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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장 - 사랑이란?
오광만 교수
고린도전서 13장은 12-14장에 이르는 논의 전개에 있어 정점에 해당하는 장이다. 12:31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한 후에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하였고, 14:1절에서 어떤 것을 구하는데 있어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2장과 14장 사이에 위치한 13장은 12장과 14장을 이어 주면서 12장과 14장에서 다루고 있는 은사에 대한 논의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 분명하다. 13장은 은사로서 사랑을 구하라는 바울의 호소 내용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실행되는 장(場) 즉 모든 은사를 행하는 규범과 지침으로서 사랑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13장은 12장에서 시작하여 14장에서 마무리짓는 은사 논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사랑이 지침과 원리가 되라고 권하는 본문이다. 이미 바울은 8:1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세운다”고 말했었다. “세우는 것”은 분명, 고린도교회에 일고 있는 분쟁과 편당과 상반되는 것이다. 바울이 8-10장에서는 지식의 교만함에 초점을 맞추어 교훈하였다면 12-14장에서는 사랑의 세움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13장은 12장과 14장의 논의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본문의 구조
본문은 “내게 사랑이 없다면”(αγαπην δε μη εχω)이라는 부정적인 단서가 세 번 등장하고 그에 따른 결과가 언급되어 사랑의 필요성을 제시한 1-3절, 사랑의 성격에 대하여 설명하는 (긍정적인 언급 5개와 부정적인 언급 8개) 4-7절, 그리고 사랑과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 사랑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8-13절로 나눌 수 있다. 특히 8-13절은 η αγαπη로 시작하여 η αγαπη로 끝나는 수미쌍관법(inclusio)로 되어 있다. 또한 8-13절에서 사랑에 대한 대조는 폐하여지는 것과 계속 있을 것,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 어린 아이와 장성한 것, “지금은”과 “그 때는”의 대조가 돋보인다. 13장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1-3절 - 사랑의 필요성
2) 4-7절 - 사랑의 특성
3) 8-13절 - 사랑의 영원성
(2) 본문 주해
1) 1-3절 - 사랑의 필요성
바울은 여기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을 할지라도……사랑이 없으면”이라고 “1인칭”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것은 목회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은사 논의의 문제 중의 하나인 방언과 관련하여 자신도 방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4:18). 즉 바울은 자신을 예로 들어 사도의 행동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사랑을 친히 실천한 사람으로 이 교훈을 하는 것이다.
1절.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의 방언”은 인간이 실제로 쓰는 언어들(αι γλωσσαι)을 가리킨다. 하지만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cf. 고전 14:6, 18)가 실제로 바울이나 고린도교회가 천사의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하는 방언을 천사의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의 상황과 사랑을 날카롭게 대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쓰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로써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내가 받은 방언 은사가 아무리 높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시끄러운 구리(징)와 요란한 소리를 내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울은 사랑이 없이 방언을 하는 상황 속에서 구리와 꽹과리에 불과 한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 방언 은사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렇다”고 말한다. “나는 ~불과하다”(γεγονα)는 표현은 완료형으로서 단지 “나는~이다”의 문제가 아니고 “나는 구리가 되었다(I have become)”이다. 마치 사랑 없이 방언을 말하는 나의 행동이 나에게 나의 가치를 낮추고 나를 내가 되지 말아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남겼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문제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이다.
“구리”를 예로 든 것은 허망한 것, 의미 없는(unintelligent) 소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cf. ‘난타’의 징과 꽹과리는 의미가 있고 심지어 엿장수의 가위 소리도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 예로 든 “구리”와 “꽹과리”는 의미 없는 기구를 가리킨다). 바울의 말은 사랑이 없으면 내가 받은 방언 은사에 영적인 의미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방언은 의미 전달이 전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꽹과리와 심벌즈 등은 이교도가 예배를 드릴 때 사용되던 것이다. 이런 기구들은 신의 주의를 끌고 귀신을 내쫓는 데 사용하고,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들이 예배 중에 엑스터시와 관련된 이상한 언어를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바울은 지금 그들의 엑스터시 행동을 조롱하는 것이다.
