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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견뎌야 할 부르심 받은 성도들(베드로전서 1:3~7)
2024년 7월 14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1:3~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원래 인간적인 생각과 삶 속에서 이 땅에 났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 살던 삶과는 상당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실 결정적으로 더 바랄 수 없는 은혜로 인해 우리 인격의 많은 부분이, 또 우리 인생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고 은혜의 길을 가는 것이기에 이전에 순전히 사람의 길을 가던 것과는 달리 아쉬울 것이 없지만, 인간은 워낙 약하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인간의 문제들도 달래줘야 되고 보살펴야 되고 또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야 되는 부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들을 때, 제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법을 주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가시는 길에 대해, 또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들을 소개할 때 많은 분들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서 자기 삶에 새로운 힘을 찾는, 어떤 하나님의 섭리를 삶 가운데 깨닫는 시간을 갖습니다. 또 은혜 받고 하나님의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해하면서 위로를 받고 있는 분들이 있고, 그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기쁨이 차는 그런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로 인해 마음이 그냥 채워지는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카테고리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힘드니까 말씀이 들어오지 않고, ‘과연 신앙생활이 내게 중요한 문제인가?’ 하고 더욱더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음에 진정 영원한 하나님의 심정이 살아있기보다는 종교적으로, 연속된 습관에 따라 교회에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라 하지만, 그 신앙의 불씨는 이미 죽어서 꺼진 촛대만으로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습의 성도들이 있겠지만,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제가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을 양육할 때, 저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성도를 다 돌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제가 거기 있다면 제가 했을 것 같은 것들을 해야 합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지금부터라도 절대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감독이 하지 않을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성도들 달래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줘야 될 내 임무도 있지만, 또 절대적으로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내가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열어줘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펼쳐서 보여야 하고, 그 광채가 세서 더러는 받기 싫어해도, 무리가 되더라도 해야 합니다. 광야에 들어와서 힘든 길이라도, 그들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합니다. 못 가는 사람들은 못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요단강 건너갈 사람들은 일부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도 “제가 절대로 변치 않겠습니다. 감독님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성도들이 많았지만은, 사태 이후 그런 자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변화가 있고 합니다.
저도 여기서 신앙생활 하면서 자라온 사람이기 때문에 교회의 상황을 잘 압니다. 교회가 때로는 내 방황하는 일에 대해 힘이 안 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런 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또 저와 교역자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인도하려고 하고, 용기를 주려 하고, 싸우게 하려고 하고 있는데, 고통 속에 있는 성도들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탄하지 않은 그런 상황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후회스럽고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저도 성도이고, 저도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육신으로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고,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 감독님이 뭐가 부족해. 다 있으면서…’ 여러분보다 더 없을 걸요? 여러분 보다 더 많은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기 보다, 저는 제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주 앞에 나온 바가 있기 때문에, 그냥 그의 종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그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삶이 제게 고통 주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도 싸워 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두 배로 강인해야 되고, 두 배로 견뎌가야 되고, 두 배로 참아야 됩니다. 아마 이제는 저도 어떤 사람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인내의 힘이 길러졌을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제가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제 자신보다도 수천 배, 수만 배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 뜻을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합니다. ‘세상 삶이 어렵고, 또 젊은 세대들은 새로이 주어진 새 세계가, 새 환경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혹독한 요구사항들을 감당하면서 인생을 만들어 가야 할 텐데, 저들이 어떻게 잘 견뎌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남의 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우리 교회는 그런 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올 사람 따라오고 못 따라올 사람은 낙오되고, 그렇게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그 모든 해결할 수는 없지만, 성도들의 그런 마음만은 이해합니다.
인생에 굉장히 어려운 문제들을 부딪치게 되면 신앙이고 뭐고 놓아버리기 쉽습니다. 저는 인생 자체에 대단히 회의적입니다. 전 인생을 미워합니다. 인생 자체가 너무 악한 것 같습니다. 너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게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왜 하느냐? 이 땅에 마지막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이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심판하는 날이 있고, 그 심판하는 날 이후에 그것이 영원한 상이 됐든지 또 영원한 형벌이 됐든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무서운, 극도의 행복과 극도의 괴로움으로 나눠지게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이 땅에 살면서도 그런 것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기에 하늘의 부르심에 충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누구를 미워하고, 목사도 미워하고, 감독도 미워하고, 전도사도 미워하고, 교회를 고소한다고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 왜 그랬냐? 다리 걷어!’ 하고 매를 드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 하나하나가 하나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게 무서운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모든 불의는 다 끝에 가서 전부 정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무서운 부분입니다.
