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 천관녀 설화 - 두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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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천관녀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암자를 짓고 숨어살면서 김유신의 성공을 빌었다. 삼국을 통일하고 경주로 돌아가던 김유신이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경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천관녀는 자기는 천관보살의 화신으로 김유신이 큰 일을 할 사람임을 알고 기생이 되어 시험했으나 이제 자기의 일도 끝났고 두 사람의 인연도 끝났다면서 거절했다. 김유신이 고집을 꺾지 않자 주문을 외워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를 타고 사라지자 김유신이 말을 몰아 뒤를 쫓았는데 천관산에 와서 놓치고 말았다.
이래서 천관산에는 천관보살이 산다는 것이며, 신라 때부터 천관보살 신앙의 터전이 되어왔다. 신라 진흥왕 때 통령(通靈)화상이 천관사를 세웠다고 전해지나 지금 건물은 1963년 장한택 스님이 극락보전을 세워 천관보살을 모셨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되었을 삼층석탑은 보물 제795호로 지정돼 있다.( -- 한국의 산하에서 어느 님을 산행기에서 펌)
■다른 분의 천관녀에 관계된 글을 싣습니다.
장흥문화 제 24호 독후감-‘지명소고’를 읽고 나서 <박형상 변호사>
김유신의 천관녀(天官女)는 장흥의 천관산(天冠山)과 무관하다. 대덕 연동의 왕비 사당은 통일 신라 말 장보고 터전과 관련 있다. 제275호 2003년 3월 27일 목요일
1. 장흥 천관산엔 천관녀가 없다.!
장흥지명고찰에 남다른 열의를 쏟고계신 계사 위성호 선생님의 노력에 늘 공감하고 있음을 먼저 밝힌다. 원감국사 충지의 보명탑을 장흥사람들에게 알려준 공로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번 '지명소고'에서 비록 구전전설의 소개일지언정「김유신의 천관녀」를 「천관산의 천관보살」에 연결시킨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그 잘못되었음을 짚어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모두의 고향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년전 언제부턴가 우리 장흥땅이나 천관산을 두고서 김유신 천관녀를 천관산 천관사에 짝지우는 글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김유신의 천관녀는 "천(天)관 지(地)관"할때의 제사올리는 천관(天官)이고, 장흥 천관산 천관사의 천관은 "천관보살신앙"의 천관(天冠)일뿐인데, 어찌하여 천관(天官)을 천관(天冠)에 빗대는지? 모름지기「전설의 역구전」그 견강부회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천관산이 낳은 사람들중 가장 박학다식했고 천관6대동천을 비롯하여 193곳의 내력을 주밀하게 망라하였던 존재 위백규선생(1727-1798)의 「지제지(1779)」에도 김유신의 천관녀는 일언반구조차 없었던터인데, 왜들 그다지도 쉽게 경주땅 천관녀를 끌어오는지? 경주쪽 사적제311호 천관(天官)사지에서는 "天"자 기와명문파편까지 발견되었다.
이른바 천관산 천관녀 전설이 「1975년도판 장흥군향토지」에 등장하지아니했음은 불문가지· 당연지사다. (필자의 글, 장흥신문 2000.2.29자 "천관· 천관산·천 관사" 참조)
천관녀가 없다한들 장흥 천관산이 외롭고 아쉬울리는 없다.
천관녀가 있다한들 장흥 천관사가 더 영예로울 것도 없다.
2. 그래도 양천허씨 허연지는 아니다!
