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133. [역경의 열매] 임만호 (1-17) "하나님, 임만호가 훌륭한 사람되게 복많이 주세요
나는 1940년 10월 10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 가덕에서 태어났다. 두 달 뒤 아버님이 일본군 비행장 문관으로 근무하시던 중국 헤이룽장성 너흐라는 곳으로 어머님과 같이 떠났다. 1945년 3월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함평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신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전쟁이 터졌다. 학교 대신 집에서 아버님에게 천자문을 배웠으며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에서 보냈다.
나는 5살 때부터 누님과 함께 할머니와 친척들이 다니던 가덕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새벽종 소리와 함께 양회덕 장로님이 새벽기도를 가시면서 우리 집 앞을 지나실 때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는 일어나 그 장로님을 따라 교회에 가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주일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금주 생일축하 시간에 나를 80여명 되는 학생들과 선생님 앞에 세우시고 연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시며 "감사하신 하나님 임만호 위에 복과 은혜 비와 같이 내려 주시고 간 데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사 영원토록 즐거웁게 하시옵소서 아멘"이라는 노랫말의 축가를 불러주셨다.
지금도 이 노래를 기억하고 가끔 부른다. 부장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임만호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니 복 많이 주세요"라고 기도해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어린 나에게 이 일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교회에서 돌아와 아버님께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물었더니 아버님은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하며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하고 친구들과 싸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시며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다. 교회에서는 요셉, 아브라함 이야기도 들었다. 그날 이후 74세인 지금까지도 항상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생각도 훌륭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눈을 뜬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밤, 내가 다니던 신광초등학교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기에 저녁을 빨리 먹고 어른들을 따라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200여명의 면민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장 구령대 앞에 장대를 세우고 하얀 천을 매달아 발전기를 돌려 흑백 활동사진이 돌아가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제목은 '윤봉길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 백천대장에게 '벤또폭탄'을 던져 죽게 하는 약 1시간짜리 영화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버님께서 광복절 행사 때면 일본의 만행에 대해 들려주시던 것을 떠올리며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를 점령한다면 내가 윤봉길 의사처럼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내가 윤봉길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인데 왜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시 침략하지 않느냐'면서 기다리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교회는 전쟁 속에서도 예배를 드렸고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주일학교는 쉬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일이면 인민군 아저씨 한 사람이 딱궁총을 메고 예배를 드리러 우리 교회에 왔다. 그 아저씨는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노래도 가르쳐주다가 총을 메고 내무서(지금의 지서)로 뛰어가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아마도 북한의 독실한 기독청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 "하나님, 임만호가 훌륭한 사람되게 복많이 주세요
* [역경의 열매] 임만호 (2) 中 3때 기독시보에 '주여 어서 오소서' 신앙시 당선
* [역경의 열매] 임만호 (3) 고교 시절 밀알학교·여명학교 등 교가 제작 참여
* [역경의 열매] 임만호 (4) 軍복무 면제자임에도 나라·민족 위해 자원입대
* [역경의 열매] 임만호 (5) 훈련소 입소 첫 주일, 예배 다녀왔더니 탈영소동이
* [역경의 열매] 임만호 (6) 고향서 보낸 장학금 거절에 "훌륭한 고집쟁이군
* [역경의 열매] 임만호 (7) 순교자 집안 딸과 결혼… 주님은 축복의 하얀 눈을
* [역경의 열매] 임만호 (8) 김준곤 목사 "민족 복음화 위해 CCC 참여하라"
* [역경의 열매] 임만호 (9) "CCC 회원 1만명 먹일 밥솥 100개 구해주소서"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0) "'엑스플로 74' 30만명분 식사·재정 맡아달라"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1) "이번엔 문서선교" 서울 후암동에 아가페 서적을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2) 보증금 부족에 "제 젊음 보고 점포 빌려주세요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3) '아가페서적' 3년… 주님은 생명 살리는 서점으로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4) 홍정길 목사 "만호, 교회 개척에 동참해주게"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5) "기독인 1000만명 넘는데 기독문학잡지 없다니…"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6) '창조문예' 18년 결간 없이 롱런… 이는 주님 은혜
* [역경의 열매] 임만호 (17·끝) "교회와 크리스천은 항상 손해나는 일을 해야"
◇임만호 장로 약력=1940년 전남 함평 출생, 숭실대 경영학과 졸업, 한국대학생선교회 간사, 1975년 도서출판 크리스챤서적 설립, 1997년 월간 창조문예 창간, 1998년 한국기독교출판협의회 회장
***[역경의 열매] 임만호 (2) 中 3때 기독시보에 '주여 어서 오소서' 신앙시 당선
신광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한국전쟁이 지난 지 1년 후인 늦봄 5월쯤이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동네 친구 김남열과 둘이서 아카시아 꽃이 만개한 노루재를 넘어오면서 고갯마루에 앉아 쉬었다.
아카시아 꽃을 따 단물을 빨아먹으며 김남열이 나에게 저 하늘에 구름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무심코 바라보니 하얗고 큰 목화솜 같은 구름이 한 점 두둥실 떠 있었다. 구름이 떠 있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친구는 내 대답을 놓칠세라 '너 노래하나 가르쳐 줄까' 하면서 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려서도 지금도 노래에 대해서 큰 흥미가 없었던 터라 불러보라고 했다.
친구는 노래를 썩 잘 부르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노래라면서 부르기 시작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흐르며 내 주님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저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이 노래는 어린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구름을 타고 오시느냐고 물어보니 "우리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이 오실 때 구름 타고 오신다고 배웠어"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내 작은 가슴이 뚫리는 듯하였으며 오월의 고개 아래 푸른 들과 맑게 흐르는 개천, 파란 하늘의 흰 구름 하나는 나를 설레게 하였다.
나도 손양원 목사님처럼 은혜로운 노랫말을 써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어려운 생활 때문에 노트를 사서 글을 쓰는 것이 힘들어 다 쓴 노트의 표지 뒷면이나 구제물품 포장 봉투를 모아 글을 쓰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기독시보'라는 주간 신문에서 신앙시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 시 공부를 해본 일도 없고 배울 만한 것은 국어시간에 가끔 시에 대해서 들어본 것밖에 없던 나는 '주여 어서오소서'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정성 들여 써서 응모했다.
신문사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시골 중학교 3학년 학생의 작품이 감히 당선이 되겠는가. 기간도 약 3개월이 지났으니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빨간 색연필로 표시된 기독시보 당선발표가 도착했다. 뛸 듯이 기뻐 다음날 국어과 김신철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선생님도 기뻐하시면서 중·고등학생 전체 월요일 애국조회 시간에 이 시를 읽으라고 하셨다. 전교생과 선생님들 앞에서 시를 발표한 나는 칭찬을 받았다. 이후 김 선생님은 문학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 학생 대여섯 명을 선정해 자기가 운영하는 함평문화원 사무실에 불러 문학공부를 시켜주시고 우리들의 작품집도 만들어주셨다.