어쨌든 우리를 아프게 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또한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갚아야 될 빚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힘들어도 참은 것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갚아주십니다. 그것을 의로 우리에게 주실 위로가 있습니다. 이 땅에는 참든지, 참지 않고 미래를 버리든지,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다 다릅니다.
이 세상이 너무 힘들 때에는 우리에게 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살길 원합니다. 이전에는 우리는 그저 따라오면 따라오고 아니면은 마는 것인데, 교회를 떠나고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교회고 뭐고 그냥 다 잃기 쉽습니다. 생각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은 연약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환경이 너무 어렵고, 너무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그래도 예수 믿어야 되고, 그래도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목사로서는, 한편으로는 그런 것이 저도 힘듭니다. 저는 지독하게 가난한 자에게도 “헌신해라. 다 바쳐라.” 해야 되고, 문제가 많아도 “그래도 교회에 에너지를 쏟고 섬기시오.”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더 큰 문제예요.” 해야 합니다. 당장 들에게 닥쳐올 가혹한 현실을 생각하면 저도 마음이 아프긴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저는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야 우리 전체가 조화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스피드에 맞춰서 가야 합니다. 이럴 때 ‘아, 너무 매정하다.’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어떤 환경에 있든지 힘을 내고 함께 나아가길 저는 참으로 원합니다. 저 나라에 가는 소망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갈 날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제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제 앞에 인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견뎌 가야 합니다. 망가뜨리지도 말고 소중하게 만들어서 가야 합니다.
세상에 온 자는 누구나 다 떠나는 것인데, 이 땅에 와서 주님을 만났다면 그 나머지 인생은 주님을 위해 바치세요. 남은 자손이 있고, 그들의 삶도 걱정이 되겠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 위하여 나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죽어서 자다가 딱 깨면 그 다음에 심판대로 올라가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심판대에 가면 그 즉시로 심판을 받고 그 다음에는 이제 주의 나라로 완전히 입성을 하든지,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어야 하는 삶이 시작하든지 할 것입니다. 이는 아무렇지 않게 이 세상에서 범해왔던 그런 일들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익숙합니다. ‘범해도 괜찮던데? ‘어? 괜찮네? 한 번 더할까?’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카운트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소망을 갖자, 이 세상 지나간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치 이곳을 구원하기 위한 시험대로 삼아서 ‘그래 어디 보자.’ 하시고 ‘여기서 미친듯이 그리스도 신앙에 몰두한 사람만 뽑아가겠다. 너희들 중에 제일 높은 사람만 뽑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마는, 주를 택하여 미치도록 주님을 향해 달려간 자들만 뽑기도 하겠지마는,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하려고 택하신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 분이, 저 분이 혹은 거의 대부분일 수 있습니다. 그 비율이 얼마가 될지 저는 모릅니다.
어떤 자는 여기서 시련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영원히 그의 사랑을 받을 자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정한 자인데, 오늘 교회에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부실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자기를 부르신 것이 있잖아요. 그것이 정말 갚을 수 없는 은혜 중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죽도록, 문자적으로 죽도록 사랑한 것입니다. 이 땅에 내가 나타났다면 이 세상 환경, 내 육신이 맞아야 되고, 내 정신이 스트레스를 받아야 되는 이 세상에서 내 육신이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되지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세상은 다 날 버리더라.’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택하셔서, 날 부르셔서 내가 교회에 왔습니다. 전도 받아서 왔거나, 내가 필요해서 교회에 왔는데 지금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십니다. 그의 은혜를,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그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1:3~7)
지금은 세상이 너무 힘들지만, 세상은 세상이고 우리는 삶을 견뎌가야 합니다. 부자를 보면 ‘아 나도 부자 되고 싶다. 나도 돈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다른 거 다 포기하고 저거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부유함은 그만큼 그에게 어려움이 되고, 반대로 부족한 자는 그만큼 감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어 견뎌가야 하는 것은 모두에게 일단 주어진 몫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굉장히 의로우시고 정확하십니다. 눈물을 흘린 자는 반드시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고, 악을 행한 자는 그가 엄하게 다스릴 것입니다.
