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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9일, 성령강림 후 제17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1년 9월 19일, 성령강림 후 제17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성령강림 후 제17주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29장(성도여 다함께)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은시편 54:1~7절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 함께 기도합니다. [《뉴질랜드 기도서》, 각색함]
(영상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주님의 창조의 선물,
우리의 세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알리는 하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땅과 그 땅의 아름다움과 자원들,
우리가 누리는 풍부한 유산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선물들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도록.
땅의 자원들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위해,
땅과 바다에서,
도시와 산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그들의 수고의 열매들을 누리며
주님의 창조세계에 경탄할 수 있도록,
또한 예술가들과 과학자들과 공상가들을 위해,
그들의 일을 통해
우리가 창조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께,
또 우리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해.
죄수들과 피난민들과 장애인들,
그리고 먹을 것이 충분치 않은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병든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
그리고 그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하려 할 때
정치, 의료, 사회복지와 구호사업에 종사하는 이들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우리를 부르사 주님의 창조세계를
찬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세계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소서.
주님의 대속하는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례로 우리를 강하게 하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게 하소서.
창조주 하나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소서.
대속자 예수님,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님,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9:38~50절입니다. (성경)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 특별 찬양: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 말씀 선포: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7주입니다. 오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요한은 ‘우리’(라는 예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의 대장)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서 이를 금하였다고 예수님께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내(예수) 이름으로 능한 일을 행했다면 나를 비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예수 공동체)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예수 공동체)의 일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새기면서 ‘우리라고 하는 예수공동체의 일’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그래야 우리(예수 공동체)를 반대하는 자인지 아닌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예수 공동체)의 일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예수 공동체로) 하셨던 일을 세가지 측면에서 살펴봅니다. 처음 것은 ‘삶’과 관련해서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해는 쉽고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둘째는 ‘나(의 마음)’와 관련해서 ‘평화(평안)’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아마 이해하는 것도 그것을 그리 누리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세번째는 ‘신’(하나님)과 관련해서 ‘진리’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진리는 비록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해를 하면 그것으로 족한 큰 깨달음이 될 것입니다.
먼저 이야기 하나 꺼냅니다. 영화 한 편을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화의 무대와 시간이 있고, 실제의 시간과 무대가 있습니다. 환한 낮에 본다고 해도 영화 속의 시간은 캄캄한 밤일 수 있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기쁜 일이 생기면 또 함께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났다든지 해서) 현실로 돌아오면 영화 속 감정은 그저 잠시 지나간 꿈과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영화 속 내용은 우리의 ‘삶’이고, 현실로 돌아오면 실제의 ‘나’가 됩니다.
2-1. 사랑: 삶을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
우리 삶은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와 같다는 말을 듣습니다. 감독이 되어 내 삶을 잘 이끌고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가장 근본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 삶의 메시지입니다. 율법(주의자)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말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법이 있으니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사랑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됩니다. 마태복음 22:34-40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은 결코 사랑할 수 있는 이웃 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6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나를 미워하며 박해하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44 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와 같은 사랑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어지는 45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고아, 과부, 나그네, 어린이 등) 섬기는 것입니다. 신명기 24:12-13입니다.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 사막 기후의 이스라엘에서 겉옷은 밤을 견딜 수 있는 이불과 같아서 목숨과도 같은 중요한 물건입니다. 밤이 되기 전에 돌려 주라는 것이 세상의 공의와 다른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1절 말씀을 새깁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 주신 메시지, ‘삶’을 이루는 가장 근본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삶을 꾸려 가십시오. 삶의 주인인 감독이 되셔서, 사랑을 주제로 하는 여러분의 한 편의 영화, 혹은 드라마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만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마음껏 뽐내며 자랑할 수 있습니다.