함평농고에 진학해서는 2학년 때 학생회 문예부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졸업식 때 재학생 대표로 송사를 써서 낭독하고 졸업식 때는 심금을 울리는 답사로 눈물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고교 3학년 때 학교 교지를 맡아 선생님과 문예부원들이 편집해 광주 인쇄소에서 2주간에 걸쳐 문예지 만드는 일도 했다.
고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고향 신광면 가덕리에서 함평읍까지는 약 3시간 거리여서 왕복 6시간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다. 어린 우리들이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신 목사님께서 안타까워하시고 함평 중앙교회 김덕수 목사님의 소개로 우리 친구들은 함평 자광원에서 어린 고아들을 돌보며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자광원 원장님은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님의 부친이자 함평 중앙교회 장로님이신 홍순호 장로님이셨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3) 고교 시절 밀알학교·여명학교 등 교가 제작 참여
홍정길 목사님의 부친 홍순호 장로님은 나에게 함평 자광원 원가 작사를 부탁하셨다. 3절까지 작사해 널리 불리던 노래인 '부모님 은혜' 곡에 붙였는데 300여명의 원생들이 즐겨 불렀다. 교회 어르신들의 장례식엔 한지 두루마리에 조사를 써 홍 장로님께 드리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알려져 서울 밀알학교와 여명학교 교가,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 교가에 노랫말을 붙이는 영광을 얻었다.
함평 중앙교회 박종철 목사님께서 주보를 만들어보자고 권해 여기에도 동참했다. 목사님이 매주 원고를 주시면 300여장의 주보를 만들어 등사하는 일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했다. 매년 학생회 회지를 맡아 만들기도 했다.
고교 3년 동안 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새벽기도였다. 박종철 목사님은 주일 새벽을 포함해 1년 365일 동안 창세기 1장부터 매일 1장씩 성경 공부를 하셨다. 얼마나 재밌고 은혜스러웠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학교 공부보다 훨씬 열심히 성경 공부에 매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시편 공부는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새벽기도에 함께했던 친구 중 17명이 신학대에 가서 목사와 선교사가 됐다.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시험 때 갑작스럽게 열병이 나서 응시 기회를 놓쳤다. "임형,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숭실대에서 후기 모집을 하고 있으니 한번 해보는 게 어때요." 숭실대 철학과에 먼저 다니고 있던 홍 목사님이 시험을 한번 쳐보라고 권유했다. 동급생보다 한 해 늦은 1961년 숭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홍 목사님은 독서광이었다. 교정에서 만날 때마다 홍 목사님은 항상 대학노트를 뒷주머니에 끼고 옆구리에는 늘 책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문학청년으로서 문학, 특히 시에 관심이 많았다. 신입생 때 시인 김현승 교수님을 만났다. 김 교수님은 1학년 대학국어를 담당하셨다. 어느 날 강의를 마치신 김 교수님은 나를 지목하시더니 다음 수업시간까지 시 두 편을 써서 자신의 연구실로 가져오라고 하셨다.
시 대가이신 교수님 말씀에 매우 긴장해 1주일 동안 밤을 새며 두 편의 시를 써서 다음 국어시간 후에 교수님 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은 아무 말씀 없이 시를 보시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불호령 같은 말이 떨어졌다. "이것도 시라고 써 왔는가." 그리고 방을 나가버리셨다.
나는 매우 당황하고 창피해 시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관악산만 한참 바라보다 나와 버렸다. 다음 강의 시간에는 부끄러워서 교수님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 한달 여가 지난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타박을 하셨던 교수님이 그 시 한 편을 학보에 실어 주셨던 것이다. 그리곤 내게 시를 많이 읽으면서 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셨다. 그 이후 내게 가끔 책도 소개해 주시고 나의 습작시를 지도해 주시곤 했다.
당시엔 1940년부터 42년생까지 군 면제를 받게 돼 있었다. 당연히 나도 면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났으니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1964년 2월 함평군 입영자 30명이 버스를 전세내 목포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장도 없는 나는 버스에 몸부터 실었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4) 軍복무 면제자임에도 나라·민족 위해 자원입대
입영자들이 함평군청에 모이는 시간을 알아본 뒤 뒷주머니에 5000원을 넣고 군청에 갔다. 입영자는 30여명 정도 모여 있었다. 입영자를 점검하고 있던 병사계 직원에게 "학생인데 이번에 지원 입대를 하기 위해 왔으니 받아 달라"고 했다. 병사계 직원은 귀찮다는 듯 "1940년생이 너무 많아서 제1보충역에 편입됐다"면서 "간단한 훈련만 받고 군복무는 면제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입대하고 싶다'고 거듭 말했지만, '바쁘니 그만 비켜 달라'는 답만 돌아왔다. 그 직원은 입영자들에게 대기해 놓은 버스에 탑승하라고 지시해놓고는 서류를 가지러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는 영장도 없이 그 버스에 탔다. 약 1시간 후 버스는 목포역 앞 공업고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함평, 무안, 진도, 해남, 완도 등에서 온 200명 이상의 청년들이 운동장에 모여 서류를 접수하고 점검을 받았다. 이어 각자 점심식사를 마친 뒤 1시까지 여기에 집합해 기차로 떠난다고 했다. 함평군에서처럼 담당 공무원에게 입대시켜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 공무원은 전라남도 병력 담당인 듯했는데 함평군 병사계 직원과 비슷한 이유를 대며 '입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2월 목포의 바닷바람은 찼다. 간단하게 점심을 얻어먹고 오후 1시에 다시 공고 운동장으로 갔다. 인원점검을 한 뒤 4열로 서서 목포역으로 가기 시작했다.
남은 방법은 대열에 무작정 끼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들어가니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입영자들은 순서대로 기차에 올랐다. 1시간 이상 달려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군용 트럭 수십 대가 서 있었는데 입영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앞차부터 태우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 같아 입영자들이 타고 있던 트럭에 가서 같이 좀 타자고 했다. 한참을 달려 사단 신병훈련소에 도착했다. 신설된 31사단 신병훈련소 연병장은 황토밭 같아서 2월의 겨울바람이 황토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연병장에서는 담당자들이 최종 서류와 인원수를 파악하고 훈련소 영내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던 나는 서류도 없이 입구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맨 끝에 선 나와 담당 중사 하나만 남았다. 나는 그 중사에게 지금까지 여기에 오게 된 사정을 말하고 입대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야 인마! 군대가 너네 안방인 줄 알아!" 담당 중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나를 부대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중사님 말씀처럼 군대가 우리 집 안방이면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그냥 들어가지요"라고 말하며 그 중사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는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나오면서 기록하라고 했다. 신상명세서였다. 열심히 써서 주었더니 힐끗 쳐다봤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별 희한한 놈 다 있네." 그는 부대로 들어가더니 10분쯤 후 문을 열고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뛰어갔더니 내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신병5중대 훈련병 입영 확정!" 그는 큰 구호와 함께 나를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수속을 마치고 신병5중대로 편성됐다. 그렇게 되고 싶던 군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선한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한 번 더 실감했다. 군 입대를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5) 훈련소 입소 첫 주일, 예배 다녀왔더니 탈영소동이
금요일에 입대했는데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제식훈련을 한다고 했다. 토요일에는 훈련복과 소총, 필요한 장비를 받아 정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총을 받으니 신기하면서도 '이제 진짜 군인이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첫 주일 아침 영내 군인 교회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교회에 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마침 내무반장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함평 궁산교회를 다니던 나태식에게 말없이 교회에 빨리 다녀오자고 했다. 예배당에 들어서니 100여명의 선배 기수들과 기관병들이 가득 찼고 찬송과 기도가 우렁찼다. 설교 시간엔 눈물바다가 됐다.
