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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대쥬신을 찾아서’는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연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중국 측의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여러 문헌의 기록을 통해 여지없이 파헤쳐 줄 것입니다.
20여회에 걸쳐 계속될 김 교수의 기획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올바른 사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운회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여러분들과 먼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지난 해 ‘삼국지 바로 읽기’에서
여러분들이 보여준 깊은 관심과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삼국지 바로 읽기’를 연재할 당시 저는 ‘쥬신’에
관해 간략히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충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의혹이 증폭되고
논쟁이 끝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언제 기회가 되면 ‘쥬신’에 대해 다시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
했지요.
그런데 그 일이 빨리 온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올해를 넘기면 다시 이 이야기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일에 뛰어든 직접적인 이유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동북공정에 대한 대안(代案)으로
① 기존의 사학계가 추진하는 ‘고구려 지키기’,
② ‘요동사(遼東史)’ 개념[요동의 역사를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닌 제3의 영역으로 보려는 시도],
③ ‘쥬신’의 관계사(關係史)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쥬신’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17세기까지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미 ‘고구려 지키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도임을 ‘삼국지 바로 읽기’를 통해서 제시한 바 있습니다.
1천4백여 년 전에 없어진 나라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한다거나, 조공-책봉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한들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설령 발해의 역사를 지킨다 해도 이미 1천 년 전에 없어진 나라이니 그 또한 동북
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1천 년 전의 국가의 토지대장이 있다한들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할 무력이 있습니까?
‘요동사’ 개념도 의미가 없는 시도입니다. 요동은 우리 민족의 주요 근거지인데 이것을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분리한다니 말이 안 되지요. ‘요동사’ 개념에서 말하는 한국이라는 것은 삼한(三韓)의 개념을 근거로 하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중국의 사서(史書)만을 중심으로 개념화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라는 개념은 한반도 남단에만 있었던 삼한(三韓)을 포함하여 북방계 유목민의 천손사상(天孫思想)을 나타
내는 용어 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충분히 밝혀 나가겠습니다.
‘요동사’ 개념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민족사의 진원지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은 모두 요동을 근거지로 하거나 요동을 주요 세력권으로 한 국가들입니다.
특히 백제는 남부여(南夫餘)라고 하기도 하여 충실한 부여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요동의 국가라고 한다면 상식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이제 쥬신의 관계사로 동북아시아 역사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쥬신의 관계사로 보는 동북아의 역사는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못합니다.
다만 ‘삼국지 바로 읽기’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정리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실적으로 다시 연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 동안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동향을 보면서, 학문적인 위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뿌리’가 근본적으로 요동
치고 있는 상황이 왔음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고민은 저 힘만으로 이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사(古代史)의 영역은
어쩌면 범위도 방대하여 저 같은 ‘아웃사이더’가 다룬다는 것도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아웃사이더’이므로 더욱 편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바둑도 훈수꾼에게 묘수(妙手)가 더 잘 보이는 것처럼 때로는 ‘아웃사이더’의
눈이 정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앞으로 연재할 글은 ‘삼국지 바로 읽기’처럼 재미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쥬신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은 우리의 참모습을 제대로 아는 것이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과 다음과 같은 항목을 하나하나 살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제가 ‘삼국지 바로 읽기’를 연재했던 글과 약간은 중복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사실상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먼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원류인 예맥(濊貊)·숙신(肅愼)을 검토하고 이들과 말갈(靺鞨)의 관계는 물론 알타이 신화, 쥬신의
호수 고구려, 몽골·백제·일본·신라 등의 국가간 관계를 쥬신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때로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쥬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만 된다면 그것으로 제 역할은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다음의 일은 관련 전문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쥬신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좁은 한반도에서 안주하면서 같은 쥬신 사람들을 서로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현재는 여러 가지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원수(怨讐)처럼 지내더라도 그 ‘뿌리’를
알고 화해의 장으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만이 쥬신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합니다.
‘삼국지 바로읽기’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시피 형제간 동족간의 싸움이 더욱 처절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죠. 부여와 고구려를 보세요.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한국전쟁의 양상을 보세요.
아마도 한국전쟁만큼 처절하고 잔인하게 형제와 자매를 살육한 다른 예는 인간의 역사에서는 없을 것입니다.
부여는 철저히 중국을 지지하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쥬신의 뿌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 화해할 필요는 물론 없겠지만 지금처럼 쥬신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쥬신을 재발견
(再發見)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학문은 정치에 종속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변하는데, 그 말 자체도 정치적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다 정치싸움이거든요.
저는 정말 사람들이 ‘진리(眞理)’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엔 세속(世俗)에는 세속의
진리가 따로 있고, 사상과 종교에는 그 나름의 진리가 따로 있었습니다. 진리도 각각의 차원(dimension)의 문제
지요.
제가 하는 일은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에 이르는 어떤 민족적인 ‘집단 무의식’과 그들의 ‘민족적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과제입니다.
자, 다시 길을 가 봅시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뿌리를 찾아서
들어가는 글
① “1904년 10월 나는 우연히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한국의 학부고문(學部顧問)으로 부임하지 않겠느냐는
교섭을 받았다. 나는 홀로 깊이 생각했다. 이 무슨 인연인가?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에 보답[應報]할 좋은
기회[好機]가 열린 것 같다.
