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서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201613522 김지훈
몇년전 세법을 공부하던 중 세금가장 잘내는 양심적인 기업은 어딜까 라고 문득 생각을 했고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박사가 눈길을 끌었다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나는 가슴이 웅장해졌다
유일한 박사는 일찍이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시킨 인물로써 사회고위층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참 된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것으로 잘 알려진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에게 배울점은 무엇일까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 - 독립운동가 유일한-
유일한박사가 기업가인것을 아는사람은 많지만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그는 9살에 아버지 유기연의 결정으로 조선인 유학생자격으로 미국유학을 가게된다 1909년 유일한은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위해 설립한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농장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생활하다가 미시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193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게 된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집행부에 가담하였고 이후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활발한 애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2년에는 재미한인이 주축이 된 한인국강경비대 창설을 주도, 1945년 재미한인으로 구성된 공작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정보수집, 폭파, 무장 유격활동을 전개하는 냅코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냅코 작전이 실행되기 직전에 일본은 항복을 하였고 유일한박사 역시 생전 이 작전에 대해 함구하며 이 작전은 세상에 밝혀 지지않았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나고 20년이 지난뒤 이 사실이 밝혀졌고 1995년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며, 유일한 박사는 독립운동가로 추앙을 받게 된다
독립운동가로 유일한 그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국가,교육,기업,가정은 순위를 정하기 매우어려운 명제이다
그러나 나로말하면 바로 국가,교육,기업,가정의 순위가된다" -교육가 유일한-
회사가 안정기에 들어서자 유일한 박사는 교육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국가부흥을 위해서는 산업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신념아래 사재를 털어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전교생에게 무상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진짜 기술인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를 세울때부터 탁상공론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일하는 사람만이 배울수있다는것이 그의 교육관이었다 생전의 유일한은 자신의 명함에 유한양행 사장이 아니라 교육자라고 적었다고 한다 이는 유일한 박사가 어느정도로 교육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수있다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기업가 유일한-
대학교에 졸업한 유일한박사는 미국내에서 숙주나물사업을 하였다 유일한 박사는 사업이 잘되지않자 시내에 있는 유명한 가게에 숙주나물을 싣고 있던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사고를 냈다 이 사건이 기자들로부터 소개되면서 숙주나물사업이 번창하게 된다 이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는데 겨우 숙주나물사업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꾸짖었다고 한다
유일한 박사는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을때 기초적인 의약품조차 없어서 고통받는 국민보고
1926년 고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유한양행은 안티푸라민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대부분 제약회사들은
만병통치약이라며 과장광고를 하였지만 유일한 박사는 정확한 제품의 용도와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같이 광고에 싣어서 소비자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이는 유일한박사가 기업의 영리보다 사람들의 건강과 사회질서를 더 우위에 둔 경영철학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100년이 지난 지금 범람하는 정보속에서도 아직까지 과대광고 허위광고가 판을치는데 기업인들은 유일한박사의 성공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볼필요있겠다
해방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을 재정비하면서 올바른경영활동과 사회공헌에 집중하며 우리사회의 모범상을 제시하였다 군사정권시절 군부는 유한양행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요구했으나 이러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고강도의 보복성세무조사를 받게 되었지만 흠잡을곳없는 투명한 기업활동으로 1968년에는 정부로 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 동탄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노환이 온 유일한 박사는 경영에서 손을떼며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도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전문경영인 이라고 한다 또, 자신이 은퇴하기전에 가족들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타툼이 일어나면 안된다는이유로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부 해고하였다 지금의 대한항공 사태를 볼때 휼륭한 선견지명이라고 생각한다
1971년 유일한 박사는 자신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한다
평생을 민족과 국가를 위해 바르게 살아 왔고 기업경영인으로도 모범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유일한 박사의 삶은 오늘날
정경유착이 낳은 기업인에대한 불신이 팽배해진 지금 진정한 기업인으로써의 모습은 어떤것인지를 말해준다
유일한박사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천함으로써 극도로 다양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선한영향력은 아직도 남아 오늘날까지도 밝은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