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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무의 조선사 원문보기 글쓴이: 환국고려
청[淸]의 연경[燕京]과 조선[朝鮮]의 탐라[耽羅]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으로 발길을 옮기며 제[第] 7[七]
이 시대[時代]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들은, 경제적[經濟的]인 번영[繁榮]은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의 역사[歷史]와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자주권[自主權]을 돌아본다면, 그 부끄러운 자화상[自畵像]에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동서[東西]로 일만리[一萬里]를 치달리던 선대[先代]들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과, 도도히 흐르던 장엄[莊嚴]한 역사[歷史]의 맥[脈]은 사라지고, 치욕적[恥辱的]인 식민[植民]의, 거짓과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반[反] 역사적[歷史的]이며, 반[反] 민족적[民族的]인 허구[虛構]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우리의 역사[歷史]로 둔갑[遁甲]을 하여, 국민의 정신[精神]과 혼[魂]과, 자라나는 후세[後世]들의 기상[氣像]을 여지없이 무너트리고 있다.
기록[記錄]으로 전[傳]하는 오천년[五千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속에서, 반세기[半世紀]를 넘도록 선대[先代]의 역사[歷史]와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을 우롱[愚弄]하는 지금의 이 부끄러운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
진실[眞實]의 역사[歷史]위에 사실[事實]이 아닌 거짓의 역사[歷史]를 세우는 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선대[先代]에 대한 역사[歷史]이며, 우리 조상[祖上]님들의 역사[歷史]이며, 우리의 조국[祖國]과 우리 민족[民族]에 대한 역사[歷史]이며, 현재와 미래[未來]의 후손[後孫]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나라의 국본[國本]이 되는 역사[歷史]이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의 운명[運命]과 직결되고, 나라의 근본[根本]되는 소중하고 중요[重要]한 역사[歷史]에 대하여, 왜곡[歪曲]과 변조[變造]와 조작[造作]으로 역사[歷史]의 진실[歷史]를 가리는 그러한 행위[行爲]는, 장구[長久]한 세월의 역사[歷史] 속에서, 찰나[刹那]의 순간이 될 뿐이라는 것을, 지나온 역사[歷史]는 우리에게 수 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 시키려고 만들어 놓은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주구[走狗]노릇을 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 논자[論者]들은, 지나온 역사[歷史]를 거울로 삼아, 역사[歷史]속에서 깊이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 이유[理由]와 대의[大義]는, 천하[天下]에 분명[分明]하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선대[先代]들이 남긴 역사[歷史]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동국[東國]의 역사[歷史]라고 한다. 그것은 천산[天山]과 요동[遼東]과 오늘날의 알타이산맥인 백두산[白頭山]을 기준으로 하여, 그 동[東]쪽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이기 때문이다.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들도, 조선[朝鮮]의 변경[邊境] 지역[地域]은, 이곳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歷史]의 금자탑[金字塔]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는, 극히 일부분만이, 들어나고 있을 뿐이다.
소위 중국[中國]이라고 불리는 역대[歷代]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실체[實體]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疑問]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주장[主張]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問題]는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본 모습을 파악[把握]하고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실체[實體]가 드러나게 되면 스스로 풀리게 될 것이다.
중국사[中國史]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대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은 무엇이었으며, 이에 대한 역사[歷史]의 사실[事實]은 무엇이었을까 ?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본원[本源]은 무엇이며, 그 들의 영역[領域]은 어디였으며, 그 나라들의 종족[種族]은 어디에 근본[根本]을 두고 있었을까 ?
들어나고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만을 보더라도, 고구려[高句麗]의 강역[疆域]이 한[漢]나라의 강역[疆域]과 겹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歷史]에 포함되어 있는 숙신[肅愼]의 고대[古代] 유적[遺跡]들은, 알타이산맥에서부터 시작하여 서[西]쪽으로 흑해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고, 서남[西南]으로는 터키와 이란, 파키스탄, 인도, 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地域]에 걸쳐서 분포[分布]되어 있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 역력[歷歷]히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길과,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과 겹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강역[疆域]과도 많은 부분이 겹치고 있다.
이 지역[地域]들은 대륙사[大陸史]의 강역[疆域]이라고 하는데, 소위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역대[歷代] 나라들의 정체[正體]는 무엇이었을까 ?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에서 가장 크게 영토[領土]를 넓힌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비문[碑文]에 실려 있는 원정[遠征]의 길은, 아직도 우리 역사[歷史]의 비사[秘史]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 수 천편의 기록[記錄]들을 따라가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비밀[秘密]에 가려졌던 원정[遠征]의 길은, 일부가 환하게 들어나고 있다.
호태왕[好太王]이 비려[碑麗]를 원정[遠征]하고 돌아왔던 길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러시아의 일부 지역[地域]과 흑해에 이르는 지역[地域] 이었다는 사실[史實]이다. 이는 원사[元史]나 청사[淸史]에서도 증명[證明]이 되고 있다.
