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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중용 제 5 강 이성과 감정
5-1
1 오성의 범주에 의한 인식의 보편성은 어떻게 확보되는 것인가?
2 인식의 선험성은 도 다시 신을 끌어 들이는 것이 아닐까?
칸트에 있어서 형식 그서이 개인의 주관 오성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보편적 형식으로 전제되는 거예요. 형식이라는게 어떤 틀에 대해서 지금 나무라는걸 얘기했지만
양 질 관계 양태 여기에 각가 세 개씩 있는거 거든요.
이게 논리학의 기초적인 형식에 관한 거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형식이라고 전제되는 거예요.
* 칸트가 말하는 오성의 12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험적 개념이 꼭 12개일 필 요도 없고 그것을 보편 타당한 것으로 우리가 인전해야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칸트의 생각일 뿐이다.
* 두 번재 질문은 칸트의 선험적 주관에 관한 것인데 칸트의 인식론적 초월주의는 얼마든지 비판될수 있다. 모든 초월주의는 초월 신관과 관련된다.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고 형식에 고나한 것인데 그 형식은 순수하다는 거예요.
경험의 잡티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순수이성이라고 말하는 거라고.
가장 기본적으로 보편적 인간에 전제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 불만이 많아요.
* 유아론 solipsism; 실제하는 것은 나 개인의 자아일뿐이다. 타아의 인식세계도 나의 의식내용일뿐이다.
모든 주관주의의 극단적 귀결
내가 본세계하고 저사람이 본세계가 다를수 있지 않나? 그럴수 있어요.
고호가 미쳐가지고 바라본 나무가 꼬불꼬불 이상하잖아 고호의 스타리 나잇 봐 그사람이본 달은 꼬불꼬불 이상하잖아 그런데 그사람은 그렇게 느꼇을 거예요. 그러나 그사람이 느낀 달의 영감을 그렸기 때문에 우리가 고호의 그림을 평가하는거 아니야. 우리가 보통 느끼는 달을 별을 그렷으면 우리에게 그렇게 감동을 주지 않았을거 이니예요. 인간마다 바라보는 게 다를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요새 철학에서는 주관이라는 말을 안쓰고 간주관적이라는 말을 써요.
* 간주관성 intersubjectivity: 복수의 주관에 동통되는 인식. 공통주의, 상호주관.
* 내가 말하는 간주관은 훗설 1859-1938 이 말하는 간주관보다 더 포괄적이다. 간주관의 궁극적 근거는 몸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의 보편성이다.
서브젝티브하기는 한데 주관과 주관이 모두 겹치는 주관이라 이거야. 여러분들이나 나나 입맛이 달라요 그러나
역시 맛에도 보편적인 간주관적인 것이 있지 않은가? 내가 맛있는거는 여러분도 맛있거든.
인간이라는 것은 약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간주관이나 보편성의 근거는 나는 몸이라는 거예요.내 철학 세계에서는. 왜? 우리는 몸의 구조가 같다 이거야.
물론 색맹하고 아닌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색깔이 다르잖아요. 그 사람이 djejg게 볼지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항상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생물학적 몸의 보편성이 잇기 때문에 우리가 공통으로 이세계를 바라본다. 이거 전제하고 사는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세계가 이게 어려워져요.그래서 우리가 사는세계를 간주관적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주관이라도 그냥 주관이 아니라 간주관적이다.그러나 나는 간주관의 궁극적 근거는 인간의 몸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이다. 이게 완전히 달라져 버리면 보편성을 얘기할 수가 없죠.
* 몸의 보편성은 향식적 보편성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몸의 보편성은 우리 인식의 현실적 준거 다. 몸속에 천지가 들어 있다.
5-2
天命之謂性 : 하늘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
칸트는 이세계를 나의 오성의 범주가 구성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여기서는 거꾸로 천이라고 하는 천지대자연이 나와 교섭되는 과정을 성이라 그랬죠.
* 칸트는 이세계를 인간의 오성의 범주가 구성한 것으로 보았다.
자사의 사상에는 그러한 일반적인 방향서이 없다. 모든 인식은 세계와 나의 교섭의 과정일 뿐이다.
* 중용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규정성이 없다. 그것은 선,악의 가치로 규정되기 이전의 동적인 과정(dynamic process) 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성이 없다는 거죠.
인간의 본성은 이러하다가 아니고 인간의 본성은 항상 하늘이 명하는 것이다.