2절
여기서 바울이 과장법을 쓰고 있다는 것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느 선지자라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3:9에서 바울은 우리의 지식과 예언하는 것이 부분적이라고 설명한다. 두 용어간의 구별은 없다. 혹시 엄격하게 구별할 수 있다면 모든 “비밀”은 종말론적인 목적과 행동에 대해 감추어진 계시들을 언급하고(고전 2:1, 10; 4:1),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전 구속의 목적을 언급할 것이다.(고전 2:16; 갈 4:9). 그러나 바울은 이 두 용어를 구별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다. “(이번에는)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아무리 많은 믿을 만한 정보가 예언의 은사에서 나온다고 하더라도(cf. 고전 2:2-16; 7:40; 14:6; 갈 1:15-16) 그것이 사랑이 없이 실행되면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믿음의 은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믿음”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니라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인데(고전 12:9; 고후 12:12; 롬 15:19), 이러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믿음도 사랑이 없이 행사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바울이 말하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선언한 것은 은사가 가치 없는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I am nothing)는 것이고 자신이 “영적으로 0(영)”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사랑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그것을 우선 방언과 예언과 대조하는 것은 14장의 논의에서 나타나 있다시피 방언과 예언이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랑은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반면, 방언과 예언은 분열시킨다(고전 14:2-5, 29-32). 바울은 이미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3:3), “교만한 마음(puffed up)을 먹고 있다”(4:6), “통한이 여기지 않고 욕되게 하고 있으며”(5:2; 11:4), 모두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며(8-10), 충동적이고 악을 해하는 자들이라(6장)고 지적했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9장에서 그러했듯이 여기서도 자신을 예로 들어(모델 삼아) 어떤 교훈을 내리는 것이다. 12:31에 언급된 “내가 제일 좋은 길(και υπερβολην οδον)을 너희에게 보내리라”는 말은 “최상의” 또는 “가장 탁월한” 길을 보이겠다는 의미기도 하지만(고후 1:8; 롬 7:13; 갈1:13), 과장법으로써 사랑의 예를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제일 좋은”이라고 표현된 단어가 “과장법(hyperbole)”을 의미하는 υπερβολη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3절
바울은 3절에서 앞에서 이야기 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희생할 정도의 박애적인 행동에 대해 말한다. “구제를 하거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경우와 “사랑이 없는 것”을 대조한다. 구제와 관련하여서는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어(cf. 고전 9:12; 고후 11:7-11) 그래서 가난하게 되었다는 그의 경험은 이해가 가지만,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과장법의 표현이다. 결과는 동일하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얻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박애의 행동을 하고 진리에 충실하려고 순교를 당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나의 높은 영적인 지위나 성령을 경험했다는 사실에 대한 보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런 말로써 고린도 교회에게 그의 사도직 수행이 사랑에 의해 수행된 것임을 다시 한번 더 상기시킨다.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회를 진정 사랑하여 모든 일을 했다고 항변한다(고후 2:4; 12:15). 그리고 그들도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 사랑이 지배하기를 바란다.
12-14장에 이르는 바울의 논조에서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가 분명하다. 방언을 함으로써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 즉 예언의 은사를 받아 성령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영적인 선물(은사) 그 자체로는 그들이 신령하다는 그 어떤 것도 입증해 주지 못한다.
바울은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 신학적인 정보를 머리에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든지, 산 기도를 얼마나 많이 다녔든지,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하든지 간에, 그런 지식이나 웅변이나 산 기도나 그가 가지고 있는 경력 그 자체로는 자신이 성령의 사람이고 그가 가진 것이 성령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예배 형식 때문에 성령이 그 예배 중에 계신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예배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모임에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파산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처음에 이런 언급을 했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부풀리고) 사랑은 (덕을)세운다”(8:1)고 말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진정한 사랑이 있을 때 수동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경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8:3).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맺으면서 다시 한번 사랑을 언급한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6:14). “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16:24).
바울은 사도로서 친히 그의 사역 중에 이러한 사랑의 모습을 보였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면에서 사역을 하였지만 사랑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첫째,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을 많이 잘 말했고(14:18),
둘째, 바울은 여러 면에서 예언자적 위치에 있었고(2:2-16; 7:40; 14;37),
셋째, 바울은 비밀을 알고 가르친다고 했으며(cf, 2:1,10; 4:1; 15:51; 고후 12:1-7) 또한 특별한 계시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2:16).
넷째, 바울은 바울 자신의 주장과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었다(고후 12:12; 롬 15:19; 행 14:3; 16:16-24; 19:11; 28:3-6).