천리[千里]의 요동[遼東] 지역[地域]을 들어서서, 서[西]쪽으로 가면서, 이 지역[地域]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사행[使行] 기록[記錄]에서 설명하는 대로, 장례[葬禮] 풍습[風習], 묘제[墓制], 가옥의 구조, 혼인[婚姻]의 풍습[風習], 등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행[行]하고 있으며, 옛 성곽[城郭]의 유지[遺址]들이 그대로 보존[保存]되어 있어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사실[事實]임을 증명[證明] 하고 있다.
유주[幽州]에 포함되어 있는 주[周]나라 이래의 연경[燕京]의 지역[地域]에는, 그 곳이 연경[燕京]임을 상징하는 칸[汗]의 동상과, 제비를 함께 만들어 세워 놓고 있으며, 연경[燕京]의 옛 성곽[城郭] 유지[遺址]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연경[燕京]의 옛 영화[榮華]를 그려보게 하고 있다. 또한, 엣 산해관[山海關] 자리에는, 산해관[山海關]을 상징[象徵]하는, 조형물[造形物]을 세워 놓고 있으며,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자락이라고 연행록[燕行錄]서 말하는, 그 장성[長城]의 일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연경[燕京]은 오늘날의 알타이산맥의 서남[西南] 지역[地域]에 있었다. 그러므로 압록강[鴨綠江]의 통군정[統軍亭]은, 요동[遼東]과 연경[燕京]인 북경[北京]을 내리 누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경[燕京]은 오늘날의 자이산호의 서[西]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조선[朝鮮]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서, 청[淸]나라가 재화[財貨]를 영고탑[寧古塔]으로 실어다가 쌓아두고 있는데, 만약에 청[淸]나라가 영고탑[寧古塔]으로 쫓겨 가는 일이 생기다면,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에 있는 백두산[白頭山] 북[北]쪽의 길을 빌려 달라고 할 것이라는 말은, 연경[燕京]과 건주위[建州衛]와 백두산[白頭山]의 위치[位置]를, 명화[明確]히 지적하고 있는 기록[記錄]들이다.
고구려[高句麗]의 본래 평양[平壤]은, 요동[遼東]과 경계[境界]를 하고 있었다.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요동[遼東]의 난민[難民]들은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백성[百姓]들이며, 평양[平壤]에서 이를 받아들여 구휼[救恤]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는 것은, 평양[平壤]과 요동[遼東]은 같은 지역[地域]에 있었으며, 그러므로 조선사[朝鮮史]에서 평양[平壤]도 연[燕]의 지역[地域]에 포함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平壤]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사실[事實]의 기록[記錄]이다. 평양[平壤]에 있는 묘향산[妙香山]은, 산[山]의 허리부터 봉우리에 이르기까지 흰 암석[巖石]으로 되어 있으며, 사백리[四百里]에 걸쳐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맞는 기록[記錄]들이다.
이 산[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천산[天山]의 줄기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뻗어 들어가는 중국[中國]과 카자흐탄의 접경[接境] 지역[地域]인, 이리 카자흐자치주의 남[南]쪽 지역[地域]이며, 이식쿨 호수[湖水]의 동[東]쪽 지역[地域]이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를 포함하여,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설명하고 있는 지역[地域]들을 따라가면서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역사서[歷史書]들은,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거짓이 수 없이 혼용[混用] 되어 있음을 새삼 깊이 느끼게 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 남방[南方]의 바다 속에 있었다는 제주도[濟州道],......... 신라[新羅]가 황룡사[皇龍寺]의 구층[九層] 탑[塔]을 세우며 평정할 원[願]을 세우는 아홉 나라중의 탐라국[耽羅國],......... 조선사[朝鮮史]의 최남단의 바다 속에 있다는 탐라[耽羅]인 제주도[濟州道]는, 어느 지역[地域]에 있었을까 ?
