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90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묵상글
+++++++++++++++++++++++++++++++++++++++++++++++++++
제1독서<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습니다.>(1코린4,6ㄴ-1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6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가르침을 나와 아폴로에게 배워, 저마다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7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12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13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4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복음<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26090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 09.04. 21:26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 동정 기념일 독서와 복음
마태 25,31-46 한 달의 ‘영적 성찰’이 오늘 이 복음에서 한 점으로 모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우리 삶을 단 하나의 잣대로 비추십니다. “가장 작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가장 작은 이’와 하나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갇힌 이 ―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오른쪽의 의인들은 오히려 놀라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그렇게 해 드렸습니까?” 그들은 ‘상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이라서’ 했을 뿐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를 섬긴 줄도 몰랐습니다. 참된 사랑은 이렇게 ‘계산 없이, 무심히’ 흘러갑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늘 강조했듯,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내 것을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마땅히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기리는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가 이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콜카타 길거리의 죽어 가는 이들 안에서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분을 씻기고 안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수십 년간 ‘하느님이 안 계신 듯한 어둠’ 속에서도 이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로의 ‘느낌’이 없어도, 오직 ‘믿음’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영적 성찰의 열매입니다. 느낌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가장 작은 이 안의 그리스도’를 계속 섬기는 것 말입니다.
영적 성찰의 마지막 물음은 그래서 이것입니다. 나의 신심과 열매는 결국 ‘가장 작은 이’에게 닿았는가? 그리고 이 물음은 곧 ‘영적 회복’의 문이 됩니다.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메마른 영혼과 세상을 다시 살리는 회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가장 작은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가? 나의 사랑은 ‘상을 바라는’ 것인가, ‘계산 없는’ 것인가? 나는 위로가 없는 ‘어둠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가? 나의 한 달 영적 성찰은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 맺는가?
주님, 가장 작은 이 안에 계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상을 바라지 않고 계산 없이 사랑하게 하시고, 어둠 속에서도 믿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6090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04. 15:27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자유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2026년 9월 4일 금요일 신학자 숀 코플랜드(M. Shawn Copeland)는 많은 사람들과 장소가 여전히 "지속되는 십자가의 길"을 겪고 있음을 애통해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알고 따른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배척당하고, 멸시받으며, '다르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하고, 폭력과 죽음에 내몰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어린이들과 여성들과 남성들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가자와 라파, 바그다드와 베이루트, 카이로와 키갈리에서 울려 퍼지는 통곡과 비탄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케이프 코스트와 엘미나, 크리스티안스보르그의 감금된 요새에서 거칠고 피로 얼룩진 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오클라호마에서 아칸소와 앨라배마, 미시시피로 이어지는 추위와 굶주림 속을 절뚝이며 걸어간 체로키, 세미놀, 촉토족의 어린이와 여성, 남성들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우리의 마음에 깊이 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수용소의 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다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허술한 배와 낡은 트럭, 화물 컨테이너에 몸을 실어 사막의 철조망 앞에서, 시골 마을 외곽의 버려진 검문소에서, 강과 물가의 삼엄한 국경에서 질식하며 죽어간 어린이들과 여성들과 남성들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우리의 기억 속에 되찾아 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주의와 경외와 신심으로 따른다면, 무고한 이들의 눈물과 피와 신음이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 스며들고, 우리가 마시는 시냇물과 바다에 흘러들며, 우리가 씨앗을 뿌리고 거두어 먹는 땅 속에 배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주의와 경외와 신심으로 따른다면, 세기를 넘어 학대받고 불태워지고, 강간당하고 훼손되며, 노예로 팔리고 포로가 된 이들의 신음과 눈물을 따라 결국 나자렛 출신 유다인이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자리로 이끌려 가게 될 것입니다. [1] 코플랜드(Copeland)가 강조하는 핵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안에서 자라나는 "동정심(compassio)"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또 우리를 위하여,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자유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인격적 삶의 의미를 몸소 보여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려면 자신을 버리고(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 인간됨과 인격적 삶의 의미를 그분을 본받음으로써 발견하게 됩니다. 곧 우리도 십자가를 짊어져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속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선택하셨고, 우리는 그분 때문에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2]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신음과 눈물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 속으로 들어가, 능동적이고 자비로운 연대의 사명을 살아내며 그 의미를 우리 삶 안에 육화하게 됩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소명을 늘 기억하게 해 줄 '기준점'이 될 단어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2026년의 단어로 "belight"라는 단어를 만들어 택했습니다. 이 단어는 "delight"처럼 발음되는데, 상처 입고 갈자진 세상 안에서 복음을 살아낸다는 것이 곧 '빛이 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단어로 만든 것입니다. —Jason O. References [1] M. Shawn Copeland, Knowing Christ Crucified: The Witness of African American Religious Experience (Orbis Books, 2018), 133 , 134–135. [2] Bernard Lonergan, “The Mediation of Christ in Prayer,” in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Papers, 1958–1964, Collected Works of Bernard Lonergan, vol. 6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86), 181. [3] Copeland, Knowing Christ, 14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
26090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05 04:22
- 자중자애(自重自愛)하며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말이 바로 자중자애(自重自愛)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자녀나 젊은이들에게 부디 자중자애하라고 당부하곤 했지요.
