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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버지의 보좌관, 아니다.
버릇처럼 입에 배어있는 그 직함은 잊어야 한다.
이제는 잊어야 한다.
보좌관이 아니라 법무법인 남일의 사무장으로 있는 나한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페르세우스는 오전에 사무실에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서 다나에와 함께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나가던 점심나절이었다. 운전 중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혹시 미궁에 빠진 사건이라도 한 건 넘겨주려는가 싶었는데 전혀 엉뚱한 이름이 불쑥 나왔다.
“김재필을 한 번 만나보지 않을래?”
김재필이 누구더라? 많이 들었던 이름인데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김재필이 누구지요?”
“현역 국회의원! 아버지와 붙었던 놈!”
나한수가 신경질적으로 말해서 그를 떠올렸다. 정서상 결코, 아름답게 들리는 이름은 아니었다.
“민수야, 너는 그 이름을 잊으면 안 돼!”
“잠시 착각했어요.”
김재필이 보좌관을 통해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김재필의 보좌관이 나한수의 고등학교 후배라면서 지금 김재필이 사무실에 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바닥이 작은 소도시니 보좌관들끼리도 그렇게 연줄이 닿는 모양이다. 김재필의 사무실이 어디에 있는지 페르세우스는 모른다. 그렇다고 하자 지산삼거리 하이마트 뒤에 보면 크게 간판이 걸려 있다면서 거기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김재필이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기로 예정이 되어 있기에 시간이 없다면서 당장 출발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자를 만나지?
페르세우스는 회의적인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방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이 지역구에 머무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그렇고 그 국회의원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다는 건 더 드문 일이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여직원 하나가 사무실을 지키며 앉아 있다가 민원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시간과 예정을 파악하고 연락을 해주는 정도가 고작이다.
선거기간이 아니면 들르지 않는 곳이 지역구에 있는 국회의원 사무실이다. 철 지난 원두막이라고 할까? 여의도 국회에 자신의 사무실이 있기에 지역구에 있는 사무실은 보잘것없이 허름한 사무실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사무실이 없는 이들도 있다. 지역에 꼭 참석해야 할 행사나 현안이 있으면 그 행사장에만 들렀다가 바로 올라가는 게 지역구 국회의원이다.
흥미로운 건 김재필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점이다.
그자가 왜 만나자고 했을까?
오후에는 안드로메다가 얘기했던 안과에 진료를 가장하여 탐색전을 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미루어야 하겠다. 지산삼거리라고 했으니 사무실까지 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보다 시간이 이르지만 바로 가는 게 덜 번거로울 것이다. 다음 신호등 앞에서 페르세우스는 지산동 쪽으로 우회전했다.
방송으로 보아서 안 사실이지만 김재필은 군 병역문제를 가지고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피력하며 꾸준히 모색하는 중이다. 페르세우스가 알기에도 그건, 남발한 그의 선거 공약사항 중 하나였다.
아버지의 공약인데 그것마저도 따라서 모방한 것이다.
그 문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시급하다.
지난해에 국내에서 출산 된 신생아가 남녀 합쳐서 겨우 20만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고령의 인구는 엄청 늘어나면서 낮은 연령층의 감소에 출산을 회피하는 경우가 생겨 신생아는 줄고 초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다. 그게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실정이다. 출산율이 이렇게 저조해서는 앞으로 징병제를 유지할 경우 60만 대군을 구성할 수가 없다. 60만 대군을 구성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채택해야 하는 일이다. 인력의 부족, 그건 분단국가로서 첨예한 문제로 대두된다. 거기에 김재필이 끼어든 모양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치가 필요한 사안이다. 아버지는 군 생활을 삼 년을 꽉 채웠다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복부 기한이 딱 반절이다.
아버지는 그 점을 일찍이 내다보셨다.
도로가 가로수로 심어놓은 벚나무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 가로수 길을 달려 김재필의 사무실은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지산삼거리 하이마트 뒤에 가니 눈에 띄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자동차 부품가게의 이 층에 있는 사무실인 모양인데 밖에서 한눈에 보아도 작고 허름해 보였다. 부품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으로 오르는 시멘트로 된 계단은 좁고 가파른 계단이라 두 사람이 교행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국회의원의 사무실이 아니면 도저히 세가 나가지 않을 그런 위치고 사무실이었다.
페르세우스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과 사무실 입구에는 떨어진 벚꽃 잎이 날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건물 뒤에 커다란 벚나무가 있어 낙화가 날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올라온 페르세우스는 김재필의 사무실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면 무어라고 하실까?
자문하니 대답이 실로 궁했다.
