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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 다음시간 자료입니다. 1장은 헤겔 입문으로서 특히 권장하고 싶은 글입니다.
F.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서문
1859년 베를린에서 나온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서 칼 맑스는, 어떻게 우리 두 사람이 1845년에 브뤼셀에서 “독일 철학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대립하는 우리의 견해”−특히 맑스에 의해 완성된 유물론의 역사 파악−“를 공동으로 만들어 내고 사실상 우리의 그 이전의 철학적 의식과 결별하는 일”에 착수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헤겔 이후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로 실행되었다. 두 권의 두꺼운 8절판으로 된 원고가 베스트팔렌의 출판사에 도착한지 한참 되었을 때, 우리는 사정이 변해서 출판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주요 목적−자기 구명(究明)−에 도달해 있었던 만큼 기꺼이 그 원고를 쥐들이 갉아먹는 비판에 맡겨 두었다.”(선집6,241)
그 후 40여 년이 흘렀고,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도 그 주제로 되돌아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맑스는 세상을 떠났다. 헤겔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곳곳에서 말했지만 폭넓은 연관 속에서 말한 적은 없었다. 포이어바흐는 비록 많은 맥락에서 헤겔의 철학과 우리의 파악 사이의 중간이지만 우리는 포이어바흐로 되돌아간 적이 없었다.(선집6,241)
그 동안 맑스의 세계관은 독일과 유럽의 국경을 훨씬 넘어 세계의 모^든 문명 언어들에서 대변자들을 얻었다. 한편 독일 고전철학은 외국 특히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일종의 부활을 경험하고 있으며, 심지어 독일에서도 사람들은 그곳 대학들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떠먹고 있는 절충적인 거지 국에 신물이 난 듯하다.(선집6,241-242)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는, 헤겔의 철학에 대한 우리의 관계 즉 우리가 어떻게 이 철학에서 출발했고 이 철학과 결별했는지를 짧고 조리있게 서술하는 일이 더욱더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헤겔 이후의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 포이어바흐가 질풍노도의 시기에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도 나에게는 아직 갚지 못한 신용 빚으로 보였다. 그래서 신시대의 편집부가 나에게 포이어바흐에 관한 슈타르케의 책을 비평해 다라고 부탁했을 때 나는 그 기회를 얼른 붙잡았다. 나의 저작은 그 잡지 1886년 4호와 5호에 게재되었는데, 여기에 교열한 인쇄본으로 발행한다.(선집6,242)
나는 이 글을 인쇄하러 보내기 전에 1845/46년의 낡은 초고를 다시 찾아내어 살펴보았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절은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완결된 부분은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 관한 서술이지만, 이 서술은 경제사에 관한 그 당시의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포이어바흐의 교의 자체에 대한 비판도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초고는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는 쓸모 없었다. 대신 나는 맑스의 낡은 한 공책에서 부록에 실린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개의 테제들을 발견했다. 이 테제들은 나중에 가다듬으려고 급히 흘려 쓴 메모였으며 출판하려 예정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를 간직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 귀중하다.(선집6,242)
1888년 2월 21일, 런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I
이 저술(주1)에 의하면 우리는, 시간적으로는 우리보다 한 세대 남짓 전에 있으나 독일의 현 세대에게는 이미 꼬박 한 세기나 된 것처럼 낯설게 된 시기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 시기는 독일이 1848년 혁명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모두 1848년의 계속 즉 혁명의 유언 집행일 뿐이다.(선집6,243)
주1) 철학 박사 C. N. 슈타르케의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슈투트가르트, 페르디난트 엔케, 1885년.
18세기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의 독일에서도, 철학의 혁명은 정치적 붕괴의 서곡을 울렸다. 그러나 둘은 어떻게 이렇듯 다르게 보였는가! 프랑스인들은 공인 학문 전체, 교회, 때로는 국가와도 공공연하게 투쟁하였다; 그들의 저술들은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인쇄되었고, 그들 자신은 자칫하면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기 일쑤였다. 이에 반해 독일인들은−교수들이며 국가가 임명한 청년 교사들이었고, 그들의 저술들은 공인된 교과서였으며, 모든 발전을 완결한 체계인 헤겔의 체계는 더욱이 어느 정도는 프로이센 왕국의 국가철학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런 교수들 뒤에, 그들의 현학적이고 애매한 글 뒤에, 그들의 답답하고 지루한 문장 안에 혁명이 숨어 있을 수 있을까? 당시 혁명의 대표자로 여겨^진 사람들은, 바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 철학의 가장 격렬한 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어느 정부도 어느 자유주의자도 보지 못한 것을 이미 1833년에 적어도 한 사람이 보고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 하이네였다.(선집6,243-244)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헤겔의 유명한 다음 명제처럼 속좁은 정부들의 찬사와 역시 속좁은 자유주의자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은 철학 명제는 없었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 현실적이다.”(선집6,244)