현재 남아서 전[傳]하고 있는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따라가며, 이러한 기록[記錄]들이 설명하고 있는 지역[地域]에는, 과연 탐라[耽羅]에 대한 설명대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부합[符合]되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제주[濟州] 사람 김만일[金萬鎰]이 1만[一萬] 필[匹]이나 되는 많은 말을 기르면서 한라산[漢拏山] 일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기언[記言]
사방[四方]
탐라지[耽羅誌]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 있는 작은 나라인데, 너비가 400리이고, 해로[海路]로 970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본래 구이[九夷]의 일종이다. 상고[上古]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그곳 사람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세 시조[始祖]가 터를 닦은 곳을 상도[上都], 중도[中都], 하도[下都]라고 한다. [중략]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와 고청[高淸]이 처음으로 신라[新羅]와 교통[交通]하였는데, 이때 객성[客星]이 신라[新羅]에 나타나니 신라왕[新羅王]이 고후[高厚]를 성주[星主]라고 부르고 고청[高淸]을 왕자[王子]라고 불렀는데, 왕자[王子]는 총애하는 자에게 붙이는 명칭[名稱]이다. 당초 두 고씨[高氏]가 바다를 건너와 탐진[耽津]에 정박하였기 때문에 국호[國號]를 탐라[耽羅]로 하도록 명하였다. 후세[後世]에 백제[百濟]에 항복하여 탐탁라[耽乇羅]가 되고 은솔[恩率]의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 뒤에 좌평[佐平]이 되었다. [중략]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에 원[元]나라가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소, 말, 낙타, 노새, 양을 방목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20년에 총관부[摠管府]가 혁파되어 다시 고려[고려]에 소속되었다. [중략]
고려[高麗]는 제주목[濟州牧]을 설치하였는데, 6년 뒤에 원[元]이 다시 군민만호[軍民萬戶]를 설치하여 내구마[內廐馬]를 방목하다가 곧이어 폐기하였고,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원[元]이 다시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으나 원[元]이 망하자 다시 고려[高麗]에 소속되었다. [중략]
주[州]와 현[縣]이 모두 산기슭과 바닷가에 있어 토지가 모두 모래와 자갈인데 주[州]의 치소[治所] 옆에 있는 광양[廣壤]만이 붉은 진흙이다. [중략]
그곳에서 재배되는 곡물[穀物]은 기장, 피, 콩, 보리이고, 생산되는 물화는 빈주[璸珠], 대모[玳瑁], 나패[螺貝]이고, 잡히는 어물은 전복, 상어, 웅어인데 태생[胎生]이고 알로 낳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과일은 귤[橘], 유자[柚子], 등자[橙子], 감자[柑子], 치자[梔子], 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난다. [중략]
탁라[乇羅], 화탈[火脫], 여서[餘鼠] 사이는 바닷물이 시퍼렇고 심한 바람과 높은 파도가 잦다. 매해 봄과 여름에 남[南]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면 높은 돛대에 큰 돛을 단 배가 무수히 지나간다. 이곳은 흑치국[黑齒國] 오랑캐가 중국[中國]과 교통하는 길목이고 또한 바다 건너 여러 만이[蠻夷]의 물화[物貨]가 교통하는 곳이다. 서남[西南]쪽으로는 백해[白海]가 바라보이는데 최부[崔溥]가 표류[漂流]하여 동풍[東風]을 타고 7일 만에 백해[白海]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너머는 대유구[大琉球]가 있다. [중략]
난중잡록[亂中雜錄]
복수[復讎] 의병장[義兵將] 전 현령[縣令] 고종후[高從厚]가 한 것은 다음과 같다.[復讎義兵將前縣令高從厚云云]
제주[濟州], 정의[旌義], 대정[大靜] 3고을, 고성[高姓], 양성[梁姓], 문성[文姓] 3가 문호의 모든 어른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太古] 때에 인물이 생기기 전인 시초[始初]에 하늘이 세 신[神]을 한라산[漢挐山] 밑에 내려 보내시건대 고씨[高氏], 양씨[梁氏], 부씨[夫氏]요, [중략]
감히 사노[寺奴]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수의 싸움을 하려 하나 본도[本島]에는 공사[公私]간에 파멸되어 군기[軍器]와 전마[戰馬]를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 3고을에는 물력[物力]이 홀로 완전합니다. [중략]
농암집[農巖集]
서석산[瑞石山]은 호남[湖南]의 여러 산 가운데 특별히 높고 큰데, 그 위에 오르면 한라산[漢拏山]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가친[家親]이 낭주[朗州]에 귀양 가신 뒤로 해마다 찾아가 안부[安否]를 살폈는데, 그때마다 그 산 밑의 길을 지나가면서 드높은 모습을 보고 웅장[雄壯]하다고 생각해 왔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탁라[乇羅]라는 나라는 먼 바다 가운데 위치[位置]하여 장기[瘴氣]가 심하고 토질도 척박[瘠薄]하므로 흉년[凶年]이 잦은 곳이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자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겨 더욱 부지런히 보살피는 뜻에서 곡식을 실어다가 먹이기까지 하니 불평하는 백성[百姓]이 없고, 모두 다 감격한 나머지 은총[恩寵]에 감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조[國朝]의 제도로 보아 그곳 공물[貢物]로는 감귤[柑橘]과 말[馬]뿐이어서 해마다 중동[仲冬]이면 공사[貢使]가 서울에 오게 되는데, 금년에는 때가 되어도 공사[貢使]가 오지 않고 [중략]
높고도 아득한 한라산[漢拏山]이 縹緲拏山
깊은 바다에 꽂혀 있음이여 挿重溟兮
남극[南極]이 지표에 나타나 南極出地
수성을 볼 수 있음이여 見壽星兮 [중략]
동계집[桐溪集]