아버지는 김재필을 건전한, 선의의 경쟁상대였다고 생각하실까?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없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했다.
추측하는데, 경찰서에서 그 난리를 떨고 지역 언론에 뿌린 것은 김재필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훨씬 윗선일 것이다. 김재필은 그런 짓거리를 할 작자가 못 된다. 그런 정도의 힘을 지닌 자가 결코, 아니다.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했던 무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아버지께선 여권에서 추진하는 개헌과 선거법 개정에 굉장히 분노하사고 반대하셨던 의원이었다. 적어도 여권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김재필은 적어도 아버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여권의 눈 밖에 난 인물이었다. 김재필과 내통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를 정계에서 제거하고자 했던 무리는 훨씬 윗선일 거다. 어부지리로 김재필이 수혜를 입은 것일 것이다. 어쩌면 김재필은 수사를 지시했던 무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재필이 왜 보자고 했지? 과연 김재필을 부름에 쫓아오는 게 현명한 처사인가? 여기까지 와서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 김재필의 의중도 파악하기 전에?
페르세우스는 좀 혼란스러웠다.
“안 들어가고 거기서 뭐 하냐?”
돌아보니 나한수가 급하게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저씨를 기다리던 참이었어요.”
페르세우스는 그렇게 둘러댔다.
“그래? 들어가자.”
나한수가 앞장섰다. 노크하고 들어가니 여직원은 없었다. 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평소에는 비워 두는 모양이다. 신발도 벗지 않고 신고 들어가는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은 삭막했다. 싸구려 화분도 하나 없는 사무실이었다. 나한수가 앞장을 서고 페르세우스가 뒤를 따랐다. 김재필은 보좌관으로 보이는 사람과 싸구려 응접 소파에 마주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일어섰다.
“아이쿠, 의원님 의정활동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불러주시고, 고맙습니다.”
나한수는 김재필과 악수를 하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페르세우스는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렇게 굽신거리려고 왔나?
“아무리 바빠도 지역 유명인사인 자네를 안 보고 가면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지.”
김재필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긴 자의 여유가 보였다.
“자네도 오랜만이네”
나한수는 보좌관과 또 악수했다.
“자네가 설의원님의 아들이신가?”
김재필이 페르세우스를 보고 물었다. 김재필은 아버지보다 대여섯 살 적다. 풍채는 풍만한 게 얼굴에 윤기가 잘잘 흐르고 있었다. 그 깔끔한 모습이 페르세우스에겐 오히려 적의로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설민수라고 합니다.”
페르세우스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아, 잘 생겼구만, 어떻게 보니 아버지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반갑네.”
김재필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마지못해 악수하고 김재필의 맞은편에 나한수와 나란히 앉았다.
“형제가 몇인가?”
김재필은 페르세우스를 보고 물었다.
“저 혼자입니다.”
“오, 독자이구먼!”
“올해 몇 살이신가?”
“스물일곱입니다.”
페르세우스는 뭔가 취조받는 기분이 들어 못마땅했지만, 솔직히 대답했다.
보좌관은 앉았던 자리를 비켜주고 접이식 철제 의자를 당겨서 응접 소파 귀퉁이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의원님께서, 항상 두 분이 어떻게 사시나 궁금하게 여기셨습니다.”
보좌관의 언질이 끝나자 김재필이 입을 열었다.
“민생을 돌본다는 게 궁극적으로 말하면 가까운 사람부터 챙기는 게 아니겠나? 요즘 경기가 그렇게 안 좋다면서? 취직자리 구하기도 어렵고?”
이 작자가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취직자리를 알아봐 주려는 게 아닌가? 페르세우스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앉은 보좌관이 말을 꺼냈다.
“의원님께서 두 분의 취직자리를 알선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몇 군데 괜찮은 자리 찍어둔 곳이 있습니다.”
페르세우스의 짐작이 정확했다. 싸구려, 졸렬한 생색내기가 분명했다. 심리적으로 빚진 게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걸 선심이라고 꺼낼 리가 없다. 심리적 채무의식을 만회하려는 심보가 분명할 터이다.
“생각 없습니다. 아저씨는 어떤지 몰라도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페르세우스가 단호하게 사양했다.
“저도 지금 하는 일이 있긴 합니다만.”
나한수는 말을 조금 흐리고 있었다. 분명한 사절이 아니다. 무슨 일인지. 경우와 때에 따라서는 응할 수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나한수와 자리를 같이하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 말씀 하시려고 불렀다면, 볼일이 끝났네요. 가보겠습니다.”