신명(身命)을 걸고 맡기로 마음을 먹고 상월(霜月)의 차가운 바람[寒風]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갔다.”
-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 -
② “상고시대 일본의 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 미즈노 유우(水野祐) -
③ “나라(奈良)는 야마토(大和)의 지명. 도읍으로 유명하다. 나라는 한국어에서 국가라는 뜻이므로 상고시대에
이 고장을 점거하여 살던 한국 출신의 이즈모족[出雲族]이 쓴 이름이다.”
- 마쓰오까 시즈오(松岡靜雄) -
④ “황국진출(皇國進出)의 대방향을 정립하고 독립할거(獨立割據)할 기분을 가진 제번(諸蕃)의 무사(武士)들의
병력을 한국 정벌[정한(征韓)]에 동원함으로써 무사들의 눈을 해외로 돌릴 수 있다. … 해군과 육군의 제 기술을
실질적으로 급속히 신장시켜야 하는데 이는 정한(征韓)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 정한(征韓)으로 다른 날 황국
(皇國)의 흥기(興起)와 만세(萬世)를 보장할 수 있다. … 속히 방향을 정하고 사절을 조선에 보내어 그들의 무례
함을 책하고 만일 복종하지 않을 때는 죄를 열거, 조선을 정벌하고 크게 일본의 위신을 신장할 것을 바란다.”
- 기또 다까요시(木戶孝允) -
⑤ “5세기 후반 유적인 큐슈 다마나(玉名)시 후나야마(船山) 고분 주변에서 무밭을 갈던 마을 아주머니에게 내가
한국의 전주(全州)에서 왔다고 하자 그 아주머니는 ‘고향사람이 왔다’며 큰 무 하나를 통째로 밭에서 뽑아 주었다.”
- 일본을 방문한 어느 한국 선생님의 말(『조선일보』2004.12.11) -
(1) 천세(千歲)의 문은(文恩)
사람들은 저마다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중국이나 미국, 일본의 시각에서
우리를 이야기합니다. 세계화(Globalization)가 중요한 이 시대에 ‘뿌리’니 ‘민족’이니 하는 말들이 무어 중요한
말일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 류의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 국민들이 하는 말은 아니지요.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한족(漢族)이라는 거의 불변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거대한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모택동(毛澤東)의 말처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사람도 한족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어(漢語), 즉 중국어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학문적인 ‘주변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현실성의 문제이
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세계 최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인 나라에서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도와주는 이론으로
무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나중에 한반도가 중국의 일개 주나 성(省)으로 전락하여 ‘한성(韓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면 그들은 아마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뿌리에 대한 얘기는 가까이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국풍(國風)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이 때 나온 말들 가운데 “공자(孔子)는 한국인(韓國人)”이라든가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가
중국의 장안에 있었다.”라든가 십제(十濟) 또는 비류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저는
이 같은 생각들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단고기』보다는 린유탕(林語堂) 선생의 차분한 에세이
집에 더 관심이 있었지요.
당시 한국은 신군부(新軍府) 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대학가는 시대착오적인 주체사상파(主體思想派 : 북한의 주체
사상을 신봉하는 집단)가 학내를 점거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제게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우리 뿌리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현실을 호도하는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한국 근대사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과거 조선의 교육 식민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한국사가(韓國
史家)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가 한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직접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04년 10월 나는 우연히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한국의 학부고문(學部顧問)으로 부임하지 않겠느냐는 교섭을
받았다. 나는 홀로 깊이 생각했다. 이 무슨 인연인가?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에 보답[應報]할 좋은 기회[好機]가
열린 것 같다. 신명(身命)을 걸고 맡기로 마음을 먹고 상월(霜月)의 차가운 바람[寒風]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갔다
(幣原坦,「千歲の文恩」『朝鮮學會會報』1950년 4월호).”
여기서 시데하라 히로시가 말하는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족이며 틈만 나면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민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글을 읽으니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일단 과거 백제의 대학자인 왕인(王仁)과 아직기
(阿直岐)가 학문을 전수한 이래 지속적으로 문화적인 관계를 가져왔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2) 대쥬신 제국사
대학 생활 당시 우리는 우스개 소리로 일본(Japan)은 거꾸로 쓰면 Napaj가 되어 “나빠유”, 즉 ‘나쁜 나라’라는
의미의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 속에는 일본에 대한 경멸과 저주를 담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어를 배우면서 더욱 놀라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일본어와 한국어는 단어만 다를 뿐 어순이나 원리가
거의 똑같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제게는 긴 세월 동안 일본은 ‘원수(怨讐)의 나라’, ‘강도의 나라’였는데
어떻게 한국과 일본의 말이 이토록 닮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한문(漢文)을 공부해보면 한문은 영어(English)
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한국이나 일본인보다 영어를 잘하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두 문자에 관심이 많아서 ‘서동요(薯童謠)’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처용가(處容歌)’ ‘제망
매가(祭亡妹歌)’등의 향가(鄕歌)들을 스스로 번역해 본 경험이 있는데 제가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어가 과거
우리의 고대문자인 이두(吏讀) 문자와 완전히 같은 형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크게 놀랐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어의 ‘하다’는 ‘爲る’ 또는 ‘する’인데 우리말로 한다면 ‘爲る’는 ‘爲다’가 되고 ‘する’는 ‘하다’가 되는
식입니다. 과거에 우리말도 ‘하니’를 ‘爲니’와 같이 쓰기도 했지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등이 모두 같은 언어군(言語群)이니 하나의 민족
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말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릅니다. 로마는 5세기에 멸망하고 이후 그 영향력이 사라지지만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은
로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며 강력하고 지속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등은 중국어와는 분명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봅시다. 로마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과 중국이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비교할 수 없지요.