그렇습니다. 영주[瀛洲]의 전역은 바닷속에 있는 궁벽한 섬이지만 이곳 대정현[大靜縣]은 바닷가가 더욱 가깝고 지형[地形]이 낮아서 장독[瘴毒] 기운이 세 읍[邑] 중에서 가장 심합니다. 봄여름의 교차 시기부터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려서 갠 날이 없고 사나운 바람이 무시로 불며 장무[瘴霧]가 잔뜩 끼면 지척에서도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동문선[東文選]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
정이오[鄭以吾]
至高乙那十五世孫。高厚與其弟高淸。將朝見新羅。有客星先現 [중략]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인 고후[高厚]에 이르러 그의 아우인 고청[高淸]과 장차 신라[新羅]에 조회하려 하는데, 객성(客星)이 먼저 나타났다. [중략]
及前朝太祖統三之初。星主高自堅。王子梁且美。卽良乙那之後。改以梁聲相近也。世一朝見。太祖待以優渥。晝日三接。飮食供帳。殆擬王者。自率從至於櫂夫。賚予稠疊。 [중략]
전 왕조[王朝]의 태조[太祖]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직후에 성주[星主]는 고자견[高自堅]이요, 왕자[王子]는 양차미[梁且美]였으니 곧 양을나[良乙那]의 후손[後孫]인데, 양[梁]으로 고친 것은 음[音]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 세대에 한 번씩 조회하기로 하였는데, 태조[太祖]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여 낮에 세 번씩 접견하며 음식과 접대하는 범절이 거의 임금과 비슷하게 하였고, 데리고 온 사람과 사공에 이르기까지 물품을 중첩[重疊]으로 내렸다. [중략]
比及至元八年辛未夏。神義軍三別抄。叛入耽羅。二十年癸酉夏四月。國家濟師。討之盡殲。以高適爲留揔管。特令安集餘民。[중략]
지원[至元] 8년인 신미년[辛未年] 여름에 이르러 신의군[神義軍]과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탐라[耽羅]에 들어와서, 20년인 계유년[癸酉年] 여름 4월에 나라에서 군대를 물을 건너보내어 그들을 토벌하여 모조리 없애버리는데, 고적[高適]으로 유총관[留摠管]을 삼아 특히 남은 백성[百姓]을 위안하여 모아들이게 하였다. [중략]
是年秋。上臨軒策士。得宗對策。中乙科十三人。明年。襲星主。累轉爲司憲監察,刑曹都官佐郞,禮曹佐郞。[중략]
이해 가을에 임금께서 대궐에 나앉으시어 친히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득종[得宗]이 대책[對策]을 지어 을과(乙科)에 제13번째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성주[星主]의 작을 세습받고, 여러 번 옮기어 사헌[司憲] 감찰[監察], 형조 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중략]
戊戌秋七月。奉使歸故鄕。士林榮之。得宗謂以吾曰。吾宗肇基毛興之穴。自新羅式至于今。世襲星主。服事王家。赤心無已。而俛仰陳迹。非托之文字。懼其湮沒。無以示來裔。然世次譜牒不全。姑以大槩爲請。[중략]
무술년[戊戌年] 가을 7월에 사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가니 인사들이 모두 그를 영광[榮光]스럽게 생각하였다.
득종[得宗]이 이오[以吾]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이 모흥혈[毛興穴]에서 기초를 세운 이후로 신라[新羅]로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성주[星主)의 작위를 세습하였고, 국가[國家]를 섬기어 충성심이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잠깐 동안에 옛 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記錄]으로 남기지 아니하면 그것이 모두 없어져서 장래의 후손[後孫]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세대의 차서라든가 족보[族譜]의 기록[記錄]이 완전하지 못하여 우선 대략을 적어서 부탁한다. 하였다. [중략]
동사강목[東史綱目]
갑인년[甲寅年] 공민왕[恭愍王] 23년[二十三年]
왕[王]이 대답할 길이 없어 드디어 제주[濟州]를 토벌하기로 의논하고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전함 3백 14척과 날랜 군졸 2만 5천 6백여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최영[崔瑩]은 도병마사[都兵馬使] 염흥방[廉興邦], 양광도[楊廣道] 원수 이희필[李希泌], 변안열[邊安烈], 전라도[全羅道] 원수 목인길[睦仁吉], 임견미[林堅味], 경상도[慶尙道] 원수 지연[池奫], 나세[羅世], 삼도조전원수[三道助戰元帥] 김유(金庾)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군대가 나주[羅州]에 이르자, 최영[崔瑩]은 영산[榮山] 폐현[廢縣]으로, 지금의 나주부[羅州府] 남[南]쪽 10리에 있다. 에서 열병[閱兵]을 하고, [중략]
안[安],........ 원[元]나라 때 유진[留鎭]과 목마[牧馬]의 일로 원[元]나라 사람들이 제주[濟州]에 와서 거주한 자가 매우 많았고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원[元]에서 죄인 40명을 이곳에 유배[流配]하였다. 그래서 제주[濟州]에는 원[元]나라 사람의 자손[子孫]이 많다. [중략]
지금 조[趙], 가[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씨들의 호적[戶籍]이 원[元]으로 본관[本貫]을 삼는 것이 이것이다. 명[明] 초기에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제주[濟州]로 이주시켰는데 지금의 원[元], 양[梁], 안[安], 강[姜], 대[對]씨들의 호적[戶籍]이 운남[雲南]을 본관[本貫]으로 삼은 것이 이것이다. [중략]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원[元] 세조[世祖]가 탐라[耽羅]를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의 요충으로 삼고 또한 마음을 많이 쏟았다. 이에 그 땅에다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세우고 군사 1천 7백 명을 파견하여 둔진[屯鎭]케 하였다. [중략]
목은집[牧隱集]
자안내의하평운남표[子安來議賀平雲南表]
한라[漢拏]의 산빛이 아스라이 푸르스름한데 漢拏山色望蒼然
그 아래로 만리 길 금릉[金陵]으로 배 떠나네 下有金陵萬里船
물길은 희부옇게 끝도 없이 펼쳐지고 水道微茫不知畔
돛단배는 경주하듯 경쾌하게 내닫누나 風帆飄忽似爭先
힘으로 육조를 개통시킨 운남[雲南] 지역이요 力通六詔雲南地
위엄이 삼한[三韓]을 진동시킨 해외의 바다로세 威振三韓海外天 [중략]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
마가귀[馬價貴]
수십 년 전에는 관[官]에서 기르는 말이 9천 필 남짓했는데, 지금 와서는 3천 7백 필이나 더 늘어났다고 하니, 이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이다.