예배를 마치고 부지런히 뛰어서 내무반에 돌아왔다. 그러나 내무반에선 우리가 탈영을 했다고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내무반장이 소리쳤다. "너희를 탈영병으로 보고했다. 이제 영창으로 보내겠다. 엎드려뻗쳐!" 명령과 동시에 야전용 곡괭이 자루가 날아왔다. 주먹으로 뺨도 맞았다. "또 이 따위 짓 할 거냐." "네." "이 자식들, 교회에 말없이 갈 거냐고?" 우리는 작은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입대 전에도 교회에 다녔느냐고 묻기에 또 "네"라고 대답했다. "이 새끼들, 진짜 예수쟁이구먼. 알았어."
저녁예배 시간이 됐다. 군종병이 찾아왔다. 내무반장이 "예수쟁이 두 놈 말고도 교회 갈 사람 또 있어?"라고 했다. 그랬더니 7명이 따라 나섰다. 내무반장은 나태식과 나에게 인솔자가 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교육이 끝날 때까지 예배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원주 1군 사령부 통신교육대에서 6주간 무전병 훈련을 받았다. '이왕 군 생활을 하려면 전방에서 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교육대 행정실을 찾아가 최전방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욕만 얻어먹었다. "후방으로 가겠다고 찾아오는 놈은 있었지만 전방으로 가겠다는 놈은 처음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
대구 보충대에서 1주일을 머문 다음 고향이 가까운 전주 35사단 103연대로 전속 명령을 받고 인사과에 배속됐다. 마침 35사단 교회가 부대 근처에 있어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까지도 출석할 수 있었다. 주일예배는 군목이 집례했지만 수요예배는 많이 모이지 않아 사병들이 돌아가며 설교를 했다. 인사과에 근무하는 나는 부대원들의 신상카드를 정리하는 일도 했다. 카드 정리할 때 기독교인들을 파악했고 이들을 중대별로 정리해 중대 신자들 중에 나름대로 책임자를 뽑아 주일예배와 수요예배에 참석하도록 권했다. 그랬더니 예배 참석자 수가 날로 늘어났다. 처음엔 50명 정도였지만 금세 120명을 훌쩍 넘어섰다. 신우회와 성가대도 조직해 교회의 면모를 갖추는 데 힘을 썼다. 나는 상병 말기부터 신우회 회장직을 맡았다.
하루는 군종 목사님께서 연대장을 찾아왔다. "임만호 병장이 주간에는 인사과에 근무하고 일과 후에는 교회에서 지내며 신우회를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연대장은 불신자였지만 흔쾌히 승낙했고 그날부터 나는 반(半)군종병처럼 일과 후에는 교회로 퇴근해서 사병들의 신앙상담을 도왔다. 제대할 때까지 군종 목사님을 도우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6) 고향서 보낸 장학금 거절에 "훌륭한 고집쟁이군
1967년 7월 군에서 제대하고 68년 숭실대 경영학과 4학년에 복학했다. 당시 농촌경제의 열악한 구조상 자녀를 서울로 유학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도 집에서 기르던 돼지와 닭을 팔아 입학금을 마련해주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61년 대학 입학 당시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님의 부친인 홍순호 장로님이 보내주신 편지다. 어느 날 기숙사로 등기우편이 왔다.
'만호의 대학 입학을 축하한다. 우리 정길이와 같이 기독교 대학인 숭실대를 다니게 되어 기쁘구나.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한 학기에 3만원씩 장학금을 보내주려 한다. 우선 1만원을 우편환으로 보낸다. 신앙생활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거라. 이만 줄인다.' 편지 안에는 1만원짜리 우편환이 들어 있었다. 당시 1학기 등록금이 8만원, 1개월 기숙사비는 6000원가량 하던 시절이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려움을 아시고 홍 장로님을 통해 도와주셨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 기도를 드렸다. 다음날 우체국에 가기로 하고 들뜬 마음을 달래며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결에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아버지는 늘 "대인관계에서 덕을 많이 보면 평생 짐이 될 수 있다. 어떻게든 자기 일은 자신의 힘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갑자기 잠에서 번쩍 깼다. "자기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이 또렷하게 울렸다.
'그래, 내가 존경하는 홍 장로님은 동네에서 부자이시지만 지역의 미자립 교회를 많이 도우시면서 고아원까지 운영하시니 쓰셔야 할 돈이 많을 것이다. 당장 내 형편이 어렵긴 하지만 부모님이 계시고 내 힘으로 몇 푼이나마 벌 수 있으니 사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날 밤 홍 장로님께 보낼 편지를 써내려갔다.
'큰돈을 장학금으로 보내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돈을 받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고향에 부모님도 계시고 제 힘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평 자광원에는 부모도 없는 불쌍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돈을 원생들을 위해 써주신다면 더 좋을 듯싶어 다시 보내드립니다. 저의 당돌한 행동을 용서하시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돌한 편지가 아닐 수 없다. 그날로 편지에 우편환을 넣어 영등포우체국에서 발송했다. 훗날 다른 분을 통해 홍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만호란 녀석이 훌륭한 고집쟁이더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학 때면 서울 신당동 건축 현장에서 잡부로 일했고 오전 4시에 일어나 노량진에서 학습지 돌리는 일도 했다. 근로장학생으로 얼마의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68년 11월 미림목재라는 회사에 경리직원으로 입사했다. 당시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일자리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을 했으니 고향집에서 무척 대견해 하셨다. 69년 6월쯤 고향에서 아버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나이도 서른이 다 돼 가는데 좋은 혼처가 있으니 속히 내려와서 맞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마침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도 있으니 결혼이 늦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함평읍에 사시는 고모님께서 중매를 섰다고 했다. 휴가를 얻어 함평 고모님 댁으로 향했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7) 순교자 집안 딸과 결혼… 주님은 축복의 하얀 눈을
함평군은 작은 동네이기 때문에 교회 간 소식이 활발하게 오갔다. 어느 교회 누구라고 하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처녀는 김성율 장로님의 외손녀로 한국전쟁 때 순교하신 박병헌 집사의 둘째 딸이었다. 나도 김 장로님께서 궁산교회 수석 장로로서 옥산교회를 개척하시고 함평 교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는 것을 고등학교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총각이 맞선 볼 처녀 집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재촉하셨다. 고향 집에서 약 6㎞ 떨어진 곳으로 궁산교회가 있는 동네였다. "김성율 장로님을 보나 순교하시기 전 박병현 집사님을 보나 뼈대 있는 가문임에 틀림없다. 순교자가 나온 신앙 있는 집안이다." 고모님의 말씀을 듣고 내심 결정을 한 상태였다.