동아시아 지역 대부분은 한자(漢字)를 사용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은 중국어를
다만 필요에 따라 차용(借用)할 뿐, 중국어 자체가 이 지역 언어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습니다. 조선의 세종대왕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몽골이나 청나라의 황제들도 자체적인 언어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중 가장 성공
적인 경우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1980년대 초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지만 1985년 소위 ‘삼저호황(三低好況 : 저유가ㆍ원화
약세ㆍ저금리)’으로 경제가 회복되어 한국경제는 새로운 중흥기(中興期)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데올로기 문제와 남북문제에 골몰해왔던 저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경제는 호황(好況)인데다 올림픽이 개최(1988)되어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세계 속의 한국”이었고, 민주화의
물결이 넘치니 그나마 오랫동안 패러다임(paradigm)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문제에 골몰하였던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는 듯하였습니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별로 원하는 일이 아니었고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한 세월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지방에서 조그만 사업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김산호 선생의 『대쥬신제국사』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매우 놀라운 사실들이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김산호 선생은 미국에서 만화가로 성공하여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분입니다. 그는 중국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장성(長城 : 만리장성) 이북은 과거엔 모두 가오리[고구려(高句麗)] 땅이었지요?”라는 현지인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의 성공을 뒤로 하고 귀국하여 여생을 바쳐 우리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하시고 계신 분입니다.
이렇게 나이가 드신 분이 열정을 바쳐서 뿌리를 찾는데 저는 오히려 열정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급급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직은 젊은 저에게 김산호 선생의 열정은 한마디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쥬신’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대쥬신제국사』를 읽어갈수록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지만 정사(正史)에도 없는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상세히 기록ㆍ서술되어 있는 데에 대하여 마음이 편하지 못했습니다. 정사(正史)는 물론 다 믿을 것은 아니지만
모두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물론 모든 기록들이 중국의 사서(史書)를 통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김산호 선생의 고충은 컸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그 책이 일반인들 또는 지식인들에게 설득력이 과연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이 내용들이 정말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3) 구드리, 비밀의 화원
그 즈음 한국방송공사(KBS)에서는 『삼국기(三國記)』라는 역사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삼국시대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매우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삼국기(三國記)』의
내용들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히 백제와 일본 사이의 많은 이야기들은 제게는 매우 충격
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부여(夫餘)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부여에 가보면 유명한 백마강(白馬江)이 있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낙화암(落花岩)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곳이죠.
그런데 그 곳에 ‘구드리’(또는 구다라)라는 곳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구다라(くだら)는
제가 배운 일본어에서 백제(百濟)를 의미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일본어에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 くだら + ない)
라는 말은 ‘가치가 없다(시시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이(ない)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백제의 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의미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다라나이는 ‘下らない’로 쓸 수도 있으니 그 어원은 일천한 제 일본어 실력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
니다. 어쨌든 저는 일본(日本)이라는 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일본(日本)을 방문했을 때 일본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안내자 분(인류학 박사과정)
으로부터 “일본의 고대사가 한국과 긴밀하다는 것을 모를 일본의 지식인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일본이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기고만장하는 것이
싫어서 다만 그것을 피할 뿐이지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또한 제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저는 도쿄대학(東京大學)을 홀로 거닐면서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는 도쿄 대학생들에게 ‘한국을 아는가’
라고 물어보니 어이없게도 대개의 학생들이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방학이 시작되는 기간이니 온통 유럽으로 갈 생각으로 들떠 있는 듯했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긴 세월을
일본을 증오하고 일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는 학생들이 한국에 대해서
모른다니,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도쿄의 거리를 거닐면서 일본은 여러모로 우리나라와는 닮은꼴의 나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마치 서울의 거리를 거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일본말을 하여 당황스러울 지경으로 느껴지기도 했습
니다. 제3국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비슷한 사람이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긴 세월 동안 일본은 ‘원수(怨讐)의 나라’, ‘강도의 나라’ 였는데 이 알 수 없는 친근감(親近感)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제 자신도 답답해지고 있었습니다.