그러나 나라 안의 말 값은 자꾸 뛰어올라서 옛날에 비교하면 거의 갑절도 더 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제주도[濟州道] 안에 있는 세 고을만 해도 개인 사사로 기르는 말이 얼마든지 많다.
자본이 넉넉한 백성[百姓]은 혹 수백 필까지 길러서 온 국내[國內]에 매매시키게 되고 관[官]에서 기른 말은 다만 중국[中國]에 공물[貢物]로 바칠 뿐이다. 하지만 한라산[漢羅山]이 아주 높고 험해서 말이 한 해 동안에 백여 필씩 떨어져 죽게 된다. [중략]
성호전집[星湖全集]
서삼석설후[書三石說後]
남[南]쪽으로 한라산[漢拏山]에 오르니, 북[北]으로는 마한[馬韓]과 백제[百濟]의 옛 터전이요, 동[東]으로는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오르는 것이 보이고, 서[西]쪽으로는 중국[中國]의 강소(江蘇)ㆍ절강(浙江)과 통한다. 그 남[南]쪽은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 붕새가 날아다니고 고래가 헤엄치며 다닌다. 이때 마침 두 팔 겨드랑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발밑에 물결이 치면 홀연히 배를 타고 멀리 떠나고픈 마음이 생긴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군명[郡名], 무진[武珍], 무주[武州], 광주[光州], 해양[海陽], 익주[翼州], 화평[化平], 무진[茂珍], 익양[翼陽]. 서석[瑞石]
형승[形勝],..... 전라도[全羅道]의 거읍[巨邑]이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있다. 모든 봉우리는 중첩하고 온 골짜기는 구불구불 하도다.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있다. [중략]
남국[南國]의 웅장한 번진[藩鎭]이다. 이집[李集]의 시[詩]에, 광주[光州]는 남[南]쪽 지방의 가장 큰 번진[藩鎭]이라 하였다. [중략]
한 도[道]의 요충지[要衝地]이다.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있다. [중략]
산천[山川],....... 무등산[無等山] 현[縣]의 동[東]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며,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雄壯]하게 50여 리에 걸쳐 있다.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 경상도[慶尙道]의 남해[南海], 거제도[巨濟島] 등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山] 서[西]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척[百尺]이나 된다. 산[山] 이름 서석[瑞石]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 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
건치연혁[乾置沿革],........ 본래 제주[濟州] 동도[東道]인데 본조[本朝] 태종[太宗] 16년에 제주[濟州] 안무사[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서 한라산[[漢拏山] 남[南]쪽 넓이 90여 리의 땅을 쪼개어 동[東]쪽은 정의[旌義]를 삼고 서[西]쪽은 대정[大靜]을 삼아 모두 현감[縣監]을 두었다. [중략]
배추[裵樞]의 기문[記文]에,......... 전라[全羅] 한 도[道]의 토지[土地]의 넓은 것과 인물의 많은 것이 제주[濟州]가 그 반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곧 예전 탐라국[耽羅國]이다. 한라산[漢拏山]이 가운데에 웅거하여 제주[濟州]는 산[山] 북[北]쪽에 있다. 산[山]의 동[東]쪽 서[西]쪽이 모두 90리 거리이고 산[山]의 남[南]쪽은 또 더 멀어서 백성[百姓]이 왕래하려면 반드시 이틀 밤을 자야 하고 관청[官廳]에서 공문[公文]을 보내면 며칠 후에야 이른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
하담[河澹]의 기문[記文]에,......... 통첩[通牒]하기를, 성곽[城郭]은 단단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한두 부로[父老]와 더불어 이 언덕을 두루 순시하여 흙을 헤아리고 땅을 정하니, 장정[壯丁]들이 자식처럼 와서 공사[工事]에 참가하여 한 달도 못 되어 성곽[城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를 당하여 경영이 정밀[精密]하지 못한 것이 한[恨]이다. 하였다. [중략]
고려[高麗] 말기[末期]에, 다스리고 어거하는 것이 방향이 없었고 거둬들이는 것이 한이 없었으며, 또 우리 민족[民族]이 아닌 종족[種族]이 섞여서 갑인[甲寅]의 변란[變亂]을 불러, 무기는 바다를 덮고 시체는 땅을 뒤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 바야흐로 이제 밝으신 성상[聖上]께서 위에 있어 교화[敎化]을 행[行]하고 풍속[風俗]이 바뀌어져, 집집마다 순박한 풍도[風度]를 회복[回復]하고 사람마다 충효[忠孝]의 뜻을 품었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샘물 맛이 좋고 땅이 비옥[肥沃]한 곳에 나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정하여, 양을나[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夫乙那] 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여, 비로소 오곡[五穀]을 파종하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마다 부유[富裕]하고 번성해졌다.