이 명제는 확실히 현존하는 모든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예찬하고 전제정치, 경찰국가, 전단(專斷)재판, 검열 등을 철학적으로 축복하는 것이었다. 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 명제를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헤겔에게는 현존하는 모든 것이 곧 현실적이기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는 현실이라는 속성은 동시에 필연적이기도 한 것에만 속한다; “현실은 자신의 전개 과정에서 필연으로 증명된다.” 따라서 헤겔은 결코 정부의 이러저러한 조치−헤겔 자신은 “어떤 조세제도”를 예로 든다−를 곧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필연적인 것은 종국에는 이성적인 것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당시 프로이센 국가에 적용하면 헤겔의 명제는 이런 뜻일 뿐이다: 이 국가는 필연적인 한 이성적이고 이성에 조응한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그럼에도 우리 눈에 악으로 보이고 이런 악에도 불구하고 존속한다면, 정부의 악은 이 악에 조응하는 신하들의 악으로 정당화되고 설명된다. 당시 프로이센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마땅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선집6,244)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현실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시대하에서도 주어진 사회와 정치의 상태에 걸맞는 속성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로마 공화국은 현실적이었지만 이 공화국을 몰아낸 로마 제국 또한 현실적이었^다. 프랑스 군주제는 1789년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즉 모든 필연을 잃고 비이성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군주제는 헤겔이 언제나 매우 열광하며 이야기한 대혁명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군주제가 비현실적인 것이었고 혁명이 현실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전의 현실적인 모든 것은 발전 과정에서 비현실적인 것이 되고 자신의 필연, 존재 권리, 이성적 성질 등을 잃는다; 죽어가는 현실적인 것 대신 생존력 있는 새로운 현실이 나타난다−만일 낡은 것이 거역하지 않고 사멸할 만큼 분별력이 있다면 평화적으로 나타나고, 만일 낡은 것이 이 필연에 저항하면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헤겔의 명제는 헤겔의 변증법 자체에 의해 반대 쪽으로 돌아선다: 인간 역사의 영역에서 현실적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비이성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이미 비이성적인 것이 되기로 정해져 있으며 처음부터 비이성적인 성질이 붙어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모든 것은 비록 현존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현실적인 것이 되기로 정해져 있다. 모든 현실적인 것의 이성적 성질에 관한 명제는, 헤겔의 사유 방법의 모든 규칙에 따라 다음의 다른 명제로 용해된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멸망하여 마땅하다.(선집6,244-245)
그러나 헤겔 철학(여기서 우리는 칸트 이래 모든 운동의 완결로서 이 철학에 제한할 수밖에 없다)의 진정한 의미와 혁명적 성격은,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모든 성과가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실히 끝장내 버린 데 있다. 헤겔의 경우 철학에서 인식해야 한다고 여긴 진리는, 일단 발견되면 암기하기만 하면 되는 완성된 독단적 명제들의 집합이 더 이상 아니었다; 이제 진리는 인식 과정 자체에, 낮은 인식 단계에서 점점 더 높은 인식 단계로 상승하는 과학의 오랜 역사적 발전 속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은 언젠가 이른바 절대적 진리를 발견하여 획득된 절대적 진리를 팔장낀 채 멍하니 쳐다보는 일말고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더 이상 남은 일이 없는 지점에 이르지는 않는다. 철학적 인식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식과 실천 행위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똑같다. 인식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인류의 완전한 이상 상태에서 완결될 수 없다; 완전한 사회, 완전한^ ‘국가’란 환상 속에서만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역사의 모든 상태는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나아가는 인간 사회의 끝없는 발전 행정 속에 있는 일시적 단계들일 뿐이다. 각 단계는 필연적이며 따라서 그 단계를 낳은 시대와 조건에 대해서 정당하다; 그러나 각 단계는 자신의 태내에서 서서히 발전하는 새롭고 더 높은 조건에 대해서는 무기력하고 정당하지 않다; 각 단계는 더 높은 단계에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고 이 더 높은 단계 또한 다시 일련의 쇠락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부르주아지가 대규모 산업 및 경쟁과 세계시장을 통해 모든 안정되고 유서 깊은 제도를 실제로 해체하듯이, 이 변증법 철학은 궁극적, 절대적 진리와 이에 조응하는 절대적 인류 상태에 대한 모든 표상을 해체한다. 이 철학 앞에서는 궁극적인 것, 절대적인 것, 신성한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철학은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모든 것에서 무상을 보여 준다. 이 철학 앞에서는 생성과 소멸, 낮은 데서 높은 데로의 끝없는 상승의 부단한 과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 과정을 사유하는 뇌에 그대로 반영한 것이 이 철학 자체이다. 물론 이 철학은 보수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이 철학은 특정 인식 단계와 사회 단계가 그 시대와 상황에 대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이러한 고찰 방식의 보수성은 상대적이며 그 혁명적 성격은 절대적이다−이 혁명적 성격이야말로 이 철학이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절대적인 것이다.(선집6,245-246)
여기서 우리는 이런 고찰 방식이 자연과학의 현재 입장과 꼭 들어맞는가라는 문제를 고찰할 필요는 없다. 자연과학은 지구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있을 수 있는 종말을 예언하지만 지구에 사람이 거주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확실한 종말을 예언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 역사에도 상승하는 가지뿐 아니라 하강하는 가지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아무튼 사회의 역사가 내리막 길로 접어드는 전환점까지는 아직 상당히 멀었다. 따라서 당시에 자연과학이 전혀 검토하지 않았던 대상을 헤겔 철학이 다루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선집6,246)
