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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10.27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는 강제 해산된다. 엄혹한 유신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8대 대통령 취임식: 대통령으로서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바로 다음해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다.
박정희 대통령/1973.1.12 연두기자회견: 80년에 우리 수출 목표를 100억불까지 올려보자~~
수출 100억불,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 꿈 같은 목표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1977.12.22. 모두를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온 국민이 염원하던 100억 달러 수출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정부는 100억 달러 목표가~~
80년대 이룩하겠다던 목표를 3년이나 앞당긴 것이었다. 그 중심엔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290번째 시간입니다. 대한민국 수출 100억 달러가 실현된 그날의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보니까 모두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단시간 내에 100억 달러를 달성한 거네요. 얼마나 신났을까요?
이시원/배우: 그러니까요 당시 전국이 잔칫집 분위기였대요. 그래서 광화문 앞에 커다란 대형 아치를 세웠구요. 야~~ 이제야 우리나라 진짜 잘 사는 나라가 되었구나. 이렇게 느꼈다고 하더라구요.
최원정: 그때 그 분위기는 아마 이 분은 잘 아실 것 같애요. 요즘에 경제평론가로 종횡무진 활동하고 계시는 김동환 소장님 오늘 나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동환/대한금융 경제연구소 소장: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최원정: 역사저널 그날은 가끔 보세요?
김동환: 매주 봅니다. 저의 가족하고 매주 안빼놓고 봅니다.
최원정: 진정한 우리 식구를 찾았네요. 혹시 100억불 달성 기억나세요?
김동환: 어렴풋해요 십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때 우표 수집이 취미였는데 백억불 우표는 굉장히 귀한 우표였어요. 그래서 제가 도봉구 어느 우체국 앞에서 새벽에 줄을 서서 시트지 라고 그거잖아요. 그것도 샀던 기억이 나고 그때 제 기억이 맞다면 우표뿐만이 아니라 신문에도 백억달러를~~
최원정: (박태균 교수를 향해) 교수님은 잘 아실 것 아녜요? 11살 보다는 좀 더 컸을 때~?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아닙니다. 비슷한 때였습니다. 이게 100억불 이라는게 하나하나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으로 한번 들어섰다 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애요. 그러니까 저의 60년대 초에 1억불 돌파를 그때도 와~ 대단하다고 그랬거든요. 서독 같은 경우도 10억불에서 100억 가는데 11년이 걸렸고 일본 같은 경우는 16년이 걸렸다는 거예요. 우리도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는 것 아냐~~라는 걸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죠.
박상영/작가: 어찌 보면은 희망의 상징 같은 숫자로 볼 수 있겠네요.
최원정: 100억불을 지금으로 치면 10조원 정도 되는 거죠? 한 전자회사의 일년 매출보다도 안되는 금액인데 그때는 사실 아무튼 대단했다는 거죠.
김동환: 삼성전자가 분기 영업이익이 한 10조를 내거든요.
최원정: 분기에요?
김동환: 한 분기, 3개월에~ 그때 하고 지금하고 비교할 수가 없고요. 그때 우리나라 외환 보유액이 대충 한 1~2억 달러 수준이었을 거예요. (1963년 외환보유액 $1억3천만-2020년 10월말 $4265억). 지금은 우리가 4300억 달러이거든요. 그러니까 엄청난 규모의 발전이 있었던 거죠.
이시원: 그 당시에 최빈국 중에 하나였는데~ 주위에서 가능할까 하는 말들이 많았을텐데요?
최원정: 그래서 아까 저기 화면에서도 보셨다시피 이게 3대 조롱거리, 웃음거리였다고 했잖아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당시는 정부를 비판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잖아요.
최원정: 터무니 없는 목표였다는 거죠.
다니엘: 그 목표를 달성했더니 사람들이 엄청 기뻐하고 놀라기도 했을 거예요.
박상영: 아무래도 하면 된다 라는 정신으로 군인정신으로 막 밀어부쳐서 이루어낸 게 아닐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들긴 하네요~
최원정: 오늘 이렇게 단 시간에 100억 달러 달성을 했던 그 과정과 명과 암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고요. 사실 박정희 대통령 하면 독재정치는 했어도 우리 국민들 배 곯치 않게 했던 경제 대통령으로서는 굉장히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잖아요.
박태균: 사실 저는 좀 궁금한 점이 있어요. 1977년에 저희가 100억불을 달성했단 말예요. 기대가 더 높아져야 되고 정권은 좀 더 안정이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2년이 지나서 유신체제가 무너지거든요.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역설적인 일이 어떻게 2년 사이에 일어났는가~?
이시원: 왜 그렇죠?
박태균: 잠시 후에~?
최원정: 머리를 맞대고 해볼까요?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과 유신시대의 마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오늘 끝까지 저희와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영상) 박정희 대통령/1966.12.10: 내 가슴 속에 풀리지 않고 맺혀 있는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도 어떻게 하든지 남과 같이 잘 살아 봐야 되겠다. 이러한 염원입니다--------------
박태균: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경제성장이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거든요. 또 그렇게 경제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했던 게 수출이 아니었던가 사실은 처음부터 수출을 생각했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 초기에 나왔던 1차계획은 수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수출 좀 해서 그 동안에 있었던 무역적자 수지를 메꾸어야 된다 라는 부분이 있을 뿐이었어요.
다니엘: 놀랍네요. 처음부터 수출이었을 거라고 추측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아니었네요.
이시원: 그럼 어떻게 수출을~
박태균: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 경제상황이 굉장히 안좋았어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 10개월 동안에 경제기획원 장관이 7번이 바뀝니다 (1961.7~1964.5=장관임기 평균 5개월, 정착되지 못한 경제정책). 경제정책이 정착되지 않았다 라는 거죠. 그래서 63년에 군정이 끝나는 시점에서 경제정책 실패했다 라는 것을 자인을 합니다. “경제 문제에 대하여--- 자기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출처: 국가와 혁명과 나). 우리가 크게 실패 했다. 뭔가 바꿔야 된다.
김동환: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매우 초조했을 거예요. 왜냐면 당시에 미국이 대부분 원조를 했는데 그게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바뀌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원리금을 상환해야 되는 의무가 처음 생겼거든요. 1963년도에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을 보니까 거의 국가부도위기 수준이었어요 (1963년 외환보유액 $1억3천만-거의 국가부도위기상황). 그래서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표현을 했다고 해요. 겨울에 땔감이 떨어져서 벌벌 떨어야 되는 초가집~~ 그것도 모자라서 도둑놈이 들어와서 세간살이 다 훔쳐간 그런 초가집에 이었다 라고 측근들한테 실토했다고, 임자~ 나 혁명 괜히 했나봐~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초조했다 라고~
최원정: 원래 못살았는데 사정이 더 나빠졌다 라는 얘기잖아요?
이시원: 근데 박정희 대통령의 쿠데타를 일으킨 명분이 반공과 경제재건이었잖아요? 꼭 해결해야 되는 숙제 아니었을까요?
박태균: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사실 GNP가 높았습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1965년 한국 $105 < 북한 $165). 남한의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지 않고서는 우리는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라는 생각들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경제성장이라는 문제는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다니엘: 단순한 경제성장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달여있고 정권의 생명이니까~
이시원: 얼마나 초조했겠어요.