2-2. 평화(평안): 나(의 마음)를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
삶을 사랑으로 꾸려감에도 불구하고 (즉 섬김의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삶이 나(의 마음)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지금의) ‘나’(의 마음)와 관련이 있습니다. 밖에서 제 아무리 평안하다고 해도, 지금 내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평안하지 않은 것이고, 반대로 제 아무리 밖이 불안하다고 해도 지금 내 마음이 괜찮으면 평안한 것입니다. 킬케골이 말한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곧 나(의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를 놓침이, 곧 절망(絶望)이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평화의 나라가 이룩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11:1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6-9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마침내, 성탄(聖誕),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평화가 선포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 위에 오실 때 천사들의 노래입니다. 누가복음 2:14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렇게 평화(평안)는 우리에게 찾아 온 메시아 오심의 복(福)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를 전해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 건넨 첫 인사가 평안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9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복음을 전파하면서 건네는 첫 인사도 평안입니다. 마태복음 10:12입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치유하시고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도 평안입니다. 누가복음 8:48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그러나 평화가 선포되었다 해도, 나(의 마음)가 받아 들이지 않으면 그 평화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아기 예수를 죽이려 소동하는 사람도 있었고, 크게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헤롯 왕이 그랬고, 시므온이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2:3입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그들에게 평화는 요원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아기를 볼 때에 큰 평안이 찾아 옵니다. 누가복음 2:28-29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가 만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어지는 30-32절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영화나 드라마 속 내용이, 비록 사랑이 근본 주제라고 해도, 때로 이런 저런 원치 않는 일들이 무수히 벌어집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마음이 푹 빠져있으면 그럴 때 마다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슬쩍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관객으로(주시자, 注視者) 돌아 오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곧, ‘평안(평화)’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 안 마음 속에 있기에 평안(평화)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에게 숨겨진) 평안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9:42입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세상은 ‘삶’입니다. 그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있는 나는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삶’이 비록 재미있다고 해도 이 현실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의 내용에 따라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 50절에,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을 ‘너희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화목하라’는 말씀으로만 읽지 말고, “‘너희 속에’ 곧 ‘내 속에서’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내 속의 마음과 (마음을 드러내는) 내 삶이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곳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3. 진리: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
삶을 마주하며, 사랑을! 나(의 마음)을 마주하며 평안(평화)을! 그리고 아직 마주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신(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메시지는 ‘진리’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끝이 없는, 한계가 없는, 절대적인 분이 진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너무 소중하기에 오늘 본문은 차라리 장애인이 될지언정 (손을 찍어버리든지, 발을 찍어버리든지, 눈을 빼 내든지) 영원한 것을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를 놓치면 자신 뿐 아니라 남도 실족하게 만들고 맙니다.
본문 42-48입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문제는 진리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영화를 봅니다. 영화 속에 빠져 있는 나는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 주시자로 영화를 보고있는 나를 봅니다. 이제 영화 속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삶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있는 나(의 마음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있는 (생각하고 있는) 나는 또 누구입니까? 그를 보고 있는 또 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를 보는 나가 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시자가 한 명이 아니라 무한히 많은 주시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을 신(하나님)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을 내가 보는 것이니까요. 신앙적으로 말해서(진리를 말하려면), ‘내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셔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만, 실상은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 마지막 주시자가 (무한히 등장하겠지만) 결국은 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유한한 인간이 마지막 주시자가 된다면 여기서 절대적인 진리를 논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마지막 주시자가 하나님이 되어야 하기에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지막 주시자를 하나님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 물리학의 주류는 양자 물리학입니다. 어렵지만 여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행기 날아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양자 물리학을 빌려 진리의 오묘함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이해가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양자 물리학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할 수도 없고, 들은 들 알 수도 없습니다. 마치 비행기가 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고 또 들어봐야 뭔 말인지 모르듯이 말입니다. 다만 여차여차해서 ‘아~ 비행기가 나는구나’하는 정도로, 비행기가 나는 것을 마음에 의혹이 없이 받아들이는 그 정도 선에서 (양자) 물리학에서 밝힌 몇 가지 사실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진리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말입니다. .[*. 여기서 이야기하는 양자 물리학에 대한 내용은 벳시 체스, 윌리엄 안츠, 마크 빈센트 공저., <블립: 일상의 현실을 바꾸는 무한한 가능성의 발견>을 참고로 합니다.]
