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혜옥 할머니의 생애
전남 나주 출신으로, 다른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과는 조금 다르게 조상 대대로 소문난 재력가 집안. 그의 부친은 나주에서 ‘영신상회’라는 간판으로 소금판매업, 암모니아 배급소, 전당포를 운영했는데, 나주 역전 상권을 쥐락펴락 할 만큼 큰 재력을 형성함.
“역전 곳간은 다 우리 것이었어. 나주 상권을 다 쥐고 있었으니까. 보리밥은 구경도 못해봤지. 아마 나주 골에서 금 수저로 밥 먹은 집은 나 밖에 없었을 거야.”
당시에 벌써 4살 때부터 유치원엔 다녔을 정도로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이었음. 당시 유치원생이라고는 고작 8명에 불과했다고 함. 아버지는 언제나 밖을 행차할 때 큰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 외 조랑말만 집에 3필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5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이 있었음. 1944년 3월 나주 초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이듬해 다시 상급학교 여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교에서 ‘재습(再習)’이라는 과정을 치르고 있었다. 5월경 마사키 도시오(正木俊夫) 교장과 곤도 헌병이 교실에 들어섰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좋은 여학교에도 갈수 있다는 것.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 속으로 좋았지. 친구들은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데 내가 일본 여학교에 다니면 내가 제일 최고가 되겠다 싶었지. 나 간 것 보고 간 사람도 많았을 거야. 나주 부잣집 딸도 간다고 하니까….”
나주 역에는 모두 24명이 집합했다. 이들의 인솔은 곤도헌병과 당시 학교 임시교사로 있던 손상옥(孫相玉) 선생이 담당했다. 나주를 떠나던 날은 특별히 아버지도 여수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리고 당시로는 남들은 쥐어보지도 못했을 꽤 큰 액수의 지폐 3장을 그녀의 손에 쥐어 줬다. 그녀의 나이 열 세살 때였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서도 뛸 듯이 기뻤단다. 일본행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기대가 꺾인 건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녀에게 주로 배치된 일은 비행기 부품에 국방색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마스크라도 주고 그러면 되는데, 냄새가 아주 고약해. 환풍기도 없었거든. 머리가 아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도 두 번쯤 돼.”
학교는커녕 겨우 일본에 관한 공부와 군가 등을 외우도록 하는 정도였다. 월급 역시 없었다. 공장의 감시자와 일본 애들은 걸핏하면 ‘조센진’이라며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그해 12월 도난카이 대지진에는 공장 지붕이 붕괴되면서 오른쪽 어깨에 철골이 떨어져 병원에 실려 가기조차 했다. 당시 6명의 동료가 건물더미에 깔려 현장에서 숨졌다.
어느 덧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철모르고 일본에 끌려가 갖은 고생을 했지만 귀국 후 고향에 돌아온 후의 삶도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귀국 후 곧바로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광주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해방정국과 연이어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집안은 여러 풍파를 견뎌야 했다. 친일파로 몰린 아버지는 한 동안 고향을 등지는 신세가 됐다. 당시 시대 분위기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한때는 아버지 덕분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그녀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가는 바람에 광주 사범학교도 도중 중단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수녀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수녀원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했더니 폐결핵이라는 거야. 안 된데. 일본에서 독한 페인트 냄새 때문에 고생한 것 때문이었지….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나중에 화순에서 생활하던 도중 이미 가정을 두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나 아이 하나를 낳았다. 고향에는 갈 수 없었다. 아들을 낳았지만 정식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적할수도 없었다. (호적에는 미혼으로 기록)
“위안부 갔다 왔다고 여긴 아들이 처음에는 제 엄마라는 소리도 안 했어. 재판 때문에 일본만 갔다 오면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더라고. 사춘기 때는 나더러 ‘더러운 여자’라며, ‘왜 날 낳았느냐’고, ‘죽어 버릴란다’고 칼 들고 난리를 치는 통에...” “한 번은 그 칼 뺏다가 다치기까지 했고….”
아들의 오해는 한참이 지나서야 풀릴 수 있었다. 2003년 5월 어머니를 따라 일본 재판에 함께 동행 하고 난 뒤부터였다. 위안부로 오해하고 있는 아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일부러 ‘나고야 소송 지원회’에서 어머니와 아들 안호걸씨를 초청한 것. 아들 안씨는 이때 연극 ‘봉선화-조선여자근로정신대’ 공연을 통해 위안부와 근로정신대가 어떻게 구분돼야 하는 지를 새삼 알게 됐고, 무엇보다 국적을 뛰어넘어 돕고 있는 일본인들의 헌신적 모습에서 큰 감화를 받았다. 더불어 어머니에 대한 오해가 오히려 어머니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김 할머니는 정의감이 남다른 분이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에는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계엄군에 의해 한 대학생이 끌려가자, 순간 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이를 말리다가 군인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뒤늦게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명예회복 조치로 ‘5.18 유공자(부상자)’인 그녀는 국립 5.18묘역 제6묘역에 잠들어 있다.
김 할머니는 1965년 한일협정 문서공개 운동, 일제 강제동원특별법 제정 등 일제 강제동원 문제 이슈화 과정에서 투사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서울을 오가며 무성의한 국회의원들을 상대로는 매번 호통을 치기도 했다.
“국회의원들 순 도적놈들이야. 노인들이 도장 하나 찍어 달라고 하는데, 어떤 놈들은 우리를 아주 거지 취급을 해. 누가 자기들보고 돈 달라고 했어?. 국민들 세금 걷어 우릴 도와 달라고 하느냐고?. 우리들 목숨 값, 우리에게 돌려달라는 것뿐이여….”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을 넘지 못한 할머니는 2008년 11월 11일 최고재판소 판결 기각 소식을 듣고 투병 중 20009년 7월 25일 한을 뒤로 하고 사망했다.
<특징>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거치며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전형적 인물
(일제때는 근로정신대 피해자, 80년 광주에서는 부상당한 뒤 유공자로 명예회복)
○일제 시대: 독점적 상권을 쥔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유복한 삶, 그러나 일본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욕심과 유혹에 넘어가면서 삶이 뒤 바뀜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에서의 혹독한 강제 노동
○해방 후 친일파로 몰린 아버지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 부산까지 감. 이후 가세도 기울기 시작.
○80년 광주항쟁 당시 투사로서의 면모(부상자)... 명예회복에 의해 ‘유공자’(5.18묘역)
○일제 강제 동원 문제를 위해 열심히 활동해 왔으나, 좋은 소식을 보지 못하고 2009년 7.25일 사망.
첫댓글 정말로...늘 들을때마다 가슴아프고, 그래서 더 마음을 다잡게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