김동환: 1963년도에 급변동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우리나라의 경공업 수출이 4배에서 7배로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갑자기 잘 했다기 보다는 이웃 나라 일본이 경공업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의 고도화가 이루어지면서 수출품목을 바꾸었습니다. 빈자리가 생겼을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원래 농수산물, 광물 위주로 수출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합판과 섬유 등 경공업 제품들을 미국이나 일부 유럽으로 수출하기 시작하거든요. 거기에다 또 한가지 이벤트가 있었던 게 미국에서 우리나라보고 원화 환율이 이상하다고 해요. 그때는 1달러당 130원 정도의 고정된 환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걸 현실화 해라 그래서 1달러가 255원이 됩니다. 두배가 된 거죠.
최원정: 달러가치가 상승한 거죠.
김동환: 그러니까 만약에 1억 달러 어치를 수출하면 기존에는 130억원이 생겼는데 환율을 바꿔놓으니까 255억원이 생긴 거에요. 그럼 어떻게 돼죠?
이시원: 더 싸게 팔 수 있는 거죠?
김동환: 그러면 원화로 월급 주고 공장 짓고 땅 살 수 있죠. 투자 여력이 생겨요. 그러니까 기업체들이 수출하니까 돈 버네, 이 분위기가 잡히자 마자 수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버린 거죠.
박상영: 될 놈은 다 된다~
박태균: 실제로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이걸 운이 7할 노력이 3할(運七技三)로 봐야하는데~ 이런 생각도 하셔야 돼요. 이 조건이 우리한테만 있었던 게 아니고요. 다른 나라도 똑 같은데 왜 한국은 그게 성공을 했고 다른 나라는 성공을 하지 못했는가~ 이 부분이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이 됩니다.
이시원: 아무튼 여러가지 운대가 맞아들고 해서 이제 박정희 정권에서는 야 우리가 가야될 길은 수출이구나 이런 확신을 가졌을 것 같애요.
최원정: 수출 제일주의의 서막이 열리는 거예요. 그래서~~ 1964년 11월 30일 수출 1억불 고지를 넘습니다. 따~ 당~ 여기서 수출의 탑을 세웠습니다.
-------------------(동영상) 수출은 곧 국력의 총화입니다. 우리는 수출증대를 위해서 우리의 총력을 경주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최원정: 이때부터 수출을 위해서 내달리는 거죠.
박태균: 그렇죠, 수출하기 위해서 인제 1969년도 상공부 장관을 새로운 사람을 임명합니다.
최원정: 저기 사진이 나오고 있어요. (이낙선 소령-5.16 쿠데타 동지에서).
박태균: 이 분이 우연한 기회에 1966년에 국세청장을 하게 됩니다. 이 분이 엄청난 세금 징수의 능력을 보여주는 거에요. 내가 66년에 700억을 걷겠다. 그 전해인 1965년에 520억 정도가 되었어요.
이시원: 그러면 너무 무리수 아닌가요?
최원정: 65년보다 66년에는 더 걷어야 된다. 벼룩의 간도 빼먹어야 되는 상황이에요.
이시원: 이게 되긴 돼요?
박태균: 그러니까 자기 마음가짐, 내 자동차 번호를 700번으로 바꾸겠다. 넥타이에도 가방에도 돈 보기를 돌 같이 하라(見金如石). 그런 글귀가 새겨진 넥타이도 지급을 해요. 세금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많았잖아요~
이시원: 이만큼 감면해 줄 테니까 이만큼 챙겨줘~
박태균: 해보셨어요? 이것도 사실은 쉽지가 않은데 사람들이 돈이 있어야 걷죠. 돈이 없는데 쥐어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면 내년에 낼 세금까지도 미리 좀 내라 결국은 876억원을 징수했다는 거에요.
박상영: 군인출신 다 이유가 있었네요.
이시원: 이건 리틀 박정희 인데요. 하면 된다라는 정신을 세금 쪽에서도 실현을 한 거네요. 자연스럽게 수출도 올라 갈 수 박에 없었을 것 같애요.
박태균: 기본적으로 밀어부치라는 거지요.
이시원: 마음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요. 도대체 뭘 팔았길래~
최원정: 도대체 뭘 팔았을까요? 이런 걸 팔았다고 합니다 (가발 메리야쓰 건오징어~~), 먼저 이건 가발이구요. 속옷 메리야쓰, 합판, 뱀? 쥐?
박상영: 설마 쥐를 잡아서~?
김동환: 진짜 입니다. 이거 모피 코트를 만드는 거예요. 쥐가죽으로요. 그래서 쥥크~ 쥐와 밍크의 합성어 쥥크, 그런데 목도리도 만들고 핸드백도 만들고 코트도 만들었는데~ 코트를 하나 만드는데 저 쥐가 몇 마리 희생을 당했을까요?
최원정: 백 마리?
김동환: 오백 사십 마리입니다. 실제로 도지사들한테 다 할당을 해가지고 할당을 못채우면 체크하고~ 그 정도로~
최원정: 당시 다람쥐를 유럽에 수출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다람쥐들이 유럽의 생태계를 교란시켜서 문제가 되고 있다구~
이시원: 황소 개구리 처럼~
김동환: 마네킹에 가발이 씌워있잖아요. 저게 인모입니다. 합성이 아니고 저 어렸을 적엔 진짜 제가 기억에 나는게 머리카락 삽니다 이렇게 외치며 가방 들고 다니는 분이 흔히 있었거든요.
최원정: 제가 듣기로는 시원씨 머리카락 정도면 시집가고 혼수도 마련하고 살림 밑천도 하고~
이시원: 그래서 저 이렇게 살림 밑천 할려고 이러고 있잖아요. 진짜~ 팔 수 있는 건 다 갔다 팔았던 느낌이네요.
최원정: 온 국민에게 수출을 독려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챙기는 것이 있었는데~ 도끼만행 사건(1976.8.18) 직후에도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1974.8.15) 이후에도 했던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이광용 아나운서가 전해드립니다.
--------------------이광용/아나운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1972.1.24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우리 사랑하는 대통령 각하 이하 국무총리 경제기획원장관~~ 기업 대표 등 무려 200여명의 수출전사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박수)~~먼저 수출유공자 표창이 있겠습니다. 수상자는 이시원님 (수출유공자) 표창장~,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크므로 이에 표창함, 이시원: K 드라마 열풍이 더욱 거세어 질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습니다. 다음은 상공부의 수출 및 수입실적 보고가 있겠습니다. 이시원(등장), 이시원: (수출실적보고 차트) 여기 농산물 실적이 약간 저조한데요. 엽연초 작황이 좋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올해는 인삼 견직물 등을 특화산업으로 지정해서 한국제품이 세계에서 제일 좋다 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광용: 다음은 해외 공관별 수출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목표를 초과 달성한 우수 공관은 31개로 그 중 우리 페루 대사관은 무려 1020%의 실적을 달성했습니다. 다 함께 우리 페루 대사에게 박수~~ (이시원 페루 대사役으로 등장했다 퇴장),
이광용: (서독대사役 다니엘에게) 아~~ 우리 페루 대사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목표를 70~99%를 보면 양호 해외 공관 서독대사 고생했어요. 박상영(태국 대사役에게) 특히 꼴찌하셨어요. 꼴찌~~ 목표의 70% 밖에 달성하지 못했어요. 문제가 심각합니다. 지금~~
이광용: 하면 된다! 다시 한번, 하면 된다! 마음에 새기시고요~~
박상영: 해외 공관들은 진짜 초비상 이었을 것 같애요. 이렇게 숫자로 줄을 세우고 부진하다고 뭐라고 하고 이럴 정도였으면~~
박태균: 수출성적표를 가지고 그 지역의 대사와 영사들한테 일 잘한다 못한다 라는 평가를 했으니까요. 대사를 수출대사 라고 얘기할 정도로~~
다니엘: 자국민 보호하고 문화 교류하고 여러가지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수출에 집중하면은 원래 해야 되는 일을 못하게 되는게 아니에요?