중용은 인간의 성을 나의 본성이 뭐냐 내가 도대체 어떤 놈이냐 하는 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내가 원래 좋은 놈이냐 나쁜 놈이냐 이것을 규정하지 말라는 거죠.
기독교는 규정하죠? 유대교에서 특히 죄인이라는 것은 규정하고 들어가는 거죠.
* 원죄 original sin ; 유대민족의 특별한 인간관. 아담의 원죄를 인간의 생득적 죄악의 경향으로 규정. 바울, 아 우구스티누스가 강조. 원죄의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수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나쁜놈들 이라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은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들이다는 것이지.
그니간 사람을 악하게 규정해 놓으면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가 되는 거죠. 이게 황당한 거죠
니들 그러냐? 니들 죄진 사람이냐? 나는 천만에 올시다여.
* 원죄는 구원론을 정당화 하기 위한 인간의 비하다. 그것은 유대민족의 문화적 특성에서 유래한 신화적 규정이며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이 될수는 없다.
기독교인들이 처음에 토인비의 그리스차니티 월드 어몽더 릴리젼 이라는 책을 보면 처음에 선교사들이 와서 그대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러니깐 그 죄인이라는 말이 전달이 안돼.중국놈들이 가서 선교사 멱살을 잡으면서 내가 언제 범죄를 저질렀어 새꺄. 죄인이라는 말이 범죄자라는 말이거든.멀쩡한 사람들보고 선량한 사람들 보고 그냥 범죄자라고 그러니까 죄인이라 그러니까 중국놈들이 전부 반발했다는 거야.
그만큼 전달이 안돼 서양에서 말하는 죄인이라는건 인간 본성에 대한 규정이고 인간은 항상 육체적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허약한 존재라는 거거든. 인간은 그런 한계상황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다 그게 원죄론이거든
그게 일리도 있어요. 우리가 항상 나 하나도 이기지 못하고 살거든 그치?
담배하나 끊을려도 담배가 않끊어져 이거. 내버렸는데 금방 또 쓰레기통에서 담배찿는게 인간이야.
그때 나는 역시 원죄가 맞다. 기독교 원죄라는게 이런건가 그런 생각도 들거든.
그러나 인간을 죄인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사악한 것이다,. 왜 인간이 죄인이야.
중용은 인간을 성하다 악하다 규정하지 말라 그거야. 오로지 인간은 하늘의 명을 받고 있는 한에서만 이 성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process다. 규정성이 없다. 과정이라는거야
* 프로세스 process; 동적 과정을 강조하는 모든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적 사유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개 념적 규정성이 사라진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천명을 거부하게 되면 완전히 정신병자 되는 거예요.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할수 있는거야. 그러니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한순간도 천명을 받지 않으면 아니되는 존재다. 이게 자사의 인간 이해의 위대함입니다. 출발점이 달라 그래서 천명지위성 이라는 말을 했고 그런데 성이라는게 뭐냐
성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성이다 칸트만해도 이성이라는 말을 굉장히 존중하거든요. 순수이성이라는게 결국 과학적 이성 이거든요.별게 아니예요. 고학적 이성이예요.여러분들이 과학을 할 수 있는 능력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쓸적에는 순수이성비판을 쓸적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사람이 뉴턴이다.
뉴턴의 영향을 받아 순수이성비판을 쓴거거든.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위대한 자연의 법칙을 만들 수 있냐 일마이요.
* 순수이성은 결국 과학이성이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적 과학법칙을 이해할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이라고 부 른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위대한 중력을 법칙을 발견할수 있는 것은 선천적 이성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위대한 거다.
* 중용의 성은 인간의 도덕성에 관한 것이고 칸트의 성은 인간의 과학적 인식에 관한 것이라서 양자는 다르다.
그래서 항상 인간의 성을 얘기할 때 이성을 얘기한단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고. 에이라는 갑돌이와 갑순이가 미팅을 했어.그런데 여자가 난 게 싫어.
그건 할수 있는 말이지. 그런데 따져보면 그 남자애가 부잣집 아들이야 학벌도 좋고 뭐든지 훌륭한 애야.
이성적으로 계산해볼 때 그처럼 좋은 신랑감은 없거든. 부모입장에서는 야 게 정말 끝내준다 말이야 걔랑 결혼해라. 그런데 여자는 싫어.
그러면 너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라 이렇게 얘기를 한다는 거지.