그러나 사실 여기서 말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위의 설명은 헤겔의 경우 그다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 설명은 헤겔의 방법의 필연^적 귀결이지만 그 자신은 이 귀결을 이토록 분명하게 끌어내지 않았다. 더욱이 그 이유는 간단했는데, 그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야 했고 철학 체계는 재래의 요구에 따라 어떤 종류든 절대 진리로 끝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헤겔이 특히 논리학에서 이런 영원한 진리란 논리적 또는 역사적 과정 자체일 뿐이라고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그는 바로 자기의 체계를 어디선가 끝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이 과정에 종착점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논리학에서 그는 이 종착점을 다시 출발점으로 만들 수 있다. 이때 최종 지점인 절대 이념−이 절대 이념은 그가 이것에 관해 절대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한에서 절대적이다−은 자연으로 ‘외화되며’ 즉 전화하며 그 후 정신, 즉 사유와 역사에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러나 철학 전체의 종결점에서 출발점으로 비슷하게나마 되돌아 오는 것은 단 하나의 길에서만 가능하다. 즉 인류가 바로 이 절대 이념을 인식하는 것을 역사의 종착점으로 설정하고 절대 이념에 대한 이런 인식이 헤겔 철학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헤겔 체계의 독단적 내용 전체는 독단적인 모든 것을 해체하는 그의 변증법적 방법과 모순되게 절대적 진리로 선언된다; 또 혁명적인 면은 무성하게 자란 보수적인 면에 깔려 질식된다. 그리고 철학적 인식에 들어맞는 것은 역사적 실천에도 들어맞는다. 헤겔이라는 인물에서 절대 이념의 완성을 성취한 인류는, 실천적으로도 절대 이념을 현실 속에서 관철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나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동시대인에 대한 절대 이념의 실천적, 정치적 요구가 너무 높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법 철학 결론에서 보다시피 절대 이념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자기 신민들에게 굳게 약속했으나 허사가 된 신분제적 군주제에서, 따라서 당시의 독일 소부르주아 관계에 알맞은 유산계급의 제한되고 완화된 간접적 지배에서 실현된다; 여기서는 여전히 귀족의 필연이 사변적 방식으로 증명된다.(선집6,246-247)
그러므로 철저하게 혁명적인 사유 방법을 매개로 매우 온건한 정치적 결론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는 체계의 내적 필연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이런 결론의 독특한 형식은, 헤겔이 독일인이었고 자신과 동시대인 괴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등 뒤에 속물들의 변발 한자락을 매달^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괴테나 헤겔은 각자 자기 영역에서는 올림푸스 산의 제우스였지만 두 사람 모두 독일 속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선집6,247-24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헤겔의 체계가 이전의 어떤 체계와도 비교할 수 없이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이 영역에서 오늘날에도 놀랄 만한 풍부한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정신 현상학(이것은 정신의 발생학 및 고생물학과 비슷한 것으로 부를 수 있는데, 개인의 의식이 서로 다른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것을 인간의 의식이 역사적으로 겪는 단계들을 압축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파악한다),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그리고 이 정신철학은 다시 다음과 같은 그 역사적 개별 하위 형태로 완성된다: 역사철학, 법철학, 종교철학, 철학사, 미학 등등. − 이 모든 서로 다른 역사 영역에서 헤겔은 발전을 관통하는 가닥을 찾고 증명하는 데 몰두한다; 또 그는 창조적 천재일 뿐 아니라 백과사전처럼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기 떄문에 도처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체계’의 필요에 의하여 헤겔이 여기에서 저 억지 구조 속으로 매우 자주 도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 이 구조에 관해서는 보잘것없는 비평가들이 오늘날까지 말도 안 되는 악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조는 그의 작업의 틀과 발판일 뿐이다; 우리가 여기에 쓸데없이 머물지 않고 웅대한 건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오늘날에도 충분하 가치가 있는 수많은 보물을 찾을 것이다. 모든 철학자에게 ‘체계’ 그 자체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게다가 그 이유는 바로 체계란 인간 정신의 불변하는 욕구 즉 다음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모든 모순을 극복하려는 욕구. 그러나 모든 모순이 영원히 제거되면 우리는 이른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게 되고 세계사는 끝나게 된다. 그렇지만 세계사는 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는데도 계속되어야 한다−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모순이다. 이렇게 설정된 철학의 과제란 한 사람의 철학자가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만이 진보적 발전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통찰하기만 하면, −이런 통찰에는 결국 헤겔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없다−우리가 이 점을 통찰하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의미에서^ 철학 전체는 끝난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는 그리고 각 개인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를 내버려 두고 대신 변증법적 사유를 매개로 실증과학의 방법과 그 성과들의 총괄적 파악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를 추구한다. 철학 일반은 헤겔로서 종결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그가 철학 발전 전체를 그의 체계 속에서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총괄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비록 무의식적이나마 체계의 이 미궁 속에서 세계에 대한 진짜 실증적인 인식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선집6,248-249)