이런 탁월한 은사를 발휘하면서도 바울은 사랑을 앞세웠고 사랑을 친히 실천했다. 이런 열매가 고린도에서, 그의 사역지에서 나타났던 것은 이런 과시적인 행동 이전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그의 사역은 열매를 맺었다. 그는 이런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데도 자신을 포기했고 가난하게 되었다. 이것으로써 바울은 자랑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수사학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2) 4-7절 - 사랑의 특성
이제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극적인 특성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행한 비난을 받을 만한 행동과 바울 자신이 그들의 모델로 보여 주는 행동을 대조한다. 여기에 언급된 사랑에 대한 서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역사상 지금까지 사랑을 정확하게 정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이 묘사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며, 감성적(sentimental)인 것이 아니라 행동적(behavioral)인 것이고, 느낌이 아니라 행동이다. 바울의 글은 “사랑이 무엇이다”는 긍정적인 서술을 하고는, “사랑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서술로 나아간다. 그리고 긍정적인 서술로 끝맺는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의 속성은 고린도 교회의 공동체 상호 간에 보인 행동을 염두에 두고 열거한 것이다.
①오래 참음(patient): 이것은 단지 긴 시간을 기꺼이 기다림이나 고난을 견뎌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해를 끼치는 사람은 복수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가 그 사람에게 해 받는 것을 견뎌내는 것을 의미한다.
②온유함(친절함, kind): 해를 받았을 때 참고 오래 기다리는 것만 아니라 그가 받은 상처에 대해 친절함으로 되 갚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대한 이 두 가지 속성은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사역하면서 많이 경험한 것이다. 그는 고린도후서 6:3-10에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많이 견디는 것과……오래 참음과……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는 것(6:4, 6, 8)을 강조한다.
다음으로 바울은 사랑의 속성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한다.
①질투(시기)하지 않음(not envy): 질투는 다른 사람을 시샘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non-charismatics들이 명심해야 할 속성이다. 질투는 다른 사람을 경쟁 상대로 삼으면서 상대방에게 내가 갖지 못한 어떤 것이 있을 때 보이는 적대감과 적대 행동이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성취를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진 은사를 시기하면서 바라보지 않는다.
②자랑하지 않음(not boast):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뻐기거나 으스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charismatics들이 배우고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이 단어는(περπερευεται) 성경에 단 한 번 등장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듣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과시하며 뻐기는 것을 의미한다.
③교만하지 아니함(not proud): 이것은 부풀림, 과장하여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4:6, 18, 19; 5:2; 8:1에서도 사용되던 용어이다. 교만이란 자신의 실제보다 부풀려서 생각하고 그런 자신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④무례히 행치 아니함(not rude): 다른 사람에게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단어는 7:36에서 어떤 남자가 젊은 여성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으나 결혼하기를 꺼려한다면 그 남자가 행하는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 때 사용되던 단어이다. 또는 자기 하인에게 하던 행동을 왕에게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⑤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not self-seeking):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것의 반대다. 사랑은 단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구하지 않는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것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행동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24, 33에서 자기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자기의 권리보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구하라고 권면한다.
⑥성내지 아니함(not easily angered): 인간 관계에서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외부에서 어떤 자극을 받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⑦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함(keeps no record of wrongs): 이런 행동은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행한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게 된 경우, 그들이 가한 악한 일들을 (나중에 되 갚기 위해) 일일이 기억해 두지 않는 행동이다. 이것은 남에게서 받는 해를 복수하기 위해 상대방의 악한 행동을 하나 하나 헤아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랑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7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하였다.
⑧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함(not delight in evil): 불의는 악, 나쁜 짓, 비행, 악행 등 도덕적인 모든 악을 의미한다. 사랑은 이런 악을 기뻐하지 않는다. 특히 이것은 심지어 다른 사람이 자기의 원수에게까지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특성을 언급한 바울은 다시 사랑의 긍정적인 특성을 제시한다(6a-7). 사랑은 이래야 한다.