너 이성적으로 계산해보면 이건 수학적 계산이지 너 걔랑 결혼하면 이렇게 이렇게 다 경제적인 안정도 보장될거고 집안도 좋고 아파트 열쇠랑 자동차 열쇠랑 열쇠가 몇 개 들어올텐데 이 여자는 싫다 이거야.
그러면 싫다는 이 여자의 세계 우리는 이걸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건 맹목적이다 그래서 걔는 유치하다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20세기의 모습이예요.
* 우리의 20세기는 이성이 감정에 대하여 절대적 우위를 점유하였다. 이성은 서구적 과학문명과 결부되어 있었다.
우리는 20세기를 통해서 항상 이성적인간이 되라는 것을 교육받아 왔어요.
그런데 칸트에 있어서 밀가루 반죽은 이것은 형태도 없거 아주 카오틱한거야. 그런데 이것을 감성이라고
* 감성 Sensibility; 직관을 행하는 인식능력, 칸트에게 있어서 직관은 고등한 영감이 아니라 감각자료를 내용으 로 갖는 것이다.
감성이라는 것은 사실 감각적인 거거든 가장 기초적인 감각 나무를 바라보면 퍼런게 눈에 들어온다 밀가루반죽 같은게 내눈에 들어 온다. 그런데 칸트에게 있어서 감성보다 오성이 단계가 더 높겠지 인간의 보편적인 오성의 빵틀이 있어가지고 양과 질과 관계 이런거를 어떤 범주를 판결을 내리는거지. 니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나무니라.
그래서 이제 아눔가 보이는 거야. 니가 나무니라.그런데 오성 위에 이성이 있다고 더 높은 거야
감성----> 오성----> 이성
하나님이 있고 우주는 무한하냐 유한하냐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감성 오성 이성 이렇게 올라가면
이성은 굉장히 좋은 것이고 감성은 저열한 낮은 것이다.인간에서 있어서 어떻게 하면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인간이 되느냐 이것을 우리가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이세계를 만들어야만 훌륭한 사회가 될거 아니냐 이런식으로 생각해왔죠? 분명히 그렇게 생각해왔죠?
*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은 오성의 제약을 넘어서는 자유와 관련된다.
감정이란게 이 정이라는게 이성보다 저열한 감각을 말하는게 아니란 말이예요.우리가 말하는 정이라는 것은 오히려 이성위에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이 여자는 다 계산이돼 다좋아 걔가. 그런데 난 싫다. 그런데 그여자의 판단이 훨씬 더 위대할 수가 있다고 . 이성적으로 다 판결이 났지만 난 그사람이 싫다.그게 인간의 위대한 점이예요.
* 동양인들이 말하는 감정은 칸트가 말하는 감성이나 인식의 기본자료인 감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복합적 판단이다.
* 감정은 이성의 계산이나 자유를 포섭하는 주체적 판단이다.
우리 서양철학은 근세를 통해서 너무 이성의 질곡에 빠져 있었단 말이야.
이성에게만 빠져있기 때문에 최소한 기본 공약수는 나오는데 위대한 인간은 안만들어져
교육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인간을 만드는게 아니라 감정의 세련된 ㅅ인간을 만드는게 교육의 궁극적 목표라고 나는 생각해
* 교육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세련된 감정의 소유자를 배양하는데 있다. 이성적 훈련은 너무도 당연한 기초과정일 뿐이다.
이 세계를 생각해봐 서양에서 이성이라는말은 계산한다 그런얘기요. 이성이라는 것은 수학이라고. 이것은 보편은 있죠. 왜냐면 1+1=2가 된다는게 서울에서는 3이되고 부산에서는 4가 되나?
1+1=2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가 약속이 된 체계라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1+1= 라면 계산해내지
그 계산해낸다 그거을 우리가 이성이라고 한다. 이성이라는게 별게 아니고 이러한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우리에게 내장된 능력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성이라는 것은 선천적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 이성 reason은 “ratio" 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그것은 게산하다( to calculate)의 뜻이다.
이성은 결국 인간의 양화될수 있는 수리능력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굉장히 저열하고 기초적인 것이야
인간은 이성으로 사는게 아니요.
문제는 뭐냐 이성을 포괄하는 감성의 세계를 우리는 궁극적으로 성에 자리에 놔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이라는 것을 과거에는 이성이라든가 주자학에서는 이 性을 理로 해석했거든요.