나라(奈良)를 갔을 때 그 ‘나라’라는 이름이 우리말로 ‘나라’와 동일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교토(京都)나 여러 고대 유적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일본은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오래된 역사의 창고처럼 우리가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어떤 것들이 제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즈노 유우는(水野祐)교수의 책『일본고대의 국가형성(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에서,
“상고시대 일본의 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라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의 숙명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서 이 두 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일본은 고려가 몽골과 연합하여 일본 정벌에 나선 것을 두고두고 한국침략의
이유로 들곤 한다는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일본 고대 조정에서는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만 하면 세깡론(征韓論 : 정한론 - 한국을 정벌해야 한
다는 주장)이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 설화
라고 합니다.[日本歷史敎育者協議會『天皇制』50問 50答 (혜안 : 2001)] 대학원 수업시간에 일본 외교사 전공
교수님이 “근대 일본 지식인 치고 세깡론자(征韓論者 : 정한론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이 자꾸
뇌리를 스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한국과 일본, 이들의 뿌리는 무엇인지, 이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민족적인 갈등과 분노의 원천은 무엇
인지, 그리고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은 뭐고, ‘백제와 일본은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후금(後金), 즉 청나라 황제의 성(姓)은 ‘아이신 자오뤄(愛新覺羅)’라는데 이 말의 의미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신’은 금(金)을 뜻하는 알타이어이지만 그 말을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라는 한자음을 빌려서 표현한 것이죠. 결국 이 말의 음과 뜻을 합해서 해석해 보면
‘경주 김(金)씨’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되자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미스터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가슴 속에서는 도대체 ‘쥬신은 누구’이며 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들과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도 끝없이 해답을 재촉하여 이 문제들이 제게는 어떤 숙명적 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다시 여러분과 함께 아득하고도 먼 역사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멀고먼 옛날에 떠나온 고향의 노래
를 부르는 흥겨운 마음으로 떠나 봅시다. 물론 이 여행의 가이드가 시원치가 않다는 점이 여러분 마음에 걸리실
것입니다. 어느 분은 제 약력(略歷) 어디를 보아도 역사(歷史)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시는데 그 말도 사실
이거든요.
아침 안개 속의 쥬신
요즘 한국 미인, 무엇이든지 큼직큼직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팔등신에 눈도 크고 키도 큽니다. 과학(科學)이 발달해서인지 의학(醫學)이 발달
해서인지 어떻게 하나같이 얼굴이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기준으로는 별로 아름다워 보이진 않습니다. 미인(美人)이란 것도 기준이 문제겠죠. 워낙 미국
(America)의 세상이니 미인도 미국인에 가까우면 미인이라고 합니다. 원래 한국 미인은 뭐든지 작은데 말입니다.
불과 1백년 전에 살았던 선비가 요즘의 패션쇼를 구경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어허, 괴이한 일이로다. 어찌 조선의 여인들이 하나같이 팥쥐 어미에 뺑덕어멈처럼 생겼는고. 뒷박 이마에 눈이
부리부리한데다 움푹 들어갔고 입술에는 고춧가루를 발랐으며 키는 부잣집 소슬 대문만하구나. 입은 큰 궤 문
열어 놓은 듯하고, 혀는 짚신짝 같네. 흑각(黑角) 발톱에 신은 침척(針尺)같이 크구나.”
이 말을 제가 들었다면 깜짝 놀라 그 선비의 입을 틀어막으며 이렇게 둘러댔겠지요.
“선비님, 입술에 바른 것은 고춧가루가 아니라 루즈(rouge)입니다. 그리고 흑각발톱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검은색 매니큐어(manicure)라는 것입니다. 발톱을 보호하기도 하고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키가 크니 발도 큰 법이죠. 그리고 눈이 부리부리한 것도 쌍꺼풀 수술을 해서 그런 거죠. 요즘 많은 여자
들이 하는 것이니 별로 이상한 것도 아니지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러면 그 선비양반, 또 이렇게 말할 겁니다.
“어허, 말세(末世)로다. 말세야. 눈에 칼질을 하다니 ? 김선생, 당신 선생이라는 작자가 그걸 말이라고 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야차(夜叉)가 아닌 다음에야 신체발부(身體髮膚)에 스스로 칼질을 해? 세상이 온통 뺑덕
어멈에 팥쥐 일색이니 장차 이 일을 어찌 할꼬?”
그나저나 한국인들이 세상에서 눈이 제일 작다고 합니다. 미국의 세상이 되다보니 요즘은 눈이 작으면 아예
미인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쌍꺼풀 수술한다고
난리지요?
글쎄요. 눈이 작은 게 뭐 어때서요? 눈이 작으니 겁이 없어 보입니다.
한국인의 눈이 세상에서 가장 작기 때문에 시야가 넓어져 활을 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말하자면 눈이 작다는 것은 초점이 짧은 카메라를 항상 휴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마 그래서 쥬신족들에게는
활과 화살이 따라다니나 봅니다. 한국이 그동안 세계 양궁을 제패한 것도 그저 된 것이 아니지요.
전문가에 따르면 이 작은 눈은 바로 북방계 유목민의 대표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북방의 모진 추위를 이겨내기 쉽도록 실눈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몽골-만주 사람들이 더 눈이 작아야지 왜 한국인이 눈이 작냐구요? 그것은 눈이 작은(실눈)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계속 결혼하여 더욱더 눈이 작아져서 그렇답니다. 이것을 유전자 증폭현상이라 한답니다.