그때는 이 말이 매우 상투적인 당부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주 좋은 뜻으로 요즘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존감을 얘기하는 겁니다.
자중자애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말인데 자중자애하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거의 완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주님 말씀은 이런 뜻에서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아들, 인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그중에서도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가장 소중하고 너무도 소중합니다.
모든 고등종교와 올바른 종교는 다 이것을 가르치고 그래서 부처님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고,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다름이 아닌 깨달은 자 곧 부처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이렇게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귀하게 창조했고 여전히 귀하고 소중하다고 하시고, 부처처럼 깨달은 사람들은 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소중한 줄 알라고 가르쳐줬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만 귀하다며 우쭐거리고 남은 얕보며 쓰레기 취급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런 행태를 보이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나와 아폴로에게 배워, 저마다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프란치스코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내 것이란 하나도 없고, 내 것은 죄와 악습밖에 없다며 자기 주제를 알라고 했지요.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이 말을 우리는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 것이란 죄와 악습밖에 없다는 말을 인간의 품위를 형편없이 깎아내리는 말로 알아들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의 선이란 하나도 없기에 우쭐댈 수 없는 존재지만 다행히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에 우리는 보물을 지닌 질그릇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음을.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셨기에 우리는 보물을 지녔음을. 그리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도 그런 존재들임을.
이렇게 자중자애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26090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05. 05:21 사랑과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근본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겸손!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이 기묘한 갈등은 이웃의 재산을 몰래 가져가는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에 일을 하는 문제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웃의 밭을 지나가며 손으로 이삭을 뜯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낫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신명기 23장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가 남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남의 곡식에 낫을 대어서는 안 된다."(23,26). 그러니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들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행위가 안식일 법을 다섯 가지나 위반했다고 보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곧, 이삭을 뜯는 것은 추수이고,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탈곡이며, 입으로 숨을 불어 겨를 날려버리는 것은 키질이고, 곡식을 손에 쥐는 것은 짐을 지는 것이며, 전체 과정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눈덩이처럼 큰 문제로 삼은 셈입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사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이 억지를 부린 이유는 예수님의 유명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명세를 위해 사람들을 치유하고 용서하며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표징들을 보면서 그분을 구세주나 위대한 예언자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함구령을 내리셨던 이유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이 정확하게 당신의 신원을 고백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진정한 본질을 왜곡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을 때의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 보면 알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얼마나 정반대였는지가 그 이야기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며 그분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이런 큰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탄은 "고발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이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고발하는 자들, 즉 사탄들, 혹은 사탄의 하수인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성찰해 봅시다. "나도 이렇게 고발하는 자가 된 적은 없는지?"를 요... 아마도 말로는 자주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생각으로는 자주 그리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도록 '나'를 내어 맡기려는 연습(수양)이 필요합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먹을수록 말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지켜보며 실수하기만을 기다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비판적인 시선은 오히려 실수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만 발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공격을 자주 겪는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빌미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과하거나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논거(다윗의 행동)는 안식일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다윗과 그 일행에 관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분은 율법과 관련한 논쟁에 빠져들지 않으셨습니다. 광신적인 율법주의자와 논쟁하다 보면 자신도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세부 사항에 들어가기보다, 그들의 전체적인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당신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극진한 사랑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을 위해 만드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안식일의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극진한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의식하고 상기하며 새기는 데 더 크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으면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얻어내고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착각인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들의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착각인 이유는 자기들이 세세하게 가지를 쳐서 만들어 놓은 법과 규정을 잘 지키기만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며 간혹 혹은 자주 빠지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은총은 우리의 공로나 선업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이 믿음은 겸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근본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겸손 말입니다! 이러한 겸손이 정말로 근본적이고 중대한 이유는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그 하느님으로부터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진정으로 깨어 바라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잘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자주 그 마음먹은 바에서 벗어나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지 않나요?! 그때마다 "나는 왜 이렇지?" 하며 자책할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우리의 경향이 문제임을 의식하고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이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또다시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것들을 의식하고 상기하고 새기는 날인 것입니다. 물론 매일 우리는 이런 의식 속에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한계가 있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다 보면 이러한 현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까마득하게 잊은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의식과 상기와 되새김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바로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자주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의식한다면 금상첨화겠지요?!...
