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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목차
1. 개요
2. 생애
3. 작품
4. 어록
5.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화가. 생전에 말이 없어 ‘침묵의 화가’로 불렸다. 면포나 마포 위에 2~3개의 청다색 또는 검은색 기둥을 세운 그림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28년 4월 12일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356번지에서 아버지 윤용한과 어머니 서임득 사이에서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예와 사군자를 즐긴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주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미원금융조합 서기로 입사하여 잠시 근무하였으며, 화가가 되기 위해 1947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부에 진학하였다. 이후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이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으며, 1949년에는 반체제 시위에 참여했으나 이 때문에 중부경찰서에 42일간 구류되었고 서울대학교로부터 제적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에는 대학교 시절 전려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하였다.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 장발이 시위 전력이 있는 사람은 복학할 수 없다고 공표하였는데, 이에 홍익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부임한 김환기의 도움을 받아 홍익대학 미술학부 회화과 서양화전공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청주여자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했으나, 이승만 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가 부당한 발령을 받고 사직하였다. 1956년에는 6.25 전쟁 중에 피란가지 않고 서울특별시에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1957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0년에는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하였다. 1967년부터 홍익대학교 강사로 근무하였다.
유신 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 권력자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한 재벌가 딸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그가 즐겨 쓰던 '베레모'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것과 닮았다는 명목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된 뒤 한 달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이 때를 경험한 후 같은 해에 만 45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작품 제작을 시작하였다. 조각가 최종태는 이 날을 회상하면서 “숙명사건이 아니었으면 윤형근 선생이 그림을 안 그렸을지도 몰라요. 그 사건 이후 10년의 유신 시절 동안에 윤형근의 그림이 만들어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밝은 색채가 아닌 전형적인 ‘검은’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때 그려진 작품들은 나중에 그의 대표작이 된다. 수묵화의 농담에서 물감이 번지는 느낌을 두 개의 기둥으로 표현한 단색화가 바로 그것. 이는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땅을 상징하는 암갈색을 혼합한 색인 '청다색'을 큰 붓으로 내려 그은 것이다. 내려 그은 두 기둥 사이에서 문이 생기는데, 이것을 '천지문(天地門)'이라고 이름지었다. 심연으로 빠져들어갈 듯한 묵빛이 여백과 대조를 이루며 묘한 한국적 정서를 이끌어낸다. 한국 전통 가옥이나 고목, 흙을 연상시키는 이미지 속에서 오랜 세월 억압당했던 그의 감정이 스며나온다.
“낙엽이 다 지고 나목의 숲속에 산비탈에 거목이 넘어져서 썩어가는 것을 봤다. 한쪽은 이미 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그 빛깔은 흙 빛깔과 다름없었다. 그 나무가 쓰러진 것으로 보면 꽤 오랜 세월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숙연해졌다”
윤형근의 일기 중에서..
197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앙데빵당전’에 ‘다색과 청색 No.39’ 등을 출품했다. 이 때 한국을 방문한 조셉 러브(Joseph Love)가 이 작품들을 감명깊게 보고는 일본에 돌아가 도쿄화랑 야마모토 타카시(山本孝)에게 윤형근을 소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7년 8월 도쿄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단면전’에 출품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접했을 때는, 쓰러지는 인간 군상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 당시 작품들을 살펴보면, 쓰러진 기둥들이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똥이여, 사람들이 픽픽 죽어가는데 예술이 다 뭐 말라죽은 거여”라고 한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80년 12월 대한민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갔다.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제작된 후기 작품들은 그 전 작품들과 비교해 한층 간결해졌다. 특히 1991년 미니멀 아트의 대가인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의 만남 이후로 윤형근의 작품들은 더욱더 극단적인 단순함을 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 어떤 단호한 확신마저 보이게 된다. 색채는 검은색의 미묘한 변주가 사라진 채 '순수한 검정'에 가깝고, 물감과 함께 섞었던 오일의 비율도 줄어들면서 화면은 건조해졌다. 형태와 색채, 과정과 결과가 더욱 엄격해지고 간결해지지만, 순수한 검은색 앞에서 관객은 왠지 모를 심연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생전에 그의 화풍이 '추사 김정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그림을 보다보면, 고매한 인격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 여겼던 옛 선비정신이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테이트 모던과 시카고아트인스티튜드, 독일 로이틀링겐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1984년 경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1988년 경원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 10월 20일부터 1992년까지 제2대 경원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였고, 1992년 퇴임하였다.