처가 동네는 궁산교회를 중심으로 30가구 정도로 이뤄진 동네였다. 100%가 신자여서 예수 냄새가 난다고들 하는 곳이었다. 농촌교회에는 200여명이 모였는데 김도빈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셨다.
먼저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교회 바로 밑에 있는 처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친척 몇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친척들은 간단히 식사를 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다들 나가셨다. 처녀와 나만 안방에 덩그러니 남았다.
오랜 침묵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나 귀댁이나 결혼 정년이 되었으니 결혼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낭만도, 멋도 없는 프러포즈였다. 처녀의 얼굴을 봤다. 나를 쳐다보더니 빙긋 웃는 게 아닌가. '됐다!'
나는 답을 얻은 것으로 알고 또다시 선포를 해버렸다. "10월 9일이 휴일이니 이때 약혼하고 내년 1월 9일에 결혼을 합시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박장대소를 하셨다. "만호야, 결혼 일자는 신부 측에서 잡는 거란다." 어머님이 웃으시면서 잘했다고 하셨다. 약혼식은 광주의 음식점으로 정했다. 김 목사님을 모시고 양가가 모여 10월 9일 약혼을 치렀다. 신부는 영광농협에 근무하고 있었다. 순서가 뒤바뀐 것 같지만 연애편지 같은 편지를 한 주에 한 번씩 보냈다.
1970년 1월 9일에 처가 교회인 함평 궁산교회에서 김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사진을 보았더니 얼마나 경황이 없었는지 신부 자리에 내가 서고 신랑 자리에 신부가 서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주변에선 축복 속에 아름다운 결혼식이라고들 좋아했다. 결혼식 당일은 처가에서 하루 쉬고 시댁으로 가는 풍습에 따라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혼식 다음날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신랑 신부에게 복이 있다는 징조'라며 다들 좋아하셨다.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약 6㎞ 거리였다. 마을길에서 대로변까지만 해도 1㎞가 훌쩍 넘었다. 온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우리가 탄 차 앞에서부터 눈을 쓸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1시간 정도 차 안에서 왕처럼 호강을 했다. 고향 마을에서도 큰길에서부터 집까지 1㎞를 동네 사람들이 나와 눈을 치워줬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즐겁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결혼 후 3일 만에 전세로 준비해 놓은 서울 집으로 '신혼여행'을 왔다. 지금의 결혼문화와 많이 다르지만 당시 소박한 결혼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지금도 처가 동네에 가면 어르신들로부터 '눈 쌓인 길을 치우며 보내줬던 신랑'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8) 김준곤 목사 "민족 복음화 위해 CCC 참여하라"
1968년 10월 5일 미림목재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10일부터 출근했다. 사장님과 전무님은 입사 환영과 훈시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회사에 금송아지가 있어도 팔 줄을 모르면 돌덩이만도 못한 것이다. 여러분이 각별히 신경 쓸 게 있다. 첫째는 영업을 잘해야 하며, 둘째는 목재를 잘 알고 구입을 잘 해야 한다. 셋째는 부하 직원들을 잘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앞으로 2개월간 사무실에 들어올 생각 말고 공사현장에서 현장 일을 배우도록."
당일 목재 공장에서 작업복을 지급받았다. 2개월간 일과 시간에는 공장장의 지시에 따라 목재 운반과 톱으로 목재를 켜는 일을 했다. 톱밥을 모으고 피죽 묶어 옮겨 쌓고 목재 입출고 등을 점검하며 현장 직원들과 함께했다.
신입사원 5명은 일과가 끝나면 오후 6시 사무실로 들어가 전무님으로부터 영업과 사무 행정에 대해 1시간씩 교육받았다. 그때 계산서를 작성하며 검산을 주산으로 했다. 2개월간 현장실습 후 영업실습을 6개월간 한다고 했다. 목재가 필요한 건축현장과 목재소 매점으로 아침 7시까지 출근했다. 그와 동시에 전날 영업활동 보고를 하고 9시부터 현장 판매사원으로 일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은 서울 신림극장 건축현장에 목재를 납품한 것이었다. 당시 신림극장 건축현장에 납품한 목재 가격만 해도 3억원이 넘었다. 신입사원으로서 대어를 낚았다고 사내에 칭찬이 대단했다. 영업실습 6개월 동안 입사동기 중 3명이 중도 퇴사해 버릴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70년 6월 서울 대림동 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받고 불철주야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님인 홍정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홍 목사님은 당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무간사로 한국CCC 설립자이신 김준곤 목사님과 함께 대학생 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홍 목사님은 학원복음화와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간단하게 전화로 설명한 뒤 며칠 후에 김 목사님과 면담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설 영업소지만 다른 영업소를 따라갈 만한 실적을 보이고 있어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홍 목사님은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김 목사님과의 면담을 주선하고 떠났다. 김 목사님은 홍 간사에게서 나를 자세히 소개받으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목사님 역시 CCC의 거룩한 비전을 설명하면서 CCC가 당면한 사업 중 회관 건축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법인을 설립했다고 말했다.
"CCC가 지금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자체 회관도 지어야 하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전력을 다해 뛰어가야 할 상황입니다. 임 선생은 제가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학원복음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예비해 놓은 인재인 것 같습니다. CCC에서 재정담당을 해주십시오." 간사 봉급은 월 5만원이었다. 당시 총무였던 홍 목사님의 급료보다 1만원 정도 높았으나 미림목재소보다는 1만원 적었다. 하지만 김 목사님이 보여주신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꿈이 나를 움직였다. 그렇게 그 꿈에 사로잡혀 CCC에 합류했다.
목재사 일은 건축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만큼 CCC 회관을 건축하는 데 도움이 됐다. 대학에서 전공했던 경영학은 CCC 재정을 담당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이때의 건축 경험으로 훗날 반포 남서울교회 건축실행위원장으로 일했고 1993년 남서울은혜교회가 밀알학교를 건축할 때도 위원장과 실행이사로서 헌신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려지는 건축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 뜻을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9) "CCC 회원 1만명 먹일 밥솥 100개 구해주소서"
1971년 제야의 종소리에 맞춰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에서 민족 복음화 제1차 집회가 열렸다. 김준곤 목사님과 30여명의 간사, 대학을 졸업한 나사렛 형제들이 민족 복음화를 선언했다. 나는 71년 대전 1만명 민족복음화운동 요원 강습회와 73년 춘천성시화대회, 74년 엑스플로 74 대회의 CCC 총무부장으로 책임을 맡았다.
70년대 당시 CCC는 서울 묵정동 대학생 봉사회 강당을 빌려 집회를 갖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서울 정동 구 러시아 공관 자리 500여평 부지를 불하받아 꿈에도 그리던 20층짜리 회관과 별관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CCC 재정을 담당했으며 정동회관 신축 담당 간사로서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CCC는 71년 8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운동 요원 강습회를 가졌다. 3박4일 동안 복음전도 정예 요원을 훈련시킨 것이다. 그때부터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대단원의 훈련이 시작됐다.
