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집사님, 詩는 준비되셨나요?” 집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요즘 바빠서 생각만 하고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2주 전 성도들의 자작詩로 예배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두 분의 집사님께 공개적으로 詩 한 편씩을 준비해 주십사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중 한 분은 농사를 지으시고, 또 한 분은 사업을 하십니다. 성도들의 고백이 있는 詩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절대 부담을 드리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참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주가 지나고 2주가 되어도 농사일로 바쁘신 집사님은 저의 생각만큼 빨리 준비해 주지 못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詩 한 편이 그렇게 어려울까? 그냥 자신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인데...” 그리고 어제 집사님이 일하시는 고흥의 매실 밭을 찾아서 매실수확을 함께 해 드렸습니다. 저는 오전 한 나절만 도와드렸지만 집사님은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수확한 매실은 그날그날 순천 해룡 농협까지 운반하여 선별작업을 마쳐야 합니다. 저는 그 한 나절 매실을 따고 와서 지금도 뻐근합니다.
해봐야 아는 것이 있더군요. 부엌의 부지깽이도 일손을 돕는다는 이 바쁜 오뉴월에, 목사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책상에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있지만 농부와 사업가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늘 글자와 함께하는 목사에게 한 줄의 詩는 그 완성도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비교적 쉬운 작업이지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흙과 함께해야 하는 사람에게 한 줄의 詩 는 어쩌면 사치스런 관념놀이에 불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참 속없는 목사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편의 설교문을 그렇게 작성했는지도 모릅니다. 땀은 없고 정답만 있는 설교, 현장은 없고 이상만 즐비한 설교, 고백은 없고 강요만 있는 설교문은 바로 저의 서재에서 생겨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책 곰팡이가 피어있는 목사의 서재에서 너무도 쉽게 탄생하는 한편의 詩 보다 언어의 유희는 없지만, 삶으로 써내려간 집사님의 땀에 젖은 작업복을 진짜 詩로 받으실 것입니다. 저는 참 속없는 목사입니다. 이 바쁜 철에 무슨 詩 나부랭이입니까? 이제 관념적 이상주의에 빠진 속없는 목사의 강요에 맞서서 글이 아닌 삶으로 詩를 쓰십시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받으시는 언어입니다. 우리 교인들... 속없는 목사 땜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첫댓글 약간 수정을 하고 고백도 함께 넣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