우리는 이런 헤겔의 체계가 철학으로 물든 독일의 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 결과는 하나의 개선행렬이었고 이 행렬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헤겔이 죽은 뒤에도 결코 잠잠해지지 않았다. 잠잠해지는 것과는 반대로 바로 1830년부터 1840년까지 ‘헤겔류’는 독보적으로 우세했고 그의 반대자들조차 어느 정도 감명시켰다; 바로 이 시기에 헤겔의 견해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아주 다양한 과학 속에 매우 충분히 스며들었고 또한 평범한 ‘교양 있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의 원천으로 삼는 대중문학과 일간 신문도 충분히 발효시켰다. 그러나 모든 전선에 걸친 이 승리는 단지 내부 투쟁의 전주곡일 뿐이었다.(선집6,249)
헤겔의 전 학설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아주 다양한 실천적 당파의 견해를 수용할 넉넉한 공간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당시 이론적인 독일에서는 무엇보다 다음의 두 가지가 실천적이었다: 종교와 정치. 헤겔의 체계에 큰 비중을 둔 사람들은 두 영역에서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변증법적 방법을 핵심으로 본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주 극단적인 반대 편에 속했다. 헤겔 자신은 바록 그의 저작에서 꽤 자주 혁명적 분노를 터뜨렸지만 대체로 보수적인 측면에 기운 듯이 보였다; 아마 그로서는 그의 방법에서보다 그의 체계에서 훨씬 더 ‘신물나는 사고 노동’을 하였을 것이다. 삼십 년대 말 무렵 학파는 점점 더 눈에 띄게 분열했다. 좌익, 이른바 청년 헤겔파는 경건주의 정통파 및 봉건적 반동과의 투쟁에서 달아오른 시사 문제들에 대한 저 철학적-품위있는 자제를 차례차례 포기했다. 그때까^지 그들의 학설은 이런 자제 덕분에 국가의 관용과 심지어 보호를 확실히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1840년 정통파의 광신과 봉건적-절대주의적 반동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더불어 즉위했을 때 공개적인 편들기가 불가피해졌다. 투쟁은 아직도 철학을 무기로 사용했지만 더 이상 추상적-철학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물려받은 종교와 현존하는 국가를 사멸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비록 독일 연보에서는 실천적 궁극 목표가 대체로 철학으로 변장하고 나타났지만, 청년 헤겔학파는 1842년의 라인신문에서 직접 신흥 급진 부르주아지의 철학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철학적 겉옷을 검열을 속이기 위해서만 사용했다.(선집6,249-250)
그러나 정치는 당시 가시가 매우 많이 돋친 영역이었고 따라서 주요한 투쟁은 종교를 겨냥했다; 물론 이 투쟁은 특히 1840년 이래 간접적으로는 정치투쟁이기도 했다. 최초의 충격을 준 것은 1835년의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였다. 그 후에 브루노 바우어는, 이 책 속에 서술되어 있는 복음서의 신화 형성에 관한 이론에 맞서 복음서의 많은 이야기가 저자들 자신에 의해 날조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실체’와 ‘자의식’의 투쟁이라는 철학적 변장을 한 속에서 이루어졌다;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들이 공동체 안에서 무의식적-전통적 신화 형성을 통해 생겨났는가 아니면 복음서 저자들 자신에 의해 날조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미치는 힘이 ‘실체’인가 아니면 ‘자의식’인가라는 물음으로 부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 무정부주의의 선구자 슈티르너−바쿠닌은 그에게서 매우 많은 것을 채용하였다−가 나타나 자신의 지고한 ‘유일자’를 지고한 ‘자의식’ 위에 올려 놓았다.(선집6,250)
헤겔팍파의 해체 과정에서 나타난 이 측면은 더 이상 통찰하지 않겠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청년 헤겔파의 많은 주요 인물들은 기성 종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실천적 필요 때문에 영국-프랑스의 유물론으로 떠밀려 갔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자기 학파의 체계와 갈등에 빠졌다. 유물론은 자연을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지만, 헤겔의 체계에서 자연은 절대 이념의 ‘외화’ 곧 이념의 격하를 표상할 뿐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유와 그 사상적 산물인 이념이 근본적인 것이고 자^연은 이념 일반의 하강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파생적인 것이다. 사정이 놓든 나쁘든 사람들은 이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선집6,250-251)
그때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 나왔다. 이 책은 단도직입적으로 유물론을 다시 왕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한 방에 모순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자연은 모든 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자연은 바로 자연의 산물인 우리 인간이 성장하는 기초이다; 자연과 인간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종교적 환상이 창조해낸 더 높은 존재들은, 우리 자신의 본질의 환상적 반영일 뿐이다. 금기는 깨졌다; ‘체계’는 분쇄되어 한 구석으로 내팽개쳐졌고 모순은 공상 속에만 있는 것으로 해소되었다−누구든 이 책의 해방 효과를 생각해 보려면 이 효과를 몸소 체험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열광했다; 우리는 모두 한순간에 포이어바흐주의자가 되었다. 맑스가 얼마나 열렬하게 새로운 견해를 환영했고−모든 비판적 유보에도 불구하고−포이어바흐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는 신성 가족에서 읽을 수 있다.(선집6,251)
이 책의 결점조차 이 책이 일시적으로 효과를 낳는 데 기여했다. 통속소설같고 심지어 곳곳에 있는 과장된 문체는, 더 많은 독자를 보장했고 어쨌든 오랜 동안 추상적이고 난해한 헤겔류 이후에 나온 청량제였다. 과도한 사랑의 신격화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정당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순수 사유’의 지배에 맞서 용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은 다음이다: 1844년 이래 ‘교양 있는’ 독일에서 전염병처럼 번질 ‘진정한 사회주의’는 포이어바흐의 바로 이 두 가지 약점과 관련되어 있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과학적 인식 대신 통속 소설같은 문구를 늘어놓았으며 생산의 경제적 변혁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 대신 ‘사랑’을 매개로 한 인류의 해방을 떠들었고, 간단히 말해서 지겨운 통속소설과 사랑 예찬으로 빠져버렸는데 그 전형은 칼 그륀씨였다.(선집6,251)