----------------------------------------------------
26090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717 2026.09.04 19:58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주님, 저를 가난하게 하소서.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제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람을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게 하시며, 진리를 독점하지 않고 겸손히 섬기게 하시고, 저의 재능과 직분과 경험을 자랑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선물로 내어놓게 하소서.
주님, 저를 비워 주소서. 판단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우고, 옳음에 대한 집착을 비우며, 인정받으려는 갈망과 비교와 경쟁의 소음을 비워 주소서. 그 빈자리에 당신의 성령이 머무시고, 제가 만나는 사람들의 다름을 받아들일 넓은 공간을 만들어 주소서.
주님, 저의 팔을 벌려 주소서. 상처받을까 두려워 가슴 앞에 모아 둔 두 팔을 펼치게 하시고, 나와 다른 이를 품되 소유하지 않게 하시며, 가까이하되 그의 자유와 신비를 존중하게 하소서. 그리고 포옹이 끝났을 때 다시 팔을 펼쳐 그를 자유롭게 보내 줄 수 있는 사랑을 주소서.
주님,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상처를 피하지 않고 부서진 인간성 안에 숨어 계신 당신을 보게 하시며, 가난하고 병들고 늙고 버림받은 이들의 얼굴에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하소서.
주님, 저의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약해지는 것을 실패라 여기지 않고, 도움을 받는 것을 수치라 생각하지 않으며,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질수록 당신께 더 깊이 의지하게 하소서. 누군가의 손에 저를 맡겨야 할 때 그 손을 통하여 저를 돌보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아보게 하소서.
주님, 제가 가난한 사랑을 살게 하소서. 상대를 변화시키려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게 하시며,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신비로 남겨 두면서도 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해결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말보다 현존을 내어주고, 아무런 보답도 받을 수 없는 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하소서.
주님, 저를 모든 피조물의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한 방울의 물과 작은 풀 한 포기와 이름 없는 생명 안에서도 당신의 선성을 보고, 세상을 소유물이 아니라 가족으로 대하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 마침내 제가 기도하는 사람이기보다 기도가 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 존재가 당신의 가난한 사랑을 드러내는 작은 성사가 되고, 제 삶의 빈자리마다 당신께서 태어나시며, 제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이 흘러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생의 마지막에 아무것도 제 것이라 붙들지 않고 빈손으로 당신 앞에 설 때, 그 빈손이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돌려드린 사람의 손이 되게 하소서.
그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가난은 사랑을 잃는 일이 아니라 사랑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일이며, 하느님 사랑은 나를 부유하게 만드는 소유물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내어주어 마침내 모든 존재와 하나 되게 하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당신을 바라볼 것이고, 당신은 나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 서로의 바라봄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며,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자녀가 되고,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모든 피조물의 형제자매가 될 것입니다. 가난은 그렇게 내 안에 하느님께서 태어나시는 자리이고, 기도는 그렇게 태어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나의 삶이 될 것입니다.
++++++++++++++++
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2026.09.02. 06:35 )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