계사선생께서는 필자가 제시한 '장보고의 딸 - 왕비사당설'을 염두에 두고서 ① 원나라황제 후궁설, ② 고려왕 궁녀설, ③ 백제의자왕 태자빈설, ④ 천관산불적 연못설등을 취합하셨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위 ①, ②, ③, ④전설자체도 「1996. 12. 판 대덕읍지」테두리안에서의 역구전적 상상과 지레짐작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양천허씨 허연지(蓮池)처녀"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도 없다. 결국 왕비사당의 연원과 유래는 합리적인 해석여하로 귀결될 일이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장흥읍지 정묘지(1747)」에 기재된 "연지각 호전(胡奠 尊) 알(아)씨상"을 거론하면서도 "호전(胡奠)"부분을 성씨를 보고서 한어대사전쪽에서 찾고있는데, 장보고 딸의 입비문제가 신라왕실에서 좌절된 이유가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인, 해도인"의 딸이라는 사정때문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호(胡)전(奠,尊) 알(아)씨"와 "중국 무녕군소장을 하다가 건너온 장보고"와의 인연의 끈, 그 기호학적 암호를 못 풀어낼 것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胡"자 뒤에 장보고가 "胡人"으로 숨어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계사선생이 지적한 것처럼 "… 하나의 설화일지언정 역사(歷史, 正史)라는 거울에 비춰 우리들의 상식의 폭을 넓히는 길"에 해당된다. 천관산남쪽 대덕사람들이 왜 "석전(釋奠)대제"를 모시듯 "호전(胡奠)아씨- 존경스런 호인 장보고의 딸"을 이때까지 고이 모셔(奠, 尊)왔겠는가. 또한 선생께서 언급한
「천인」이「천관산기(1240)」에서 "… 신라 신호(무)왕이 왕자때 견책을 받고서 천관산남쪽 완도로 귀양왔다 … 流山南莞島"라고 기록하고 있듯 천관산을 기준해서 그 남쪽에 완도가 있을 뿐이다. 또「천인」이 속했던
「강진만덕산 백련결사」라함은 "천태종"에 "법화경"이 어우러진 정토종파일진대, 장보고의 불교신앙처도 곧「법화원」 아니었던가. (후대일지언정 천인이 완도에 법화사를 세운바도 있다.)
한편 계사선생이 취하는 "허연지(蓮池)처녀"설의 양천허씨에 대해 살펴보자.
양천허씨에서의 "양천"은 1310년경, 고려 충선왕때에서야 비로소 "경기도 앙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양천허씨는 백제멸망기의 왕족성씨나 8대성씨에 속할수 조차 없다. 여조시대 어느때든 양천허씨집안이 장흥땅을 "전설의 고향"쯤으로 만들만하게 유별난 활동을 했던 적도 없다. 그들과 "호전아씨"와의 연결고리도 달리 없다. 또한 "허연지처녀" 한사람을 놓고서 같은「장흥읍지 정묘지」안에서 "연지(燕支)" "연지(蓮池)" "호전아씨"로 나누어 표기할수도 없는 일.
필자의 "장보고의 딸, 왕비사당설"은 장흥땅 남쪽, 천관산의 남녘지방이 남방문화의 도입처라는 특수성을 전제한다.「천관산 아육왕탑」
설화(조선초「석보상절」에도 등장한다.)도 해남 미황사 영광 불갑사와 함께 남전불교의 해로유입현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천관산 천관보살신앙」도 남전불교가 전파되는 거점경로에서 생성되었을 것이다.
「강진땅 청자문화 - 기실 장흥반도의 도자문화」라는 것도 남방무역경로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 장흥땅 임씨 최씨등 지방호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도 장보고시대의 해상세력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하다.
지난번 장흥신문 2002.8.10자 "시론, 잃어버린땅· 잃어버린 왕비-대덕 연동 왕비사당"에서 "유치 보림사 철불을 시주조성한 「무주 장사(長沙)부수 김언경」에서의「장사」지방은 통설이 말하는 전북고창쪽이 아니라 우리 장흥 천관산남쪽 고읍터이며, 이는 장보고 터전과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했었는데, 장흥땅에 귀양왔다가 그 인연으로 예양서원에 배향된 "추강 남효온(1454- 1492)"의 "장흥우음21수"에서도 장흥고칭으로서「장사(長沙)」지명이 등장하고「(천)관산」도 나타난다.