페르세우스는 일어섰다. 김재필이 좀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그 눈치를 물고 페르세우스는 선 채로 김재필을 향해 물었다.
“누구의 모함으로 아버지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명예스럽지 못하게 경찰의 조사를 받았는지, 누구의 모함인지 그게 궁금합니다.”
“어? 나를 의심하지 말게. 나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어. 사실이야.”
김재필이 매우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다 지나간 일인데, 민수야! 지금 그걸 들추어서 뭣 하겠냐?”
옆에 앉은 나한수의 말이었다. 갑자기 나한수에 대한 적개심이 일었다. 게걸스러운 권력에 아부하는 작자. 페르세우스는 나한수를 그대로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냥 놔두시게! 자식으로서는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나? 나로서도 해명할 기회가 있어야 하고.”
김재필이 나한수에게 그렇게 일축하고는 페르세우스를 올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후보자로서 그렇게 현역의원을 조사를 좌지우지할 힘이 당시에는 없었네. 솔직한 말이라네. 우연히 불어준,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의 동남풍 같은 바람이었지. 사실이지 낙선의 위기에 처했었는데 바람이 술술 불어준 것이었지. 고인에겐 참 미안하지만 내게는 숨통을 쉴 수 있는 바람이었는데 그분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다니,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 맞붙어도 좋았을 상황이었지. 일테면, 위기와 기회의 법칙이 작용한 거야. 내가 낙선하는 한이 있어도 그분의 그런 선택을 바라지 않는다네. 솔직한 심정이네”
이긴 자의 담담한 여유가 엿보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그 수사는 무혐의로 종결되었답니다. 그 사실도 아시죠?”
페르세우스가 물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럼 그 조사에서 가장 큰 수혜자가 누구입니까? 합리적인 의심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합리적인 의심이 돌아오겠지. 그래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마냥 항상 부자연스러웠다네. 그러나 그런 일은 당시의 내 힘으로 할 수가 없는 일이야. 내 짐작으로 미루어 설의원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 차원의 소행으로 간주되는데 그걸 모색하고 추진했던 당의 고위들은 자신들도 선출되지 못하고 낙선해서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혀 지내고 있다네. 정치인에게 선거란 참으로 냉정한 것이야.”
그 말을 끝으로 김재필은 담배를 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서 뱉으며 김재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 아버지, 설의원님을 존경한다네.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야. 설의원님은 참 대단한 분이셨어. 내가 대적할 인물이 아니었어. 그 정도로 큰 인물이셨지. 국회에 들어가 보고서야 실감했다네.”
“그것 말고, 선거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아버지께 미안한 일은 없었다는 말씀인가요?”
“민수야!”
나한수가 말리려고 들었다. 페르세우스는 나한수를 돌아보지 않고 김재필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김재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궁금한 게 많을 거야. 풀고 가게 그냥 두시게.”
김재필은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아마도 숨을 고르는 모양새였다.
“내가 당선되었다는 결과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선거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미안할 일은 없었네. 선거법이라는 게 엄연히 있는데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나? 설의원님께서 성격이 너무 격하셨던 거야. 그리고 국회에서 원수를 너무 많이 만드셨어. 그 결과로 추이가 되네만, 거듭된 된 이야기지만 나는 도덕적으로 미안해할 짓을 하지 않았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페르세우스는 그 말을 뱉어놓고 사무실을 나와 좁은 층계를 내려왔다. 더 이야기하면 김재필에게 핑계를 댈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셈이다. 나한수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혼자서 나왔다. 김재필이 왜 찾았는지는 자명해졌다. 날리는 벚꽃의 꽃잎이 페르세우스의 어깨에 떨어지고 있었다.
광명 안과.
김재필의 사무실을 나와 바로 광명 안과를 찾았다.
환자들이 대기실에서 대여섯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과 노인들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접수하면서 눈이 침침하고 자주 충혈된다는 이유를 둘러댔다. 사실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원장이라는 사진작가의 얼굴과 병원구조를 보려고 들른 것이다.
얼른 보아도 간호사는 넷이었다.
안드로메다가 나가자 간호사를 한 명 다시 채용한 것이 분명했다. 입구의 접수부에 한 명, 한 명은 자외선 열등으로 한 노인을 치료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시력검사를 하고 또 한 명은 원장실에서 보조로 일하는 것이 분명했다.
페르세우스는 간호사의 몸매부터 하나하나 살폈다.
과연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는 몸매인가?