①진리와 함께 기뻐함: 사랑은 진리에 대해 기뻐하는 일에 다른 사람과 연합한다. 요한삼서 4에 요한은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진리에 대해 기뻐하는 사람과 연합한 것을 보였다. 바울도 그의 사역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②7절은 모든 것을 요약한다. “사랑은 항상 참으며, 항상 믿으며, 항상 바라며 항상 견디느니라.” 이것은 헬라어 παντα(모든)를 부사적으로 이해하여 표현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과도한 실현된 종말론 입장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4:8; 6:12). 그들은 종말론적 통치가 지금 시작되었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가 믿은 실현된 종말론은 과도하게 실현된 종말론이라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모든 것이 현 상황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13:7에서 기독교의 사랑은 여전히 항상(always) 참으며, 늘(always) 믿으며(신임하고), 늘 소망하고, 늘 인내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8-9장에서 논한 개인의 자유 사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에서 요구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유와 권리를 전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공동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 말하자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인 면에서 기독교의 사랑은 첫째로 “항상 참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닥치는 여러 종류의 어려움을 끈기 있게 이겨내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사랑은 항상 믿는 것(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거나 냉소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개방)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태도를 지칭한다.
셋째, 사랑은 항상 소망한다. 계속되는 학대나 무례한 행동으로 실망하게 될 때에도 최상을 바라는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것이다(cf. 마 18:22). 지금 자신을 무참히 밟는 사람이라도 변화되어 미래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소망한다. 이것은 사랑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넷째, 사랑은 항상 견딘다(인내한다). 소망한 것이 반복해서 절망과 실망으로 돌아올 때라도 여전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소망한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랑은 여러 가지 역경이나 고난, 어려움을 견뎌 낸다.
사랑은 “(항상)모든 것을 믿고, (항상)모든 것을 소망하며, (항상)모든 것을 견딘다”고 정의한 바울의 경우 그는 과연 이런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였는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가 사역 초기부터 참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그는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면서 크리스천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참음과 소망을 잃지 않았는데,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의 표라고 생각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그리고 그는 그가 받은 직책에 훼방을 받지 않으려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을 겪었다”고 선언한다(고후 6:4).
바울이 실천한 소망은 복음의 열매에 대한 소망을 가리키든지(고전 9:12),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리킨다(고전 15:19).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를 위하여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7). 또한 “우리는……너희 믿음이 더할수록……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 지기를 소망하노라”(고후 10:15).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그의 믿음을 지극하게 표현하였다. 그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처럼 객관적인 믿음일 수도 있었고, 그들이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일 수도 있다. 바울은 사도로서 고린도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전했고, 그들은 믿었다(고전 15:11). 또한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였다(15:14, 17). 그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사도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고전 10:33). 바울의 이런 사랑의 생활은 고난 받은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설득하였다(고전 11:1). 바울은 이처럼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의 문제라는 것을 친히 실천하였다. 이번에는 고린도 교회의 차례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풍성히 받고도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본받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논하는 사랑이 과연 어떤 사랑일까? 하나님의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사랑일까? 지금 살펴본 문맥의 흐름을 염두에 둔다면 바울이 13장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이기적인(자기 중심적인) 사랑(egocentric love)과 이타적인 사랑(altruistic love)의 대조,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과 자기애의 대조라는 느낌을 받는다(cf. 고전 10:33). 그런데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사랑이 이런 대조로서, 이타적인 사랑만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13:3에 자기 몸을 내어 주는 일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즉 이타적인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도 “사랑이 없다면”이라고 단서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식으로 이것을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과 같은 사랑이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랑 받을 만한 대상을 찾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한다면(요 3;16), 그것은 사랑을 받을 만한 요소가 세상이나 우리에게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하신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다. 바울이 요구하는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고상한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는 달리 절대적으로 자기에게서 기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본질상 사랑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신자들)을 변화시켜 그런 사랑이 나올 수 있게 하셔야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당대에 대단히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당시 사랑(혹은 ‘정열’이나 긍휼을 베푸는 행동)이 공적인 덕으로 여겨지지 않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바울의 권면은 놀라운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인류애는 존경을 받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아니 하였다. 감정을 표현하지 아니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서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독교란 사랑으로 특징 되는 삶, “사랑”과 긍휼이 존재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 이것은 방언과 예언 문제로 야기된 고린도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사랑은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은 성령이 임재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사실 성령의 은사에 속한 내용들은 단지 이교도들도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애굽의 바로의 궁정에 있던 술사들처럼, 이교도들은 신탁(예언)을 받고 엑스터시 가운데서 말(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장에 언급된 기독교의 사랑은 실천할 수가 없었고 그들에게는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13:35).