이런 식으로 실눈 사람들은 한반도와 일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는 실눈과 더불어 광대뼈, 속 쌍꺼풀, 검은 머리, 단두형의 머리 등이 추위에
적응된 북방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1) 인간의 새벽
인류의 기원을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유전자 분석법을 토대로 한 이른바 ‘아프리카 가설(Out of Africa theory)’
에 의하면, 현대 인류의 조상은 ‘이브’라 불리는 여성 선조에게서 시작되었는데 한쪽은 아프리카인,
다른 쪽은 각지의 모든 인종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으니 일단
은 두고 볼 일입니다. 유전자 분석법에 의하면 A지역에서 하나의 민족이 B, C, D 등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경우,
A지역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유전적인 변이가 훨씬 크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가설에 의하면 한국인과 일본인·티베트인·몽골인들은 에스키모, 아메리카 인디언들(북방계)과 유전적
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동일한 반면 중국 남부인[과거 중국인들이 남만(南蠻)으로 불렀던 사람들]들은 캄보디아인·
태국인·인도네시아인·필리핀인(남방계)들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주된 흐름은 청동기문화를 이룩한 알타이계 종족인데 선주민들인 구몽골족과 남몽골의
일부가 융합하여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분석해 봅시다.
몽골로이드(몽골인종)는 북몽골와 남몽골로 구분합니다. 북몽골은 다시 신몽골과 구몽골로 나눠지는데, 구몽골
은 고시베리아족(Palaeo-Siberians), 또는 고아시아족(Palaeo-Asiatics)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원주민으로 알려진 아이누 족이나 축치 족·코리악 족 등이 있습니다. 신몽골은 투르크·위구르·퉁구스 족 등이 지적
됩니다. 한국인들은 북몽골이자 신몽골에 속하며 알타이 계열이라고 합니다(이 때의 알타이라는 말은 어족(語族)
분류 때 쓰이는 말이지만 혈족을 말할 때도 관행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북몽골의 중심지는 대체로 바이칼 호수 일대로 추정됩니다. 북몽골이 기후의 변화에 따라 이동하였을 것이고
그 일파(一派)가 한반도까지 내려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한반도 자체에도 북몽골과는 다른 선주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남방계가 훨씬 전에 이동해왔다 하더라도 소수이고 주된 흐름은 북방계로 보고 있지요.
참고로 학자들은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인류의 화석을 보면, ① 동북아시아 형(한반도와 만주 지역), ② 황하ㆍ
양자강 형(중국 형), ③ 동남아시아 형(인도네시아의 자바 섬 등) 등으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즉 한반도 만주 등지의 사람들은 중국인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말이죠.
(2) 쥬신의 아침
미술해부학의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에 따르면, 한반도의 해안지대나 일본의 남부 지대에는 남방계 아시아인의
특징[큰 눈·쌍꺼풀·큰 신체·작은 신체·작은 몸통·긴 팔다리]들이 나타나고 있고 한반도의 전 지역과 일본 중북부
지방에는 북방계 아시아인들의 특징[작은 눈·홑꺼풀·큰 몸통·짧은 팔다리] 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몸통이 크고 팔다리가 짧은 것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열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주도나 한국의 일부 해안지대(목포·장흥·부산)의 고분들에서 나타나는 이마는 넓고 얼굴은 짧고 큰
눈을 가진 사람(남방계)들은 일반적인 일본인이나 한국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낙동강을 건너
인근 김해지역의 고분들에 나타나는 유골들은 가까운 부산 지역이나 인근 해안지대에서 나타나는 유골들과는
특징이 다른 북방계라는 것이지요. 즉 낙동강 하구까지 북방계가 들어왔다는 것이죠. 북방계, 참 멀리도 왔군요.
한반도를 중심으로 본다면 남ㆍ북방계가 혼재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주류는 북방계라고 합니다.
즉 한국인들은 언어ㆍ체질ㆍ문화면에서 북방민족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얘깁니다[조용진『얼굴』
(사계절 : 1999) 85쪽].
그렇지만 한반도 도처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은 남방계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중국의 황해 연안(요령성·산동성·절강성), 한반도 영산강 유역과 제주도, 일본의 큐슈(九州)
지방, 인도차이나 전역, 인디아(인도) 남부 등인데 이것은 남방계의 이동경로를 보여주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고인돌의 이동경로는 벼농사 문화의 이동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림 ②]에서 보면 마치 남방계가 만주와 한반도 일본에까지 나타나 전체적으로 이 지역들을 장악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는 못합니다. 고인돌은 타이완·인도네시아·인도로 연결되고 있지만 적석묘(積石墓)
와 석관묘(石棺墓)는 한국· 만주·몽골·스키타이 지역으로 또한 넓게 분포되어있습니다. 즉 북방계도 남방계 못지
않게 이 지역을 크게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 점들을 먼저 신화나 묘제양식으로 살펴봅시다
(유전학적 부분은 다음 항목에서 다루지요).
신화(神話)의 경우를 보면 북방계 유목민들은 천손(天孫 : 하늘의 자손) 신화이고 남방계 농경인들의 신화는 난생
(卵生) 신화인데 이 두 가지의 신화 요소가 한국 고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모두 나타납니다.
그러나 난생 신화는 북방계 천손 신화에 의해 압도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천손난생신화(天孫卵生神話)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경제적 기반은 벼농사로, 정치적 기반은 천손사상이 바탕이 되었다는 얘기지요(그래서 한국말에는
특히 농사와 관련하여 인도나 동남아 등지의 말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죠. 그러나 한국어의 근본 구조는 북방계의
언어구조입니다).