모두 소망을 가지세요. 우리의 그 생명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고, 하늘에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그가 보존하고 계십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누구든지 우리 교회에 와서 누가 누구를 억누르고 경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누가 여기서 ‘내가 더 훌륭하지.’ 하면서 경쟁하는, 세상에서 보던 것, 마귀와 마귀의 사자들이 하는 그런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오면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과 관계없이도 자기 가정의 문제, 계속 씨름하고 있는 자기 문제를 내려놓고 평안하게 그가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충만함으로 어려움이 있는 자들도 교회에 와서 평안하고, 새로운 용기를 얻고 그렇게 해 가야 합니다.
요즘 우리가 찬양을 많이 하는데, 왜 매주 새로운 곡을 할까요? 우리 교회 레퍼토리를 자꾸 늘리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교회가 ‘복음송’을 엄청 많이 불렀었습니다.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이 불렀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찬송가보다 복음송을 더 많이 불렀던 주일 예배도 많았습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는 노래를 우리가 많이 불렀습니다. 예배할 때에도 ‘내게 강 같은 평화~’, ‘승리는 내 것일세~’ 계속 복음송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우리가 교회에 이제 와서 “아 복음송, 이거 나쁘다”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때 우리가 그렇게 해서 부흥했습니다.
복음송을 정말 미친듯이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빨리 간 것입니다. 당시에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아우… 뭐 저런 걸 하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트렌드가 무엇이니까? 지금은 세상이 발전하는 속도가 과거보다 훨씬 빠릅니다. 지금의 10년 간격이 과거의 30년, 40년 간격과 같습니다. 3~40년에 걸쳐 이루어낸 성과들이 이제는 10년 안에 이룰 수 있습니다. 유행이 굉장히 빠르게 갑니다. 제가 한번은 ‘그 어떤 유명한 그룹 있다면서요? 저도 그 그룹의 곡 좀 들어보고 싶은데.’ 했더니 이미 해체됐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빨리 갑니다. 누가 등장했다가도 빨리 사라집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 새로 구원해야 되는 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찾아내서 사랑해주고 힘을 얻게 해야 합니다. 수백 명이 됐든지, 수천 명이 됐든지, 아니면 단 수십 명이라도 우리 전체가 그들을 구해내고 살려주고 사랑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면 내가 손해 보지 않느냐?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원래 받고 있기 때문에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사랑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찬양도 빨리 빨리 진행해 가지 않으면, 젊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음악이 계속 나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전 세대들과는 이미 음악을 접하는 체질자체가 다릅니다. 저를 포함한 이 위의 세대들은 ‘아이고! 아이고! 곡이 너무 어렵네?’ 하는 것들도 젊은이들에게는 하나 어렵지 않습니다. ‘아유, 저들이 하는 저런 거는 경건하지 않아.’ 그것이 그들이 기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100년 전 사람들이 보면 기절할 것입니다. 요새 많이 유행하는 그런 복음송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너무 훌륭합니다. 복음송을 만들어서 세상에 다 빼앗기지 않고 그래도 영혼들 지키고 있으니까. 그들의 메시지를 보면 ‘하나님께서 나랑 함께 하신다. 예수께서 나와 공감하신다.’ 그런 노래도 있습니다. 있어요. ‘주는 내 친구’ 이런 노래가 있는데, ‘주는 내 친구’라는 복음송을 며칠 동안 없는 시간 쪼개서 하루에 한 번 정도씩 듣고 있는데, ‘이야…주는 내 친구… 이야…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이 내 친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젊은이들이 노래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라 하면 구름 위에서 위엄 있게 나타나는 모습만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권위주의적인 이미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공감 시대입니다. 지금 찬양한다고 막 땀을 흘리면서 춤을 추는데, 누가 옆에 있어서 보니 예수님입니다. 그도 같이 춤추고. 이런 식으로 되어야 된단 말입니다.
