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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아름다운 행위는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보살은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보시란 보살의 생활이다. 사람들의 생활이다. 그 삶이 색, 성, 향, 미, 촉, 법, 그리고 어디에라도 안주하거나 집착한다면 이미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보살의 삶이 아니다,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다. 안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온 우주를 다 채우고도 남는다. 온 법계를 다 채우고도 남는다. 아니 그러한 삶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며, 세계적 삶, 우주적 삶이다. 반야적인 삶이다.
제4. 묘행무주분(제사 집착없는 보시)
부차 수보리 보살 어법응무소주 행어보시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없이 보시해야 한다.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말하자면 형색에 집착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하되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 상하 허공 가사량 부. 불야세존.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 上下 虛空 可思量 不. 不也世尊.
수보리여! 남서북방, 사이사이, 위쪽, 아래 위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수보리여!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여! 보살은 반드시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한다.“
第四 妙行無住分
제사 묘행무주분
第四 妙行無住分
제사 묘행무주분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니라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須菩提야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라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富德을 不可思量이니라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不也니이다 世尊하
불야 세존
須菩提야 南西北方과 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不也니이다 世尊하
불야 세존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하는 福德도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第四 妙行無住分
제4 묘행무주분
묘행무주(妙行無住)라,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나는 금강경의 삼십이 분 중에 제목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묘행무주, 이 말을 제일 좋아합니다. 요걸 이제 해석하면요, 아름다울· 묘(妙)자 아닙니까? 아름다운 행위,
‘그 사람 멋지네, 멋져. 아 그 사람 멋져. ’뭐가 멋지냐?
묘행(妙行), 아름다운 행위, 아름다운 행위는 무주다 이거야.
집착이 없다, 머물· 주(住)자 집착할· 착(着)자를 붙여서 쓰면 더 드러납니다.
주착(住着)이 없다. 머물면 집착해요.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머물면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고.
그래서 주착(住着)이란 말이 많이 있어요. 불교에는.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일을 했던지 간에, 자기가 어떤 일을 했던지 간에 내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해서 거기에 조금이라도 미련을 갖는다든지, 뭐 생색을 낸다든지, 무슨 자기표현을 하려고 한다든지, 그러면 그건 이제 주(住)야.
아름답지가 못해. 뭔가 어디 끈적끈적하고 여름날 땀을 잔뜩 흘리고 신에 이렇게 먼지 속을 한 시간씩 이렇게 걸어 다니면서, 그 시내의 매연도 들이키고 땀까지 났고 이래가지고 그냥 얼른 목욕하고 싶은 그런 상태.
우리는 대개 그렇게 살아요. 그런 상태로 사는 거야.
뭘 하나 좋은 일했다. 아니, 어떤 일을 했던 간에 그런 상태로 사는 거야.
멋이 없죠. 그건.
집착 없이 깨~끗하게, 아~무 그냥 어떤 생색도 안 내고 그렇게 하면 참 그 사람은 멋있어 보이죠.
예를 들어서, 어느 신도가 아주 대시주야. 그런데 와서 따로 주지실 찾지도 안 해.
어떤 사람들은 오기만 하면 주지실에 떡 앉아가지고, 주지스님께 차 얻어먹으려 하고, 밥도 거기까지 갖다 줬으면 하는 그런 신도도 많아요. 그 참, 여름날 땀 잔뜩 흘리는데 매연 뒤집어쓰는 거와 같지, 그건.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 이 사람은 언제 왔다 갔는지, 언제 보이긴 보이는데 법회때 보니까 보이는데 언제 왔다 갔는지 몰라. 항상 보통 대중들하고, 일반 신도들 하고, 똑 같이 생활하고, 똑 같이 식사하고, 똑 같이 있다가 어느새 사라졌는지 몰라. 그런데 어마어마한 시주를 했어, 그전에. 야~! 정말 존경스럽죠. 얼마나 멋져 보입니까?
그걸 묘행무주라고 합니다. 참 좋은 낱말입니다. 묘행무주(妙行無住)!
第四 妙行無住分
제사 묘행무주분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베푸는 문제가 나오잖아요.
보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 불자의 일상생활입니다. 다반사예요, 그냥.
숨 쉬고 그냥 밥 먹고 하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금강경이 통용될 무렵에 보시라고 하는 것은 너무 우리 불자들에게 일반화 되어 있어요. 뭐 육바라밀 중에 하나다, 뭐 그런 정도가 아니고, 당연히 베푸는 삶이야. 불자는 무조건 베푸는 삶이라.
승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아무 예고도 없이 보시가 탁 나와 버리잖아요.
너무 평이한 일상사니까.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응무소주 행어보시
무소주(無所住),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하느니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니라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須菩提야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라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富德을 不可思量이니라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所謂不住色 布施 不主聲香味觸法 布施니라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所謂不住色布施(소위부주색보시)며
색에 머물지도 말고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
또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
須菩提야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라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수보리야!
이와 같이 보시해서 상에 머물지 말지니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富德을 不可思量이니라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느니라.
왜냐? 만약 보살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其福德(기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라 그랬어요.
상에 머물지 아니하고서 보시를 할 것 같으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다.
그렇죠. 아까 예를 들었던 그 신도가 언제 왔다 갔는지, 법회때는 잠깐 보이는 듯 했는데, 그 뭐 좋은 자리에 앉는 것도 아니고 저 구석에, 좋은 자리 다 양보하고,
그리고 절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냥 돈 한 보따리씩 갖다 놓고 가버리고.(일동 웃음)
내가 갖다 놨다 소리도 안 해. 주지스님은 다 알아. 다 안다고.