예를 들면 한반도의 남단에서 나타난 신라(新羅)의 경우에도 그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천마(天馬)의 알
에서 나옵니다. 여기에는 북방 기마민족(쥬신족)의 성수(聖樹)인 버드나무[양산(楊山)]가 나오고 그들의 영웅
신화(영웅의 탄생과 죽음)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새가 나옵니다. 박혁거세의 박(朴)은 음을 빌린 말인데 바지[瓠]
또는 ‘밝다[明]’는 의미이고 혁(赫)도 ‘붉다’ 또는 ‘붉은 빛이 나다’는 의미로 모두 태양을 나타내지요.
즉 천손사상을 유지하면서 난생설화를 적절히 섞어서 만든 신화이지요.
제가 보기에 천손사상이라도 토착세력의 도전을 일시에 물리칠 경우에는 신화에 알[卵]이 등장하지 않고
① 토착세력 때문에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히 힘이 들거나 ② 점차적으로 세력을 키워서 정치권력을 장악한 경우
등을 알[卵]로 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알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점차적
으로 성장하고 새롭게 변신하여 강력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즉 여기서 말하는 알[卵]이라는 것은 남방계 신화와는 다른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卵]이라는 것은 남방으로 이주한 북방민들이 천손(天孫)이라는 고유의 이데올로기(ideology)를
유지하면서 현존하는 문화의 외피(外皮)인 난생신화(卵生神話)를 덮어쓰고서 ‘재탄생(re-birth)’한 것을 의미하죠.
유목민족인 천손족(天孫族)이 실제로 다스려야할 사람들은 결국은 난생신화를 믿는 농경민이 아닙니까?
북방 유목민들이 천손사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몽골의 겔과 같은 이동식 가옥
(yurt)은 가운데 지붕[天窓(천창 : 하늘로 향하는 창)]이 눈과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늘로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동식 가옥을 지탱하는 ‘마루’(宗 : 마루는 북방어입니다)는 하늘과 교통하는 매개체지요. 겔을 지탱하는
기둥은 하늘과 연결되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축으로 여기지기 때문에 함부로 만지거나 기대어서도 안 되지요
[김의숙 “몽골이 민속생활의례 고찰” 『몽골민속 현장답사기』(민속원 : 1998)]. 부부가 성관계를 가지는 것도
하늘이 내려다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죠. 이들에게 태양이나 하늘은 바로 생활이자 신앙의 대상입니다.
이해가 안 되시면 여러분들도 야외에서 잠을 한번 자보세요. 텐트 안에서 자는 것 말고 밖으로 나와서 자보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겔처럼 가운데가 뚫려있는 텐트에서 자보세요.
캄캄한 밤 벌판에서 아무런 잠자리 도구도 없이 자보면 어느 샌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습
니다. 처음에는 벌판 위에 있다고 생각되지만 하늘을 계속 바라보면 어느 순간 하늘 여기저기를 떠다니게 됩니다.
겔에서의 생활이 바로 이런 것이겠죠.
그러니까 나 자신과 하늘을 하나로 느끼게 되고 나중에 죽더라도 마음의 고향인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죠.
물론 그 인도자는 새[鳥]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들이 신조(神鳥)로 보는 것은 철새들입니다.
한국의 솟대(꼭대기의 새)나 일본의 도리(とり)도 같은 맥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솟대 위의 새들[삼족오
(三足烏)나 오리·원앙·기러기와 같은 철새)은 모두 북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의 원고향이 추운
북쪽 지방이기 때문입니다(김병모 『고고학여행』).
멀리 떠나온 고향, 고향은 환경이 어떠하든 그리운 곳이죠. 그래서 잠시 겨울을 피해 온 철새들에게 고향 소식을
물어보고 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새들에게 간절한 소식을 전하는 대상이 바로 한국의 솟대이지요.
신라(新羅) 부분에서 다시 상세히 분석하겠지만, 이 솟대는 쥬신 샤먼들의 지팡이 머리 장식이기도 합니다.
난생신화가 나타나는 지역은 타이완(파이완족)·인도네시아(자바족)·태국(타이족)·인도(군다족) 등으로 동남아
농경민족에 퍼져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천손신화(天孫神話) 체계는 몽골·부리야트·에벤키·스키타이 지역의 여러
종족 등 주로 북방유목민족들에게서 나타나죠.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 ③]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림 ③]을 보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난생신화(卵生神話)는 지석묘·고인돌과 같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천손신화(天孫神話)는 적석묘(積石墓)와 석관묘의 분포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데 한반도의 남단의 신라왕들의
무덤은 대부분 적석묘라는 것입니다. 이상하죠? 이 부분은 최근에 여러 연구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라 부분에서
검토하기로 합시다.