첫째, 우리가 보는 모든 것(원자: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입자)은 99.999999999999999%는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빈 공간은 미묘하고 엄청나게 강한 에너지로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 원자는 양성자(+)와 원자핵 그리고 원자 핵 주변에 구름처럼 확률로 존재하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소원자의 크기는 지름 25피코미터라고 합니다. 피코미터는 1/1조m 입니다.]
보여지지 않는 빈 공간에 대한 에너지를 인정하듯, 보여진 것 너머의 보여지지 않는 진리를 진리로 두어야 합니다. 큰 것을 작은 그릇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주권자이심을 고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춤췄던 다윗처럼 말입니다. 이를 어기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닙니다.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많은 이들이 대부분 거짓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참 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참’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진리의 속성상 내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지난 번에 한 번 소개해 드린 ‘슈뢰딩거의 고양이’이야기처럼, 주시자가 보기 전까지는 고양이는 죽었으면서 살아있습니다. 주시자가 등장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합니다. 이뿐 아니라 시간/공간, 시간 내에서 이 때/저 때, 공간 내에서 이 곳/저 곳, 주체/객체, 관찰자/관찰 대상 등등이 (양자중첩처럼) 겹쳐집니다. 구분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 세계 속에서 빛 보다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양자 물리학의 아원자 입자들은 공간 속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동시에 정보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속도는 무한합니다). 400년 간 과학을 지배해 온 데카르트 식의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구분이 깨진 것입니다. 관찰자는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치고, 물질 우주에서 독립된 관찰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 안의 모든 것들은 서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있어 모든 이원(二元)의 세계가 깨집니다. 심지어 옳음과 옳지 않음의 시비(是非)도 그 정당성을 잃게 됩니다. 에덴 동산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먹지 말라/먹어라’와 ‘선악을 구분하지 말라’가 상충하지만 하나님-진리 안에서 그 이원도 깨집니다) 양자 물리학이 다시 열어 보인 세계가 에덴 동산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이원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것)의 이원(二元)도 사라집니다. 혹은 보는 자 안에 보이는 자가 있고, 보이는 자 안에 보는 자가 있습니다. (*. 니이체가 ‘바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바위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셋째, 원자핵을 돌고 있는 전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 구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파립자(파동이면서 입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실험에 의하면 주시자(관측자)가 있으면 입자가 되고, 주시자가 없으면 파동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주시자에 따라서 그 형태가 달라지니, 주시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면 문제가 되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는 자에 따라 보이는 것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시편 8:3-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Ref.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누가복음 15:4~7)에서 양 한 마리가 (주시자가 되면) 양 99마리와 목자의 삶의 궤적을 바꿔 놓습니다.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에서는 탕자가 (주시자가 되면) 아버지와 형 그리고 하인들의 삶의 궤적을 바꿔 놓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시자입니다.]
