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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연금술사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5.27~1958.2.13) 프랑스 화가
파리 출생. 마티스, 피카소 등과 함께 20세기 전반을 대표한다. 가구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내어 10세 때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4세 때부터 공예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업자의 견습공으로 일하였다. 유년시절의 경험은 후에 루오의 오묘한 색채발현에 큰 도움을 주었다.
90년 국립미술학교에 입학, 엘리도로네와 G.모로에게 사사하였다. 모로는 예술의 스승 이상으로 정신적인 선배이며 때로는 동지나 친구로서 마음의 지주가 되었다. 이것은 모로의 사후(死後:1898)에 많은 제자 가운데서 뽑혀, 루오가 '모로미술관'의 관장이 되어 스승의 유작을 관리하는 지위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는 것으로 알수 있다.
모로의 사후 루오의 시야에는 포랭과 러트렉 및 도미에가 뚜렸하게 부각되었고, 모두가 사회 비판의 경향이 농후한 화가들이었다. 또한 카토릭의 문필가 위스망스와 레온 블르와와의 교우는 루오의 종교적인 인생관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나하고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공감, 부자나 권력자를 향한 분노는 루오에 있어서의 깊은 종교적인 감정에서 유래한다.
"가령 창부를 그리는 경우 루오는 이 죄많은 여인이 풍기는 전율할 향기에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의 죄에 울고 그녀와 더불어 괴로워하는 것이다(미술사가 드리발)." 세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루오는 포비즘의 와중에 있지만 밝게 삶을 구가하는 그들과는 대극(對極)의 위치에 있었다. 루오의 신앙과 그에 입각한 예술관은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이었다.
그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는 이처럼 비합리적인 세계에서의 계시(啓示)를 어둔 밤 속에서 빛나는 별을 인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해 낼 수 없는 것의 극(極)을 다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는 까닭에 가치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야(暗夜)의 절규이며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극점에 서서 루오는 단언하기를 '구세주로서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했다. 이 동안의 소식을 여실이 말해주는 것으로 판화집 <미제레레Miserere>(1948년 발표)가 있다. 1913년 루오는 화상(畵商) 볼라르에게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금액으로 전 작품을 인수받게 되었다. 1917년에는 역시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한때 유채화를 중지하고 판화에만 전념하였으나, 이것이 일반 사람에게 공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것에서도 그가 시류(時流)에서 멀어져 가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용이하게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 화가여서, 독특한 에나멜을 칠한 것과 같은 중후한 마티에르와 농밀(濃密)한 색채로 덮힌 작품으로 완성이 될 때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1948년 볼라르의 유산 속에 들어가 있던 약 300점 이상의 작품을 재판에 의하여 되돌려 받았을 때에도, 벌써 이것들을 마음대로 가필 수정할 여력이 없다고 하여 아낌없이 태워버렸던 것이다. 판화 때문에 중단된 유채화의 제작을 다시 시작한 때는 1929년이며, 이 때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졌으나 이후 87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루오는 현대 화단에 초연한 성화상(聖畵像)의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색채와 어울려서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그림 소재는 거의 모두가 법관, 창녀, 어릿광대, 기독교인 등의 인물과 도시의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작품으로 <교외의 크리스트><재판><붉은 코의 어릿광대><베로니카> 등이 있고,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늙은 왕(老王)
늙은 와의 표정은 몹시 침통하다. 이 작품에서는 왕의 권위나 위신 등을 찾아볼 수 없다.
왕관 그리고 화려한 의상에서도 그와 같은 허영심은 없다. 마치<수난의 그리스도>나 <상처 입은 어릿광대>상과
일맥상통하는 인간상이다. 신비롭게 가라앉은 화면 처리는 마치 중세 시대의 없는 것을 보면 다시 가필하려는
작가의 고원(高遠)한 인간상을 물씬 풍기게 된다. 이 작품은 루오 인간상의 작품 중에서
작가의 정신 내부를 잘 표현한 걸작이다.
팔을 들고 있는 누드(Nu aux bras levés)(1945-1952년 사이)
종이를 덧댄 캔버스에 유채, 잉크, 파스텔 및 과슈 68 x 67,5cm, 1963년 루오 여사와 자녀들 기증
뒷모습의 누드
거울 앞의 창부(娼婦)
루오는 1902년 이후 무서운 정열로 일련의 창부들을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는 많은 나체의 창부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들의 고달픈 삶의 탓일까? 모두가 怒氣가 서린 표정들이다.
