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한산도의 밤
이순신(李舜臣)
바다에 가을빛 저무니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아가네
근심으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밤
지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
閑山島夜吟(한산도야음)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驚寒雁陳高(경한안진고)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역사이야기]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조선 선조 때이 명장으로 시호(諡號)는 충무공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명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빼어난 한시와 시조 작품을 남겼으며 임진왜란 기간 동안 쓴 일기체 형식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겼다. 저술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다.
충무공은 서울 건천동(현,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선조 9년(1576)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선조 19년(1586) 국방력 강화를 위해 병력 증강을 요구했으나 당시 북병사 이일(李鎰)에 의해 거절되었다. 그해 가을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자, 충무공 홀로 이들과 맞서 싸워 포로 된 동포 60여 명을 구했다. 이일(李鎰)은 피해 책임을 이충무공에게 돌려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무죄로 판명되어 해임에 그쳤다.
충무공은 47세에 전라좌도수군 절도사가 되어 수군을 훈령하고 거북선을 제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에 패한 원균의 요헝으로 적의 수군을 도처에서 격파했는데, 특히 한산도와 부산포 전쟁의 공로로 인해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후 충무공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원균의 시기와 일본군의 이간책으로 선조 29년(1595) 2월 서울에 압송되어 고문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정탁(鄭琢)의 반대로 사형에서 면제되어 권율(權慄)의 휘하에 백의종군했다.
정유재란 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니 배는 고작 12척이 남아 있었다. 8월 15일 명량(鳴梁)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명나라 진린(陳璘)의 수군(5,000명)과 합세하여 위용을 떨쳤다. 11월 18일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적을 섬멸했으나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으니 그때 나이 54세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 녹훈되고,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이 더해졌다.
오늘까지 잊히지 않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시조는 전장에 임한 이순신 장군의 심사를 헤아리게 한다.
“한산섬 닭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끊나니”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