하나같이 늘씬하고 출중한 몸매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마도 원장은 간호사를 채용할 적에 몸매부터 보는 모양이다. 저 간호사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미 누드모델이 된 간호사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간호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병원은 이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삼 층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텅스텐으로 된 철문이 달린 것으로 미루어 가정집으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화장실은 밖에 계단에 있는 곳에 있었고 들어가는 출입문에는 방화문 외에 나무문이 달린 이중으로 된 문이었는데 자물쇠는 없었다. 자물쇠는 방화문인 철문에만 달려 있었다. 들어서면 오른편에 접수하는 테이블이 있고 쭉 이어지는 대기실이고, 대기실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방은 자외선 치료실이다. 그리고 현관이 있고 정면에 수술실이라는 작은 푯말이 붙어 있었고 옆이 간호사실이다. 전원의 스위치는 접수부 뒤쪽 벽에 붙어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CCTV는 없었다. 하긴 이런 작은 병원에 뭐 훔칠 게 있어 도둑이 들겠는가? 퇴근하면서 디지털 자물쇠만 잠그면 끝이지, 보안 시스템은 전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올 수가 있겠다.
페르세우스는 대기실에 앉아 매의 눈으로 간호들과 병원 내부구조를 살폈다. 구조가 단순한 병원이었다. 도로 쪽으로 보이는 창은 모두 안쪽에서 석고보드를 붙이고 도배를 해놓아 불을 켜더라도 밖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다. 그 가운데 환기를 위해서인지 두 곳을 창을 다시 만들어 놓았지만 닫혀 있었다. 바로 도로 건너에 재래시장이 있어서 소음을 차단하려고 창문을 닫은 모양이다. 진료를 받은 사람이 처방전을 받아서 나가고 또 다른 환자가 들어와 접수하곤 했다. 대충 미루어 잘 되는 병원인 셈이다. 위치가 좋고 대중교통의 중심지라 노인들이 많이 찾는 병원인 모양이다.
페르세우스 차례가 되어 시력검사를 했다.
그리고는 원장실로 안내되었다.
의료용 흰 가운을 입은 원장은 키가 훤칠한 사십 대였는데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눈빛이 좀 강렬하다는 것 외에는 평범한 원장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원장실 진료 의자에 앉으며 주위를 살폈다. 진료실에서 남쪽으로 창이 나 있고 철로가 훤히 보이며 흰색 시트를 입힌 진료용 침대가 있었고 벽에는 액자가 몇 개 걸려 있었다. 정자를 찍은 사진인데 눈을 끌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모른다. 페르세우스가 작품을 보는 안목이 없어 그런지도. 원장은 확대경으로 페르세우스의 눈을 검사했다.
“눈이 침침하다는 기분이 드나요?”
“눈이 자주 충혈되구요.”
책상 밑의 컴퓨터는 한 대다. 데스크톱인데, 의료의 실무와 작품에 함께 쓰는 모양이다. 책상 위의 모니터는 큰 데 반해 하드디스크가 들어 있을 몸체는 작은 것으로 최근에 구매한 모양이다. 날이 갈수록 모니터는 커지고 몸체는 작아지는 게 컴퓨터다. 원장이 앉은 뒤쪽은 벽이었고 진료실에서 수술실 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 있었다. 암실인 모양이었다. 구조는 더 훑어볼 게 없다. 단순한 안과다.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눈을 자주 씻고 눈에 넣는 안약을 처방해 줄 터이니 찝찝하다 싶으면 자주 넣으세요.”
이 작자가 명의네. 정확하게 본 것이다.
이상이 있을 리가 없다.
진료실을 나와 접수부에서 잔돈으로 진료비를 계산하고 처방전을 받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처방전을 잘게 찢어서 계단에 버렸다. 전혀, 필요 없는 처방전이었다. 유명약국, 올라갈 적에는 대수롭잖게 보았는데 일 층은 약국이었다. 페르세우스는 도로에서 건물의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시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가 건물이었다.
*8.
“차가 상당히 높네요. 이런 차를 끌고 다니면 겁나는 게 없겠어요? 최소한 충돌사고에서는.”
밖에서 보기보다는 레미콘 트럭의 조수석에 올라앉으니 엄청 높았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지하차도를 지나가다가 다리 교각이나 더 큰 차에 박으면 박살이 나지. 특히나 버스, 버스는 앞에 강판을 넣어서 이런 화물차 대가리보다는 단단하거든. 그러나 정면충돌을 하더라도 버스보다는 운전석이 높아서 크게 다치지는 않겠지.”
우영구는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우영구는 마흔하나인데 얼굴은 더 많아 보였다.
“버스만 피하면 승용차와 박는 데는 문제가 없겠네요.”