이 작품 역시 냉정한 입장에서의 사회 관찰이나 비판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노기에 찬 격렬한 고발심과 격정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단숨에 그린 수채화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드가나 로트렉도 裸婦를 많이 그렸지만
화면에서 풍기는 냄새가 전혀 이질적으로 , 루오 특유의 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의 얼굴
예수 그리스도
성안(聖顔)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도중 한 여인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 준다. 이상하게도 그 수건에
그리스도의 상이 찍혀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聖顔(성안)이라고 한다.
루오는 여러 장의 성안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파리 국립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지극히 종교적인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뇌와 인내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루오는 화가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으로 성안을 그린 것이다.
저녁 노을
성서의 풍경
성탄절 풍경
교외의 그리스도
저녁놀
루오는 1937년부터 39년까지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1920년경에 그린 <교외의 그리스도>.<성탄절 풍경> 등에
비하면 화면(色調)이 맑아졌다. 이미 그의 풍경화는 시각의 자연에서 심각(心覺)의 자연으로 변해 온 것이다.
구도나 등장되는 건물, 인물들은 물론이지만 광선 처리나 화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종교인으로서의
심각적 감정에서 솟아난 새로운 차원의 세계이다. 그리스도와 2,3명의 인물들이 노상에 서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필치, 굵은 선, 충만한 구성 등 실로 놀라운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특히
녹색조(綠色調)의 하늘 처리 등은 격조 높은 그의 품위를 말해 주는 듯하다.
그리스도교적 야경(夜景)
루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가장 우주적인 작품으로 보여진다. 구도는 아랫부분에서 윗부분으로
장대하게 울려 퍼졌고, 수 개의 원(원)과 반원(반원)의 포름이 화면 중앙부에 위치해 루오 특유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내면 세계를 표출시키는 그의 회화 언어가 그러하듯 이 그림에 등장한
배, 바다, 달, 섬, 집, 수목 등은 달빛을 받은 달밤의 자연 현상을 시각 체험대로 재현시킨 것이 아니고,
그 실체를 보는 루오의 내면적인 세계. 즉 심각적(心覺的) 진실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티베리야스 호(湖)에서의 그리스도와 제자(그림 아랫부분)가 모티브인데, 신비로운 빛과
검은 그림자 및 무한히 크고 넓은 화면이 어떤 영겁의 세계, 영원한 정신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베로니카
푸른 새
전쟁 중 연극계에서 명성을 얻은 여배우 마리아 라니가 모델이 되었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한 자세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이 미녀는 루오 자신이 화면 윗부분에 표기해 둔 바와 같이 '푸른 새'를
상징적으로 그리면서 화면을 정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새에게 노래를 시키려면 눈을 멀게 하라'는 습관이 있다. 그와 같은 속세적인 것에서 취재,
비록 새를 상징한 얼굴을 그렸지만 루오는 이를 자신의 예술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루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그의 인간상을 주제에 용해시켜 표현하였다.
우리들의 잔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나치스군대가 프랑스로 진주했다. 남달리 프랑스를 사랑하던
루오의 심정은 국민들의 추앙받는 성녀 잔느 다르크를 보다 수난 받는 인간상으로 그렸다.
배경은 이 시기에 꾸준히 그린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풍경화와 같다.
주인공은 숨김없이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조국애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란 때로는
그 시대의 증인이며 대변자가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 아름다운 조국애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이리라.
수난(受難)에서
화면에 골고다 언덕은 가운데, 그리고 좌우로 십자가가 그려 있을 뿐 언듯 보아
적적하고 음산하고 무섭다.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을 뿐...
쟉 보노무
쟉 보노무는 농민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이다. 백색 상의와 푸른 하의, 그리고 붉은 띠를 두른
이 사나이는 뒤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상반신을 약간 숙인 채로 달이 떠 있는 밤에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모든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운명이며 숙명적인 상(像)을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고독감이다. 멀리 지평선 위로 외딴 집이 한 채 서 있다.
집의 흰 벽면은 인물과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붉은 띠와 지붕이 또한
색채적인 조화를 형성하면서 한층 화면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장식적인 꽃
가을
독백록 중
예루살렘
세 명의 심판관
애굽으로의 피난
작은 배가 있는 풍경
견습공
루오의 자화상 ‘견습공’이다. 화가에게 자화상은 자신의 예술 철학을 그대로 담아내는 중요한 작품이다.
루오는 54살이던 1925년에 ‘견습공’을 그렸고, 그 해 슈발리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신성한 예술가가 아니라 노동자의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릴 만큼 루오는 서민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고,
또 강조하고 싶어했다.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에서 유리에 자주 손을 베며 일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성공한 화가가 되어 자화상으로 그려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