나는 정혜숙 간사와 대회의 재정, 취사를 맡았다. 1만명의 밥과 반찬을 준비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100개가 넘는 밥솥을 구하는 게 문제였다. 전국 CCC 17개 지구에 수소문해 봤지만 집회 1주일 전까지 겨우 7개밖에 못 구했다. 응급처치로 대전 지역 군부대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자대원들의 용도에 맞게 시설을 갖췄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취사장 부지까지 마련해 놓고 솥을 구하지 못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다렸다. 솥이 없다보니 동분서주했다. 취사장에서 일하는 30여명 간사들은 목재소에서 땔감으로 쓸 마른 피죽을 구해다 현장에 쌓아놓기만 했다. 다들 간절한 마음으로 '밥솥은 어디 있습니까'하며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때 진공열이라는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간사님, 다른 준비는 다 됐는데 솥이 없으니 어떡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저쪽 너머에 중국 사람이 하는 솥 공장이 하나 있긴 한데요.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단 몇 개라도 솥을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취사장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10분을 걸어 솥 공장에 도착했다. 소규모 공장이었는데 양은솥에 밀려 파산 직전의 상태처럼 보였다.
"솥을 파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사정을 들은 중국인 사장은 창고 한 귀퉁이로 우리를 안내했다. 창고 안에 들어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는 솥 100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10년 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아직까지 팔리지 않아 이렇게 먼지만 쌓이고 있습니다."
전율이 느껴졌다. '하나님은 민족복음화대회를 위해 10년 전부터 솥을 준비해 두셨다! 민족 복음화는 반드시 이뤄진다.' 순간 하나님의 계획과 민족 복음화의 확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72년 국제CCC 본부 주최로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코튼볼 미식축구장에서 엑스플로 72 대회가 열렸다. 주 강사는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였다. 엑스플로 74 대회 준비를 위한 견학차 나도 참가했다. 7만명이 운집한 집회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복음 전도를 위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한 얼굴과 옷을 차려있고 모였다. 수만명이 함께 찬송하는 소리는 마치 천군천사가 함께 부르는 소리 같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음성 같기도 했다. 엑스플로 72 대회는 상상을 초월하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0) "'엑스플로 74' 30만명분 식사·재정 맡아달라"
미국 엑스플로 72대회에 참가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단 일행 32명은 뉴욕, 샌프란시스코, LA, 라스베이거스 등 미국 대도시 몇 곳을 둘러봤다. 가난한 나라 한국 국민 입장에서 미국이란 나라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경이로웠다. 귀국한 뒤 엑스플로 74대회를 위한 스태프 기도회가 서울 수유동 영락기도원에서 열렸다. 그때는 정말 국가와 민족, 민족 복음화를 위해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때다.
"주님,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보니 기독교 정신 아래 나라가 평안하게 운영되고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무장공비가 나타나고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 불안감을 어찌해야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까. 주님, 이 불안과 어려움을 어찌해야 합니까. 주여, 민족 복음화의 불씨를 일으켜주시옵소서."
사흘간 금식기도를 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간구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민족 복음화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각오가 새로워지는 계기가 됐다.
1973년 가을엔 춘천성시화대회를 윤수길 간사, 춘천CCC 요원들과 약 3개월간 준비해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어 김준곤 목사님과 총무 홍정길 간사를 중심으로 엑스플로 74대회 준비에 돌입했다.
엑스플로 74대회는 74년 8월 13∼18일 여의도 5·16광장(현 여의도공원 일대)에서 연인원 655만명이 참여한 한국교회 역사상 최대의 전도집회였다. 이때 나는 총무부장으로서 재정과 식사 준비를 담당했다. 대회를 앞두고 김 목사님이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임 간사는 아이디어가 좋잖아요. 71년 대전 집회의 경험을 살려 약 30만명이 식사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보세요. 그리고 단기간에 전국에서 약 30만명 이상의 요원이 상경하는 방안도 생각해보세요."
지금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때 기술력으로 30만명의 밥을 한꺼번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연구 끝에 월남전 파병 때 쓰였다는 간이 밥공장이 생각났다. 경기도 이천 공장을 찾아갔다.
"뭐라고요? 30만명의 밥을 짓는다고요!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밥을 지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5·16광장에 대규모 시설을 만들어야 하고 밥을 짓기 위해 많은 인원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일시에 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데다 일단 사용한 시설은 재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 손실이 엄청날 텐데 이런 위험부담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결국 간이 밥공장은 포기했다. 기도하며 연구한 끝에 대림보일러에 근무하던 홍정길 목사님의 고모부 박종구 장로님이 생각났다. 박 장로님과 대림보일러 기술진이 참여해 회의를 거듭한 끝에 여의도 아파트의 보일러에서 나오는 스팀으로 밥을 짓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보일러 스팀으로 밥을 짓는 원리는 이렇다. 철판으로 거대한 탱크 2개를 만들고 거기에 파이프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 관은 다시 여의도 아파트 보일러에 연결하고 거기서 나오는 스팀으로 밥을 짓는 원리였다. 탱크 안에는 1500개의 넙적한 양은 밥통을 만들고 각각 200인분의 쌀을 넣고 물을 맞춰 밥을 짓는 것이다.
시험 삼아 소형 탱크를 만들고 거기에 밥을 해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반찬은 단무지로 했고 식수는 수돗물로 대신했다. 엑스플로 74대회 때 30만명의 식사를 큰 어려움 없이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1만명을 먹인 71년 대전 집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1) "이번엔 문서선교" 서울 후암동에 아가페 서적을
엑스플로 74대회 때 수십만명이 단시간에 상경한다는 것은 당시 철도 운송 규모로 봤을 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장시간 연구 끝에 자전거로 엑스플로 74대회를 상징하는 민족 복음화 깃발을 달고 대회 10일 전 그룹을 지어 올라오면서 전도도 하고 교회를 찾아 전도훈련을 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숙소는 교회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회 전날 서울로 입성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임 간사, 아주 좋은 아이디어요. 그렇게 하면 대회 홍보도 되고 전도훈련도 가능할 것이오." 김준곤 목사님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수천 명의 자전거 전도요원들이 수원공설운동장에 집결해 엑스플로 74대회 전야제를 가졌다. 이때 국내외 신문기자들은 이 광경을 대서특필했다.
오전 9시에 출근하면 밤 11시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서울 정동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회관에서 버스로 밤 11시쯤 퇴근하면 늘 졸음이 몰려왔다. 상도동 숭실대 앞에서 내려야만 자정 전에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는데 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 상도동을 지나쳐 봉천동 종점까지 가버리는 일이 일상화됐다. 당시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 봉천동 종점에 도착하면 밤 12시 5분 전, 상도동 집으로 고개를 넘어 뛰면 약 20분 정도 소요됐다. 그러면 늘 통행금지 위반으로 걸리곤 했다. "아니, 오늘도 늦게 오십니까." "아,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좀 봐주세요." "다음엔 늦지 마세요. 가세요." 그렇게 늦는 일이 많다 보니 봉천동 파출소 순경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통과시켜 주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CCC에서 민족 복음화에 열정을 다했다.