-------------------이광용: 자~~자~~자~~ 회의 중에 조용히 해주시고요. 마지막으로 2시간 동안 묵묵히 듣고만 계셨던 우리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의 훈시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 (수출확대) 회의라는 건 안되는 걸 이러 이러해서 안됐습니다 하는 그런 안되는 보고가 아닙니다. 안되는 걸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가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이 무역확대회의지 경기가 나쁘니까 안됐습니다 하는 그런 보고를 하는 회의가 아닌 걸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광용: 안되면 되게 하라! 우리 대통령 각하의 주옥 같은 말씀을 끝으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자~ 수출!~ 수출!~ 수출!~-------------------
이시원: 수출 못하면 큰일 날 것 같애요.
최원정: 1972년 회의록을 바탕으로 저희가 상황을 연출해 봤는데 수출확대회의는 1962년에 시작됐고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에 눈을 뜬 1965년 부터는 꼬박 꼬박 참석을 했다고 하죠.
이시원: 근데 관계자들은 좀 부담이 됐을 것 같애요. 대통령 앞에서 실적보고를 해야 되잖아요.
박상영: 분위기도 화기애애한 것도 아니고 아까 목소리 들으셨잖아요~~
이시원: 안된다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하셨어요.
김동환: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고 직접 챙기니까 그 회의의 효율성이란 측면에서는 뛰어난 거예요. 이런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관계부처에서 바로 개선하는거구~처음에는 관계부터 장관하고 한국은행총재 하고 20명이 참석하여 시작했는데 계속 늘어나 가지고 1970년쯤 되면은 200명 정도의 대규모 회의가 되요. 민간기업체 경영진들도 참석하는데 여기 그렇게 참석하고 싶어했다는 거예요.
최원정: 왜 안그렇겠어요~~바로 바로 해결해 주는데~
김동환: 아유~~ 차관 필요하고~~ 대출 필요하고~~이런 얘기들 다 했을 것 아녜요. 그래서 대게 이렇게 모이면 그 회의 안들어오셔~ 얘기할 정도로 위력이 있는 회의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시원: 여기에 끼지 못하면 재계의 인물이 아닌거죠?
박태균: 수출하는 기업들한테 혜택을 줘야 되거든요. 수출해서 소득을 올리면 소득세의 80% 정도를 감면을 해주어요. 수출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면 대출도 쉽게 해주는 거예요. 60년~70년대 1등 신랑감은 은행원이었습니다. 은행원이 최고였어요. 수출을 하게 되면 대출을 받기 시작하고 차관도 받기 시작을 해요. 이걸 제때 제대로 상환을 못하게 되고 일부 기업에서는 받았던 차관을 수출에다 쓴 게 아니고 부동산 투자를 합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서 60년대말에 부실기업들이 속출하기 시작합니다. 부실기업을 부도처리하게 되면 기업에서 수출하는 양이 줄어드니까 기업문제를 처리하고 시장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수출을 중심에다 놓다보니까 정상적인 처리가 매우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는 거에요.
최원정: 정부정책이 수출이 되다보니까 모든 국민들도 수출만 바라보고 수출을 향해서 뛰게 되어있잖아요?
김동환: 수출전선 이상없나 이런 얘기 많이 하죠. 전선이 뭐예요. 전투하는 라인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당시 제 기억에도 수출전선 수출전사 수출로 나라를 세운다 이런 얘기를 전국민이 편안하게 한 기억이 나거든요.
박태균: 노동자들도 전쟁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거죠. 내가 지금 내 권리를 얘기하기 전에 나는 일단 국가를 위한 전쟁에 나와 있다 라고 희생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라는 것이 마음에 씁쓸하게 합니다.
다니엘: 저번에 전태일 열사 얘기했잖아요. 노동조건에 대한 개선문제가 확실히 있었네요.
최원정: 노동자들의 희생과 부실 기업이 계속 출현하는 위기 속에서도 수출 총력전은 계속 됐고 1970년 수출 10억불을 달성합니다. 그리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은 더 큰 꿈을 꾸게 되는데 1980년에는 100억불 가자라고 외치는 거죠.
이시원: 1억에서 10억불은 어느 정도 가능한 것 같은데 10억에서 100억불은 만만치가 않은데?
--------------수출 100억불을 향하여-----------수출 100억불 달성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대대적인 산업구조 개편을 선언한다------------(동영상) 박정희 대통령/1973.1.12 연두기자회견: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합니다------------기자: 철강 전자 조선 등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계에 이른 경공업을 대신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그때 1973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국가들을 압박하기 위해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 하기로 결정한다. 전세계 원유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장이 멈추었고 국민들의 삶까지 위태로워졌다.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정책은 위기를 맞는다.
최원정: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자 100억 달러 달성하자 외치고 있는데 쎈 제동이 걸린 거예요.
다니엘: 석유가 없으니까 타이밍이 안좋았네요.
김동환: 지금도 사실 국제유가가 출렁출렁하면 우리 경제에 굉장한 영향을 주기도 하고 수출에도 영향을 주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비축도 안되었고 거의 무방비상태에서 맞은 거였거든요. 그래서 1975년대 처음으로 목표를 미달해 거의 멘붕 상태가 온 거에요. 공무원들이 어땠을까요?
박태균: 보고도 못했을 거예요.
박상영: 박대통령 앞에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못하잖아요.
이시원: 그러면 100억불 목표 수정이 필요한게 아닌가요?
박태균: 이거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은 10월유신의 100억불수출 1000불 소득-70년대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은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았을까. 원래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71년에 수립이 되는데 이때는 80년에 수출복표를 50억불로 했어요. 50억불로 한 것을 100억불로 올리겠다는 거예요.
