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 2℃만 내려도 1백50살까지 산다
원자마저 얼어붙는 극저온의 세계에 새생명의 온기를 불어넣는 저온생물학이 냉동인간 부활의 꿈을 키우고 있다. 정자와 난자 등의 세포는 물론 최근 여성의 난소도 냉동시키는데 성공했다. 인간의 세포는 극저온에서 어떻게 변하며, 냉동인간의 부활에는 어떤 걸림돌이 있는지. 영하 1백96℃의 서늘한 저온생물학의 세계로 가보자.
사랑하는 마음을 채 전하지도 못했는데, 애인이 그만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젠 그녀를 그만 잊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날텐가, 아니면 의식불명의 그녀 곁에서 못다한 사랑을 마저 불태울 것인가.
웬 느닷없는 사랑타령인가 하겠지만 영화 ‘Forever Young’(한국 개봉명은 ‘멜 깁슨의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다니엘은 똑같은 상황에서 냉동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런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다니엘은 59년 후 냉동인간에서 깨어나 시간의 굴레를 뛰어넘는 사랑을 다시 하게 된다.
만약 냉동인간이 가능하다면 미래에 살고자 하는 인류의 희망은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진시황이 꿈꾸던 영원한 삶도 가능할 것이며, 불치병으로 한평생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억울한 죽음도 더이상 없을테니 말이다.
부동액 체계 갖춘 개구리
그렇다면 냉동인간은 정말 가능할까. 영화 ‘데몰리션 맨’이나 ‘에일리언’에 나오는 황당하고 썰렁한 냉동인간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타당한 진정한 냉동인간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냉동인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먹이와 기온이 모두 떨어지는 겨울이 오면 동물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따뜻한 곳으로 옮겨가거나 살던 곳에서 버텨야 한다. 철새가 옮기는 쪽이라면 무당벌레와 개구리, 뱀, 박쥐, 다람쥐, 곰 등은 잠으로 겨울을 넘기는 쪽이다. 동면할 때 동물들은 신진대사를 죽음 직전까지 끌어내린다. 몸 속에 비축한 지방을 조금씩 태우면서 미미한 심장박동과 호흡을 이어간다. 보통 체온은 주변 기온과 비슷한 2℃까지 낮아지고, 심장박동 수는 평소의 2-10%까지 줄어든다.
기온이 떨어지면 대부분의 동물세포는 치명적 피해를 입는다. 세포의 70-90%를 차지하는 물이 얼면서 세포 내 소기관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면동물은 얼음결정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특별한 장치를 갖고 있다. 개구리는 몸 속에 정교한 ‘부동액 체계’를 갖췄다. 겨울철 자동차에 부동액을 넣듯이 동면에 들어가기 전 먹이를 많이 먹어둠으로써 포도당(글루코오스)을 혈액 속에 다량 넣는다. 세포의 어는점을 낮추기 위해서다.
사람이라면 혈액 속의 포도당이 2배만 돼도 당뇨병에 걸리지만 개구리는 2백50배까지 견딘다. 최근 미국 과학자가 밝힌 연구결과에 의하면 개구리는 몸이 더워지면 치사량의 혈중 포도당을 재빨리 방광으로 모은 다음 조금씩 간으로 보내 무해한 글루코겐으로 바꿔 혈액으로 내보낸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동면동물의 부동액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옷을 두텁게 입어야 한다. 만약 인간의 체온이 35℃ 이하로 떨어지면 ‘저체온증’(hypothermia)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심장과 폐, 뇌의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27℃ 이하가 되면 부정맥이 유발되며, 25℃ 이하가 되면 심장이 정지해 겉으로 보기에는 사망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태를 계속 방치하면 맥박이 느려지고 호흡이 감소하며 혈압이 저하돼 결국 사망한다.
10℃에서 90분 냉각시킨 일이 최고
이렇듯 인간은 저온에서 살 수 없도록 설계됐다. 왜 저온에서 살 수 없는 것일까. 저온에서는 어떤 생물학적 현상이 나타나며 세포와 조직, 기관은 어떤 변화를 겪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이 바로 ‘저온생물학’(cryobiology)이다. 저온생물학의 가장 큰 관심은 물론 인체의 냉동이다.
저온생물학이 내놓은 최신의 연구결과는 지난 2002년 미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개를 2℃에서 4시간 동안 냉각시킨 뒤 다시 살려낸 일이다. 붕어의 경우 급속냉동시켰다 녹이면 다시 살아난다고 알려져 있으나, 포유동물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간의 경우 10℃에서 90분간 냉각시킨 것이 최고라고 한다. 이보다 온도가 내려가거나 냉동기간이 길어질 경우 세포와 조직이 파괴돼 해빙 후 원상복구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냉동인간의 부활은 아직 우리가 바라는 미래의 일이지만 세포와 조직을 냉동시켜 영구적으로 보관한다는 개념은 오늘날 의학 분야에 널리 응용되고 있다.