앞으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다음이다: 헤겔 학파는 해체되었지만 헤겔 철학은 비판적으로 극복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와 바우어는 각자 이 철학의 한 측면을 끄집어내어 상대 측면에 논쟁적으로 맞세웠다. 포이어바^흐는 체계를 부수어 간단히 한구석으로 내팽개쳤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철학을 잘못된 것이라고 간단히 선언함으로써 그 철학을 끝장낼 수는 없다. 그리고 헤겔 철학처럼 민족의 정신 발전에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미친 강력한 작품은, 손쉽게 무시한다고 해서 제거되지는 않는다. 이 철학은 말뜻 그대로 ‘지양’되어야 했다. 즉 이 철학의 형식은 비판적으로 폐기되어야 하지만 이 형식을 통해 얻은 새로운 내용은 구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졌는지는 아래서 더 살펴보자.(선집6,251-252)
그러나 그러는 동안 1848년 혁명은 마치 포이어바흐가 헤겔을 제쳐버렸듯이 철학 전체를 거리낌없이 한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포이어바흐 자신도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선집6,252)
II
모든 철학, 특별히 최신 철학의 중대한 근본 문제는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사람들이 자기 몸의 구조를 전혀 모른 채 꿈에서 나타난 것(주2)에 자극을 받아 사유와 감각은 자기 몸의 활동이 아니라 이 몸 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몸을 떠나는 특별한 영혼의 활동이라는 표상을 가졌던 아주 오래 전부터−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영혼과 외부 세계의 관계를 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죽을 때 영혼이 몸과 갈라져 계속 산다면 영혼이 특별하게 죽는다고 꾸밀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영혼 불멸에 대한 표상이 생겨났으며, 이 표상은 당시의 발전 단계에서 결코 위안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자 그리스인들의 경우처럼 흔히 실제적인 불행으로 나타났다. 종교적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은 일단 받아들였지만 몸이 죽은 후에는 이 영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일반^적 한계에서 생긴 곤경 때문에 대체로 개인의 불멸에 대한 지루한 상상이 생겨났다.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자연의 힘들의 인격화를 통해 최초의 신들이 생겨났다. 이 신들은 종교가 더 발전하면서 갈수록 초세세계적인 모습을 띠었으며 마침내 정신의 발전 행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추상 과정, 내 방식대로 말하면 어느 정도 제한되고 서로 제한하는 많은 신들로부터 증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일신교적 종교들의 배타적인 유일신에 대한 표상이 생겨났다.(선집6,253-254)
주2) 오늘날에도 야만인과 수준 낮은 미개인의 경우 꿈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은 잠시 몸을 떠난 영혼이라는 표상이 널리 퍼져 있다; 따라서 실제 인간은, 꿈을 꾼 사람의 꿈에 나타나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임 던은 1884년 가야나의 인디언에게서 이런 사실을 발견했다.(선집6,253)
따라서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에 관한 문제, 철학 전체의 최고의 문제는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야만적인 상태에서 나타난 편협하고 무지한 표상들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럽 인류가 기독교 중세의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이 문제는 매우 날카롭게 제기될 수 있었고 충분한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큰 역할을 했던 존재에 대한 사유의 지위에 관한 문제, 다음과 같은 문제: 무엇이 본원적인가, 정신인가 아니면 자연인가?−이 문제는 교회에 맞서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날카로워졌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한 옛날부터 거기에 존재하는가?(선집6,254)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개의 큰 진영으로 갈라졌다. 자연에 대해 정신의 본원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어떤 종류든 결국 세계의 창조를 받아들인 철학자들−그런데 이 창조는 흔히 기독교의 경우보다 예컨대 헤겔 같은 철학자들의 경우 훨씬 더 복잡하고 허황되다−은 관념론 진영을 이루었다. 자연을 본원적인 것으로 여긴 그 밖의 철학자들은 유물론의 다양한 학파에 속한다.(선집6,254)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두 표현은 본래 이것말고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여기서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두 표현에 다른 의미를 집어넣으면 어떤 혼란이 생기는지는 아래서 살펴볼 것이다.(선집6,254)
그러나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상은 이 세계 자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의 사유는 현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고 우리는 현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과 개념으로 현실의 올바른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철학 용어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라고 불리며, 절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예를 들어 헤겔의 경우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은 바로 사유하기에 알맞은 이 세계의 내용이고 세계를 절대이념의 단계적 실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인바, 이런 절대이념은 영원한 옛날부터 세계와 독립하여 세계 이전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유가 이미 처음부터 사상의 내용을 이루는 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증명해야 할 것이 이미 슬그머니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헤겔은 조금도 거침없이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자기의 증명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철학은 자기 자신의 사유에 옳은 것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옳은 철학이며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은 인류가 즉시 자신의 철학을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기고 전세계를 헤겔의 원리들에 따라 반영함으로써 입증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하나의 환상이며, 이런 환상을 헤겔은 모든 철학자와 상당히 공유하고 있다.(선집6,255)