많은 일 중에 엑스플로 74대회에 미력이나마 기여한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엑스플로 74대회를 마치고 원주 지역 간사로 일하다 나의 일을 찾기 위해 CCC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젊음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힘썼던 민족 복음화는 후회 없는 보람된 삶이었다.
CCC를 떠나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여러 가지 구상을 했다. 간사를 퇴직할 때 퇴직금도 없을 뿐 아니라 CCC의 봉급으로는 저축할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민족 복음화를 위한 열정과 보람은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힘과 가치가 있었다. 후회 없는 일을 마무리하면서 아무 불만이나 걱정이 없었다.
기도하면서 직업 선택을 고민했다. 1976년 1월, 선교 방법은 CCC와 다르지만 선교적 사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서선교에 나서기로 했다. 출판사와 함께 서점을 동시에 개업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상도동 숭실대 앞 상도제일교회(예장 합동)였다. 담임 목사님은 백병건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오후에 나를 부르셨다. "임 집사는 내가 보기에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나 신앙생활 하는 면을 보니 총회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좋아 보이네. 학비는 교회에서 부담할 테니 교회 전도사로 봉사하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감사합니다. 목사님. 그러나 인생의 값진 젊은 시절에 아낌없이 일했던 CCC의 정신대로 순수성을 갖고 평신도로서 민족 복음화 사역을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서선교사역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당시 주요 기독교 서적 출판사들은 직영서점(기독교문사, 생명의말씀사, 백합서점, 정음사)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도 규모는 작지만 도서출판 크리스챤서적 출판사와 서울 후암동 입구 도로변에 아가페 서적이라는 서점을 개업했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2) 보증금 부족에 "제 젊음 보고 점포 빌려주세요
신학을 하지 않고 평신도 사역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함평중·고등학교 시절 함평중앙교회를 다니며 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님의 부친 홍순호 장로님과 그 가정이 신앙적으로 매우 부러웠다. 나의 신앙생활 목표로 삼을 만큼 깊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홍 장로님은 함평 자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운영하시면서도 정미소 제재소 목욕탕을 운영하셨다. 함평에서 가장 큰 상점을 사거리에 갖고 있었는데,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수천명이 홍 장로님의 사업장 중 어느 한 곳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정도로 홍 장로님은 큰 사업가였다. 새벽기도와 주일 성수, 교회를 섬기는 모습 또한 모범적이어서 함평 지역사회에서 신앙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런 경험은 신학대에 가는 것보다 평신도로서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직업과 선교를 향한 꿈은 사업자금에 가로막혀 있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사영리 첫머리 말처럼 하나님은 나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지만 사업자금은 낭떠러지 절벽처럼 느껴졌다.
1976년 2월 사람들이 설 준비로 바쁘던 날, 나는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하고 무작정 서점 점포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동대문에서부터 용산 후암동 입구까지 10여개 이상의 복덕방을 찾아다녔다. 복덕방도 설을 앞두고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나는 낙심치 않고 걸어서 남영동 어느 복덕방에 찾아갔다. "사정이 이런데 제 사정에 맞는 서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을 쇠러 충청도 고향에 가기 위해 문을 닫기 직전에 오셨네요. 우리 복덕방 옆으로 한 집 건너에 북쪽을 향하는 10평쯤 되는 점포가 나와 있으니 설 지난 다음 다시 봅시다." 그 말만 듣고 복덕방 주인은 고향으로 향하고 나는 봉천동행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포는 남향보다 북향이 더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함평 홍 장로님 상점도 북향이었다. 주위에 숙명여대, 신광여고, 수도여고, 용산고, 보성여고, 숭실고가 있어 서점 위치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을 쇠고 복덕방을 찾아갔다. 임대료와 입주일자를 알아보니 보증금도 적은 월세였다.
아무리 적은 보증금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가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주인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제 사정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경찰 출신인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으니 가볼 필요도 없을 것 같소만." 나는 즉시 노량진에 산다는 가게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게 임차 관계로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오라고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경찰 출신답게 깐깐해 보였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보증금이 부족하니 대신 월세를 올려주겠다고 했다. 주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순간적으로 "나의 젊음을 보시고 점포를 임대해 주시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대신 다섯 돈짜리 결혼반지를 맡겨 놓고 3개월 동안 보증금 잔액을 마련해 반지를 찾아가겠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미소를 띠고 청년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며 금반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금반지를 점포 주인에게 가져갔다. 그렇게 다음날 복덕방에 가서 임대계약서를 썼다. 계약서 내용엔 '금반지 다섯 돈이 포함됨'이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복덕방 아저씨도 이런 계약은 처음 본다며 웃었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3) '아가페서적' 3년… 주님은 생명 살리는 서점으로
1976년 2월 가게에 '아가페서적'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유리문에 성경, 찬송이라 큼지막하게 써 붙이고 개업예배를 드렸다. 10평 남짓이었지만 나에게는 백화점처럼 커 보였다.
문서선교를 위해 서가 한편에 무료 대여 코너를 만들었다. 미우라 아야코의 '빛이 있는 동안에' '살며 생각하며' '이 질그릇에도' 등 기독서적을 진열하고 서점에 들르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대여해 줬다. 호응이 좋았지만 30%는 회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사명이라 여기고 계속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20대 아가씨가 서점에 들어왔다. "뜨개질 책이 있나요?" "여기는 기독교 서점이라 그런 책은 없습니다. 다만 무료로 빌려주는 건 있습니다." 안이숙 선생님의 '죽으면 죽으리라'를 권했다. 3일 후 밝은 얼굴로 서점을 찾은 그에게 후편인 '죽으면 살리라'를 빌려줬다.
3일 후 그가 다시 찾아왔다. "책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금식기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예?" 의외의 질문이었다. "갑작스럽게 금식기도를 하기보다 가까운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신앙지도를 받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는 2시간 후 다시 서점에 왔다. "성경 공부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결국 내가 아는 성경 공부 모임에 연결해 줬다.
그의 사정은 이랬다. 국립병원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영등포 모 교회 목사님의 아들과 연애하며 결혼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목사님 댁에서 비신자와 결혼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그 총각은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해버렸고 그 충격으로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에 드러누웠다는 것이다. '누워 있지만 말고 뜨개질이라도 배우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뜨개질 책을 찾으러 서점을 찾았고 내가 권한 책을 읽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흘러 남서울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밖에서 인사를 하는데 어떤 여자 분이 아기를 안고 내 앞으로 왔다. "선생님, 혹시 몇 년 전에 남영동에서 서점하시던 분 맞지요?" "그렇습니다만." "그때 책을 빌려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 후 결혼도 하고 남편의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에 따라 갔습니다. 귀국하기 전 목사님께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교회에 출석하는 게 좋겠냐'고 여쭤 봤더니 반포 남서울교회를 추천해 주시더군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서점을 3년간 운영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밤 20대 중반의 아가씨가 서점에 들어왔다. 우산도 쓰지 않고 비 맞은 머리를 손으로 훔치면서 서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책을 찾으시나요?" 대답도 없이 나가려는 아가씨에게 '죽으면 죽으리라'를 권했다. 그녀는 책을 받아들고 나가버렸다.
