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대신 할 수 없었다. (폐암선고) // 치료후기
폐암3기b라는 선고를 받고 2005년 5월17일 수술을 한지 이제 8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59세 키 1.76m의 몸무게 82kg 건강한 남편이었으나.
담배를 36년쯤 피던 남편은 어느 날 벼락같은 소리들 들었습니다,
아들딸 두 자녀를 둔 아버지로써 두 자녀모두 결혼시켜 홀가분하던 때 먹는 것은 여느 때보다 더 많이 먹는데도 별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는데도 몸무게는
오히려 줄고 살이 빠져 가벼워 좋다고 3개월 만에 몸무게는 73kg 되었으며 수술할 당시는69kg 이었습니다.
앉았다 일어서는 순간 갑자기 쓰러질번한 현기증에 일하다 돌아온 남편은 해마다 엑스레이 찍던 병원에 다녀오더니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개인병원 원장님 말씀이,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이튿날 가깝게 있는 보라매병원에 12일후 5월4일 입원예약을 하고 그 날짜에 일찍 갔으나 입원한 환자가
늦게 퇴원 하는 바람에 겨우 저녁에서야 입원을 하게 되었고 이튿날은 어린이날 그리고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라서 들어가던 날 에스레이 한 장 찍어 보는 것으로
더 검사나 진료가 진행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급한 환자 숨 넘어 갈 지경에 이르자 환자 옷으로 가라 입을 무렵 보라매병원의사님께서 그날 찍은 에스레이 보고
의사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 이 환자는 너무 급한 환자입니다. 지금이라도 의사선생님을 잘 선택하여 빨리 수술 받으 면 살릴 수 있는 환자라고 말씀해주시더니.
― 빨리 안하면 2개월 밖에 못산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서는 아무리 빨라도 수술까지는 며칠이 걸린다고 빠른 길을 알아보라고―
이 말을 듣고 난, 허둥지둥 어렵게 입원한 입원실에서 즉시 나와 일산 국립암센타로 갈 생각으로 접수를 하고 수소문 끝에 잘 아는 지인에 알선으로
사흘 후 월요일 입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한 징후가 보인다고 하여 보라매병원입원 예약하고 12일 동안 자녀들한테 알리지 않고 기다린 시간도 길었지만 일산 국립암센타로 결정하고
기다리던 사흘이 더 긴 시간이었고 놀란 자녀들은 울며 인터넷에 올라온 좋은 정보란 정보는 모두 복사를 해오고 난리었습니다.
그러나 일단,국립암센타에 입원하던 날 이미 병을 다 고친 것 처럼 맘이 놓이고 편안했습니다.
차분하게 검사들 맞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수술 준비를 하는 동안 집으로 돌아와 집안 정리라도 하듯 평소 아끼고 주어오던 이런저런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고 죽을 준비라도 하듯 채무관계를 부탁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수술실로 들어가자 본인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더욱 슬펐을 것입니다
5시간 이상 걸려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나 가족들의 얼굴이 다시 볼수 있었던 순간
아! 난 이제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을 지금도 가끔 이야기 하곤 합니다.
그렇게 수술하고 항암주사 4차례 받으라는 것을 한 번 만에 기침과 가래가 더 많아 지고 아주 힘들어 했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항암 주사 맞으러 가는 날 항암이 오히려 해가 될까 우려 돼 한 달 뒤로 미루는데 몸이 따라 주지 못하니
항암주사를 맞을 수 없답니다, 다른 처방 약을 들고 약을 먹어도 기침과 가래는 차도를 보이지 않고 심해서 다시 병원응급실에 가야 했습니다.
이렇듯 오라는 날짜에 병원에 못 가고 언제나 하루 이틀 먼저 응급실에 실려 갔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다시12일 입원하여 항생제를 계속 투입하고 많이 좋아져 퇴원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조금씩 산을 찾았고 좋은 공기를 마시려 공기 청청기를 아들이 사와 사용도 하고 늘 산에 갔었습니다. 여러 가지 고충도 많았지요.
그때 아직 시부모도 함께 살고 계신 터라 멀리 좋은 곳을 찾아 시골에 가서 묻혀 있을 수도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울 집을 떠나지 않고 아침 먹고는 산으로 가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산을 잘 다니지 않던 제가 산을 다니면서 깨달은 것은 서울서도 얼마든지 다닐 산이 있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론 전철을 이용하고 때론 자가용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항암주사에 대해서는 기침 치료 끝나고 다시 맞으려 했으나 의사 선생님께서 이제 항암 주사는 맞을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 말도 황당하게 들렸지요. 그마저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나쁜가 하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여 보니 이해가 갑니다.