세포나 조직을 냉각시키면 신진대사가 떨어져 산소요구량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적은 양의 에너지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러시아의 생화학 물리연구소는 지난 6월, 인체의 온도를 낮추는 실험을 실시한 뒤 그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연구소의 류드밀라 소장은 “사람의 체온을 2℃ 정도만 내리면 인체의 대사율이 줄어들어 인간의 평균수명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1백20-1백50살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론적으로는 액화질소가 만들어내는 영하 1백96℃에 도달하면 에너지 요구량이 0에 육박하므로 생체는 늙지 않고 무한정 같은 상태를 지속할 수 있다. 심장과 대동맥질환 수술 때 쓰이는 초저체온 수술이 대표적 사례다. 이 경우 체온을 11℃까지 냉각시켜 인체의 신진대사를 떨어뜨린다. 냉각의 대가로 1시간 남짓 심장박동을 멈출 수 있어 수술부위로 혈액이 흐르지 않게 되므로 이 시간 동안 의사는 피범벅이 되지 않고 수술을 깨끗이 마칠 수 있다. 초저체온 수술법은 현재 서울중앙병원 흉부외과 송명근 교수팀이 62명을 수술해 60명을 완치시킬 정도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세포를 넘어 난소 조직까지 성공
냉동인간은 현재 미국의 알코르 생명연장재단과 크라이티요 스팬 등 수십여개의 냉동전문회사의 지하 냉장고에 영하 1백96℃로 저장돼 있다. 이들 대부분은 암 등의 불치병을 앓다가 치료법을 찾지 못해 죽은 뒤 냉동한 시신들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불치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개발된 뒤 깨어나기를 바라는 이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최근 생체를 얼리고 녹이는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냉동인간의 소생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세포 수준에서는 이미 정자와 난자, 수정란 등이 불임전문클리닉 등을 중심으로 성공적으로 냉동되고 있다. 이제 냉동인간에 대한 꿈은 세포수준을 넘어 조직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금까지 개발된 세계 최고의 생체 냉동기술은 사람의 난소를 얼려 보관한 뒤 이를 다시 이식해 임신하도록 하는 수준이다.
이는 을지의대 산부인과 불임센터의 김세웅 교수팀이 올 6월에 일궈낸 것이다. 김 교수팀은 지난 2002년 4월 쥐의 난소를 냉동해 이를 다른 쥐에 이식하는 실험을 성공해 ‘네이처’에 게재한 뒤 또다시 이같은 결과를 이뤄냈다.
김 교수팀은 자궁경부암으로 항암치료와 자궁적출술을 받은 장모씨를 대상으로 냉동난소조직 이식술을 시행한 결과, 정상적으로 난소 호르몬이 분비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냉동난소조직 이식술이란 항암치료로 난소 기능 상실이 우려되는 여성 암환자를 대상으로, 치료 전 환자의 난소 조직을 떼어내 냉동보관했다가, 암 치료가 끝난 후 환자의 난소 조직을 재이식, 난소 기능을 되살리는 치료법이다. 이 방법은 여성의 난소 호르몬 기능을 재생하므로 이론적으로 임신까지 가능하다. 국내에서 냉동 난소조직을 이식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전 세계적으로는 미국, 영국 다음 세번째다.
항암 치료는 난소 등 생식세포의 기능을 파괴한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가임여성이 항암치료를 받을 경우 여성으로서의 생물학적 특징을 포기해야 했다. 물론 치료 전 환자의 난자를 채취해 냉동시켜 놓으면 ‘임신 불가능’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난소에서 분비되는 여성호르몬의 경우는 어쩔 수 없었다. 난소 기능이 파괴된 환자는 여성호르몬 부족으로 인한 갱년기 증상에 시달려야 했다.
연구팀은 지난해 자궁경부암으로 진단된 환자의 난소를 떼어내 영하 1백96℃에 냉동보관했다. 난소는 정자나 난자에 비해 매우 큰 조직이므로 이를 통째로 얼리면 소생률이 너무 낮다. 다행히 난소에서 난포(난자의 초기 세포)와 여성 호르몬을 분비하는 세포는 난소의 피질(겉껍질)에 존재한다. 이에 따라 떼어낸 난소 중에 피질 부분만 발라낸다. 이를 다시 얼리기 적당한 크기로 조각낸 다음, 일종의 부동액인 동결억제제로 처리한다. 이렇게 준비된 난소 절편을 영하 39℃까지 서서히 얼린다. 이 온도 이하에서는 얼음결정이 생성되지 않아 급속히 얼려도 상관없지만, -39℃까지는 얼음결정이 생기지 않도록 분당 -0.3℃씩 서서히 온도를 내린다.
김 교수팀은 이렇게 냉동된 난소 조직을 항암치료가 끝난 환자에게 다시 이식했다. 환자는 난소 이식술 10주가 지난 후부터 갱년기 증상이 없어졌고, 14주부터 여성호르몬, 황체 호르몬 등 난소에서 생산되는 각종 호르몬 분비가 확인됐다. 이식 24주부터는 초음파검사 등을 통해 자연배란이 일어나는 것도 확인됐다.
또다른 윤리문제 잉태
현재의 저온생물학 기술은 1948년 인간의 정자를 최초로 냉동하는데 성공한 이래, 크기가 가장 큰 세포인 난자에 대해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후 50여년의 세월이 흘러, 세포 수준을 넘은 강낭콩 크기 만한 난소조직까지 냉동시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이보다 수백-수천배 큰 점을 감안하면 통째로 얼린 뒤 되살리는데는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짐작하기 힘들다. 김 교수는 “육안으로도 겨우 관찰할 수 있는 난자의 경우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소생 성공률이 매우 낮다”며 “이런 수준의 기술로 얼려진 냉동인간이 깨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한편 냉동인간은 기술 개발과는 별개로 윤리적 반발도 불러오리라 예상된다. 냉동시킨 사람이 나중에 살아난 경우 친인척 사이에 연배 혼란이 생길 수 있고, 또 설령 깨어난들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정립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뇌만 냉동보관하는 경우 뇌세포에서 체세포복제기술로 몸을 만들어내야 하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어쩌면 냉동인간은 최근의 생명복제기술처럼 또다른 윤리적 문제를 잉태하고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처 : 국립중앙과학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