형승[形勝],....... 북[北]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南]쪽으로 높은 산[山]을 대하였다.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에, 집집마다 귤[橘]과 유자[柚子]요. 곳곳마다 준마[駿馬]로다. 하였다. [중략]
정이오[鄭以吾]의 서[序]에,...... 본토에서 탐라[耽羅]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속국[附屬國]과 같다. 하였다. [중략]
귤[橘],........ 금귤[金橘],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왜귤[倭橘], 청귤[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는데, 청귤[靑橘]은 열매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 [중략]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역대전고[歷代典故]
충렬왕[忠烈王] 3년에 목마장[牧馬場]을 만들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제주[濟州]에 목장을 설치하고 10만 필의 몽고[蒙古] 말을 풀어놓아 번식하게 하고, 다루하치[達魯花赤]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 토지[土地]를 곧 고려[高麗]에 주고 해마다 공물[貢物]을 바치게 하였다. 동문광고[同文廣考] [중략]
일찍이 원[元] 나라 순제[順帝]가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 보존[保存]하고자 하여 공장[工匠]을 섬 안에 보내 크게 궁실[宮室]을 짓도록 하였다가, 계획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명[明] 나라 군사에게 몰려 북[北]쪽 개평[開平]으로 달아났다. [중략]
공민왕[恭愍王]이 영전[影殿]을 짓는 역사에 원[元] 나라 공장[工匠] 원세[元世] 등 11명을 제주도[濟州道]에서 부르니, 개성[開城]에 이르자, 원세元世] 가 재상에게 말하기를, 원[元] 나라 황제[皇帝]가 토목 공사를 일으키기 좋아하다가 민심[民心]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천하[天下]를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에 우리들로 하여금 제주도[濟州道]에다 궁궐[宮闕]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섬에 들어와 보전[保全]하기도 전에 나라는 망[亡]하고 몸은 도망쳐 우리들을 이 모양으로 의식[衣食]을 잃게 했습니다. 원[元] 나라는 넓은 천하[天下]를 가지고도 백성[百姓]을 수고롭게 하다가 패망[敗亡]하였습니다. 고려[高麗]가 비록 크지만 인민[人民]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제공[諸公]은 임금에게 아뢰소서. 하였다. 동문광고[同文廣考] [중략]
남사고[南師古]가 말하기를, 백두산맥[白頭山脈]이 동[東]쪽의 대해[大海]로 들어가 일본이 되고, 남[南]쪽의 대해[大海]로 들어가 탐라[耽羅]가 되었다. 하였다. [중략]
한라산[漢拏山] 마루에 오르면 하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데, 곧 유구[琉球]의 지경[地境]이다. 서남[西南]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이 가깝고, 북[北]쪽으로는 강진[康津, 해남[海南]과 접하여 세상[世上]에서 수로[水路]가 9백 리라고 일컫지만 실은 4백여리[四百餘里]라 한다. [중략]
홍재전서[弘齋全書]
운곡도박일제제주해신문[運穀到泊日祭濟州海神文]
한 점의 작은 섬을 一點小島
이름하여 영주[瀛洲]라고 부르니 號曰瀛洲
그곳에선 귤[橘]과 유자가 우거지고 厥包橘柚
공물[貢物]은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준마일세 厥貢驊騮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머리를 조아리고 守臣稽首
백성[百姓]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 고생함을 아뢰자 奏庶艱食
내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予不遑息
그 자리에서 곡식을 배에 싣도록 명했네 立命船粟
절미에 허리를 길게 펴겠고 長腰浙米
연맥에 기름이 흐르듯 하네 流脂燕麥
중류[中流]에서 배의 봉창을 들어 보니 中流擧篷
한라산[漢拏山]이 지척[咫尺]에 보이네 挐岑咫尺
고대일록[孤臺日錄]
계사[癸巳]
추칠월[秋七月]
二十一日癸酉余來家見天兵三人云是雲南人也路遠十萬里離家 八箇月云云 [중략]
7월 21일 계유[癸酉],...... 나는 집으로 오는 길에 명[明]나라 군사 3명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운남[雲南] 사람들로서 여기서 거리가 10만 리나 떨어져 있으며, 집을 떠난 지가 8개월 되었다고 한다. [중략]