-------------------(동영상) 기자: 박대통령께서는 10월유신의 중간목표는 80년대초의 수출 백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를 달성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모든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꾸준히 노력하면 가능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최원정: 경제성장이 정권 유지를 위한 심장 엔진 같은 거 였잖아요. 지금 위태로운 상황이고 위기인데요~~
다니엘: 1억불 달성했을 때 운이 좋았고 10억불은 어느 정도 밀어부쳤고 이제는 100억불이 되어가는 길인데 100억불을 달성하지 못하면 유신체제가 위태로워 보이는 상황이니까~~
이시원: 비책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김동환: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할까요. 이제 어디서 활로를 찾았느냐 하면 오일쇼크가 왔잖아요. 갑자기 기름값이 엄청나게 오른 건데 (원유 1베럴당 $3 -> $11), 우리 같은 수입국들은 굉장히 힘들어 지는데 (경상수지적자 3억 -> 20억), 중동 산유국들은 떼돈을 버는 거잖아요. 항만 만들고 도로 만들고 학교 짓고 이런 거 할거 아녜요. 아~ 저기 가서 우리가 공사를 따내면 오일머니 다시 회수할 수 있겠네~ 이런 생각을 한 거죠.
다니엘: 기가 막힌 생각이네요.
이시원: 위기를 기회로 삼은 거네요.
김동환: 당시에 경제수석비서관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각하~ 우리가 중동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군인출신들이니까 저희들에게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아주 양질의 노동력이 있습니다. 두번째 우리는 인건비가 싼 기술력이 있습니다. 분명하고요, 세번째로 공기단축 지금도 우리 잘 하고 있잖아요.
박태균: 경부고속도로가 대표적이죠~
최원정: 해봐서 알죠~
김동환: 마지막으로 각하! 우리가 중동에 진출하자면 (뭐 뭐)가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방면엔 소질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뭐 뭐)가 무엇인지 한번 맞춰보십시오.
박상영; 건설에 노하우 아닐까요?
최원정: 거긴 더우니까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
김동환: 뒷거래~~굉장히 비민주적인 국가들이었잖아요. 갑자기 돈이 생긴 거예요.
이시원: 근데 이걸 잘 했다고 해야 돼요?
박태균: 어쨌던 뒷거래를 했던 뭘 했던 간에 일단은 가서 성공을 해야 돼요. 밀어부쳐야 됩니다. 1974년 새로운 건설부 장관 김재규입니다.
일동: 어~어~!!
박상영: 그때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
최원정: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그 김재규요?
박태균: 거기가 또 육사 동기잖아요.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한번 밀어부쳐 봐라. 사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만들 때에 그때가 이한림 장군(7대), 여기도 또 동기예요. 그분을 건설부 장관으로 해 가지고 경부고속도로 깔고, 중동진출은 김재규 (13대) 동기 앉혀서 우리가 한번 밀어부쳐 보자 이렇게 간 거죠.
박상영: 거의 군인의 나라였네요~
박태균: 그러면서 이제 부실공사가 나오지않게 문제가 생기지 않게 중앙정보부 사람들을 파견 했다는 거예요.
최원정: 중앙정보부는 만능입니까? 계속 등장해요.
박상영: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까지 파견될 정도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이 사업에 사활을 걸었는지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최원정: 더 알고 싶어지죠? 중동건설진출 더 자세한 내용 또 이광용 아나운서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동영상) 태권도 시범 (젊은 청년 3인 등장) 스튜디오 홀에서 절도있게-호흡척척-격파시범-대리석 10장 격파성공-이것이 대한민국 테권도다!-----------------
최원정: 태권도 시범이 멋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거든요.
박상영: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이에요.
이시원: 진짜로 한 대라도 맞았으면 뼈 부러지는 줄 알겠어요!
최원정: 괜찮으세요~? 합판이 막 튀었는데~
김동환: 그런데 진짜로 리얼하게 보기는 저도 처음이에요. 태권도 유단자한테는 정말 까불면 안될 것 같애요.
이시원: 갑자기 태권도 시범단 난 의외거든요.
-----------------------이광용: 박정희 정부가 중동진출을 위해서 어떻게 했느냐 태권도 유단자들과 함께 직접 중동에 가서 일단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고 합니다. 멋진 발차기의 힘! 고도의 정신력! 아무도 몰랐던 대한민국을 정말 힘차고 활력있는 나라로 각인시키고 중동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자 했던 것이죠---------------------
다니엘: 난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 지을려고 영국은행에서 차관을 빌릴 때 오백원짜리 화폐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조선산업에 대한 깊은 나라 라는 걸 어필했다 라는 것과 비슷한 사례네요.
이광용: 맞습니다. 또 정주영 회장하면 중동 진출의 아이콘 아니겠습니까.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불린 1976년 대규모 항만 공사에 도전합니다. 위성사진으로도 한 눈에 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곳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바일입니다. 주바일 한 가운데 30만톤의 유조선 네 척이 동시에 접안 할 수 있는 건설계획이 발표됩니다.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어렵고 큰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이 해외의 유수한 건설사들을 다 제치고 가격경쟁력과 6개월 빨리 완공하겠다는 공기단축을 앞세워서 이 주바일 항만 공사를 따냈습니다, 10억달러 규모~ 당시 우리나라 국가예산의 4분의 1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시원: 수주액이 국가예산의 4분의 1이라면 진짜 정부도 만세를 외쳤을 것 같애요.
박상영: 근데 반면에 공사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은 기업의 명운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최원정: 안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아까 누가 그러셨잖아요!
박상영: 죄송합니다!
이광용: 그런 건 없소! 정주영 회장이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항만공사에 필요한 철골구조물을 울산 조선소에서 직접 제작해서 사우디 공사현장으로 가져가기로 결정합니다. 약 10층건물 높이, 무게 400톤의 구조물을 한 개가 아니라 무려 19개를 울산에서 1만2천킬로미터 떨어진 주바일 현장까지 해상으로 운송하기로 한 겁니다. 감이 잘 안오시죠~ 바지선 두 척을 연결해서 그리고 그 위에 철골 구조물을 올립니다. 그리고 예인선들로 끌어서 35일 걸리는 뱃길을 무려 19번이나 오가며 이 재킷을 날랐습니다.
이시원: (선적한 그림이) 합성한 거 같아요.
박상영: 실제 이게 가능한 거였던 거예요?
이광용: 사실 바닷길이 또 얼마나 위험합니까 해상 보험에 가입을 하려고 했는데 보험들 시간이 어디 있어! 이렇게 된 거죠. 대신 철골 구조물을 바다에 빠트렸을 때 가라앉지 않는 방면을 연구해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두번의 사고가 있었는데요. 한번은 떠내려간 철골구조물을 싱가포르 근처에서 찾았고요. 또 한번은 대만에서 찾아서 무사히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최원정: 그걸 또 건져서~
이시원: 정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애요.
다니엘: 정말 현대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 그런 주바일 항만 공사였던 것 같애요.
--------------------이광용: 다니엘 말이 맞습니다. 이 공사를 성공 시킨 후에 1976년 포춘지에서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 현대가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현대를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하면서 대한민국은 오일쇼크라는 재난을 탈출한 생존왕이 되었습니다-------------------
이시원: 오일 쇼크를 이렇게 이겨낸게 중동진출이 진짜로 신의 한 수 였어요.
김동환: 근데 그거 기억나세요? 쿠웨이트박~
최원정: 쿠웨이트박~?
김동환: 한번도 휴가라는 건 없고 3년동안 아예 못보는 거예요. 그리고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편지가 거의 유일한 낙이죠.