성을 리도 해석해가고 그래서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 성리학; 주희는 중용 1장 주에서 成卽理也 라고 말했다. 성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선천적 도덕법칙의 자리라고 본 것이다
5-4
근세 이퇴계 학문을 성리학이라 불러.여기에 喜怒哀悲之氣 性也(희노애비의 기야말로 성이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건 놀라운 얘기죠.예를들면 희노애비의 감정의 세계는 옛날에는 이성에 비해서 급이 낮은 것이라고 조선조 유학들도 이퇴계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이퇴계게 그렇게 모시는 자사선생께서 이퇴계의 신이거는요 자사는.
근데 무덤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깐 이퇴계 너틀렸다.이렇게 나온거예요.
뭐냐면 희노애비가 성이다 그렇게 박아서 나와버렸단 말이죠, 천명지위성이라 할 때 그 성이 이성이 아니라 희노애비라는 몸을 구성하는 기가 곧 성이다 이렜거든요.
* 주용의 저자 자사의 논리에 의하면 성리학은 성기학이 되어야 한다. 성은 선천적 도덕이 아니라 태어난 대로의 무규정적 기의 감정일뿐이다.
* 최근 초나라 분묘에서 아온 중용의 배경을 이루는 자사의 性論자료에는 性이 선천적 理로 규정되지 않는다.
천명지위성 다음에 나오는게 솔성지위도 라 이러면 천명지위성에 대해서 그 성을 이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해 나가면서 나의 희노애비지기를 발전시켜 나가아 된다. 여러분들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감정의 세계예요. 이성으로 살질 않아요. 여러분들이 살아갈 때는
친구들 만나도 싸울일이나 좋아하고 싫어하고 감정의 세계예요. 여러분들이 살아가다는게.
성을 리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리의 성을 따라간다고 봤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해석할 수가 없고 솔이라는 것은 선탸간다는 거요. 그 성의 감정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발전을 시켜서 하나의 우리의 삶의길(도)를 만들어 가느냐
* 솔성: 성을 리로보면 솔성은 성을 “따라간다 ”가 되지만 감정의 세계로 보면 솔성은 “성의 가능성을 선택한 다”는 뜻 이된다.
* 道 : 삶의 길, 태어난 대로의 무규정적 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선택하여 만들어 가는 길.
삶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 해가면서 여러분들의 삶의 길을 만들어 가느냐 하는 문제예요.
길이라는 것은 계속 걸어가는 길이 길이잖아요. 길이라는 것은 산에서 사람이 하나둘씩 자꾸만 걸어가면 길이 닦여져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길로 가잖아.
* 修道: 삶의 길을 끊임없이 닦는다는 뜻. 길은 계속 닦지 않으면 없어진다.
* 길道 : the way, the dao 로 번역된다. 길은 삶의 길이며 또 자연의 법칙이다. 법칙은 항상 미레 예측성 (predictability)과 관련이 있다.
산에서 헤메다가 길을 만나면 좋은게 뭐야. 살았다. 왜냐면 길을 만나면 앞이 보이기 때문에 미래가 예측 가능하단 말이야. 내가 어디어디로 갈수 있겠다.
5-4
길이라는 건 항상 닦어야지 안닦으면 어떻게 돼 다시 금방 수풀이 돼버리죠.
문명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닦음으로서만 문명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안닦으면 자연으로 돌아가 버려요. 그러니깐 여러분의 몸의 길고 안닦으면 금방 황폐해버져버려. 여러분의 머리도 안닦으면 금방 잡초가 나버려요.그레서 끊임 없이 공부를 해야돼요.
여러분들 내가 강의 할수 잇는 것도 끊임 없이 공부하고 책을 보고 그것이 내몸속에 체화되어 길이 되어 있으니깐
이렇게 말이 졸졸졸졸 나오는 것이지 어떤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하나.
길을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서 교라고 하다. 위대하죠. education.
* 修道之謂敎 - 길을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서 敎라고 한다.
* 교육 education ; 교는 교육이다. 교육은 수도의 과정이다.교육을 받지 않는 인간은 황폐화된다. 교육은 죽는 순간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교육을 받지 않으면 인간은 황폐해져 버린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이 그것이 나의 존재의 성을 형성하고 그 성주에서 내의 가능성을 선택해서 나의 길을 만들어 모색을 해 그래래서 그것이 어느정도 보이면 여기서는 보편적인 누구나 그길을 가는것이고 보편적이 될려면 모든 사람이 참여가 돼야 도니까 그것이 길이고 그리고 그것을 끊임 없이 닦아 나가야만 그성이 길이되고 그것이 문명이 완성되어 나간다는 거죠.
