난체 하는 사람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나눕니다. 심지어 일하지 않은 자도, 손님에게도 나눠줍니다. 만일 누가 내 것이라 자기 소유를 강하게 주장하면 그가 미쳤다고 여기고 그를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버립니다. 한 사람이 지배하려고 하는 것, 그가 더 많은 사람을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군가를 지배하고 또 누가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것은 인디언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디언 사회의 추장은 흔히 우리가 아는 그런 권력자가 아닙니다. 그가 권력을 갖는 것은 오직 말할 때뿐입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 말하는 사람이 바로 추장입니다. 과거의 신화,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누구도 남보다 못하거나 더 낫지도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옛이야기들을 들려줄 때뿐입니다. 오히려 추장은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눠줄 수 있는 넓은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나눠준 것으로 목에 힘을 주고 우쭐대며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들면 모든 부족은 그를 무시합니다. 그래도 그가 지배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아예 그 추장을 죽여 버린다고 합니다. 모두가 동등하다는 그들의 평등의식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지요.
과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예수를 접해들었던 한 인디언 추장의 말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제국을 혼동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음에 담아야할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는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족인 세네카족의 붉은 윗도리라는 이름의 추장입니다. 인디언들은 자기네 땅을 무력으로 침략하러 들어온 유럽의 백인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환영하고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그런 인디언들을 야만인이라고 무시하며 잔인하게 학대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붉은 윗도리는 그들이 전해준 예수의 복음을 접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소유하고,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일한 것에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 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박홍규 참고)
예수를 모르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몰랐던 인디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가까운 사회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인디언 사회를 멸절시켜버렸습니다. 세상의 속성은 하나님 나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비슷한 형태조차도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예수 없이 예수처럼 사는 역설적인 예들이 많습니다.
현재 효암학원이사장인 채현국 어른이 그런 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1960년대 아버지 채기엽 선생과 함께 탄광사업을 운영했습니다. 그 사업으로 그는 당시 전국 개인소득납부액으로 전국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부를 얻습니다. 그는 주변에 어려운 친구들을 넉넉한 인심으로 도왔다고 합니다. 집 없는 친구들은 집을 얻어주고, 또 당시 독재정권에 의해 해직을 당한 해직기자들의 집을 얻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자기의 재산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 줄 게 아니다." 결국 채현국 어른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자신의 몫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정리한 재산은 모두 종업원들에 나누어 줬다고 합니다.
방배추라는 이름을 아시나요? 그의 본명은 방동규입니다. 이 이름만으로는 잘 모르실 겁니다. 그렇다면 김두한과 시라소니는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 주먹하면 알아주던 전설적인 이름들이지요. 방배추는 그들을 잇는 전설의 주먹이라 불린 사나이였습니다. 남자들이 허세로 17대 1의 싸움을 말하는데 방배추가 17대 1로 싸웠다고 합니다. 방배추는 현재 80대 연세의 어르신입니다. 방배추 어른은 주먹으로도 세고, 사업 수완도 남달라서 서해화성이라는 회사의 대표도 지냈고, 살롱드방이라는 고급양장점도 운영하고, 노느메기밭라는 농장도 운영해서 큰돈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당시 학력이나 출신배경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던 시류와 달리, 직원들을 동등하게 대우해줬다고 합니다. 심지어 적게 일한 사람도 굶지 않도록 월급을 똑같이 나눠주다가 이런 그의 행태를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잡혀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 치아를 모두 잃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왜 안 벌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렇게 벌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정권에 야합을 한다든가, 비겁한 일을 한다든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한다든가 그렇게 해서 잘 살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가난하게 사는 게 행복하지.”
힘과 권력을 가진 자, 더 많은 부를 소유한 자가 지배하는 힘을 갖고 지배자가 되는 세상의 원리는 항상 그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해왔습니다. 심지어 그와 유사한 인디언 사회도 지배의 논리에 움직이던 서양의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에 저항합니다. 반대로 지배의 논리에 움직이는 세상의 나라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저항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항상 세상 나라가 이기고 세상의 방식이 더 좋아 보입니다. 남보다 더 높아지고, 남을 지배하려거나 아니면 지배받는 상태를 더 좋아하는, 그래서 더 많이 가지려하고 더 많이 쌓아두려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러한 속성이 득세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는 실패하고 뒤처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세상의 나라라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너무나 강하게 지배를 받기에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결국 예수님은 그러한 세상을 이기신 분이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렇게 세상과 반대되는 사랑과 섬김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바로 그 예수님을 따라 사랑과 섬김의 방식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