3) 8-13절 사랑의 영원성
8절과 7절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7절에 “(사랑은) 항상 견딘다”고 언급된 것이 8절에서는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라고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3절이 사랑과 은사를 대조했듯이 8-13절 역시 다시금 대조를 보이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것으로써 대조한다. 여기서의 대조는 사랑은 영원한 것인 반면,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χαρισματα)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이것 역시 사랑이 다른 어느 것보다 본질적으로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13절의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는 말을 예상한다.
본문은 그린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둔 언급이다. 그것은 그들의 과도한 실현된 종말론적 입장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지식과 심지어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예언이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충분한 지식은 다만 종말에 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기본적인 종말론적 진리를 뒤바꾸어 생각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그들은 부분적인 은사인 방언과 예언과 지식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는 사랑만 그러한 최종성을 간직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절대적인 의미를 지는 것은 사랑뿐이다.
8절
바울은 앞으로 온전한 것이 올 때 그치게 될 은사를 언급하면서 “예언과 지식은 떨어진다(πιπτει)”고 언급한 반면, 방언에 대해서는 “그친다(παυσονται)”고 중간태 형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문체상 단어를 바꿔 쓴 것이고 세 가지 은사 자체 내에 어떤 구별을 두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아무튼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어떤 시기가 오면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방언과 예언과 지식은 가치 있는 것이며, 이 시대에 신자들에게 잘 무장될 수 있는 훌륭한 은사이지만 그 은사들이 그치고 폐하여질 때가 있다. 그러므로 이들 은사는 폐하여지는 때가 오기 전, 이 시대가 존속하는 동안만 있는 은사이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중단되는(떨어지는) 법이 없다. 사랑은 상황에 따라서 변하지 않기에 영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실천하는 크리스천의 사랑은 구별하기 힘들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방언은 그칠 것이다. 현재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부분적인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13:9에서 나중에는 우리가 완전히 알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 아는 바 될 것이다”(8:3)
9-12절 부분적인 것(το εκ μερους)과 온전한 것(το τελειον)의 대조
온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들이 없어진다. 이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먼저 생각할 것은 없어지는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의 은사이다. 지식이 없어진다면 아무도 무엇이든 알지 못할 것이다. 둘째, 없어지는 것은 예언의 내용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예언하는 행위이다.
바울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부분적으로 예언하고”(9절),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지식)”(12절)라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부분적이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언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정보만을 내놓는다는 의미이다. 이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만 유용하다(10절). 그래서 바울 당시의 성령 은사는 부분적이고 임시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12절 하반절에서도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온전함이 오는 때가 언제인가? 온전함은 어떤 것인가?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이것을 교회의 성숙, 또는 신자 개인의 성숙으로 이해하는 견해.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숙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cf. 고전2:6). 하지만 이 견해는 바울이 교회나 개인의 성숙을 염두에 두었다는 암시를 찾아볼 수 없기에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둘째, 이것을 정경의 완성으로 보는 견해. 이것은 교회에 주신 은사가 하나님의 계시가 베풀어지던 당시에 주신 것이므로 계시가 끝나 정경이 완성되면 당연히 부분적인 계시의 내용이나 계시 전달 방법들이 그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주로 비은사파가 주장한다.
셋째, “온전한 것”이 파루시아와 관련되었다는 견해.
둘째 견해와 셋째 견해는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우리 생각에는 두 견해가 시간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어 반드시 결정해야 할 견해이지만 고린도 교회가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는 본문만 가지고는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온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부분적인 것)이 사라질 것이고, 부분적인 것 속에는 고린도 교회의 현안 문제인 방언과 예언과 지식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 방언의 은사는 바울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앞으로 미래 언젠가 (그가 “온전한 것”이라고 표현된 그 때에) 끝나 버릴 것이다. 만일 이것이 1, 2세기의 어느 때를 가리킨다면 위의 세 은사는 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고 우리는 온전한 것을 가지고 온전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 때가 예수님의 재림 때(파루시아)를 가리킨다면 이 본문을 근거로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 없어졌다고 할 수 없게 된다. 이 말은 곧 시대마다 그 시대에 또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원칙상 성경을 가지고 (특히 이 본문을 근거로) 모든 은사의 중단을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11-12절
바울은 사랑의 영원성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성장 과정과 거울 비유를 예로 든다. 내가 어렸을 때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것처럼 이 시대에서의 상황과 올 시대가 충만하게 도래한 상황은 대조된다.