몇 달 지나 서점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저는 제천에서 연애를 하다가 실패한 뒤 부끄러운 마음에 용산 해방촌 친척집에 머물던 사람입니다. 실연 때문에 화가 치밀어 투신자살을 하려고 한강으로 향하다가 경찰의 검문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용산역에서 제천행 차표를 사주며 고향으로 갈 것을 권했지만 다음에 가겠다고 하고 해방촌으로 향하다가 선생님 서점이 들어간 겁니다. 아저씨가 추천해 주신 책을 읽어보니 '정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제천으로 돌아와 교회에 출석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문서선교의 보람은 갈수록 커졌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4) 홍정길 목사 “만호, 교회 개척에 동참해주게”
미림목재에 근무하던 1969년부터 서울 상도제일교회에 출석했다. 신앙생활 중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가 된 홍정길 목사님으로부터 1975년 여름 전화가 왔다. 홍 목사님은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였지만 같은 고향 출신인 데다 동급생이어서 사적인 자리에선 반말을 쓸 정도로 허물이 없는 친구사이였다. 그는 나를 한국대학생선교회(CCC)로 이끌어준 은인이었다.
“만호야, 내가 이번에 반포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어. 교회 이름도 반포제일교회로 정했어. 20여 가정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어.” “그래? 마침 나도 교회 개척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그러면 우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세우는 게 어때?”
그렇게 75년 중반부터 반포제일교회(현 남서울교회) 개척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하지만 상도제일교회에서 맡은 직분이 있었기 때문에 3개월간 낮에는 상도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밤에는 개척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상도제일교회에서 맡았던 일을 마치고 백병건 담임목사님을 찾아갔다.
“함평 고향교회의 죽마고우가 이번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제가 옆에서 도와줘야 할 것 같습니다.” “임 집사님, 교회 개척을 돕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백 목사님이 흔쾌히 허락을 해주셔서 홍 목사님을 옆에서 돕게 됐다.
그렇게 76년 1월부터 온 가족이 반포제일교회로 출석했다. 집도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반포동 아파트로 옮겼다. 반포제일교회가 남서울교회를 거쳐 남서울은혜교회가 되기까지 40여년 동안 병원에 입원하는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세 차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교회를 비운 일이 없다.
78년 장로 피택을 받아 이듬해 79년 장로 장립을 했다. 새벽예배 후 교회를 둘러보고 퇴근 때도 교회를 방문했다. 조석으로 교회를 살피는 게 장로의 본분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은 홍 목사님의 부친인 홍순호 장로님이 보여주신 삶 때문이었다.
홍 장로님 내외분은 항상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 고교 재학시절 새벽기도를 가면 두 분은 새벽 4시 전에 도착하셨다. 구체적 기도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매일 한 시간 이상 무릎을 꿇고 9명의 자녀와 300여명의 고아를 위해 간구하셨다. 두 분이 교회 선임 장로로서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홍 장로님은 주일이면 모든 사업체를 완전 휴업했다. 타지로 출장을 가셨어도 주일이면 언제나 본 교회에 돌아오셔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됐다. 주일 새벽예배부터 저녁예배까지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으셨다.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헌금 때면 9명의 자녀들과 부부, 그리고 장로님 댁에서 같이 생활하는 점원 2명까지 포함해 맥추감사절 보리 13가마와 추수감사절 쌀 13가마를 빠지지 않고 헌금했다.
홍 장로님은 먼 거리의 타지를 다녀오실 때도 매일 저녁 교회를 방문하셨다. 버스 정류장이 장로님 댁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집에 들르지 않고 3㎞가 넘는 거리의 교회에 먼저 가셔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교회를 둘러보면서 사찰집사님에게 교회에 무슨 일이 없었는지 물어보셨다. 그 다음 목사님 사택을 방문해 인사드리고 자기 집에 가시는 모습을 봤다. 이 모습을 본 나는 ‘장로는 항상 어디를 다녀와도 교회 먼저 둘러보고 집에 가는 게 순서’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5) “기독인 1000만명 넘는데 기독문학잡지 없다니…”
아가페서적을 시작으로 크리스챤서적이 태동됐다. 출판사업의 원동력은 새벽기도회에서 나왔다. 크리스챤서적에서는 600여종의 기획출판과 타 출판사 15개의 총판을 했다. 그동안 약 800만권을 보급했고 현 시가로 약 4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996년 어느 날 한국아동문학회장을 지낸 김신철 선생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계실 때 한국시에 나를 추천해주셨던 분이다. “자네가 출판으로 돈을 좀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네. 한국 기독교인이 1000만명을 상회하는데 월간 기독문학 잡지가 하나도 없으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네. 이 일을 한번 해보시게.” 김 선생님은 세 번이나 나를 찾아오셔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셨다.
김 선생님을 뵙고 나니 고등학교 문예부장과 ‘기독시보’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학교 교지를 맡아 만들던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 분과 문예지 출판을 논의했다. “기독 문학잡지를 내놓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적자가 뻔합니다.” “누가 그걸 보겠어요.” “하지 마세요. 망합니다.” 주변 모든 분이 만류했다. ‘월간 목회’ 발행인 박종구 목사님과 고등학교 친구들만 한번 해보라는 정도의 말을 했다.
고민은 갈수록 깊어졌다. 이유는 한국문학의 현주소 때문이었다. ‘지금 하는 출판사 일에 조금만 업무를 더하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적자를 예상하니 막막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3개월이 지나 문학을 통해 선교를 하시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한국현대사에서 문학의 변천을 종교적으로 분석해볼 때 고려 474년 역사는 불교사상이 배경이다. 조선 500년을 지배한 유교사상 때문에 문학도 권선징악의 흐름을 이어간다. 이런 배경에서 신문, 잡지, 일반 매체들은 불교나 유교적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유독 기독교적 작품은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게재를 꺼린다. 노벨문학상의 70% 이상을 유럽과 미국 작가들이 수상한 것도,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기독교적 문화권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문학도 서양에서 더 발전했다.’
그렇게 ‘창조문예’가 시작됐다. 1997년 1월 출판 등록을 하고 2월에 창간호를 내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았다. 발행에 어려움이 커져 페이지를 3분의 1 정도 줄였더니 기독교 작가나 신앙시를 쓰는 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창조문예’뿐인데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장로님, 어려우시더라도 용기를 내십시오!” 그러나 이자는 계속 눈덩이처럼 커졌다.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2개월 전 삼성동의 현재 건물을 매입해 은행 부채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러다 망하는구나.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힘이 빠지고 피가 말랐다.