2007년 12월 28일 오후 3시 40분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3. 작품
<청색>,1972
윤형근의 ‘블루(청색)’(1972)
<청다색>, 1973
<청다색>, 1976
<청다색>, 1977
윤형근, Umber Blue E77#41, 1977
<다색>, 1980
<드로잉>, 1981
<다색>, 1988
<청다색>, 1999
4. 어록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피상적으로 표피가 알록달록하고 빛깔이 곱고 뭐 이런 게 아름답다고 난 생각 안해.
진리에 사는 것, 진리에 생명을 거는 거.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진실한 사람은 착하게 돼있고, 진실하고 착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아름답게 되어있어.. 그것 뿐이예요.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 그 사람 사생활은 어찌 돼도 좋다' 이렇게 볼지 몰라도
인간이 바로 서야..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그대로 반영되는 거에요.
한 두장은 거짓말해서 이렇게 만들 수 있어도.. 쭉 계속하다 보면 그 사람의 품위가 나타나는 거예요.
가장 높은 품격을 가진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 중에서..
5. 여담
김환기는 '푸른 하늘'의 색을 주로 그렸다면, 윤형근은 '묵빛(청다색) 땅'의 색을 그렸다고 평가받는다.
2018년 국립 현대 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있었고, 2019 베니스 비엔날레와 함께 베니스시립미술관에서 7개월 간 전시가 열렸다.
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침묵의 화가 윤형근
한국 추상미술 거장
미디어전략팀 기자cbnews365@naver.com
충북일보 웹출고시간 2024.01.04 16:31:22, 최종수정2024.01.04 16:31:22
청주에는 작가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 아직 없다. 앞으로 생긴다면 1순위로 거론되는 작가가 윤형근(1928~2007)이다. 그 정도로 그는 우리나라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다. 그는 면포나 마포 위에 2~3개의 청다색 또는 검은색 기둥을 세운 단색화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는 청주 원도심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미원면 어암리에서 태어났다. 친구의 주말농장이 어암리에 있어 몇 번 가봤는데 산자가 수려하고 윤씨들이 많이 몰려 사는 동네였다.
윤형근 화백은 청주상고(현 대성고)를 다니며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미술교사 안승각(청주교대 교수 역임)의 지도를 받는다. 그가 다닌 청주상고는 상업계열학교면서 특이하게 미술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박노수(한국화가·서울대 교수), 김봉구(조각가·이화여대 교수), 정해일(서양화가·청주교대 교수), 박영대(한국화가·백석대 석좌교수), 이석구(국전대통령상 수상·공주대 교수), 풍속화가 이서지, 신용일(직지화가)등 수많은 작가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
윤 화백이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면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역사와 맞물려 있다. 그의 삶에는 가슴 아픈 한국 근현대사가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청주상고 졸업 후 잠시 미원금융조합에서 일하다가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 화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이 때 면접에서 면접위원이자 인생의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은 후에 장인이 된 김환기 교수다.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장인과 사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냈다고 한다.
미 군정이 일제강점기에 있던 여러 단과 대학들을 통합해 국립서울대학교를 만들겠다(국대안)고 발표하자, 통폐합 대상 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2년간 격렬히 반대 시위를 한다. 윤형근도 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당하고 만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에는 대학시절 시위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갔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서울대 복학을 원했으나 시위 전력 있는 학생들은 복학을 시켜주지 않았다. 홍익대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 교수의 도움으로 홍익대 서양화과에 편입해 졸업한다. 1956년에는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했다. 졸업 후에는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청주여고 미술교사 생활을 하며 이승만 정권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눈밖에 나 부당한 발령을 받자, 사직하고 만다.
그 후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있을 때도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는다. 당대 최고 권력자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비호로 부정 입학한 재벌가 딸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즐겨 쓰던 '베레모'가 레닌의 것과 닮았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세파에 시달릴 때로 시달린 윤형근은 1973년(45세)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제작에만 집중한다. 조각가 최종태(1932년생, 서울대 교수)는 "숙명여고 사건이 아니었으면 윤형근 선생이 그림을 안 그렸을지도 모른다"며 "그 사건 이후 10년 유신시절 동안에 윤형근의 그림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숙명여고 사건 이후 그의 작품은 밝은 색채가 사라지고 검은색 위주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를 볼 때 시대의 수레바퀴에 밟힌 것이 개인적으로는 많이 억울하고 아픔이 있었지만 회화사로 봐서는 걸출한 대가를 하나 배출하는 계기가 됐다고도 볼 수 있겠다.