둘째, 한반도의 경우에는 난생신화든 천손신화든 중국(中國)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에 이르는 어떤 신화적인 요소도 중국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말이
지요. [그림 ③]에서 보면 중원을 포함한 중국 지역만 빼고 나타나는 것이 천손신화와 난생신화이지요. 따라서
국가 또는 민족을 기원적으로 본다면 중국이 이 지역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할 하등의 권리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셋째, 만주ㆍ한국ㆍ일본은 북방의 천손사상과 남방신화의 혜택을 흠뻑 받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즉 북방계의
문화가 남방계의 문화를 압도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꽃이 핀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중국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죠. 일부 학자들이 좋아하는 대로 중국식(中國式)으로 말하면 이 지역은 ‘북적(北狄)’과 ‘남만
(南蠻)’이 융합하여 생성된 민족이겠죠? 정말이지 중국과는 거리가 멀군요.
이상의 사실만으로도 (앞으로 나올 많은 이야기는 차치하고)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 쥬신 역사의
중국 편입시도)은 얼마나 허황된 논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 봅시다. ① 신화(神話)도 다르고, ② 민족의 기원(紀源)도 다르며, ③ 인종(人種)도 다르고, ④ 문화(文化)와
습속(習俗)도 다르며, ⑤ 언어(言語)도 다르고, ⑥ 경제적(經濟的)인 기반이나 산업(産業)도 다르며, ⑦ 정치적
(政治的)으로 어느 일방의 지배 - 피지배 관계가 된 것도 아니고[순수 한족 정권은 한(漢) - 송(宋) - 명(明) 정도고
대부분 정권은 쥬신이나 기타의 민족들에 의한 것이죠], ⑧ 역사의 무대도 다른데 무슨 근거로 중국은 몽골 -
만주 - 한반도 북부 지역 전체를 중국의 영역으로 포함시키는가 말입니다.
요즘 식으로 심하게 말하면 중국은 쥬신(만주와 몽골)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만주와 몽골이 중국 땅이라는 식의
논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도가 한 때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도 인도의 땅’이라는 식의 논리지요. 말이
되나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 하나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내부에 있는 난생신화나 천손신화를
일부러 숨기려고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가진 중국에 대한 지나친 짝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난생신화나 천손신화를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설화나 신앙체계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꾼과 선녀’는 쥬신의 신성한 시조(始祖)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선정적인 섹스(sex)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비중국적(非中國的)이라고 하여 감추려고 하는 엉뚱하고
삐뚤어진 소중화주의가 수백 년 이상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가 막힐 이야기죠. 천 냥이라면 요즘 돈으로
10억 이상은 될 터인데 그 많은 빚을 지려면 별일이 다 있었을 텐데 혀 한 번 잘 놀리면 성큼 빚을 탕감해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만큼 한국인들은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이지요. 이러니 맨 날 중국인들에게 당하고 살지요.
한마디로 한국인들은 신중하거나 노련함과는 거리가 멀고 이성적이지 않다는 애깁니다.
한국인들이 감정적이란 말은 한국인들이 오른쪽 뇌가 발달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허벅지가 짧기 때문에
(북방계는 춥기 때문에 눈을 헤쳐 걷기 쉽도록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가무음곡(歌舞音曲)을 즐긴
다고 합니다.
진수의 『삼국지』에 보면 “부여인들은 길을 갈 때 밤이든 낮이든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魏書 부여전」)”고 합니다. 사실 한국의 ‘노래방’과 일본의
‘가라오케’도 그저 나온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춤은 어떨까요? 한국인들이 추는 춤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당히 어려운 것이 많다고들 합니다.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팔등신의 서양 미녀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면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데 한국의 무용수
들은 허벅지가 짧아서 인지 춤을 안정감 있게 추더라구요.
조용진 교수는 한국인들의 짧은 허벅지를 ‘조선무다리’ 로 표현했는데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 ‘조선무다리’가 나타나는 지역을 그려보니 [그림 ④]와 같이 되었습니다.
어떤가요? 몽골-만주-한반도-일본에 이르는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전체
체격조건이 같다는 말이죠.
그러면 체질은 어떨까요?
체질도 마찬가지랍니다. 체질적인 특징이 상통하는 지역도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앞서 말씀드린 신화를 함께 생각해보면 한반도의 경우에는 북방계가 소수의 남방계를 압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방계의 인구가 증가하자 남방계의 일부는 일본이나 오키나와 등지로
이주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계가 남방계에게 폐결핵을 전염시켜 남방계 인구가
격감하고 일부는 북방계에 밀려서 한반도를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조용진『얼굴』(사계절 : 1999)].
(4) 쥬신을 찾아서
한반도에서 북방계가 남방계를 압도하였다는 것을 유전학적인 연구나 분석을 통해서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김욱 교수(단국대)는 Y염색체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뿌리를 크게 두 갈래로 정리하였습니다.
즉 한국인들의 70~80퍼센트는 북방계이고 나머지 20~30퍼센트는 남방계이며 기타 일부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한국인은 동아시아인 집단 가운데서도 일본인과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고 남방계의 경우에는 베트남인 등과도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의 마쓰모도 교수(오사카대학)는 몽고인종을 특징짓는 유전자 결합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몽고
인종의 혈청 중에 있는 Gmab3st 유전자로 아시아계 인종의 계통성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Gmab3st 유전자는 바이칼호 북쪽의 부리야트 족[칭기즈칸의 종족으로 알려짐 : 몽골 쥬신]이
100명 중에서 52명으로 가장 많고 한국인(반도 쥬신)은 41명, 일본(열도 쥬신)은 45명인데 반하여 중국인은
화북(華北)지방이 26명 화남(華南) 지역은 9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에 이르는
지역이 이 민족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혈액형의 경우에도 북방계는 A, B형이 많고
남방계는 O형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국이나 일본은 A, B 형이 많다고 합니다.
