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8-3 8 즉경即景 보이는 경치 그대로 3 즉사即事 현재 보는 일 3首
1
사사희작요송지查查喜鵲繞松枝 까악까악 까치들은 솔가지를 맴도는데
정시남창독의시正是南窓獨倚時 바로 내가 남창에 홀로 의지한 때일세.
신세올여사범저身世兀如槎泛渚 신세가 외톨이라 물가에 뜬 뗏목인 듯
불방간국화도시不妨看菊和陶詩 국화를 보며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화운함이 무방하리.
►‘나무 벨 차, 떼 사槎’
2
로상연소첨일이爐上烟銷簷日移 향로에 연기 사라지고 처마에 햇볕 지나가니
지창한투랭침기紙窓寒透冷侵肌 종이창에 한기가 스며들어 냉기가 살에 파고드네.
광문전석하증난廣文氈席何曾暖 광문廣文의 담요 방석 언제 한번 따뜻했나?
각한재명매득치却恨才名買得癡 재명才名이 어리석음 사들임을 한탄하네.
►광문廣文 당나라 정건鄭虔이 광문관박사廣文館博士라는 벼슬을 했는데
그 말이 그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녹祿이 적어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두자미杜子美가 〈취시가醉詩歌〉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3
장한도망신후명張翰都忘身後名 장한張翰은 죽은 뒤의 이름을 모두 잊고
즉시배주점평생即時杯酒占平生 그 즉시의 술잔으로 한평생을 점쳤네.
이제공척구진토夷齊孔跖俱塵土 백이·숙제와 공자·도척은 모두 진토 되어서
불급시상취사니不及柴桑醉似泥 시상촌柴桑村의 진흙같이 취해 누움 못 따르리.
►장한張翰 진晉나라 때의 정치가.
어지러워 난리가 날 것 같으므로 장한은 서울에서 벼슬하는 것을 버리고 고향인 강남으로 갔는데
“고향의 名産인 농어회와 순채蓴菜가 먹고 싶어서 간다.”고 말하여
후세에서는 그를 오吳(강남)의 三高士의 한 사람으로 친다.
►시상촌柴桑村 도연명陶淵明은 술을 좋아하였는데 그의 고향이 시상촌이다.
●정건鄭虔(705-764)
唐代의 문인. 자는 약제弱齊. 호는 희황상인羲皇上人. 정주 영창(허난성) 사람.
가난했으나 서화금주書畫琴酒를 즐겼고 <飮中八仙>중의 한 사람.
재상 장허張許의 천거로 저작랑이 되었고 개원 25(737)년에 홍문관 학사가 되었다.
현종玄宗 천보天寶 초에 협율랑協律郞을 거쳐 광문관박사廣文館博士를 지냈다.
두보, 이백의 詩酒의 벗.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검약해서 종이가 늘 부족했는데 자은사慈恩寺에
감나무 잎이 많이 저장되어 있어 날마다 이것으로 종이를 만들어 감잎에 글씨 연습을 했으며
그림은 산수를 잘 그렸고 도연명 등 인물을 그렸다.
지리학에도 정통해 <천보군방록天寶軍防錄>을 지었는데 언어가 전아하고 전고典故가 꼼꼼했다.
유자儒者들이 그의 저서를 보고는 감복하여 ‘정광문鄭廣文’이라 불렀다.
안록산安祿山이 長安을 함락했을 때 잡혀 水部郎中 벼슬을 받았는데
난이 평정된 뒤 대주사호참군臺州司戶參軍으로 폄적되고 얼마 뒤 죽었다.
관리 생활을 하면서 거듭 폄적貶謫을 당하는 등 풍파가 많았다.
시를 잘 지었고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글씨 쓰기를 좋아했다.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직접 지은 시에 그림을 곁들인 <창주도滄州圖>를 바치자
현종이 감탄해서 직접 그의 작품 끝에 ‘정건삼절鄭虔三絶’이라고 써주었다.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
수묵화법의 발전에 공헌했고 작품에
<준령계교도峻嶺溪橋圖>와 <장인도杖引圖>가 있다.
정공저산빈여사鄭公樗散鬢如絲 정건공은 쓸모없는 나무 같고 귀밑털이 세어서
취후상칭노화사醉後常稱老畫師 취한 뒤에는 늘 늙은 화공이노라고 일컫더라.
/<두보杜甫 송정18건폄태주사호送鄭十八虔貶台州司戶>
삼절자어제三絶自御題 임금께서 삼절이라 쓰시니
사방우소앙四方尤所仰 사방에서 더욱 우러러보는 바더라.
<杜甫 八哀詩 고저작랑폄태주사호영양정공건故著作郞貶台州司戶榮陽鄭公虔>
내지정로시전신乃知鄭老是前身 정건이 그대의 전신임을 알겠거니
마사경일신위이摩挲竟日神爲怡 종일토록 어루만져 기쁨을 삼네.
/<성간成侃 기강경우寄姜景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