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7월 27일. 인류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된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릴 때 빠뜨릴 수 없는 날이다. 이날, 혁명의 절정을 이뤘던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1758~1794)의 자코뱅 정권의 공포정치가 1년여 만에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무너졌다. 대혁명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이 사건으로 혁명은 열기를 잃고 사실상 종막을 향해 치닫게 된다. 프랑스, 일본 등 세계 주요국들에서는 이날을 기념해 각종 전시회나 강연회를 열고 있다.
혁명달력으로 제2년 테르미도르(열의 달) 9일(1974년 7월 27일)인 이날 공포정치의 핵심세력인 공안위원회와 자코뱅그룹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생 오귀스탱, 그의 오른팔 격이었던 생쥐스트(1767~1794) 등 요인들이 국민공회 안의 반대파들에 의해 파리 시청에서 체포되고 자코뱅정당은 무너졌다.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다음날 혁명광장의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단두대에 올랐고 이후 사흘 동안 이들을 포함해 108명이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지지한 죄로 죽었다.
자코뱅정권은 주변 열강들과의 혁명방위전쟁을 치러내면서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펴는 한편 민중과 농민 등 못가진 자들의 요구를 수용해 실질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생필품의 최고가격제, 빈민에 대한 공공부양, 의무교육제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귀족 등 특권층에 반대하고 민중의 이익을 전면에 내세웠던 자코뱅정권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정통파 혁명사가들은 자코뱅정권을 높이 평가해 왔지만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뒤 자코뱅주의를 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선구로 평가절하하는 움직임도 나왔다. 그러나 생존권을 축으로 한 이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자코뱅노선은 오늘날 기본적 인권개념의 핵심으로 전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이들이 한때 주역을 담당했던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해방이라는 영원한 과제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젊고 잘 생긴 용모에 대담하고 타협할 줄 몰라 ‘혁명의 대천사’로 불렸던 생 쥐스트는 “진정한 행복은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서만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