그러나 그 밖에도 세계의 인식 가능성이나 실로 완벽한 인식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련의 다른 철학자들이 있다. 좀더 현대의 철학자들 가운데에는 흄과 칸트가 이들에 속하며, 이들은 철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견해를 반박하는 데에 결정적인 것은 관념론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에서 헤겔이 이미 다 말했다;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적인 것을 덧붙인 일은 깊이가 있다기보다 재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철학적 생각이나 그 밖의 모든 어리석은 철학적 생각을 가장 적절하게 반박하는 것은 실천, 즉 실험과 산업이다. 만일 우리가 자연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스스로 만들고 그 조건들로부터 그 일이 일어나게 하고 게다가 그 일을 우리 목적에 쓸모 있게 함으로써 그 일에 대한 우리의 파악이 옳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면, 칸트의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는 끝장난다. 동물과 식물의 몸에서 산출된 화학 물질들은 유기 화학에 의해 차례차례 석출되기 시작할 때까지는 그런 ‘물자체’로 남아 있었다; 유기 화학과 더불어 예컨대 꼬두서니의 색소인 알리자린처럼 ‘물자체’는 우리를 위한 사물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알리자린을 들에 있는 꼭두서니의 뿌리에서 자라게 하지 않고 콜타르에서 더 값싸고 간단하게 만들어낸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는 삼백 년 동안 하나의 가설이었고 비록 일대 백, 천, 만의 내기를 걸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의 가설이었다; 그러나 르베리에가 이 체계에 의해 제공된 자료들을 가지고 미지의 행성의 실존의 필연뿐만 아니라 그 행성이 하늘에서 있어야 할 지점도 계산했을 때 그리고 그 뒤 갈레가 이 행성(해왕성)을 실제로 발견했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신칸트주의자들이 칸트의 파악을, 영국에서 불가지론자들이 흄의 파악을(영국에서는 흄의 파악이 결코 단절된 적도 없었다) 되살리려고 시도한다면, 이것은 오래 전에 이루어진 이론적, 실천적 반박과 비교하여 과학적으로는 하나의 퇴보이며 실천적으로는 유물론을 뒤로는 받아들이면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반박하는 부끄러운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선집6,256)
그러나 데카르트부터 헤겔까지 그리고 홉스부터 포이어바흐까지 이 오랜 기간 동안 철학자들을 앞으로 추동한 것은 그들이 생각했듯이 순수 사상의 힘만이 결코 아니었다. 그 반대. 실은 철학자들을 앞으로 추동한 것은, 주로 강력하고 점점 더 빠르게 앞장서서 돌진하는 자연과학과 산업의 진보였다. 유물론자들의 경우 이 점이 이미 표면에 드러났지만, 관념론적 체계들도 더욱더 유물론적 내용으로 채워졌고 정신과 물질의 대립을 범신론적으로 화해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결국 헤겔의 체계는 방법과 내용 면에서 관념론적으로 거꾸로 선 유물론을 의미할 뿐이다.(선집6,256)
그러므로 이것으로 슈타르케가 포이어바하의 특징을 묘사하면서 우선적으로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이 근본 문제에 대해 그가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연구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짤막한 서론에서 슈타르케는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의 견해를 불필요하게 철학적이고 어려운 언어로 기술하고 있으며 또 헤겔 저작의 몇몇 구절에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얽매임으로써 헤겔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있다. 이러한 짤막한 서론 뒤에 슈타르케는 포이어바흐의 ‘형이상학’ 자체의 발전 과정을 이 철학자와 관련된 저술들의 순서에 따라 드러나는 대로 자세히 서술한다. 이 서술은 정성스럽고 일목요연하게 가다듬어져 있지만 다만 책 전체가 그러^한 것처럼 도처에서 꼭 불가피하지도 않은 철학적 표현 방식이라는 군더더기들을 무겁게 짐지고 있다. 저자가 같은 학파나 포이어바흐 자신의 표현 방식을 덜 고집할수록 또 아주 다양한 경향들 특히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스스로 철학적이라 부르는 경향들의 표현을 더 섞어 쓸수록 이 군더더기는 더 귀찮아질 것이다.(선집6,256-257)
포이어바흐의 발전 과정은 한 −물론 아주 정통은 아니지만− 헤겔주의자가 유물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며 일정한 단계에서 선행자들의 관념론적 체계와 완전히 단절이 필요한 발전이다. 그에게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통찰이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강요되고 있다. 헤겔의 ‘절대 이념’의 세계 이전의 존재, 즉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논리적 범주의 선존재’란 초세계적 창조자에 대한 신앙의 환상적 유물일 뿐이다; 또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질료적이며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며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아무리 초감각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질료적 신체기관인 뇌의 산물이다. 물질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이야말로 물질의 최고 생산물일 뿐이다. 이것이 마땅히 진짜 유물론이다. 여기까지 와서 포이어바흐는 멈칫한다. 그는 습관적인 철학적 편견, 즉 유물론의 실상이 아니라 그 이름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는 말한다: “유물론은 나에게 인간의 본질과 지식이라는 건물의 기초다; 그러나 나에게 유물론은 더 좁은 의미의 자연 연구자들인 생리학자들, 예컨대 몰레쇼트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 생리학자들의 관점에 직업에서 볼 때 꼭 필요한 것, 즉 건물 자체도 아니다. 지금까지는 나는 유물론자들에게 완전히 동의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선집6,257)