바울의 이 언급은 방언 말하는 것이나 예언 말하는 것이 유치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지금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단지 지금 고린도의 상황을 아이와 어른의 대조에 비추어 설명하는 것이다. 즉 방언과 예언이 적합하고 그런 것이 주어진 시대가 있고,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대의 완성이 마침내 오게 되면, 이 시대에 적합하고 필요한 것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울을 보는 것과 직접 대면하여 보는 것은 어떤 영상을 보는 데 있어 부분적으로(불완전하게) 알고 지금 크리스천-심지어 가장 성숙한 사람들(cf. 고전 2:6)-이라도 거울을 통하여 보고 아는 것처럼 보고 안다. 거울을 통하여 보는 것은 희미하게(“εν αινιγματι”, 수수께끼로) 보는 것이다. 희미하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εν αινιγματι”)가“수수께끼”를 의미하는 단어(영어의 enigmatic)이다. 여기서도 바울의 요점은 고린도에서 거울 만드는 사람들이 거울을 잘못 만든다고 질책하거나 고대의 동 거울은 질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요지는 진리를 반영하는 도구로서 거울은 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부분적으로 밖에는 알려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반드시 부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불완전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13절
바울은 사랑의 논의를 마치면서, 어쩌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의 하나인 사랑의 영원성을 선언하는 말을 남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13절을 시작하는 “그런즉”(νυνι δε)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세 가지 입장이 있다.
① 시간적인 이해
“이제 이 시대 동안”에 세 가지만 남을 것이지만,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이것은 이 어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② 이 세 개를 집합적으로 이해.
이 세 가지는 새로운 어떤 것을 가리키는 비교의 표준을 요약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 견해에 따르면, 그 집합적 총체(믿음, 소망, 사랑)은 늘 있게 될 것이지만, 이 총체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이 영원까지 갈 것인지의 여부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는 반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③논리적으로 이해.
이 구절은 앞의 논의의 결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여 “사실 이제”, “이처럼”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성령의 다른 은사들은 종말 때에 사라지는 반면 여기에 언급된 세 가지 덕은 모두 존속할 것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 그 이유는 본문에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을 보여 주셨던 반면 믿음이나 소망은 보여 주지 않았다는 것(요일 4:19)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소유물이다.
여기서 믿음은 은사로서 능력 행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영접하고 신뢰하는 것,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신실함과 신뢰이다. 혹은 이것이 언약의 중요한 개념인 신실함(faithfulness)을 가리킬 수 있다. 소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에 견고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을 기다리는 소망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인내가 필요하다. 그 인내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한 인내인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모든 관계를 주장하고 지배하여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13절의 “있을 것인데”(μενει는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믿음, 소망, 사랑은 계속될 것이며 올 시대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곳에서 믿음과 소망이 다음 세대 또는 다른 삶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말했기 때문에 이것은 좋은 이해는 아니다(cf. 고후 5:7; 롬 8:25).
둘째,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μειζων δε와 앞의 νυνι와 관련하여 이해할 때, 지금 이 시대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크리스천들에게 세 개의 큰 속성들(qualifications or attributes)로 존재하지만, 사랑이 가장 큰 이유는 사랑만이 폐하지 않고 사실 다음 세대까지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믿음은 보이게 되고, 소망은 성취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단지 수행되며, 확대되고, 순결해져서 온전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사랑은 이 시대와 종말론적인 실재를 연결하는 하나의 속성이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라고 바울은 믿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처럼 크리스천들은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면 교회도 그런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 그리스도 자신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린도 교회에 적용해보자.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추구함에 있어 먼저 사랑의 원리를 가져야 한다. 영원한 사랑의 원리, 즉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4-7),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보여 주신 사랑이다. 사랑은 성령의 은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번에는 이것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보자. 바울은 계시를 전달하는 사도로서만 아니라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자신이 친히 사랑을 실천하여 교회에 가장 가치 있고, 비중이 있는 것을 전하였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교회에 무엇을 줄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어떻게 줄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하겠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랑이며, 사랑 속에서 은사도 발휘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이 실천해야 할 것이지만 특히 말씀 전하는 사람들이 먼저 실천해야 할 윤리이다.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외친 것은(11:1) 어쩌면 오늘날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시는 말씀인지도 모른다.
2002년 8월 20일 웨신연구원 동문회 여름 MT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