나만 달려가는 때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오늘 우리 세대에서 누구도 낙오되지 않고 힘을 얻고 새롭게 세상을 이기고 같이 도와서 일어나길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베드로전서 3:8~12)
지금 드린 말씀 그대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그저 믿음이 센 사람이 구원받고 나머지는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 기회를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을 참으로 자기보다 더 사랑하고 열광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구원받습니다. 그가 부르신 자들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름 받았을 때 신앙에 충실하시되, 세상이 어려워도 힘을 내고, 오히려 부르심 받은 이 인생을 기념적으로 여기고 삶으로 다른 영혼들 격려해 주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찬양이든 뭐든 간에, 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경스럽다!’ 하는 마음은 다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과 맞지 않는 것을 예수께서 하시니 무조건 그가 하는 것은 다 마땅치 않다고 하는 것처럼, 하지 마시고, 우리 교회에 많은 부르심 받은 자들이 나와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앞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도 이기고 자신의 삶을 교회에 주고 갈 수 있게 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도 노래 한번 결정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습니다. 어느 때는 ‘아, 이거 하면은 너무 막 어떤 성도들이 나갈 것 같은데…’ 이렇게 과도하게 겁을 먹기도 합니다. 굉장히 고민합니다. 이렇게 제가 고민하는 것을 우리 사모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 너무너무 없기에, 언젠가 우리 음악하는 팀들이 감각이 이제 나랑 어느 정도 맞으면, 결이 맞으면 그들에게 딱 맡기고 싶습니다.
저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나요? 이것은 우리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저도 세상이 힘듭니다. 음악은 왜 하느냐? 저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내용이 뭐가 됐든 간에 하나님에 관한 것이면 다 좋습니다. 그냥 멍하니 하루에 한 시간씩 찬양만 계속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멍하게 계속 반복되는 리듬 듣는 것처럼. 샤프하게 ‘여기 찬양애 말씀이 뭔가 들어보자.’ 하는 태도로 말고요. 저는 하나님으로 취하고 싶고, 하나님 곡조에 춤추고 싶고, 하나님 곡조에 노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곡조에 종일토록 편안하게 있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얻고 싶단 말입니다. 저도 노력하는 것입니다.
젊은 성도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저는 그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들을 돌보듯이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준 것이 없다.’ 그러고 떠나면 어떡합니까?
나만 목자가 아니라, 우리 여러분들도 다 하나의 작은 목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여러분이 교회를 돕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 부르신 자일 것입니다. 부르심이 안 된 자들은요, 이상하게 신앙생활 오래해도 반역하게 됩니다. 원수가 계속 그를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귀신이 가득합니다. 이상하게 자꾸 삐뚤어 나갑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걸 합니다. 왜냐면, 원수에게 완전히 잠식된 것입니다. 자기 정신을 빼앗긴 것입니다.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작년에는 신앙생활 열심히 했다’ 그러지만은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렀다면 시험을 이기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자, 세상의 환란을 이기는 자, 고난을 이기는 자입니다. 그는 부르신 것 때문에 그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보증이 되시고, 맹세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임에도 맹하세고 우리를 지키시려 합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는데,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부르신 자로서 잘 인내하며 세상을 견뎌가겠습니다. 오히려 제 사랑을 쏟아붓겠습니다. 교회에 참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의 합당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겠습니다. 나를 함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으로 이어가겠습니다. 내 친구 되신 주님, 오늘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다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정말 자기 문제를 생각하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들은 영혼들 다 도와주시고 그 마음에 정말 위로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또 보살펴 주시고 보듬어 주시고, 아무리 세상에, 육신에 속한 문제들이 있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견뎌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모든 억울한 것, 또 모든 또 상실한 것, 모든 어려움들을 다 이겨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부르심이 있사오니 부르심을 응하는 우리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하늘에서 보장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 영원한 예정에 그 하나님의 계획들이, 하나님의 꿈들이 온전히 우리 가운데 성공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살펴 주시옵소서. 종과 우리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사랑하는 마음, 정말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더욱더 훈련하고 더욱더 또 마음에 간직하여 성도들 돌보는 우리 신앙의 참된 모습, 이타적이고 진실한 마음들이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출처] 20240714 시련을 견뎌야 할 부르심 받은 성도들(베드로전서 1:3~7)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