윤형근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에서 아름다움을 논한다. 그는 "피상적으로 표피가 알록달록하고 빛깔이 곱고 뭐 이런 게 아름답다고 난 생각 안해. 진리에 사는 것, 진리에 생명을 거는 거.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진실한 사람은 착하게 살게 돼있고, 진실하고 착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아름답게 돼 있어. 그것 뿐이예요.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 그 사람 사생활은 어찌 돼도 좋다' 이렇게 볼지 몰라도 인간이 바로 서야….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그대로 반영되는 거에요"라며 작가의 인격이 훌륭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미술과 교수 중 종합대학교 총장을 한 사람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홍익대학교 총장을 한 이대원 화백(경성제대 법학과 출신)이고, 또 한 명은 오늘 얘기하고 있는 경원대학교 총장을 한 윤형근 화백이다.그 흔한 대학원도 안 나온 학사 학위 출신이 대학 총장을 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윤 화백의 일생을 살펴보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항거하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말과 행동에 진심이 드러난 인격자였기에 대학의 최고 자리인 총장으로 추대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들이 많은 관람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6·25전쟁 때 잠시 피난 와 살았다는 것을 스토리텔링해 제주도 서귀포에 세워진 '이중섭 미술관', 동백림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도 인연이라고 대전광역시에 세워진 '이응노 미술관' 등이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충북은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 단색화의 대가 윤형근 등 걸출한 예술가들이 태어나거나 인연이 있는 지역이다. 더 늦기 전에 작가들의 이름을 건 미술관들이 우후죽순처럼 건립돼야 한다. 그래야 충북이 미술문화의 메카로 발돋음할 것이다. 하루빨리 '윤형근 미술관'이 청주에 건립되기를 소망한다.
윤형근, 세 가지 키워드
1.천지문
천지문 天地門. 말그대로 '하늘과 땅, 그리고 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천지문은 윤형근 작가의 예술적 사상을 대변하는 그만의 언어이자 화조가 되었죠.
2.미니멀리즘
윤형근 작가의 작품관은 그의 정서를 온전히 담고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몸소 겪은 장본인으로써 체득한 울분이 녹아 있던 작품세계는 점차 소강되며 단단하고, 간결한 화조를 완성합니다. 이 시기 미국 내 미니멀 아티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와의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3.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
윤형근 작가는 우리나라 미술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김환기 작가의 친애하는 제자이자 사위였는데요. 실제로 윤형근 작가는 김환기 작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들은 부-자 관계에 가까울 정도로 서로를 존중하고, 위해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팠던 청춘, 근현대사를 몸소 경험한 윤형근
청주에서 태어난 윤형근은 문화적인 기조가 있는 아버지 아래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지냈습니다. 그렇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기에 입학하여 당시 미술대학 교수였던 김환기를 만나 엘리트의 길을 걷는 듯 보였지만 당시에 벌어진 아픈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맞이하며 청년 윤형근의 인생에도 큰 위기가 닥치죠. 흩어져 있는 학교들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만들겠다는 국대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적을 당했고, 학생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을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벌어진 1950년 남북전쟁 때는 서울에서 피란을 가지 않았다는 사유로 6개월의 복역살이를 했습니다. 전쟁 후, 홍익대학교로 거처를 옮긴 김환기의 도움으로 홍익대학교로 편입, 졸업을 한 뒤 숙명여고에서 교사직을 맡았는데 당시 벌어졌던 부정입학비리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가 10년 동안 국가의 관찰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정입학 당사자가 중앙정보부 실세의 딸이었기 때문이었죠. 제적과 학살 위기, 구금 등 윤형근의 젊은 날은 매우 굴곡져 있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아 들기 시작합니다.
Keypoint
불의를 참지 못하던 윤형근은 유신정권, 남북전쟁, 공권력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굴곡진 청년기를 보냈죠.
울분에서 비롯된 '천지문 天地門 '의 탄생
김환기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던 그의 화조는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경험한 뒤 색채를 잃고 간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단단하고, 깊이 있는 작품들이 탄생하기 시작하죠. 넉넉하지만 간결해보이는 이 화조를 두고 윤형근은 천지문 天地門 이라 명명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 Blue 과 땅의 색인 암갈색 Umber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그림들입니다. 말그대로 ‘하늘과 땅이 만나 이루어진 문’을 의미하죠. 격동의 시기에 온몸으로 겪은 울분을 토해내듯 거대한 붓으로 찍어내린 검은 기둥들이 윤형근의 대표작품들입니다.