다시금 제안드린다. 부디「대덕 연동 왕비사당」앞에서 장흥사람들의 온 지혜를 결집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서재필사당'을 만들어낸 보성사람들이나 '왕인사당'을 만들어둔 영암사람들의 어거지와는 한참 구별될 일이다. 그런데 지금이야 완도사람들도 완도장도에 남겨진 흔적을 장보고시대의 유적으로 돌려보고 있으나 얼마전까지만해도 그들은 장도사당에 "삼별초시대의 송징장군"을 모셔왔었다. 또한 계사선생께서는 완도장도의 일부유적만으로도 장보고시대의 현장증빙으로 충분한양 그 사진까지 소개하고 있으나, 오히려 학계의 전문가들은 완도장도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사적이 장보고시대의 성가만큼에 명실상부하지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 누구라도 완도장도를 한번 보게되는 순간 그 코딱지만하게 작은 섬안에서 수많은 장졸·마필들이 함께 살수 없음을 직감할 것이다.
우리 대덕(대흥)땅의 여러 지명 - 만가촌, 도청, 거정, 어등산, 도화동, 좌명대, 모성래, 연지대, 만리장성(마류장성) 등등은 인근의 다른 면들에서는 함부로 볼 수 없는 아주 수상(?)쩍고 독특한 것들이다. 이런 지명들은「장흥읍지 정묘지」보다 훨씬 이전, 즉 장보고시대까지도 넉넉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여긴다. "도청"지명에 대하여도 계사선생은「장흥읍지 정묘지」를 내세우며 이때부터 등장한 것이라 추측하시지만,「장흥읍지 정묘지」에 앞서 간행되어 서로 대조해 볼 만한, 또다른 지지읍지도 없는 바에야 그런식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논법이라면「장흥읍지 정묘지」에 처음 등장하는 "연지대제, 연지각(호전아씨) 석상"를 두고서도 이때서야 나타났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필자로서도 "장보고의 딸 - 왕비사당설" 만이 마냥 옳다고 우겨대고자함은 아니다. 다만 장흥대덕땅 천관남녘의 이모저모를 한번쯤 꼼꼼히 되살펴보면 그 역사적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는 굳게 믿는다.
정남진 장흥정남진 장흥 네이버 까페에서 펌
김유신과 천관녀
출전: '삼국유사', 권1, 기이, 김유신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에 고구려 첩자 백석(白石)이라는 자의 꼬임에 빠졌는데, 낭자로 변한 호국신(護國神)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는 내용의 이야기. 또 천관녀(天官女)라는 아름다운 여인의 꾐에 빠져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뒤로 그녀를 멀리 했는데, 어느 날 술에 취했을 때 말이 평소의 습관대로 그녀의 집으로 가자 아끼던 명마(名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은 가야 출신을 극복하고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사람이다. 또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게 설화적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김유신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대동운부군옥' 등에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열전(列傳)에 상세히 김유신의 출생부터 나와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호국신의 도움을 받는 이야기와 김춘추와의 교분,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천관(天官)이란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적고 있다. 특히 전자 두 개의 문헌은 영웅으로서의 유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수이전'의 기록인데 [죽통미녀(竹筒美女)]에서는 대나무통에 미녀를 넣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김유신이 당황하는 이야기이며, [노옹화구(老翁化狗)]는 변신술에 능한 노인을 김유신이 만나는 이야기이다.
고전소설에 [김유신전]이 전하고 현대소설로는 이동규가 [김유신]을 썼다. 한편 천관(天官)과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황순원에 의해 [차라리 내 목을]이라는 말[馬]의 독백체 소설로 쓰여졌다.
[참고 문헌]
김진영(1978), "문헌소재 김유신 설화고", '한국 소설문학의 탐구', 일조각.
김창룡(1980), "천관설화의 소설적 변모", '연세어문학'13,연세대 국문과.
http://www.ahg21.com.ne.kr/%B1%E8%C0%AF%BD%C5%20%BC%B3%C8%AD.htm 에서 펌
[출처] 천관산 천관녀 설화 - 두 견해|작성자 공연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