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旅通信 4 話]
. 백 승 돈
<第 4話>
카트만두에서 안나푸르나 트래킹의 거점도시인 포카라로 이동한다.
포카라는 네팔 제 2의 도시로 청결하고 친환경 이미지가 있는 관광지다.
카트만두에서 200km 거리인데 국내선 비행기로는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육로 버스로는 8~9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은 도로 사정이 지극히 열악하기 때문이다.
비행기표 값은 우리 돈 6~7만원 정도 이고 버스 차비는 차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만원 안팍이면 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비행기표 값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여행을 쉽고 편하게만 하려는 것은 내 '스타이 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 산야 풍광과 식생도 보고 주민이 촌락을 이루고 농사짓고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여행의 맛이기도 하다.
내가 이 나이에 그런 게 무슨 관심거리가 되랴 할 수도 있겠지만 사무엘 울먼이 말 하길 호기심을 잃으면 금방 늙는다고 하지 않던가!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가는 버스는 2007년에 타 본후 17년 만에 다시 타는 것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도로 사정은 나아진 게 별로 없는 듯 하다.
노면이 노후 되고 파손되어 버스의 진동이 심해서 차멀미 라도 한다면 고역이겠지만 나는 그런 문제는 없다.
도로 폭도 왕복 2차선 인데 어쩌다 대형 화물트럭과 대형버스가 만나면 몸을 사려 스칠 듯 말듯 조심 조심해서 지나간다.
차량이 밀리는 구간에서는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데 가는 시간이나 서는 시간이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니 200km 거리를 가는데 8~ 9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도중에 변변한 휴게소 도 없어 간이 음식점이 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볼 일을 보게 한다.
네팔 정부는 인프라 구축 등 경제나 산업개발 정책이 있는지 궁금하다.
수도 카트만두와 제 2도시 포 카라를 잇는 도로는 이를테면 국토의 근간이 되는 주축 도로 일 진데, 고속도로는 못 만들어도 도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정 비는 해놔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해 호텔에서도 전깃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정전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좌파 들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업적을 폄하 하면서 박정희가 아니어도 그런 개발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마치 세월만 가면 경제는 저절로 발전한다는 투로 말을 한다.
아마 네팔에서도 박정희나 이광요, 마하티르, 등소평 같은 인물이 낫다면 네팔이 '요모양 요꼴'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第 5話>
전 세계 14개의 8,000m 급 고산 중 히말라야에는 최고봉인 8,848m의 에베레스트를 비롯해서 10개의 고봉이 있다고 한다.
그 중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등 서너개의 고봉을 오르는 거점이 포카라다.
포카라에는 Phewa 라는 호수가 있는데 이는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 의 설산에서 녹아 내린 물이 뫃인 것이라고 한다.
湖畔은 경관도 좋아서 호텔 레스토랑 카페 상점 등 상업 위락 시설이 밀집되어 있어서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또한 고산 등반 산악인 들과 트레커 들도 결전을 앞두고 휴식을 취하면서 심신을 재충전하기 좋은 곳이다.
포카라에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Wind Fall 이라는 게스트하우스가 페와 호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안나 프루나 트래킹을 하려는 한국인 들의 집합 장소라고 알려져있다.
거기서 트레킹을 위한 정보와 자문을 얻고 필요수속 대행과 장구와 복장 지참물품 등을 빌려준다고 한다. 나도 미리 그에게 연락을 취해 방문 일정을 말하고 그 게스트하우스에 투숙하려 했으나 이미 예약이 다 찼다고 난색을 표한다. 그러더라도 일단 찾아가서 만나 사정하면 무슨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고 장거리 버스에서 내려 곧바로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가서 사장을 만났다.
귀하가 한국에서 트레 커들 사이에 인기가 높고 칭송도 자자하다는 둥, 친 지가 꼭 가보라고 해서 찾아왔다는 둥 아 부성 발언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다.
이야기 끝에 내 나이를 알게 된 그는 놀라워하는 눈치다. 아마 내 또래의 늙은이가 트래킹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례가 별로 없는듯 하다.
내가 2007년에 이곳에 와서 해리라는 젊은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그의 주선으로 안나 프루나 트레킹을 했다는 이야길 하니 그도 해 리를 잘 안다면서 지금도 게스트하우스를 하니
그리로 가 보라고 한다.
해리와 전화 통화가 되어 그의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데릴러 와서 그의 게스트하우스에 투숙하게 되었다.
Harry에 대한 추억을 되돌이켜본다. 2007년 에 포카라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많은 호객꾼 들이 접근해 자기 숙소로 가자고 한다. 첫 마디가 "곤니찌와' 일본 사람으로 여긴 듯하다. 못 들은척 하면 곧 '니하오마' 중국말로 한다. 그래도 대꾸하지 않으면 그 때 가서야 "아-냐-새-여" 해서
그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그의 숙소로 갔는데 그가 Harry였다.
당시 그는 30대 초의 청년이었는데 이미 7년간 한국 파주에 있는 가구 제조업체에서 일해 돈을 좀 벌어갖고 와 게스트 하우스를 차렸다고 했다.
우리 말도 곧 잘 해 내게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때 이미 60대 중후반 인 나는 귀가 간질러웠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당시 대여섯 살 짜리 어린애가 있는 걸 봤는데 그가 이미 23세의 대학생이 되어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되었다고 한다.
해리는 새로 집을 구입해 임대했던 건물의 게스트하우스를 옮겨와 '신장 이전개업'을 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해리 는 풋풋한 훈남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중후한 중장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