Keypoint
윤형근의 대표적인 화조, 천지문 天地門 은 ‘하늘과 땅이 만나 이루어진 문’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타내는 청색과 땅을 의미하는 암갈색을 섞은 검정색을 주로 활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한국 미니멀리즘의 서막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울분과 슬픔은 잦아들고 한층 더 변화한 시점으로 그림들이 완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일본과 프랑스를 기점으로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았고, 추후엔 미국의 미니멀리즘 아티스트인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와의 교류도 이어졌죠. 그렇게 윤형근은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구축해 나아갔고, 그가 생을 떠나던 2000년 대에는 붓으로 위에서 아래로 칠했던 화풍은 사라지고 단단한 사각형의 다양한 구조와 배치가 작품에 반영됐습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세계가 작품에 투영되었던 셈입니다.
Keypoint
점차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성숙해지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간결하고 단단해집니다.
시대가 밝혀 준 그의 작품성
그는 2007년 담도암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미 전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은 시간을 머금을수록 더욱 빛을 발했죠. 특히 2017년 세계 최정상급 갤러리인 뉴욕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당시 작품이 완판되며 한국의 단색화가로 명성을 높였습니다. 그의 작품이 낙찰된 가격으로만 시대적인 가치를 비교하자면 2010년대 초반에는 약 4,000만원에 거래되었던 그의 작품들은 2010년 중반대에는 1-2억선, 2010년 말기에 드러서며 4억원 선을 형성했습니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 간결하고 깊이 있는 윤형근 작가의 단색화는 아크테커들에게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Keypoint
여태껏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윤형근의 작품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된 가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트 테커들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죠.
김환기와의 각별한 관계
RM 이전에 윤형근 작가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은 ‘김환기의 사위’였습니다. 사실 그전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죠. 김환기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작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132억이라는 매우 높은 낙찰액을 기록한 작가입니다. 물론 작품의 가격으로 작가의 가치를 상정할 순 없지만 그만큼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간접 증거인 만큼 분명 유의미한 숫자겠죠. 그만큼 거장으로 불리던 김환기였기에 윤형근 작가를 수식하는데 김환기 작가의 이름이 빠질 수 없었죠. 그에 비해 덜 알려진 윤형근 작가는 최근 RM이 공개적으로 shout-out을 받으며 다시금 화제가 된 작가라고 볼 수 있죠. 업계에선 이미 단단한 명성을 지닌 작가였지만요.
Keypoint
김환기와 윤형근은 스승과 제자이자, 장인어른과 사위의 관계였습니다. 완전한 로열 아트 패밀리죠.
대표작
<청색>,1972
<청다색>, 1973
<청다색>, 1976
<청다색>, 1977
<다색>, 1980
<드로잉>, 1981
<다색>, 1988
<청다색>, 1999
RM의 첫 솔로 앨범 <Indigo>와 윤형근
2023년 발매된 RM의 첫 솔로 앨범 <Indigo>. 이 앨범의 1번 트랙의 'Yun'이라는 곡은 윤형근 작가를 의미하는데요. 이 곡은 RM이 윤형근 작가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존경심과 동시의 윤형근 작가의 육성이 담긴 나레이션을 통해 그의 인생 철학을 엿볼 수 있는데요. 시간 괜찮으시면 한 번 들어보고 가시는 걸 추천!
"평생 진리에 살다 가야 한다 이거야. 플라톤의 인문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인데, 진선미, 진실하다는 진(眞)자 하고, 착할 선(善)자 하고, 아름다울 미(美)인데, 내 생각에는 진 하나만 가지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아"
"그러려면 욕심을 다 버리고, 모든 욕심을 다 버려야 해. 천진무구한 세계로 들어가야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은 해야지. 그게 인간의 목적이거든."
- Yun
한줄 내용정리
1. RM의 솔로 앨범 <Indigo>는 윤형근 작가의 세계관과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2. 불의를 참지 못하던 윤형근은 유신정권, 남북전쟁, 공권력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굴곡진 청년기를 보냈죠. 그의 울분은 작품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3. 윤형근의 대표적인 화조, 천지문 天地門 은 ‘하늘과 땅이 만나 이루어진 문’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4. 천지문은 하늘을 나타나는 청색과 땅을 의미하는 암갈색을 섞은 검정색을 주로 활용한 것이 특징!
5. 시대가 흐르며 작가의 울분이 조금씩 사그라들며 그의 작품은 좀 더 간결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6. 여태껏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작가의의 작품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된 가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트 테커들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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