항암주사는 쉬었다 맞으면 효과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서 항암주사도 딱 한번만 맞고 그만두었지요.
항암주사란 한번 맞으면 연이여 맞아야 효과가 있다 하셨습니다.
주기적으로 검사와 진료 받을 때 마다 순간순간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위기를 넘겼습니다.
1년 동안을 거의 매일 아침이면 도시락 싸가지고 도봉산/수락 산/관악산/ 삼막사/ 중턱에나 갔을까
할 정도로 가서 그냥 돗자리 깔고 쉬다 오후 4시나 5시면 집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산에 가면 제가 따라 다니기 힘들 정도로 남편은 정상을 찾아 가고 있었습니다.
지방에 근무 하던 아들도 휴일만 되면 우리를 데리고 교외로 나가려 노력했고 그런 세월이 4년쯤 되니 걱정하던 자녀들도 조금씩 잊혀 가나 봅니다.
먹는 것은 평소 먹는 대로 먹었으며 옥상 농장을 꾸며 야채는 손수 길러 먹는 편이고 먹고 싶은건 먹고 평소와 같았습니다.
민간요법에 의해 좋다는 건 이것저것 많이도 생겼지만 하나도 먹지 않았습니다.
-(예을 들면(꾸지뽕나무기름/상황버섯/민들레/뽕나무뿌리와 나무/꾸지뽕나무/인삼/ 참 많았습니다)-
오로지, 의사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고루 한식의주로 잘 먹습니다.
이렇게 회복하면서 소중한 시간들이 흐르고 수술하던 이듬해 여행해도 괜찮다고 하여 환갑여행 금강산 갈 때도, 미국에 공부 하러 간 딸 보러간다고
그랜드캐년 여행 할 때도 늘 조바심 속에 살다가 이제 5년을 지나고 8년쯤 되니 요즘 며칠간 서해안 섬들 남해안 땅 끝 마을 까지 일주일간 여행 하면서도
옆에 있어 행복하고 항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서 벗어나 소중한 시간을 보내며 담배도 끊어 깨끗해진 남편을 보니 암환자였다는 꼬리는
붙었지만 예전보다 건강한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지금은 폐암5기극복자라고 폐암으로 유명해진 저의 남편은 국립암센터자조모임으로도 자주 불러주셔 고맙고 잦은 외식도 하며
요즘 1년에 한번 건강 진단 하고 지내며 언제 암 환자였던가 하는 마음으로 살아 갑니다.
살면서 아프지 않은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산다는건 아픔을 이기는것이겠지요!
이렇게 폐암이란 암을 잘 이기고 즐겁게 사는데,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저를 만나면 아직도 먼저 남편 건강을 묻지요!
그러면, 병원을 잘 선택하여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수술한 덕분에 새 생명을 찾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암이란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이지만 수술하거나 치료 받으면 살수 있다는것을 일깨워준 산 증인입니다.
아픔을 대신 할 수 없어던 폐암 환자 0 00 -아내 실명 심순이글- 카메오
첫댓글
그동안 얼마나 조마조마 하게 사셨겠어요
너무나 고생하셨고 축하드립니다 ~~~
어떤 과정과 노력을 통해 나으셨든 나으셨다는 소식은
슬픔을 겪고 있는 암환자분들에게 희망일 것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
고은이님도 친정 아버지로 마음 고생이 많으신걸 보니 무어라 위로에 말을 전해야 좋을지요.
아무튼 모든것이 잘 견디고 완치 하시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행복을 빕니다.
무향님도 그때 그 무렵이었지요.
대명을 보고 느낌으로 알수 있었습니다.
건강하세요!
축하합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감사합니다.
카메오님 축하드립니다.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수술과 항암 이후 재발없이 깨끗하시다니 기적이라는 말이 적합하군요. 그렇게 되도록 관리도 잘 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희망적인 글을 올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누구보다도 다비드님의 꼬리글을 기다렸답니다.
david님 건강하시죠?
참 오랜만에 카폐에 찾아와 글을 올리는것도 쑥스러웠지만 david 님께 알리고 싶었서 였지요.
직접 뵙지는않았지만 내가 힘들때 님은 희망의 글을 주시였지요.
모두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았으면 소망합니다. ^^*
카메오님 너무 너무 수고 하셧어요~~~~~~~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 하시길 바라옵니다~~~~~~~~
제 동생도 행운이 함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군요^^
우선축하드리며암환우들에게희망찬글이기에저도힘내어봅니다두분오래도록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