여기서 성은 弗學而能 이라고 했거든. 사실은 배우지 않아도 할수 있는거야.
성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연의 세계란 말이죠. 그런데 자연의 네이쳐를 도를 형성해서 이 도를 가지고 가르치는 세계를 만든다. 이 교의 세계가 문명이다.
* 弗學吏能; 공자가 가어 예운편에서 한말. 인간의 감정이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능한것이라는 뜻
* 성(자연, nature) - 도(양면의 포섬. dao) - 교(문명, civilization)
인간은 끊임 없이 자연과 문명을 걸쳐사는 존재란 말이요. 항상 자연과 문명을 포섭하는 존이란 말이죠.
* 인간은 자연과 문명을 포섭하는 중간자적 존재이다. 따라서 자연과 문명,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인간은 어디서 살아가?문명속에서 살아가죠. 그러나 그 문명속에서 살아가지만 끊임 없이 또 자연으로 회귀가 돼야 되요. 여기서 성과 도와 교를 말하고 그리고 나서 끄집어 낸게 뭐예요? 도를 끄집어 냈어요.
庸-0101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1 천명지위성이오 솔성지위도요 수도지위교니라
1. 하늘이 명(命)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
庸-0102/1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도야자는 불가수유리야니 가리면 비도야라
도란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도가 떠날 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성과 도와 교를 말하고 그러니까 자연과 문명의 중간에 걸쳐있는게 도란 말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성과 교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더 포괄적인 논의를 할수 있기 때문에 도를 끄집어 낸거야.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순간이라도 순간이 뭐야 순이라는건 뭐야 문감박하는것이지. 눈깜박할 사이.
찰나라는 말은 나중에 불교에서 들어온 말이고. 옛날 고전에는 스유라는 말을 잤썻어. 수유 잠시라도 떠날수가 없는 것이다.이말이야.
*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다. 도가 떨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무슨 말이요. 자 여기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 생각해봐. 하나님은 잠시라도 나에게 떠날 수 없다. 이런말 돼요 안돼요? 사실 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죠? 그쵸? 교회가서 세례받을 때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면 믿습니다. 그래야죠?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말은 하나님이 내안에 있어요 내밖에 있어요? 믿는 다고 하는 것은 그게 내 밖에 있어야 믿지.제사를 지낼여면 뭐든지 내밖에 신위가 있고 그래야 되잖아
* 믿는다는 것은 믿의의 대상이 내 밖에 엄존한다는 것이다. 이대 하나님은 당연히 나 밖에 있는 존재가 된다.
*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나로부터 떠나 있다. 그것은 可離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도 깊게 들어가면 그렇지 않겠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밖에 있는 존재가 되는거야. 그렇죠? 그러니까 그거는 떠나있지 나에게서 떠나있는 존재라고. 떠나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말이요.
그러나 도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게예요.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길 그자체예요. 살아가는 것 자체가 도이기 때문에 공부할때도 공부하는 도가 있고 밥을 먹을 때도 밥을 먹는 도가 있고 똥을 눌때도 똥을 누는 도가 았다.이 도가 망가지면 여러분들 존재는 끝나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도라고 하는 것은 불가 수유리야 잠시라도 나 인간 존재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왜? 내 몸그자체이기 때문에.내몸이 나를 떠날 수 없잖아. 동양사상같이 될려면 하나님이 내몸이 되어야만 된다.
내몸이 되어야만 그게 하나님이란 말이예요.바깥에 있으면 하나님이 아니요.
*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동일한 경건성에 도달할 것이다.
* 도는 몸의 길이다. 몸이 없으면 종료된다. 도는 나의몸 그자체이다. 그러므로 몸은 몸을 떠날 수 없다. 동방인 의 하느님은 잠시라도 나의 몸을 떠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서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 이외의 타 존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나는 천지 대우주 자체이기 때문에 나라는 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이 하나님과 나는 항상 더불어 살아야 돼요.
* 중용은 인간의 본성을 가치론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모든 일시적인 규정성은 허구다.
인간의 삶은 과정이다. 과정이란 끊임없는 수도의 세계이다. 수도는 결국 몸의 닦음이다.
나의 몸이야말로 나의 하나님이다.
젊은이 들이여! 그대의 몸을 경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