포이어바흐는 여기서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파악에 기초한 일반적 세계관인 유물론을 일정한 역사 단계, 특히 18세기에 이 세계관이 표현된 특수한 형식과 함께 내던진다. 더욱이 그는 천박해지고 통속화된 형태와 함께 이 일반적인 세계관인 유물론을 내던진다. 18세기 유물론은 오늘날에도 이런 형태로 자연 연구자와 의사의 머릿속에 계속 실존하고 있으며, 50년대에는 뷔히너, 포크트, 몰레쇼트 등에 의해 순회 강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관념론이 일련의 발전 단계를 거쳤듯이 유물론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때마다 유물론은 그 형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도 유물론적으로 다루어질 때부터 발전의 새 길이 열린다.(선집6,257-258)
지난 세기의 유물론은 주로 기계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모든 자연과학 중에서 역학, 더욱이−천상과 지상의−고체역학, 간단히 말해서 중력의 역학만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학은 겨우 유치한 연소설의 형태로 있었다. 생물학은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동식물 유기체는 날림으로 연구되었고 순전히 기계적인 원인으로 설명되었다; 데카르트에게 동물이 그랬듯이 18세기 유물론자들에게 인간은 하나의 기계였다. 화학적, 유기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 과정, 역학의 법칙들이 비록 타당하지만 더 높은 다른 법칙들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나는 이 과정들에 역학의 척도만을 적용하는 것은, 고전 프랑스 유물론의 독특하면서도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첫 번째 한계를 이룬다.(선집6,258)
이 유물론의 두 번째 독특한 한계는 세계를 하나의 과정으로서, 즉 역사적으로 계속 형성 중인 질료로서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 한계는 당시 자연과학의 상태와 이 상태와 연관되어 있는 형이상학적으로 즉 반변증법적으로 철학하는 방식에 상응한다. 사람들은 자연이 영원히 운동하고 있다는 사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당시의 표상에 따르면 역시 영원히 원을 그리고 있었으며 따라서 진척이 전혀 없었다; 이 운동은 되풀이하여 똑같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었다. 이런 표상은 당시로서는 불가피했다. 칸트의 태양계 생성에 관한 이론은, 당시에 막 나타났고 아직은 단순히 진기한 설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의 발전사인 지질학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늘날의 생물들은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의 오랜 일련의 발전이 결과라는 표상은, 당시로서는 도대체 과학으로 확립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비역사적 파악은 불가피하였다. 이것은 헤겔의 경우에도 있었던 만큼 우리는 이것 때문에 18세기 철학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헤겔의 경우 자연은 이념의 단순한 ‘외화’로서 결코 시간 속에서 발전할 수 없고 공간 속에서 그 다양성을 펼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연은 그 속에 포함된 발전 단계들을 동시에 나란히 늘어놓고 항상 똑같은 과정을 영원히 되풀이하라고 선고받는다. 공간 속이지만 시간 −모든 발전의 기본 조건− 밖에서 발전한다는 이런 허튼 주장을 헤겔이 자연에 부과한 때는 바로, 지질학, 발생학, 식물과 동물의 생리학, 유기 화학 등이 형성되었고 이 새로운 과학들을 토대로 훗날의 발전 이론의 천재적인 조짐들이 나타난(예를 들어 괴테와 라마르크) 시기였다. 그러나 체계가 그렇게 요구했고 방법은 체계를 위해 자기를 배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선집6,258-259)
똑같은 비역사적 파악이 역사 영역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다. 이 영역에서 중세의 잔재에 맞선 투쟁은 계속 눈을 가리고 있었다. 중세는 천년 동안의 전반적 야만 상태로 인한 역사의 단순한 단절로 여겨졌다; 중세의 위대한 진보 −유럽 문화 영역의 확대, 서로 인접한 그곳에서 형성된 생존력 있는 위대한 민족들, 마지막으로 14, 15세기의 엄청난 기술 진보,−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굵직한 역사적 연관에 대한 합리적 통찰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역사는 기껏해야 철학자들이 이용하기 위한 예들과 일화들의 집합으로 쓰였다.(선집6,259)
독일에서 50년대에 유물론을 팔고 다녔던 속물적인 행상인들은 결코 그들의 스승의 이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때부터 이루어진 자연과학의 모든 진보는, 그들에게 세계 창조자의 존재를 반대하는 증거로만 쓰였다; 사실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결코 그들의 일이 아니었다. 관념론은 온갖 방책을 다 써 보았지만 도리없이 1848년 혁명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관념론은 유물론이 일시적으로 더욱 깊은 나락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보고 만족해 하였다. 포이어바흐가 이런 유물론에 대한 책임을 거절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 그로서는 순회 강연자들의 가르침을 유물론 일반과 혼동하지 않기만 하면 그만이었다.(선집6,259)
그렇지만 여기서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포이어바흐가 살아 있을 때에도 자연과학은 아직 강렬한 발효 과정 속에 있었고 그 과정은 최근 15년 동안에야 비로소 비교적 분명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전대미문의 새로운 인식 소재가 제공되었으나 잇달은 발견들의 연관을 세우고 이런 발견들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는 일은 아주 최근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물론 포이어바흐는 세 가지 결정적 발견−세포, 에너지 전화, 다윈이 이름붙인 발전 이론−을 모두 겪었다. 그러나 어떻게 시골에 있는 외로운 철학자가, 자연 연구자들조차 당시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논쟁 중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충분히 이용할 줄 모르는 발견들을 제대로 평가할 만큼 과학을 충실히 쫓아갈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서 죄는 오로지 비참한 독일 상황에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 덕분에 철학 교수직은 꼬치꼬치 따지고 벼룩같은 절충적 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반면에, 이 모든 사람 위에 탑처럼 우뚝 솟은 포이어바흐는 조그만 촌에서 시골뜨기가 되어 시대에 뒤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가능해졌지만 프랑스 유물론의 모든 일면성을 제거한 역사적 자연 파악을 포이어바흐가 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선집6,259-260)