따라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유전학적으로 아주 비슷한 사람들이 거주
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특히 몽골을 방문했을 때 느끼는 알 수 없는 그 친근감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겠죠.
이홍규 교수(서울대 의대)는 「유전자로 밝혀보는 한민족의 뿌리」라는 글을 통해서 “한국인 주류는 바이칼호
에서 온 북방계 아시안” (『신동아』2002.1)이라고 주장합니다. 이홍규 교수는 한국인들의 질병들을 추적해 가다가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이홍규 교수는 현재 한국인의 70~80%가 북방계, 20~30%는 남방계라고
합니다.
이제 이런 사실들을 토대로 한반도의 상황을 한번 살펴봅시다. 한반도에서는 기존의 일부 남방계가 살고 있는
상태에서 북방계가 이들을 압도하였다고 말씀드렸죠? 구체적으로 보면, 북방계가 압록강 연안지역(예맥ㆍ숙신의
무대)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김해지역(과거의 변한/가야지역)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림 ⑥] 참고)
그림에서 보면 ①은 빙하기로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②의 경우는 1만 2천년~8천년 전으로 남방계
신석기인들이 주로 해안지방으로 들어온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③은 동부시베리아로부터 북방계가 내륙지방
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내려왔다는 것이죠. ④는 극소수의 서부 시베리아인들이 유입되고 있습니다. ⑤ 6~7세기
혼혈과 지역별 유전자의 상승작용으로 한국인들의 현재 모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⑥은 미래의 일로서 앞으로
수많은 유전자의 교류를 통하면 실질적인 한국인의 모습은 희석되어 한국인들의 얼굴이 형성되는 루트는 찾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③ 동부시베리아로부터 북방계의 유입, ④ 서부 시베리아인들의 유입 등의 과정을 고고학자 김원룡의
견해를 통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김원룡의 견해에 따르면, 예니세이 지방에서 나타난 카라스크 문화인(황인종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북향한 퉁구
스족)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는 모체였다고 합니다. 카라스크 문화 다음에는 다카르 문화가 성립되는데 이때는
B. C 7세기경으로 이 문화는 주로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카르 문화는 말(馬)이 운송수단이 되면서 뛰어난 기동력으로 남부로 진출하게 되고 오르도스 흉노(匈奴)에게
로 뻗어갔다고 추정됩니다(오르도스는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의 고향이죠). 뿐만 아니라 이 시기를 전후
하여 흑해 북쪽 해안에 새로이 등장한 스키타이 동물 미술도 가미되어 특수한 시베리아 청동기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 문화의 주인공들이 바로 오르도스의 주인이었던 흉노(匈奴)들이라는 얘깁니다. 이들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현재의 중국 땅은 물론이고 한반도까지 큰 정치적인 변화를 주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한반도와 중국 및
동북 지방을 아우르는 청동문화는 스키타이-다카르-오르도스 청동문화라는 것입니다[김원룡 『한국문화의
기원』(탐구당) 33~35쪽].
물론 김원룡의 견해와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기 때문에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확실한 내용들이 밝혀지는 대로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일단 여명기의 알타이의 역사는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다소 긴 분석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초기 한반도의 정착민들은 소수의 남방계로서 주로 해안을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이주한 북방계는 주로 동부 시베리아 지역( 동몽골ㆍ만주)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왔으며 이들이
소수의 남방계를 압도하고 한반도의 주류 민족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일부이지만 몽골 서부 지역 또는 서시베리아
계통의 유목민이 김해지역(과거의 변한/가야지역)까지 유입되기도 했습니다(이 사람들은 신라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 부분은 신라 부분에서 다시 거론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만주ㆍ한반도ㆍ일본의 경우는 중국과 비교해서 신화(神話)도 다르고 민족 기원(紀源)이 다르며 인종(人種)
도 다르고, 문화(文化)와 습속(習俗)이 다르며 언어(言語)도 다르고, 경제적(經濟的)인 기반이나 산업(産業)이
다르며 정치적(政治的)으로 어느 일방의 지배 - 피지배 관계가 된 것도 아니고, 역사의 무대도 다릅니다.
따라서 중국이 만주ㆍ한반도(북부)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는 것(동북공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만주ㆍ한국ㆍ일본은 북방계의 문화와 남방계의 문화의 혜택을 흠뻑 받은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지역은 북방계의 문화가 남방계의 문화를 압도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문화의 꽃이 핀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중국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죠.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우리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과거 한반도에서 어떤 민족들의 이동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문화와 기원은 어떠했으며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대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쥬신사 말살정책)이 얼마나 허황된 논리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반도를 구성하는 민족은 주로 알타이를 중심으로 몽골ㆍ만주에 이르는 북방계의 민족이면서 이들의 특성이
지금 한국인들의 모습에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머나 먼 쥬신의 역사를 알아 가는데도 매우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습니다.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