그 멋있잖아요? 묘행무주 아닙니까? 묘행무주!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칭송이 두고 두고, 주지가 몇 번 바뀌어도 그 사람 칭송하는 거야.
뭐 그냥 복덕을, 우리 아주 그냥 가볍게 우리가 해석을 하면은,
其福德(기복덕)은 不可思量(불가사량)다!
그 사람에 대한 칭찬은 끝도 없을 거 아닙니까?
뭐 깊은 뜻은 여러분들이 다 알고 계시니까.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不也니이다 世尊하
불야 세존
須菩提야 南西北方과 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不也니이다 世尊하
불야 세존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하는 福德도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쪽 허공을 모두 상상할 수 있는가?
不也니이다 世尊하
불야 세존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야 南西北方과 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수보리야! 남쪽·서쪽·북쪽과 네 간방과 위쪽과 아래쪽의 허공을 모두 상상할 수 있는가?
不也니이다 世尊하
불야 세존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읽는 것도 그래 읽어야 돼요.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요렇게 딱 잘라 읽어야 됩니다.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하는 福德도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야! 보살이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福德)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상상할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하는 福德(복덕)도,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 상에 머물지 않고 생색내지 않고 하는 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
菩薩(보살)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수보리야 !
보살이 다만 응당히 그 가르친 바 대로, 가르친 바 대로 머물지니라!
금강경이 처음에 머무는 것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항복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항복받는 것부터 대답이 나오고, 머무는 게 두 번째 나왔어요.
항복받는 것은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말하자면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항복받는 내용이거든요,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항복받는 거.
그 다음에 뜻은 일맥상통하지만 머문다는 이야기가 두 번째로 이렇게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이 중요한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전부 ‘베푸는 삶’이다, ‘보시의 삶’이다.
그거 알아야 돼요, 우리는. ‘우리 불자의 삶은 무조건 베푸는 삶’이다.
특별한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 마음 내서 하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
그저 베푸는 삶, 베푸는 삶이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여기 아무 예고도 없이 그냥 보시가 턱 나오는 거예요.
이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의 상황이, 불교적 상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알아야 돼요. 그게 이제 우리는 뭐 특별한 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이게 아직도 우리가 금강경이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되어 있으면서, 그리고 여기에 뭐 보살행, 보살행이 결여돼 있다, 금강경이 보살행이 결여돼 있다, 이런 말을 더러 해요, 보면은.
물론 보살행이 무슨 뭐 그런 용어가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닌데, 이미 보살행은 우리의 의무야. 일상사야!
그러니까 보시가 그냥 예고도 없이 툭 튀어 나오는 거예요.
보살행하고, 보시하고, 보살행 중에서 베푸는 것, 이건 그냥 일상사야. 우리 호흡하듯이 하는 일로 되어 있어요, 우리 불자들에게는.
그거 우리가 꼭 기억해야 돼요. 정말 이 금강경을 통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게 ‘아! 베푸는 일, 보시하는 일’, 이것은
그냥 일상사지 특별한 일이 절대 아니란 사실.
그래서 금강경이 여기에 보살행이란 말이 없어도 보살행은 당연한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런 베푸는 이야기가 이렇게 나왔다는 거, 그걸 좀 더 깊이 우리가 인식해야 되고, 죄도 없는 신도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특정인을 들먹여서 하는 건 아니니까, 예컨대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거죠.
오자마자 주지실 떠억 차지하고 있으면서 신도들이 축원기(祝願記) 찾으러 오면 지가 뭐냥 그런 사람 하도 많이 봐서 하는 말인데, 정말 이것은 신도들에게 해당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 문제야, 우리들 문제. 여기 있는 우리들 문제.
그래서 이제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정말 금강경이 새롭게 감동적으로 이렇게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菩薩(보살)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끄트머리에 그랬잖아요.
우리 불자들은 다만 응당히 가르친 것과 ,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라, 살라, 이말이여. 내가 가르친 대로 살아라!
어떻게? 무주로 살라!
사는 것 없이 살라!
주함이 없이 살라!
그것은 아름다운 행위다!, 멋지다 말이야, 묘행이다, 이말이야.
결론이 그것이 묘행이다. 하, 그 사람 참 멋쟁이야, 아, 멋쟁이.
우리 잘 쓰는 말이지. 멋쟁이가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어.
금강경 묘행무주에 있어. 무슨 잘 입고 뽐내고 무슨 그게 아니죠.
불교의 멋쟁이 차원은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여기 얼마나 근사하게 표현해 놨습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일상에서 잘 쓰는 그 용어들, 이런 것들을 옛~날 이거 2600년전 고전, 부처님 가르치면서 얼마든지 건져낼 수가 있어요.
우리가 좀 다른 시각으로 보면은 이 고전속에서 얼마든지 현대적인 가치를 건져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참, 뜻이 무궁무진한 거예요.
우리 지혜가 부족해서 보다 더 참신하고 깊은 의미를 더 개발해 내지 못하는 게 이게 한스러울 뿐이지 사실은 이 가르침 속에 뭐 아주 옛날 부처님 말씀, 고리타분한 것,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아주 초현대적인 그런 가르침이 이 속에 얼마든지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새롭게 우리가 인식하고, 그야말로 나무 팔러 왔는데 누구처럼 다이아몬드를 한 짐 짊어지고 돌아가는 그런 그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의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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