페르세우스는 자꾸 유도 질문을 했다. 우영구의 레미콘에 타기까지는 많은 공을 들였다.
“승용차와 박아서는 다치거나 죽을 일은 없겠지. 그러나 승용차라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지. 사고는 아무리 잘 나도 덕 보는 일은 없어, 서로 덕이 없는 게 교통사고야.”
“레미콘 면허가 따로 있나요?”
“레미콘 면허는 따로 없고 일종 대형면허를 내면 운전이 가능하지만, 노하우가 필요하지. 뭐든지 짬밥이 필요하겠지만.”
“일종 대형이면 버스로 시험을 치죠. 저도 일종 대형면허를 내서 레미콘을 하면 어떨까요?”
페르세우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자꾸 말을 걸고 있었다.
“청춘이 구만리 같은 젊은 사람이 무슨 레미콘이야? 건축 기사가 되어 나중에 현장 소장을 하다가 건축업을 하면 바로 사장인데.”
“아저씨, 레미콘을 운전하면 월급이 어느 정도 되나요?”
“이 차는 내 차여. 자가영업을 하는 거지. 레미콘 기사는 월급이 얼마 안 될 거야. 대충 시내버스 비슷하겠지?”
“아, 그럼 사장님이시네요.”
“사장은 무슨 사장, 개인택시보다 못한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갑자기 남의 이름은 왜?”
“그냥 사장님이고 부르긴 그렇고, 김 사장님이나, 장 사장님이라고 불러야죠.”
“아, 우영구라고 해.”
“아, 우 사장님. 거봐요. 어감이 매끄럽잖아요?”
우영구가 확실하다. 차를 제대로 탄 것이다.
우영구의 레미콘 트럭이 자기 소유이고 자가영업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잠시도 쉬지 않고 물었다. 우영구의 인상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순박해 보였고 악의는 없어 보였다.
본질과는 상관없는 질문이었다. 에둘러가야 의심을 하지 않는다.
우영구는 아버지 선거, 얼마 전에 레미콘 트럭으로 아버지 차를 덮친 위인이다. 그게 의도적이라면 살인미수다.
오늘 이 차를 타기 위해 뒷조사를 엄청나게 했다. 자연스럽게 우영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 차에 차는 데까지는 그 방법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을 했고 성공을 한 셈이다.
살인미수자.
양의 탈을 쓴 악마.
페르세우스는 우영구를 힐끔 보며 그렇게 되뇌었다.
경찰서 교통사고 조사계에 가서 그날의 사고 경위를 열람하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냈다. 단순 중앙선 침범으로 벌금을 낸 사고였다. 피해물건은 자동차보험으로 처리되어 사고는 종결되어 있었다. 가해 차량의 등록번호도 알아내고 운전자가 누구인지. 화물노조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가족 몇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느 현장에서 일하는지 모두 파악을 했다.
“우 사장님! 개인택시랑 비교하면 안 되죠? 택시를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면 죽을 수도 있지만, 레미콘은 그런 걱정 없이 평생 할 수가 있잖아요?”
“그 점은 인정하지, 이건 정년이 없어. 힘이 되면 평생 할 수가 있지?”
우영구는 분명히 반말이었다.
건축 기사가 아니라 갓 입사한 보조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반말을 하는 것일 터이다. 건축 기사라고 했으면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니 최소한 반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영구는 별다른 의심이 없다. 페르세우스를 아파트 건설 현장의 건축 기사 보조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영구가 어느 아파트 현장에 콘크리트를 납품하는지 알고 그 아파트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입구에는 현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차량에 대해서 바퀴를 씻는 세륜기가 설치되어 있다. 거기서 일을 돕는 척하다가 우영구의 차가 나오자 물어보지도 않고,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바퀴를 씻는 동안 조수석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올라앉은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했다.
“아이쿠, 쉬워 보여도 일이 장난이 아니네요. 한탕은 쉬어야 하겠네요.”
레미콘 조수석에 올라 페르세우스가 능청스럽게 우영구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쉬었다 하시우. 처음 보는 얼굴인데, 건축 기사님이오?”
“건축 기사는 아니고 아직은 보조입니다. 엊그제부터 이 현장을 발령받았는데 오늘 일이라곤 세륜기, 감독을 맡으라고 하네요.”
그 말에 우영구는 의심하지 않고 건축 기사의 보조로 알고 있다.