성호사설[星湖僿說]
천지문[天地門]
하원북류[河源北流]
성수해[星宿海]가 운남[雲南]의 서북방[西北方] 1천 5백 리 지점에서 나와 물이 남[南]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또 동[東]쪽으로도 흐르지 않았으며 중국[中國]으로 꺾어 들어갔으니[折入於中國], 반드시 큰 산이 곤륜산[崑崙山]의 남[南]쪽에 뻗어 있어 지세[地勢]가 높기 때문에 물이 북[北]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南]쪽으로 달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운남[雲南]의 서[西]쪽이 곤륜산[崑崙山]과 수구한문[水口捍門]이 된 것이니, 우공[禹貢]에, 흑수가 남해[南海]로 들어간다.[黑水入南海]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중략]
연원직지[燕轅直指]
십구성도리재부[十九省道里財賦]
사천성[四川省]
距京師西南五千七百里。東西三千里。南北三千二百里。東界湖西。西界生番。南界雲南。北界陝西。領府十二,直州八,州一,縣一百十二。地丁雜稅銀共六十九萬四千三百餘兩。倉穀一百三萬二千三百餘石。[중략]
북경[北京]에서 서남[西南]으로 5700리 떨어져 있다. 동서[東西] 3000리, 남북[南北] 3200리이다. 동계[東界]는 호서[湖西], 서계[西界]는 생번[生番], 남계[南界]는 운남[雲南], 북계[北界]는 섬서[陝西]이다. 부 12, 직할주 8, 주 1, 현 112를 거느린다. 지정 잡세(地丁雜稅)는 은 도합 69만 4300여 냥, 창곡 103만 2300여 석이다. [중략]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 범서[梵書], 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진자정[陳子鼎]이 말하기를,.......... 운남[雲南]의 영취산[靈鷲山]에 수많은 사찰[寺刹]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대개 천축국[天竺國]의 영역[領域] 안에 있다. 이곳은 옛날 아육왕[阿育王]의 봉강[封疆]으로 그가 일찍이 8만 4천 개의 탑[塔]을 세웠고 대리석으로 된 탑기[塔基]도 수백 개나 되었는데, 모두가 그의 구지[舊址]이다. [중략]
송[宋] 나라 건덕[乾德] 2년에 사문[沙門] 3백 명에게 조칙하여 천축국[天竺國]에 들어가서 사리[舍利] 및 범서[梵書]를 구해오게 한바, 개보[開寶] 9년에 비로소 그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노정기[路程記]에, 외봉[巍峯], 계족산[鷄足山], 우바국다석실[優婆掬多石室], 왕사성[王舍城], 취봉[鷲峯], 아난반신사리탑[阿難半身舍利塔], 필발라굴[畢鉢羅窟]이 있다. 했다. 하였으니, 지금 상고[相考]하건대, 모두가 대리국[大理國]의 고적[古蹟]이다. [중략]
대개 그 당시 서번[西番]을 경유하여 천축국[天竺國]에 들어갔다가 되돌아 동[東]쪽으로 대리국[大理國]에 도착한 것은, 남조[南詔]가 이미 몽씨[蒙氏]의 땅이 되어서 검촉[黔蜀]의 길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중략]
백고통[白古通]에, 석가[釋迦]가 이해[洱海]에 있으면서 여래[如來]의 자리를 증득[證得]하였다. 했고, 불전[佛典]에는, 석가[釋迦]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서로 일치한다. [중략]
또 석가[釋迦]가 죽을 당시[當時]에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있다가 뒤에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계족산[鷄足山]과 영취산[靈鷲山]은 서로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데다, 필발라굴[畢鉢羅崛]의 사리탑[舍利塔]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니, 통기[通紀], 유양잡조[酉陽雜俎], 오선록[吳船錄], [구당서(舊唐書)가 모두 일치한다. [중략]
그렇다면 이른바 불국[佛國]이라는 것은 곧 전남[滇南]의 이해[洱海]에 있는 나라로, 8월달 밤에는 바다에서 산호수[珊瑚樹]가 나서 두어 길의 높이로 자라는데 어부들은 다 볼 수 있으며, 금사강[金沙江]의 양쪽 언덕은 모두 백사[白沙]인데, 불서[佛書]에 이른 항하사[恒河沙]가 바로 이것이다. [중략]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서장[西藏]은 사천[四川], 운남[雲南] 지방의 변두리에 있는데, 동[東]쪽에서 서[西]쪽까지의 거리는 6천 4백여 리이고 남[南]쪽에서 북[北]쪽까지의 거리는 6천 5백여 리이다. 동[東]쪽으로는 사천[四川] 경계[境界]에 이르고 동남[東南]쪽으로는 운남[雲南] 경계[境界]에 이르며, 서[西]쪽으로는 서역[西域] 회부[回部] 지방의 대사막[大沙漠]에 이르고, 북[北]쪽으로는 청해[靑海] 경계[境界]에 이르는데,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1만 4천여 리가 된다.