신문들이 IMF 구제금융 관련 기사로 도배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사장님, 신기한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우리가 만든 전집 250세트를 누가 구입하겠답니다.” “뭐라고? 250세트나?”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전집물 월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우리가 만든 39권짜리 ‘알버트 반즈 주석’을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6) ‘창조문예’ 18년 결간 없이 롱런… 이는 주님 은혜
직원의 보고를 받고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걸었다. 불황을 틈타 우리 출판사를 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 책이 필요하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저는 전집물 월부 판매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즈 주석이 좋으니 250세트를 주십시오. 대금은 은행 어음으로 결제하겠습니다. 책은 2∼3일 내로 가져가겠습니다.” 계산해 보니 5400만원이었다. 부피로는 대형 트럭 한 대 분이었다.
‘저 사람이 분명 보름 안에 다시 올 것이다. 경기가 이렇게 안 좋은 마당에 전집 판매가 가능하겠는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반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5일, 1개월, 6개월이 지나도 전화가 없었다. 책자 대금은 연 27%까지 치솟은 이자 부담의 숨통을 틔워줬다. 이자만 월 600만원이 넘었기 때문이다.
전화는 2년 뒤에 왔다. “임 사장님, 몇 년 전 주석 전집을 가져간 사람입니다. 책을 반품하려고 합니다.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쪽 직원이 주석 전집 20세트를 가지고 왔다. 현찰로 되돌려주려는데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이 그 가격만큼 크리스챤서적에서 나온 책으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예?” 결과적으로 얼굴도 모르던 그 사장을 통해 회사는 IMF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출판사를 정말 살려주시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창조문예’는 현재까지 18년 동안 한 호도 결간 없이 204호를 발행했다. 4만5000부를 국내외에 보급했다. 장르별로 242명의 기독 작가를 배출했으며, 8000여편의 작품을 게재했다. 국내 작가 8명과 일본 작가 1명에게 창조문예 문학상을 시상해 국내외 기독문학 발전을 도모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매월 4회 이상 기성작가와 신인작가 교육을 실시했다. 그동안 400여종의 문학 서적을 발간했고 문서 선교를 위해 군부대, 지하철 도서실, 미자립 교회, 교도소 등에 3만여권을 무료로 보급했다.
38년 동안 작지만 탄탄한 기업을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몇 가지 방침 때문이다.
첫째, 직원을 한 번 채용하면 내가 퇴사시켜본 일이 없다. 나와 입사하는 직원의 목표가 같아지도록 노력했으며, 직원의 잘못을 내 책임으로 생각했다. 혹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직원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다른 곳에 가서 어려움이 있으면 다시 돌아와라. 출판, 특히 문서 선교의 뜻이 좋지 않은가.” 그렇게 떠났다가 돌아온 직원이 여러 명 있다. 두 번을 퇴직했던 직원이 돌아와 10년 넘게 같이 일한 경우도 있다.
둘째, 38년 동안 직원들의 월급날을 넘겨본 일이 없다. 운영에 어려움이 있을 때도 약속은 꼭 지켰다.
셋째, 평생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 출판업무 때 우리 사무실에서 직접 편집 교정 디자인을 하고 인쇄 제본 지류 등은 외부 업체에 맡긴다. 이런 외부 거래처는 물론이고 은행, 세무사까지 모두 30년 이상을 같은 곳과 거래하고 있다. 이것 또한 나의 사업 방법이며 고집이라 할 수 있다. 평생 친구관계, 교회, 신문 구독도 20년에서 40년까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격언을 좋아한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 한 가지 일을 시작하는 것 또한 소중한 일이며 만나는 사람의 장점을 찾아 인연을 맺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추운 날에는 옷을 더 입고 더운 날에는 그에 맞게 얇은 옷을 입듯 매사 상황에 맞게 적응하며 산다.
***[역경의 열매] 임만호 (17·끝) “교회와 크리스천은 항상 손해나는 일을 해야”
우리는 누구나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초·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서선교의 자질과 열심을 주신 것은 오늘에 와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크게 느낀다.
특별히 내가 붙들었던 문서선교 철학은 홍정길 원로목사님과 남서울은혜교회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1975년 설립된 서울 반포 남서울교회는 10년 만에 장년 수가 3500명으로 늘었다. 7개 교회를 분가시켰으나 교인 수는 줄지 않았다.
87년 신년 예산 당회에서 홍 목사님이 두 가지를 제안했다. “땅을 사서 교회를 크게 짓는 것보다 학교를 지어 인재를 육성하고 주일에는 강당이나 교실을 활용합시다. 그리고 인간의 생활이란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사찰집사님이 나와 비슷한 연령인데다 식구 수가 같으니 본봉 차이가 없도록 해주세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당회원들이 완강하게 맞섰다. 그러나 홍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식생활의 원칙을 따라 해 달라”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당회원들은 사찰집사 본봉과 담임목사님의 본봉을 동일하게 책정했다.
홍 목사님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교회를 이전할 때도 그랬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료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돈을 받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인수자를 위해 빗자루 하나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당회에서 결의해 주세요.”
당회원들은 홍 목사님의 순수하고 정열적인 교회론에 동의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전 교인이 헌금에 동참했다. 그럴수록 교인들은 몰려들었다.
1992년 1월 서울 일원동 중동고에서 250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고 95년 10월 남서울은혜교회를 세웠다. 우리는 기독교 학교 운영이라는 본래 취지대로 장애인 학교 설립에 들어갔다. 때마침 일원본동에 3200평의 초등학교 부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에선 자발적으로 32억원을 준비했고 장애인 학교인 밀알학교를 건축했다. 97년 밀알학교가 완공된 후 교회는 예배실을 체육관으로 옮겼고 현재까지 활용하고 있다.
홍 목사님과 당회는 또다시 어려운 결정을 했다. ‘남서울은혜교회가 밀알학교 건축비 400억원을 내놓았고 밀알복지법인에 정식 헌납했다. 따라서 밀알학교는 우리 교회 건물이 아니다, 매년 3억원 이상의 대관료를 지불한다.’ 교인들은 ‘교회와 크리스천은 항상 손해나는 일을 해야 한다’는 홍 목사님의 철학에 따라 섬김에 적극 나섰다.
세월은 빨리 지나간다. 우리는 30대에 남서울교회를 개척했고 50대에 남서울은혜교회를 세웠다. 밀알학교를 짓고 개척교회 17개와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를 지었다. 그러고 나니 나도 은퇴 장로가 되고 홍 목사님도 만 70세가 되어 은퇴할 시기가 됐다. 교회에선 홍 목사님께 “70세 나이가 꽉 차는 2012년 말까지 교회를 이끌어 달라”고 간청했다. 퇴직금은 15억원을 책정했다. “아닙니다. 만 70세면 족합니다. 70세 생일에 곧바로 은퇴하겠습니다. 퇴직금도 절반만 받겠습니다.” 그나마 절반의 퇴직금도 러시아 국제학교 증축과 기독교 기관에 헌금했다.
나는 이런 홍 목사님과 60여년간 동행했다. 홍 목사님의 ‘손해 보는’ 목회철학은 나의 문서선교 사역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 앞에까지 가서도 홍 목사님과 교회, 출판 등 재미있는 이야기로 바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