최원정: 저희 부모님 세대는 친척 한 집에 한 사람씩 사우디에 갔다 왔고~
김동환: 그래서 아까 현대건설 애기가 나왔는데요. 현대가 1979년도까지 중동에서 52억 달러를 벌었는데 이게 현대 총매출의 60% 이상이었고요. 현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들이 속속 중동에 갔는데 1975년도에 7억 달러를 벌었는데 78년도에는 이게 81억 달러로 느니까 어마어마한 달러를 벌게 되는 거죠.
박태균: 한일협정 때 일본으로부터 무상 유상으로 해서 8억 달러를 받았구요.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전 특수가 약 10억달러 정도 예측을 합니다. 중동특수는 총 합쳐서 무려 400억 달러가 됩니다. 저희가 지금 100억 달러수출 얘기하는데 400억 달러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정부에서 나온 문서를 제가 하나 보았는데 웃고 다니지 말라고~~처음 이때 1978년에 무역흑자가 됩니다. 웃고 다니자 마! 하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외화가 쏟아 들어오게 되었죠.
최원정: 다들 대단하네요. 오일 쇼크 이후에 중동건설이 큰 힘이 되었는데 이와 함께 수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시작한 정책이 있습니다.
----------------(김정기 작가의 라이브 드로인)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면 이제 팔아야죠. 박상영: 배를 타고 가네요 이시원: 양복 입으신 아주 가방을 차고~~최원정: 세계로 이제 물건을 팔려~~ 이게 바로 종합무역 상사, 종합무역상사 많이 들어 봤는데~ 이시원: 종합무역상사는 제가 좀 알아요 드라마 미생의 배경이 종합무역상사였어요------------------
---------------(동영상) 박상영: (이시원을 향해) 첫 사랑 저문 배우~ 여배우: 제가 같이 있을 게요 집에 좀 늦게 가죠, 남자:~~ ------------
이시원; 거기에 보면 상사맨이 있잖아요. 라면부터 미사일 까지 팔 수 있는 건 다 판다~~
----------------------(동영상) 질문: 상사맨이 뭐예요? 상사맨: 전세계를 누비며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나라도 부자로 만들 수 있고 물이 없는 나라에 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시원: 미생 드라마가 백억불 하고 연결될 줄은 몰랐어요.
박태균: 오파상 혹시 들어보셨어요?
최원정: 오만 가지를 다 파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파상 이라고 옛날에 알고 있었거든요.
박태균: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offer(오파) 예요. 오파를 받아서 그 오파에 적합한 물건들을 갔다 주는게 이게 사실 종합무역상사 라는 겁니다.
김동환: 지금은 전자나 바이오가 가장 인기있는 직장인데 그때는 대부분 종합상사, 삼성의 삼성물산, 현대그룹의 현대종합상사, 대우의 ㈜대우 이런데 가는게 엘리트들의 코스였죠. 그리고 해외를 나갈 수 있다는게 우리가 90년대초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는데 종합상사맨들은 해외를 내집 드나들드시 다닐 수 있었거든요. 그게 엄청난 특권이었죠.
박태균: 정부에서 종합무역상사에다 엄청난 혜택을 주기 시작한 거예요. 세제혜택도 주고, 금융지원도 상당히 많이 하고, 대출을 받는 것도 지금 말씀 하셨던 그 당시에 있었던 대기업들이 이것을 막 만들기 시작을 한 거죠.
김동환: 수출지상주의에 최우등 모범생으로서 혜성처럼 등장한 종합상사맨의 상징 같은 존재는, 단연 김우중이었죠.
다니엘: 샐러리맨의 어던 성공신화였겠네요~
박상영: 집집마다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이 무조건 필수서적처럼 꽂혀있었어요.
김동환: 집에 세권씩 있었어요! 어머니도 읽어라 아빠도 읽어라~
이시원: 첫 시작은 어땠어요?
김동환: 1967년에 5명의 직원으로 시작을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수출만을 위한 그런 기업이었을 정도로 1978년도에 처음으로 수출단위기업으로서 1억 달러를 세우거든요. 그런데 79년도에 한국 최초로 10억 달러를 하니까 74년부터 79녀도에 불과 5년만에 10배 성장을 한 거잖아요. 엄청난 성장을 했구요. 일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서 수출 상담하고 직원들 격려하고 정말 그때 드라마에서도 모델이 되었었죠. 기억 나실 거예요.
-------------------(동영상) 직원: 사장님, 빨리 들어가시죠! 곧 이륙합니다. 비행기표는? 이 안에 있습니다. 故김우중 회장: 출장을 전부 추정하자면 150일에서 200일을~, 집에서 잘 수 있는 시간이 2, 3개월 정도-----------------
최원정: 당시 대기업 총수들은 진짜 도전이 끝이 없어요.
박상영: 사장이 이렇게 나가서 뛸 정도면 그 밑에서 일하는 일반 평사원들은 얼마나 죽어나갔을까.
---------(동영상) 직원구호: 싸우자! 나가자! 나는 보람과 자신을 갖고 팔고 있다!--------
김동환: 제가 직장생활 초년병 때도 그런 인사를 흔히 했습니다. 퇴근하면서,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최원정: 시간외 수당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김동환: 아휴! 시간외 수당은~
최원정: 점심시간도 없었을 것 아녜요~
이시원: 어마 어마 하게 일을 했다는 상징같애요. 미생 드라마에서도 오 과장이, 눈이 시뻘겋잖아요. 맨날 야근해 가지고~
박태균: 저는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신의 한 수 같애요.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서 이거를 연결해 주는 고리를 만들었거든요. 77년 같은 경우는 전체 수출의 33.5%를 종합무역상사가 한 겁니다.
일동: (놀람) 그럼 다 했다고 봐야 되는 거군요.
박태균: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종합무역상사를 만드는데도 기준이 있어요. 대기업들은 이걸 만들어서 세졔 혜택을 받는데 사실 중소기업들은 그게 안되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재벌과 중소기업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데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원정; 그런데 이런 대기업 주도의 수출정책으로 인해서 3년을 앞당겨서 드디어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합니다.
일동: (박수) 대단해요!
이시원: 목표는 대단하지만 3년 앞당겼다는 것~
박태균: 그렇죠, 이렇게 되어서 70년대 말이 되면 박정희 대통령이 얘기했던 부분들이 사실은 다 달성이 되는 거예요. 100억불 수출 1인당 GNP 1000 달러 달성 여기까지 플러스 식량 작업도 돼요. 쌀 막걸리가 이제 시판되기 시작합니다.
박상영: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졌어요.
이시원: 국민들이 막걸리 탁~ 하고 야~ 이제 좀 살만해졌네 그렇게 느꼈을 것 같애요.
박태균: 하다가 막걸리 보안법으로 구속돼죠~
일동: (웃음)~
다니엘: 해외에서도 한국의 그런 목표달성을 되게 인정했거든요. News Week (June 1977), 한국인이 몰려온다 The Koreans are Coming! 한국인은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다 (출처: 1977년 6월 뉴스위크).