조공[朝貢]하는 도로는 사천[四川]을 경유한다. 납살성[拉薩城]은 타전로[打箭鑪] 서북[西北]쪽 3천 4백 80리 거리에 있는데, 바로 당[唐] 나라 때 토번[吐蕃]에 건아[建牙]한 곳으로 지금은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 곳이다. [중략]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설명[說明]하는 탐라국[耽羅國]인 제주도[濟州道]는, 한반도[韓半島]에 있는 제주도[濟州道]가 아니다. 옛 대리국[大理國]의 지역[地域]은 지금의 운남[雲南] 지역[地域]이 아니라, 인도의 불교[佛敎] 성지[聖地]인 영취산[[靈鷲山]이 있는 인도의 중부[中部] 지방[地方]이었다.
지금의 운남[雲南]과 대리[大理] 지역에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천지[天池]가 있고, 고을나[高乙那] 후손[後孫]의 동상과 양을나[良乙那]의 고대[古代] 우물이 보전[保全]되어 있으며, 백척[百尺] 높이로 수십개의 돌 기둥이 솟아 있다는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의 서석산[瑞石山]이 있으며, 붉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제주[濟州]의 광양[廣壤]에 대한 기록[記錄]과 틀림이 없는 지역[地域]이 넓게 펼처져 있다.
또한, 제주[濟州]에 원[元]나라의 성씨[姓氏]가 많다고 하는데, 그 몽고[蒙古]의 후예[後裔]들이 버젓이 기념탑[紀念塔]을 세우고 이를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의 지역[地域]에 있는 유서[由緖] 깊은 고적[古蹟]에는, 모두 남해[南海]라는 명칭[名稱]이 붙어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남해[南海]의 지역[地域]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제주[濟州]에는 여러 개의 성곽[城郭]이 축조[築造] 되었다고 기록[記錄]은 전[傳]하고 있는데, 지금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보전[保全]하고 있다. 고을나[[高乙那]의 후손[後孫]들이 세운 동상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문관[文官] 복장[服裝]과 똑 같은 모습이다. 제주[濟州]는 말의 고장답게 지금도 목장[牧場]에서는 군마[軍馬]로 쓸 수 있는 말들이 많이 뛰놀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탐라[耽羅]는, 지금의 인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의 국경[國境] 지역[地域]과 중국[中國]의 운남[雲南], 대리[大理] 지역[地域]에 걸쳐 있던 큰 나라였다.
또한 바다의 한 가운데 있던 섬이 아니라 바다를 접하고, 내륙[內陸]의 대해[大海]에 걸쳐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新羅]는 황룡사[皇龍寺]의 탑[塔] 세우면서, 탐라[耽羅]를 평정[平定] 할 아홉 나라 중에 네 번째로 기록[記錄]하고, 원[願]을 세웠던 것이다.
이 곳의 농촌 지역[地域]에는 밀집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니는 농민들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밀집 모자는, 6 ~ 70년대에 우리나라의 농촌에서 만들어 쓰던 밀집 모자와 똑 같다. 조선사[朝鮮史]의 탐라국[耽羅國] 이었던 이 지역[地域]에는, 운남[雲南]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고인돌이 이어지고 있는데, 한반도[韓半島]에 있는 고인돌과 그 형태[形態]와 구조[構造]가 아주 똑 같다.
조선사[朝鮮史]에서, 제주도[濟州道]와 전라도[全羅道]의 기록[記錄]중에, 귤[橘]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은, 당시[當時] 조선사[朝鮮史]의 강역[疆域]을 웅변[雄辯]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佛敎]의 성지[聖地]가 있는 영취산[靈鷲山]이 있는, 지금의 인도가 운남[雲南] 지역[地域]이라는 것은, 또 하나 당[唐]과 명[明], 청[淸]의 실체[實體]에 대한 일부를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탐라[耽羅]가 남송[南宋]과 왜[倭]의 요충지[要衝地]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탐라국[耽羅國]이 이러한 지역[地域]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구국[琉球國]이 지금의 오끼나와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며, 역사[歷史]의 왜곡[歪曲]이다. 남송[南宋], 당[唐], 명[明], 청[淸] 이라는 나라들은, 탐라[耽羅]의 서[西]쪽,......... 천산[天山]의 서[西]쪽, 알타이산맥의 서[西]쪽에서 활거하던 나라들이다.
조선사[朝鮮史]의 강역[疆域]과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 하나 하나 들어날 때마다, 비사[祕史]에 묻혀서 암흑[暗黑]속에 가리워진 우리의 역사[歷史]는, 그 본 모습을 밝게 들어 낼 것이며,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허구[虛構]와 실체[實體]도 분명[分明]히 들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