넷째, 원자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전자가 원자 핵 주위의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전자들은 일반적인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궤도 사이의 공간을 거치지 않고 순간적으로 이동합니다. 즉, 하나의 장소, 궤도에서 사라졌다가 갑자기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을 양자 도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도약의 과정에서 언제 어디서 전자가 나타날 것인지 예측할 수 없으며(아인슈타인은 이를 ‘도깨비 같은 원격 작용’이라고 부릅니다),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새로운 전자 위치의 확률을 계산할 뿐입니다. 사티노바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이 확률의 바닷속에서 매 순간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확률로 존재한다는 이야기에서 창조의 세계가 열립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주시자인 나도 들어가 있습니다. (양자 역학의 확률을 반대하고 싶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 물리학의 확률론 그 무작위성에 대하여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지만, 여기에 (양자 역학의 확률, 그 무작위성을 찬성했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이렇게 응수했다고 합니다. “신에게 명령하지 마시라!”고
요약하면, 1) 양자 물리학의 빈 공간에 가득 찬 미묘한 에너지의 충만함과 같이, 하나님과 마주하는 진리는 그 자체로 사람들의 모든 담론을 넘어섭니다. 2) 양자 물리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원(二元)의 세계(관)를 깨트리듯이, 하나님과 마주하는 진리는 모든 이원의 세계를 넘어섭니다. 3) 양자 물리학에서 전자가 주시자에 따라 입자와 파동이 결정되듯이, 진리의 주인공은 주시자이고, 모든 우주 만물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 모두는 다 주시자이기에 여러분 각각의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4) 양자 물리학에서 전자가 무작위성 확률의 장으로 존재하듯, 진리는 매 순간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는 보는 자이자 보이는 자로서 참여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영화 속의 내용은, ‘섬김의 사랑’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가끔 영화 속의 내용에서 나와 영화를 보고있는 나를 바라 봅니다. 그러면 영화 속의 희로애락애오욕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가끔 영화 속을 나와 영화를 보고있는 나를 바라보는 나는 또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주시자는 무한히 반복됩니다. 마지막 주시자를 하나님으로 삼으면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바라본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까요. 여기서 양자 물리학의 도움을 받습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혹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주시는 메시지 ‘진리’입니다.) 신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사람의 아들이 신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양자 물리학은 이 성육신의 가르침을 (신앙인이 갖는 믿음의 영역을 넘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반인에게도 비로소 이해의 영역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지평은 열려 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을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는 마지막 주시자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진리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어야 혹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가능한 세계입니다. 요한복음 17:21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3.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
구세주로서 예수님의 사역은 (내가 포함되어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삶, 나(의 마음), 그리고 신(하나님)을 마주하는 메시지를 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삶에는 사랑, 나(의 마음)에는 평화(평안), 하나님을 마주해서는 진리’라는 메시지를 주시고, 이 사역을 우리(예수 공동체)를 통해서 널리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가 다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타 타 종교에 대해서, 샤머니즘에 대해서, 철학이나 진화론 등 세상의 학문에 대해서 등등 기독교 교리와 다른 가르침이라고 혹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으셨습니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마음의 불편함을 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것들이 사람들의 삶에 섬김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평안)’을 찾게 하고, 사람들이 절대(조물주)를 기억하며 ‘진리’를 추구한다면 말입니다.
4. 나가는 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면서 늘 주시자(注視者)로 있는 것은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비싼 돈 주고 가서 영화를 즐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영화 속 내용 자체에 빠져서 현실 속에서도 영화가 주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정에 휘둘린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삶은 영화와 같습니다. 영화를 마음껏 즐기시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마음은 영화 밖 현실입니다. 이를 알아채면 평화(평안)를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감독이 되어 (섬김의) ‘사랑’을 주제로 삶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 가십시오.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므로 평화(평안)을 누리십시오. 사랑으로 영화에 빠져들고, 영화에 빠져있는 자신을 보는 것으로 평화(평안)을 유지하십시오. 삶이요, 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진리는 참 어렵습니다. 때문에 1) 진리라는 담론은 늘 열어 두십시오. 큰 세계 우주도, 작은 양자의 세계도 거의 모두가 빈 공간임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아니, 빈 곳이 아니라 오묘하고 신비한 에너지로 가득 찬 세계임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2) 진리를 논함에 이원(二元)의 세계를 벗어나십시오. 3) 하나님과 하나된 내가 혹은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온 우주의 주인공인 보는 자임을 그리고 동시에 보이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4) 하나님의 창조는 보는 자이며, 보이는 자인 나와 함께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새기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위와 같은 우리(예수 공동체)의 일에 반대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를 위하는 자입니다. 그들을 금(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나라 온전히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가 411장 (아 내 맘 속에)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 헌금 기도합니다. (#.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502장(빛의 사자들이여)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