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함의 감정을 다스리는 사도 바울의 태도
디모데후서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찬송가 314장(내 구주 예수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서 아들처럼 여기며 그의 사역에 늘 변함없이 충성되어 힘이 되어준 디모데에게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는 디모데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이 진하게 묻어나는 고백들이 종종 나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말씀 4장 9절 말씀에 보면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는 말씀을 썼는데, 다시금 21절에 보면,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또 다시 당부합니다. 자기의 죽음을 직감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고 싶은 얼굴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그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아들 같은 디모데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운 디모데에게 이런 저런 마음의 있는 바 여러 응어리도 털어놓습니다. 동역자 데마가 세상으로 다시 떠난 이야기도 이야기하고 다른 동역자들이 다들 사역 때문에 멀리 떠나서 자기 곁에 오직 누가만 함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의 마음의 허전함, 외로움이 넌지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그런 중에 사도 바울을 심히 마음에 괴롭혔던 에베소교회의 사람 알렉산더에 대하여 디모데에게도 주의를 줍니다. 에베소교회에서 계속하여 사도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며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알렉산더를 디모데도 역시 사역 중에 조심하라면서 주님께서 그 행한 대로 알렉산더에게 갚아주실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다른 이들에게 섭섭함의 응어리가 있다는 점도 디모데에게 숨기지 않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가 재판하는 재판정에 증인으로 나서줄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그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당시 로마의 대 화재를 일으켰다고 누명을 덮어 씌우고 사도들이 그러한 일을 부추겼다고 하면서 체포령을 내려서 사도 바울도 잡혀들어갔던 것입니다. 아마도 재판정에서 로마 당국은 사도 바울을 향하여 고발하면서, 그가 신도들을 부추겨서 로마 공권력에 저항하라고 부추겼다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불로 심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을 두고서 기독교인들에게 사도가 로마를 불 질러 태우라고 사주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주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가 세상에 다시 올 것이며 그를 섬겨야 하며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된다는 것을 곧 로마 황제에 대한 불복의 뜻을 가르친 것이라고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입장에서 로마 당국의 이러한 고발이 근거 없는 것이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로마의 공권력을 항상 존중하는 설교이며 종말의 심판이 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임금과는 차원이 다른 장차 온 세상에 오실 영적인 왕이라는 점을 설교한 것이라는 것을 대변해줄 증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엄중했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무조건 잡아서 처형하던 네로 황제 시대였기 때문에 주의 종들이 사도 바울의 재판정에 증인으로 나서는 것을 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첫 번째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에 곁에 있었던 동료들이 두 번째로 체포되어 재판정에 섰을 때에는 그러한 정치 종교적 박해 상황 때문에 다들 바울 곁을 떠나 멀리 있게 되니까 그만 사도의 마음속에도 섭섭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마음의 섭섭함을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나누었지만 그렇다고 그 섭섭함 때문에 그 동료들에게 허물을 돌리기를 원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을 삭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사역하면서 섭섭한 일을 적지않게 당한 적이 있다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난 후에 에베소에서 사역할 당시에 보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베드로 사도를 추종하고 청년 사역자 아볼로를 추종하면서 사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을 전혀 모르던 시절에 그곳에 도착하여 몸부림치면서 교회를 세웠고 그들에게 믿음의 촉매제 역할을 했고 많은 은사를 그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베푸시는 데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아버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을 믿음으로 낳은 영적 부모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은 정작 자기를 낳아준 부모는 몰라라 하고 몇 개월 정도 건너와서 그들을 가르쳐준 영적 스승들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사도 바울은 사도도 아니라고 말하는 불손함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섭섭함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을 원망만 하지 않고 직접 디모데도 보내고 디도도 보내고 편지도 여러 통 써 보내고 사도 바울 자신도 직접 가서 설득하면서 그들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표현하며 가르쳐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다시 되돌렸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 개인에 대한 애정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애가 탄 때문이라기보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를 그들이 붙들지 아니하여 그들의 영혼이 위험할까 염려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섭섭함도 클 수 있었지만 미숙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한결같이 계속하여 사랑을 쏟았습니다. 사도의 이런 태도가 담긴 고백이 고린도후서 12:14,15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은혜를 모르고 감사치 아니하며 가르침을 줘도 잘 듣지 않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애가 타면서도 끝없이 사랑을 베풀고 베풀며 그들을 위하여 끝까지 그 자신을 온전히 허비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그렇게 그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들로부터 사랑을 덜 받을지 몰라도 사도는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이 한량없이 조건없는 사랑을 계속 베풀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다른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도 섭섭함을 표현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이나 가이사랴나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예루살렘 사도들이 그에 대하여 아무런 위로의 교제를 베풀지 않은 것 같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일체 섭섭한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과 믿음과 신뢰와 헌신을 바친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섭섭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게서, 형제에게서, 부모님에게서, 친구에게서, 동료에게서, 믿음의 교우에게서, 서운한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상대방에게 자꾸 섭섭함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섭섭하다, 섭섭하다”라고 말로 표현하면 그것 때문에 관계가 더 어색해집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섭섭한 일을 만날 수밖에 없는데, 그 때마다 섭섭함을 일일이 풀지 말고 그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가지고 나와 그와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섭섭한 마음을 주님과 함께 나누시고,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허물을 그 사람에게 돌리지 말고 탓하지 말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주님께서 알아주시면 족하다”라고 생각하고 툴툴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섭섭함을 계속 속에 품고 있으면 속이 상하고 마음에 미움이 생기고 앙금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주님께 내어놓고 툴툴 털어버리고 나의 모든 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과 기쁨을 가지고 힘차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계속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앞으로도 우리에게 섭섭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이 섭섭함을 사도 바울처럼 잘 다스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위에서 부르시는 푯대를 향하여 기쁨으로 사랑으로 달려가는 저희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