최원정: 일본을 무시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라고 그러는데~
김동환: 어떻든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수출에 중점적인 국가의 역량을 집중했던게 경제발전에 신의 한 수 가 된 게 사실입니다. 수출보다는 국내 산업의 균형발전에 훨씬 더 중점을 두었던 국가들이 지금의 남미국가들이 거든요. 사실 지금도 굉장히 큰 차이가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1973년부터 78년 사이에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9.9% 성장하는데 우리나라 상위 5대 기업의 성장율은 무려 70%였거든요. 그러니까 대기업 위주의 그리고 어떻게 보면 사회구조의 양극화가 이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라는 측면도 있죠.
이시원: 결국 수출 위주 대기업 위주 정책때문에 재벌이라는 게 생겨났고 재벌은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한 거네요. 정부와 재벌의 상부상조~~
최원정: 대기업 쏠림 현상이라는 게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거네요.
김동환: 제가 예를 하나만 들어볼게요. 1975년에 삼성물산 자본금이 10억이었는데 80년도가 되면은 120억이 되고요. 아까 김우중 회장이 대우실업은 40억(1975년)에서 무려 400억(1980년)이 됩니다. 1981년도에 포춘지에 국내기업이 10개가 랭크될 정도로 대기업이 많이 생기게 되고요.
박태균: 이렇게 계속해서 수출 주도의 성장을 할려고 하다 보니까 정부가 돈을 계속 풀어야 되는 거예요. 문제는 그게 풀어지니까 인플레이션 문제가 되는 거예요. 설탕이나 시멘트나 생필품에 있어서는 이게 인제 2중 가격이 형성되는 거예요. 여기는 실제 시장에서는 다른 가격으로 팔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최원정: 윗돈 주고 사야 되요
이시원: 뭔가 경제가 살짝 살짝 망가지고 있네요. 근데 그 당시 사람들이 경제가 좋았다 좋았다 하는 거죠.
김동환: 실제로 일자리 문제하고 관계가 있는데요. 경공업 위주 수출에서 중화학 쪽으로 1970년에 넘어오다 보니까 일자리가 늘어난건 사실이예요. 그런데 70년대말이 되면서 수출위주 정책에 어떤 부작용 같은 것들이 사회문제로 속속 드러납니다.
박태균: 제가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얘기를 다시 한번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최원정: 유신정책의 마감과 경제성장의 인과관계~
박태균: 저희가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축포를 터트렸으면 그래도 3~4년은 가야되잖아요. 77년말에 100억불 수출했는데 78년 중반에 기관들 불러가지고 우리 경제정책 마련해봐라. 우리 경제가 지금 심각하다. 이미 이 부작용은 75~76년부터 오기 시작했는데 100억불 달성을 위해서 부작용 해결보다는 밀어부치는대로 계속 갔던 거죠. 인플레이션으로 시장이 망가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기업들이 보조금을 받고 손해가 나면 정부 보조금으로 이걸 메꿀 수가 있거든요. 기업경쟁력이 떨어져 가지고 기업이 문제가 생기면 돈을 꾸어준 은행이 문제가 됩니다. 이런 악순환 현상들이 나타나는 거죠. 이렇게 돼서 1979년 9월말 통계를 보면 금융기관의 총매출액의 50% 이상이 정부관리기업과 재벌 등 17개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박상영: 이거 참 기업적이네요.
다니엘: 수출해달라고 기업들 밀어줬더니 기업들이 해이해진 느낌이 드네요.
박상영: 여러 번의 위기를 통해서 체질개선을 할 수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회들을 번번히 놓쳐왔고 누적된게 지금의 여기까지 이른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박태균: 제가 할 얘기를 다 해버리시네요. 정곡을 너무 찌르신 것 같애요. 저는 대기업을 무조건 비판 할 수 없다. 우리 같이 작은 나라가 경제성장을 하는 데 있어서는 대기업과 국가의 역할이 일정 정도 필요해요. 전략적인 부분에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문제는 거기서 국가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 그때는 이전 모델을 한번 바꿔 줄 수 있는 건강성이 있어야 되는 데 유신체제에서는 그게 한계에 다달았는데 이걸 바꾸어줄 건강성이 없었어요.
김동환: 사실 그런 것들이 박정희 정권말에 YH 사건 이라든지 이어서 부마항쟁이 나오고 그것에 대한 의견충돌이 있으면서 10.26 사건이 나오고 그렇게 된 거죠. 그래서 사실 수출 일변도의 어떤 강박 이런 것들이 역사적으로 쭉 가서 보면 사실 정권의 명운과도 연결이 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최원정: 결국 이 시대에 태동했던 이런 경제 구조적 모순이 또 다음 정권에서는 정경유착으로 더욱 곪아지면서 우리가 IMF 라는 뼈아픈 위기를 맞는 그런 경제의 흐름을 오늘 한 눈에 알게 된 것 같애요.
이시원: 잘 살아 보자는 정신 이게 근데 단순히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온 국민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고 앞으로는 좀 더 건강한 방식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동환: 수출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알라딘의 요술 램프였던 것 같애요. 왜냐면 거기서 돈이 나왔고 통치를 할 수 있는 권위도 나왔고 기업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돈이 거기서 나왔는데 요술램프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 두 가지만 더 나오게 했으면 분배도 하고 국민들의 어떤 삶의 질 같은 것도 고려하면서 차근 차근 하면 물론 어려워겠지요. 그랬더라면 정말 더 행복한 정치인이 되었을 거구 또 지금 다른 모습의 한국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태균: 빨리 가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부분에서 이후에 우리가 비용을 치르지 않도록 어떤 방식으로 이걸 탄탄하게 해서 가야되는가 라는 고민들을 하도록 하는 교훈을 저는 60년대 70년대 경제성장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다니엘: 우리 역사 저널도 하면 된다 라는 정신을 가지고~ 우리도 다음 주까지 잠시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최원정: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90회에서 정리).
① 1972.10.27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는 강제 해산된다. 엄혹한 유신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8대)은 취임식 바로 다음해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다. 1973.1.12 연두기자회견에서 80년에 우리 수출 목표를 100억불까지 올려보자. 수출 100억불 목표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그러나 1977.12.22. 모두를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1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되었다. 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 그 중심엔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② 100억불 수출은 선진국 길목에 한번 들어선걸 의미, 60년대 초에 1억불 돌파, 서독은 10억불에서 100억 가는데 11년이 걸렸고, 일본은 16년이 걸렸다. 한국은 1963년 외환보유액 $1억3천만, 2020년 10월말 $4265억, 한국 단 시간에 100억 달러 달성했는데 그 과정과 명암을 살펴보자.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정치는 했어도 국민들에게 경제 대통령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③ 사실 1977년에 100억불을 달성했으면 유신정권은 더 안정되어야 하는데 2년이 지나서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이런 역설이 어디 있나? 1966.12.10. 박정희 대통령은 내 가슴 속에 풀리지 않고 맺혀 있는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도 어떻게 하든지 남과 같이 잘 살아 봐야 되겠다 이러한 염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경제성장이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또 경제성장을 하는데 수출이 중요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수출을 생각했던 건 아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경제상황이 매우 안좋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 10개월 동안 경제기획원 장관이 7번이 바뀐다 (장관수명 평균 5개월), 경제정책이 정착되지 않았다. 63년에 군정이 끝나는 시점에서 경제정책 실패를 자인, 우리가 크게 실패 했다. 뭔가 바꿔야 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매우 초조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미국원조에 의존했는데 이게 무상에서 유상으로 바뀌었다. 미국에다 원리금을 상환해야 된다. 1963년도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거의 국가부도위기 수준, $1억3천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표현은, 한국경제는 겨울에 땔감이 떨어져서 벌벌 떨어야 되는 초가집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도둑놈이 들어와서 세간살이 다 훔쳐간 그런 초가집이었다 라고 측근들한테 실토했다고, 임자~ 나 혁명 괜히 했나봐~ 이런 얘기를 할 정도로 초조했다.