레미콘회사에 가서 콘크리트 재료를 받아서 싣고 현장에 다시 오려면 대충 삼사십 분은 걸릴 것이다. 어느 레미콘회사에서 재료를 싣는지 그것도 알고 있다. 그 시간이면 자연스럽게 우영구의 의중과 사고의 진상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페르세우스가 탄 레미콘 트럭의 전면 유리 가장자리에 건설 노조 가입 차량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차 안에서 보아도 큼직한 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그걸 가리키며 불었다.
“왜 건설 노조예요? 레미콘 노조는 없나요?”
“있지. 요즘 노조 없는 단체가 있나? 건설 노조 산하의 레미콘 노조라는 말이지. 화물연대 산하의 노조가 아니라.”
“아, 그렇군요. 우리는 노조가 없어요. 건축 기사 보조원 노조? 이게 말이 되나요?”
“하하, 나중에 회사의 중간 간부가 되면 노조가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겠지.”
“아저씬 노조에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혹시 간부예요?”
“청년부장이라고는 하지만 하는 일은 없어. 그저, 파업하느냐, 마느냐에 찬반 투표에 참석하고 또 언제 하느냐에 투표를 하고 단가를 인상할 적에 얼마로 인상하느냐에 의견을 제시할 뿐이지.”
나한수의 말이 맞았다. 청년부장이 확실하다. 어쩌면 이 자가 고의로 사고를 가장하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을까?
“청년부장이면 노조 사무실에 놀면서 노조원들에게서 회비를 받아서 생활하지 않나요?”
“레미콘에서는 딱 한 사람만 그렇지 나머지는 다 일을 해. 명의만 청년부장이지. 다른 사람들과 차이는 없어.”
“아무튼, 큰 차를 타이 기분이 굉장히 좋네요. 콘크리트를 실렸을 때와 빈 차가 운전하는데 차이가 나나요?”
페르세우스는 전혀 엉뚱한 방면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짐을 실었을 때는 핸들이 확실히 무겁지. 가속에도 차이가 있고, 확실히 달라. 빈 차는 이렇게 가볍지.”
“하루에 콘크리트를 몇 차나 실어다 나르시나요?”
그건 대중이 없단다. 거리가 가까운 곳도 있고 먼 곳도 있으며 한 차를 타설하는데 펌프카를 이용할 때에는 오 분이면 짐을 다 부릴 수가 있지만, 현장 조건이 여의치 않아 굴착기나 더 심하면 인력으로 콘크리트를 쳐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두 시간은 고사하고 한나절이 더 걸리는 곳도 있단다.
“그럼 그런 곳에는 가격은 어떻게 정산해서 받나요?”
회사에서는 물량 기준으로 정산한단다. 그런 곳에는 주기적으로 차를 변경하면서 배차를 하기에, 적은 물량이 필요한 곳과 먼 거리나 인력으로 콘크리트를 옮기는 현장을 사전에 파악해서 적절하게 배차를 하기에 운임을 더 받는 일은 없다고 했다. 레미콘 가격이 정해졌는데 더 받는다면 거래처가 다 끊어진다는 게 우영구의 말이었다. 그런 점에는 노조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우 사장님! 자제분은 몇이나 되나요?”
최대한 먼 거리부터 접근해야만 한다. 진실을 알아내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게 에둘러 가는 길이 필요하다. 물론 아이가 몇인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페르세우스는 다 파악했다.
“자식이야, 아들 하나에 딸 하나가 있지.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야. 둘 다 고등학생이거든.”
“저는 자식이 많은 집이 보기가 좋아요. 저는 독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동생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요.”
운전대를 잡은 우영구가 페르세우스를 힐끔 보았다.
“독자들이야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겠지. 솔직히 많아도 좋을 건 없어. 나는 형제가 많아. 내 위로 형 둘과 누나가 둘이고 여동생이 하나 있지. 육 남매의 중간에 끼어 있었으니 공부를 할 살림이 안 되었어. 배운 게 없어 이 모양으로 살고 있지.”
우영구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혀 경계하지 않는 눈치다.
아버지는 항상 페르세우스를 보고 나중에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했다. 버릇처럼 그 말씀을 하셨다. 페르세우스도 결혼하면 그럴 생각이다. 신부의 첫째 조건은 바로 그것이다. 아이를 몇이나 낳을 거냐고 물어보고 결정할 참이다. 아버지도 페르세우스의 동생을 낳고 싶어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시험관아기를 가질 입장도 아니었다고 했다. 아버지도 독자다. 아니 형이 있었다. 페르세우스에게는 큰아버지인 셈인데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해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철이 들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국립현충원에 여러 번 갔었다. 항상 어머니와 나들이 삼아서 셋이 갔었는데 그 덕에 서울 구경을 하는 게 즐거웠다.