둘째 포이어바흐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아주 옳았다. 단순한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인간 지식이라는 건물의 기초이지만 건물 자체는 아니다.”(선집6,260)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속에서도 살고 있고 인간 사회는 자연에 못지않게 그 발전의 역사와 과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관한 과학 즉 이른바 역사적 과학과 철학적 과학의 총체를 유물론적 기초와 일치시키고 이 기초 위에서 재구성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 일은 포이어바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기초’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서는 물려받은 관념론적 질곡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이 사실을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정한다: “지금까지는 나는 유물론자들에게 동의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선집6,260)
그러나 사회 영역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1840년 혹은 1844년의 자기 관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포이어바흐 자신이었으며 게다가 그 이유는 또다시 주로 그의 황폐함 때문이었다. 이 황폐함 때문에 그는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도 사교적 교류에 소질이 있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친구나 적으로 교류하면서가 아니라 자신의 외로운 머릿속에서 사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가 이 영역에서 여전히 관념론자인지는 나중에 하나하나 살펴볼 것이다.(선집6,261)
여기서 더욱 주의해야 할 점은 슈타르케가 포이어바흐의 관념론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포이어바흐는 관념론자이며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19면)−“기초, 전체의 하부구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념론이다. 우리에게 실재론이란 우리가 우리의 관념적 경향을 쫓아가는 동안 사도(邪道)를 막아주는 보호자일 뿐이다. 진리와 정의에 대한 동정, 사랑, 열정 등은 관념적 힘이 아닌가?”(8면)(선집6,261)
첫째, 여기서 관념론이란 관념적 목적을 쫓아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껏해야 칸트의 관념론과 그의 ‘정언명령’과 필연적 관련이 있을 뿐이다; 칸트조차 자기 철학을 ‘선험적 관념론’이라 부른 까닭은 결코 이 철학에서도 윤리적 이상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슈타르케가 나중에 생각해내듯이 아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철학적 관념론이 윤리적 즉 사회적 이상에 대한 믿음 주위를 맴돈다는 미신은, 철학 밖에서 즉 자기에게 필요한 얼마 안되는 철학적 교양의 단편을 쉴러의 시에서 외웠던 독일 속물들에게서 생겨난 것이다. 칸트의 무력한 ‘정언 명령’−이 명령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따라서 결코 어떤 현실적인 것에도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력하다−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하고, 쉴러가 중매한 실현불가능한 이상에 대한 속물의 광신을 누구보다 잔인하게 조롱한(예를 들어 현상학을 보라) 사람은 바로 완벽한 관념론자 헤겔이었다.(선집6,261)
둘째, 그러나 사람을 운동시키는 모든 것이 사람의 머리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외면할 수 없다−심지어 먹고 마시는 일조차 머리를 매개로 하여 느끼는 배고품과 목마름으로 시작하고 역시 머리를 매개로 하여 느끼는 배부름으로 끝난다. 외부 세계가 사람에게 미치는 작용은 그의 머릿속에서 표현되고 그 속에서 감정, 사상, 충동, 결심 등 간단히 말해서 ‘관념적 경향’으로 반영되며 이런 형태로 ‘관념적 힘’이 된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주로 ‘관념적 경향’을 쫓고 자신에 대한 ‘관념적 힘’의 영향을 인정하는 상황이 된다면−이 상황 때문에 그가 관념론자가 된다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발전한 사람은 모두 타고난 관념론자이고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유물론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선집6,261-262)
셋째, 인류가 적어도 지금은 대체로 진보하는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신념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과는 절대로 무관하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볼테르나 루소같은 이신론자들 못지않게 이런 신념을 거의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가지고 있었고 그 신념을 위해 매우 자주 개인적인 큰 희생을 치렀다. 만일 누군가 ‘진리와 정의를 위한 열정’−이 말을 좋은 뜻으로 해석해서−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사람은 예컨대 디드로였다. 그러므로 슈타르케가 이 모든 것을 관념론으로 선언한다면, 이 선언은 유물론이라는 말과 두 노선의 대립 전체가 이제 그에게는 완전히 무의미해졌음을 증명할 뿐이다.(선집6,262)
사실 슈타르케는, 여기서 성직자들의 오래 된 비방에서 물려받은 유물론이라는 이름에 대한 속물의 편견에 용서할 수 없는 양보를 하고 있다−비록 무의식적이었겠지만, 속물들은 유물론을 마구 처먹는 일, 마구 들이키는 일, 눈요기, 정욕, 교만한 태도, 물욕, 인색, 탐욕, 부당한 이익 추구, 증권 거래소 사기 등 간단히 말해서 속물 자신이 암암리에 하고 있는 모든 추잡한 악덕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관념론을 미덕, 일반적 인류애, 대체로 ‘더 나은 세계’ 등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한다. 속물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것들을 호언장담하지만 그 자신은 기껏해야 습관적인 ‘유물론적’ 방탕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숙취 또는 파산을 의례껏 겪고 나서 다음과 같은 자기의 애창곡을 부를 때에만 이런 것들을 믿을 뿐이다: 사람이 무엇이더냐−반은 짐승, 반은 천사라네.(선집6,262)
그 밖에 슈타르케는 오늘날 독일에서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뽐내고 있는 대학 강사들의 공격과 명제에 맞서 포이어바흐를 변호하기 위해 많이 애쓴다. 독일 고전 철학의 이 태반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이 점은 틀림없이 중요할 것이다; 슈타르케 자신에게도 이 점은 꼭 필요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 일로 독자들을 괴롭히지 않겠다.(선집6,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