④ 박정희 대통령의 쿠데타 명분은 반공과 경제재건, 꼭 해결해야 되는 숙제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GNP가 높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1965년 한국 $105 < 북한 $165. 남한의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지 않고서는 우리는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경제성장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문제, 1963년에 급변동 상황 발생, 한국은 경공업 수출이 4배에서 7배로 급증하는 현상, 일본이 경공업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수출품목이 바꾸었다. 한국은 농수산물, 광물 위주로 수출했는데 이때부터 합판과 섬유 경공업 제품들을 미국이나 일부 유럽으로 수출하기 시작, 거기에다 대미 환율이 1달러당 130원에서 255원으로 변경되었다. 달러가치의 상승은 한국 제품을: 더 싸게 팔 수 있는 계기, 원화로 월급 주고 공장 짓고 땅 살 수 있어서 투자여력이 생겼다. 기업체들이 수출하니까 돈 벌어 수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이때 다른 나라도 똑 같은 상황이었는데 한국만 성공을 했다는게 특수했다.
⑤ 1964년 11월 30일 수출 1억불 달성, 수출은 곧 국력. 수출증대를 위해 총력경주다. 1969년에 이낙선 소령(5.16 쿠데타 동지)을 상공부 장관에 임명, 이낙선씨는 1966년 국세청장 때 700억을 걷는다 (1965년에 520억 정도 징수) 어떻게 하냐면 내년에 낼 세금도 미리 내게해 결국 876억원을 징수, 수출한 품목들은 가발 메리야쓰 건오징어~~, 속옷, 합판, 뱀, 쥐, 쥐로 모피 코트를 만들다, 쥐와 밍크의 합성어 쥥크, 목도리도 만들고 핸드백도 만들고 코트도 만들었다, 도지사들한테 다 할당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도끼만행 사건(1976.8.18) 과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1974.8.15) 이후에도 수출진흥확대회의(1972.1.24)를 꼭 챙겼다. 참석인원은 대통령 국무총리 경제기획원장관~~ 기업 대표 등 무려 200여명이었다, 먼저 수출유공자 표창에 이어 상공부의 수출 및 수입실적 보고가 있고 해외 공관별 수출현황보고가 있었다.
⑥ 해외 공관들은 초비상, 수출성적표로 대사와 영사를 평가해서 수출대사 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2시간 보고후 듣고만 있었던 대통령의 마지막 훈시: 이 수출확대 회의는 안되는 걸 이러 이러해서 안됐습니다 라고 보고하는 회의가 아니다. 안되는 걸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문제를 검토하는 회의다. 경기가 나쁘니까 안됐습니다 라는 보고를 하는 회의가 아닌 걸 확실히 알아야 한다. 수출확대회의는 1962년에 시작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에 눈을 뜬 1965년 부터 꼬박 꼬박 참석을 했다.
⑦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고 직접 챙기니까 회의의 효율성은 뛰어났다. 애로사항이 있으면 관계부처에서 바로 대출이나 차관을 해결 개선하여 주었다. 처음에는 관계부처 장관하고 한국은행총재 하고 20명이 참석하였는데 1970년쯤 되면은 200명 정도 민간기업체 경영진들도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였다. 수출해서 소득 올리면 소득세의 80% 정도를 감면해주고 수출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면 대출도 쉽게 해주고 그래서. 60~70년대 우리나라 1등 신랑감은 은행원이었다. 그런데 대출이나 차관을 제때 상환을 못하게 되고 일부 기업에서는 받았던 차관을 수출에다 쓴 게 아니고 부동산 투자를 해서 60년대말에 부실기업들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부실기업을 부도 처리하게 되면 수출 양이 줄어드니까 수출이 중심이다 보니까 정상적인 처리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었다.
⑧ 노동자들의 희생과 부실 기업이 계속 출현하는 위기 속에서도 수출 총력전은 계속 됐고 1970년 수출 10억불을 달성,. 그리고 박 대통령은 1980년에는 100억불 가자라고 외친다. 수출 100억불 달성을 위해 박 대통령은 대대적인 산업구조 개편을 선언한다. 1973.1.12 연두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한다. 철강 전자 조선 등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겠다. 그때 1973년 중동 전쟁이 일어난다.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무기화 로 원유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 공장이 멈추었고 국민들의 삶까지 위태로워졌다.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정책은 위기, 이때 비축도 안되었고 무방비상태에서 맞은 위기, 1972년 10월유신의 100억불수출 1000불 소득이 1975년대 처음 목표 미달, 원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71년에 수립이 되는데 이때 80년에 수출복표를 50억불로 했다. 이걸 100억불로 변경,
⑨ 정권 유지에 위기 상황, 유신체제가 위태로워 보이는 상황, 갑자기 원유값이 1베럴당 $3에서 $11로 올랐다. 한국같은 수입국들은 경상수지적자가 3억에서 20억으로 생겼다, 중동 산유국들은 떼돈을 버는 거다. 그들은 항만 과 도로 만들고 학교 지을 거다. 아~ 거기 가서 우리가 공사를 따내서 오일머니 회수하자.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 박대통령한테 우리가 중동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몇가지 이유를 보고. 첫번째 우리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양질의 노동력이 있다. 두번째 우리는 인건비가 싸다, 세번째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민주적인 국가들이라 뒷거래가 필요하다.
⑩ 우리나라는 뒷거래든 뭐든 일단은 가서 성공을 해야 되었다. 1974년 건설부 장관은 김재규(13대)다. 그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그 김재규다. 박대통령과 김재규와 육사동기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만들 때 이한림 장군(7대)과도 동기, 우리가 한번 밀어부쳐 보자. 부실공사 나오지않고 문제가 생기지 않게 중앙정보부 사람들을 파견 했다. 박 대통령은 중동 사업에 사활을 걸었다. 중동진출을 위해서 태권도 유단자들과 함께 직접 중동에 가서 태권도 시범으로 한국은 힘차고 활력있는 나라로 각인시키고 중동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자 했다. 정주영 회장이 영국은행에서 차관을 빌릴 때 오백원짜리 화폐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조선산업에 조예 깊은 나라 라는 걸 어필했던 것과 비슷하게,
⑪ 정주영 회장은 20세기 최대 역사라고 불린 1976년 사우디 주바일 대규모 항만 공사에 도전한다. 주바일 한 가운데 30만톤 유조선 네 척이 동시 접안 할 수 있는 건설계획이다.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어렵고 큰 공사였다. 정주영 회장은 해외 유수한 건설사들을 다 제치고 가격경쟁력과 6개월 공기단축을 앞세워서 10억 달러의 주바일 항만 공사를 따냈다, 당시 우리나라 국가예산의 4분의 1이 넘는 금액, 정주영 회장은 항만공사에 필요한 철골구조물을 울산 조선소에서 제작해서 사우디 공사현장으로 가져가기로 결정, 약10층건물 높이, 무게 400톤의 구조물 19개를 울산에서 1만2천킬로미터 떨어진 주바일 항만 현장까지 해상운송, 바지선 두 척을 연결해서 그 위에 철골 구조물을 올린다. 예인선들로 끌어서 35일 걸리는 뱃길을 무려 19번이나 오가며 무거운 쇳덩어리를 날랐다.