가만히 생각하니 큰아버지를 한참이나 잊고 있었다.
그 점을 어머니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듯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아버지와 큰아버지 묘역을 둘러보고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울컥, 갑자기 그 점이 죄스럽게 여겨졌다. 아버지는 큰아버지를 엄청 따랐단다. 지금 해평시가 당시에는 시골 마을이었단다. 농촌이었던 이곳에서 공부하려면 다른 형제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에게 그 역할을 큰아버지께서 담당했다고 하셨다. 큰아버지께서 월남전에 참전하셔서 보내오는 돈으로 아버지는 공부할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살림으로는 대학이 언감생심이었는데 그게 다 큰아버지의 덕이라고 했는데 전사하셨단다. 전사하시고 국가로부터 나온 위로금으로 대학을 다니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입장에 서서 헤아리면 큰아들을 잃고 그 돈으로 작은아들 공부를 시킨 셈인데 얼마나 가슴이 시렸을까? 페르세우스는 할아버지도 보지 못했다. 페르세우스가 태어나는 해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레미콘은 어느새 형곡동 고개를 넘어섰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영구에게 사고에 대해서 입을 열게 해야 한다.
“차가 커서 그런지 겁이 나는 게 없네요. 승용차를 끌고 다니면 아찔하고 위협을 느낄 때가 많은데.”
“하하. 그래도 조심해야 해. 요즘 운전을 형편없이 하는 여편네들이 많으니 항상 방어운전을 해야지. 방어운전이 최고야. 십 년 잘하다가 한번 사고가 나면 말짱 헛일이야. 아이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 천운이었어. 하늘이 도운 거지.”
“뭐가요? 뭐가 아찔해요?”
페르세우스가 물었다. 무슨 말이든 꼬투리를 만들어 자꾸 하게 만들어야 한다.
“재작년에 사고가 났었지. 사고가 날 자리가 아닌데, 멍하니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난 거야. 자네 해평시의 사람인가? 지난번 국회의원을 했던. 설강진을 아나?”
어라? 묻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올 모양이다. 이런 횡재가 없다. 우영구의 입에서 아버지 얘기가 먼저 나오다니?
“설강진? 들어본 거 같기도 하네요.”
페르세우스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하신 분이야. 네가 그 유명한 양반을 죽일 뻔했다니까.”
“어쩌다가요?”
“자네 해평시민인가?”
“예. 학교는 여기서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까지요.”
“그런데 그 유명한 설강진 의원을 몰라?”
“정치에는 워낙 관심이 없어서요. 대학을 타지로 나갔고 또 군에 있었으니, 들어보기는 했어요.”
“글쎄, 내가 그 양반을 죽일 뻔했다니까. 자네 수출탑 알지?”
“예. 공단 입구에 있는 탑 말이지요.”
페르세우스는 대답에 고리를 만들어 자꾸 말을 유도했다. 뒷말이 이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 어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그래. 바로 거기, 롯데마트 앞에 있는 탑. 그 큰 대로는 사고가 날 곳이 아니었어. 그래서 방심했는지도 모르지.”
“졸음운전을 했나요?”
“아니야. 단거리에서는 졸음운전을 안 해. 졸 사이가 없는 거지. 그날 공단의 어느 공장, 지하실 콘크리트를 치는데 물량이 상당히 많았어. 자칫하면 야간까지 해야 하는 실정이었지. 그래서 회사에서 다른 현장의 일은 미루고 거기에 모든 레미콘이 전격 투입된 거지. 레미콘이 줄을 지어서 공단으로 가고 있는데 내가 세 번짼가 네 번째에 섰지. 그러니 전방은 보이지 않고 앞의 레미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 큰 도로에서 개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검둥개 한 마리가 갑자기 그 큰길에 뛰어든 거야. 그리고 내 차 앞으로 건너가려는지 뛰어들었어. 브레이크를 잡을 사이도 없이 순간적으로 핸들을 살짝 꺾었는데 중앙선을 침범한 거야. 앞에 선 레미콘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으니 맞은 편에 차가 오는 줄을 몰랐지. 순간적인 충돌사고가 일어났어. 검은색 승용차였는데 내 차 운전석 앞바퀴에 박고 승용차가 돌았는데 오던 방향을 보고 완전히 돌았지. 그런데 뒤에 따라오던 레미콘이 놀라서 핸들은 반대 방향으로 꺾지 못하고 돌아서 뒤로 중앙선을 넘는 그 차의 꽁무니를 또 들이박은 거야. 이차사고까지 난 셈인데 그 차는 도로에서 세 바퀴를 돌고 밀려나서 반대편 인도를 들이박고 멈춰선 거야.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 저, 죽었다 싶었는데 승용차 다 찌그러진 차, 문을 억지로 열고 사람이 나오더라구. 그게 얼마나, 반갑고 고맙든지.”
“전복되지는 않았네요?”
“그렇지 전복되지는 않고 수평으로, 그대로 두 대의 레미콘에 두 번이나 박고 도로에서 세 바퀴를 돌고 인도를 박고, 오던 방향을 보고 멈춰선 거지. 그게 국회의원이 탄 차량인 줄 누가 알았겠나?”
“일단 사람이 죽지는 않았네요?”
“국회의원이 운전자와 같이 탔는데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어. 국회의원 차의 운전자도 보좌관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 국회의원 차를 운전하는 자도 그렇게 놉은 사람이라는 걸 몰랐지. 이건 중앙선을 침범했으니 100% 내 과실이다, 하고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싣고 갔지만, 단순 찰과상이었어. 천만다행이었지.”
“이 큰 차에 두 번이나 박았으니 승용차는 완전히 박살이 났겠네요? 아! 재미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겠네요?”
“재미? 그런 소리 말아. 사고 조사하는데, 정말 애를 먹었어. 내 뒤에 따라오다가 꽁무니를 박은 차도 노조 회원이었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노조원이 사고 내면 불이익을 당하나요?”
전혀 엉뚱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 건 아니란다. 노조원이 사고 내서 당하는 불이익이 아니라, 아버지가 당시에 노조의 반대편에 서서 노동법 개정안을 반대했기에 고의적인 표적 사고라고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일도 못 하고 사흘간 그 점에 대해서 조사를 받았노라고 했다. 말을 들어보니 고의로 낸 사고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차를 타보니 앞에 레미콘이 있어 줄을 지어 갔다면 맞은 편에 오는 차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차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차는 앞차에 박고 승용차가 돌면서 꽁무니가 중앙선을 넘었기에 피하지 못하고 박은 것이 분명하다. 레미콘을 직접 타보니 그 점을 이해하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조사를 세 번이나 받고 우리는 노동법 개정안 자체를 몰랐다고 했지. 사실 모르고 있었거든. 오비이락이지,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진 거야. 그런 법을 개정하고 그 반대편에서 설의원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는 걸 전혀 몰랐거든.”
“아니 그 차는 어떻게 되었느냐구요?”
“그 차? 그 차는 폐차를 시켰지. 고칠 수가 없을 정도로 망가졌거든. 덕분에 내 차 보험료만 잔뜩 올랐어. 벌금도 중앙선 침범에 사고라 왕창 내고, 개새끼 한 마리 때문에 엄청 손해를 본 거지. 그대로 개를 깔아뭉개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놀라면 그게 안 되거든. 그래도 다행이야. 차가 부서진 걸 보면 다 사람이 죽었다고 할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졌거든. 천운이었지. 사고는 아무리 잘 나도 덕을 보는 건 없어. 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사고를 당하고 덕을 본다고 생각하면 꼭 그만큼 언젠가는 물려주게 되어 있어. 사고는 피하는 게 가장 좋아.”
“벌금만 내고 말았나요?”
“그렇지만, 벌점도 있고 보험료는 왕창 올랐고, 조사받느라고 일 못 한 거하고 따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야. 만약 상대가 죽었다면 물어낼 거 다 물어내고 또 교도소에서. 그만하자.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사고는 아무리 잘 나도 손해야. 아우, 치가 떨린다.”
“뒤에 따라오던 레미콘은 책임이 없나요?”
“그 차는 과실이 10%밖에 안 돼. 일차사고가 나고 중앙선은 넘은 차를 들이박은 거니까, 자기 차선을 지킨 것이고 전방주시 태만 정도로 약한 것이지. 설령 사람이 그 차에서 받은 충격으로 죽었다고 해도 내가 다 뒤집어쓰는 거야. 교통법이 그래.”
들어보니 고의로 낸 사고는 분명 아니었다.
나한수는 과잉 의심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페르세우스는 우영구의 아이들 신원까지 모조리 파악했는데 들어보지 않고 실행했다면 죄 없는 아이들이 당할 뻔했다. 그래서 사고는 확실히 검토하고 또 검토해야 하는 모양이다.
며칠간 공을 들였는데 헛일했다.
아니다. 헛일이 아니라 하나를 배웠다.
빨리 짬을 내서 국립현충원에 가서 큰아버지를 뵈어야겠다. 아버지가 없으니 그것도 페르세우스의 몫으로 굳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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