⑫ 해상 보험 가입 대신 철골 구조물을 바다에 빠트렸을 때 가라앉지 않는 방면을 연구하라고,. 실제로 두번의 사고가 있었는데, 한번은 떠내려간 철골구조물을 싱가포르 근처에서 찾았고, 또 한번은 대만에서 찾아서 무사히 이동시켰다, 불가능은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 이 공사를 성공 시킨 후에 1976년 포춘지는 세계 500대 기업에 현대를 올렸다. 현대를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하면서 한국은 오일쇼크 재난을 극복, 한국의 중동진출은 신의 한 수였다. 당시 드라마 쿠웨이트박은 사우디 근로자들의 생활을 대변했다. 현대는 1979년도까지 중동에서 52억 달러를 벌었다. 이게 현대 총매출의 60% 이상이었고, 현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들이 속속 중동에 갔는데 1975년도에 7억 달러를 벌었는데 78년도에는 무려 81억 달러였다. 65년 한일협정 때 일본으로부터 무상 유상으로 해서 8억 달러를 받았고, 베트남전 특수가 약 10억달러 정도, 중동특수는 총합 무려 400억 달러, 지금 100억 달러수출 얘기하고 있다. 이때 1978년에 무역흑자가 나니까 웃고 다니자 말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⑬ 오일 쇼크 이후 중동건설 붐과 함께 수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시작한 정책이 종합무역상사제도다, 상사맨은 전세계를 누비며 필요한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가난한 나라도 부자로 만들 수 있고 물이 없는 나라에 물을 줄 수도 있다. 여기서 Offer(오파)상은. 오파를 받아서 그 오파에 적합한 물건들을 갔다 주는게 종합무역상사다. 당시 상사맨은 엘리트들이었고 해외를 내집 드나들드시 다닐 수 있었다. 한국은 90년대초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다. 정부는 종합무역상사에다 엄청난 혜택을 주었다. 세제혜택과 금융지원을 해주고, 대출도 해주었다. 수출지상주의에 혜성처럼 등장한 종합상사맨이 대우 김우중이다.
⑭ 대우는 1967년 5명의 직원으로 시작했는데 태생서부터 수출만을 위한 기업이었다. 1974년에 처음으로 1억 달러를 세우고, 79년에 한국 최초로 10억 달러를 세우니까 불과 5년만에 10배 수출 성장을 했다. 김우중씨는 일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서 수출 상담하고 직원들 격려하고 드라마 모델이 되었다. 77년엔 종합무역상사가 전체 수출의 33.5%를 차지하였다.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신의 한 수였다. 대기업 종합무역상사는 정부로부터 세졔 혜택을 받고 중소기업들은 그걸 못받았다.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대기업 주도 수출정책으로 인해서 3년을 앞당겨서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 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얘기했던 100억불 수출 1인당 1000달러 달성도 되었고 식량도 자급자족, 쌀 막걸리가 시판되기 시작, News Week (June 1977)는 한국인이 몰려온다 The Koreans are Coming! 라고 보도, 수출이 경제발전에 신의 한 수가 되었다. 1973년부터 78년 사이에 한국 국내총생산(GDP)이 9.9% 성장하는데 상위 5대 기업의 성장율은 무려 70%였다. 고로 대기업 위주의 사회구조의 양극화가 이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⑮ 수출 위주 대기업 정책 때문에 재벌이 생겨났고 재벌은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정부와 재벌의 상부상조, 대기업 쏠림 현상이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한다. 1975년에 삼성물산 자본금이 10억이었는데 80년도에 120억이 되고, 대우실업은 40억(1975년)에서 무려 400억(1980년)이 된다. 1981년 포춘지에 국내대기업 10개가 랭크된다. 수출 주도 성장은 정부가 돈을 계속 풀어야 되고 그게 인플레이션 문제야기, 설탕이나 시멘트나 생필품이 2중 가격이 형성되어서 시장에서는 다른 가격으로 팔리기 시작한다. 윗돈 주고 사야 된다. 당시 사람들은 경제가 좋았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살짝 살짝 망가지고 있었다. 1970년에 경공업에서 중화학으로 넘어오다 보니까 일자리가 늘어난건 사실, 그런데 70년대말부터 수출위주 정책에 부작용들이 사회문제로 드러나고 있었다. 77년말에 100억불 수출했는데 78년 중반에 기관들 불러가지고. 우리 경제가 지금 심각하다. 경제정책 마련해봐라. 이 부작용은 75~76년부터 오기 시작했는데 100억불 달성을 위해서 부작용 해결보다는 밀어부치다 보니까 인플레이션으로 시장이 망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졌다. 기업들이 손해가 나면 정부 보조금으로 이걸 메꾸었다. 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돈을 꾸어준 은행이 문제가 된다. 이런 악순환 현상 속에 1979년 9월말 통계를 보면 금융기관의 총매출액의 50% 이상이 정부관리기업과 재벌 등 17개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 정부가 기업들 수출해 달라고 밀어줬더니 기업들이 해이해졌다. 정부는 여러 번의 위기를 통해서 체질개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회들을 번번히 놓쳐왔고 누적된게 지금의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대기업을 무조건 비판 할 수는 없다. 우리 같이 작은 나라가 경제성장을 하는 데 있어서는 대기업과 국가의 역할이 일정 정도 필요했다. 전략적인 부분에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서 국가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 이전 모델을 한번 바꿔 줄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야 되는 데 유신체제는 그게 한계에 다달아서 지혜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이 박정희 정권말에 가서 YH 사건이 터지고 이어서 부마항쟁이 나오고 그것에 대한 의견충돌로 10.26 사건이 터졌다. 경제성장 후에 유신체제의 한계노출, 수출 일변도의 강박감들은 역사적으로 보면 정권의 운명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 태동했던 경제 구조적 모순이 다음 정권에서는 정경유착으로 곪아지면서 우리는 IMF 라는 뼈아픈 위기를 맞았다. 잘 살아 보자는 정신은 단순히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온 국민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앞으로는 건강한 방식의 경제성장을 이루어야겠다. 수출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라딘의 요술 램프였다. 거기서 돈이 나왔고 권위도 나왔는데 한 두 가지가 더 나와서 분배도 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고려하면서 차근 차근 진행하였다면 박 대통령은 더 행복한 정치인이 되었을 거고 한국도 지금보다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60년대 70년대 경제성장의 역사는 우리에게 빨리 가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방식으로 가야되는가 라는 고민과 교훈을 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